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 혼군(#6G) 후조(後趙)의 석호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4월17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3월06일 23시43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5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34) 석감(石堪)의 쿠테타 실패(AD333)

 

석륵의 부인 유태후가 팽성왕 석감(石堪)을 조용히 불러서 말했다.

 

“ 지금 승상(석호)이 황실을 능멸하기가 이처럼 잔인하고 무도하오.
  황제(아들 석홍)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 같으니 왕의 운명도 급박하지 않소?“

 

석감이 말했다.

 

“ 지금 돌아가신 황제의 측근들이 모두 외지로 배척되었고
  군사도 이미 석수에게 장악되었으니 궁성 안에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연주로 달아나서 남양왕 석회(석륵의 어린 아들)를 맹주로 삼고
  늠구(산동성 운성 서북)를 바탕으로 군사를 모아 보겠습니다.“

 

유태후는 석감을 재촉해 내보냈다. 9월 평복으로 경무장한 기병을 이끌고 연주를 공격했으나 실패했 남쪽 초현(안휘성 박현)방면으로 도망갔으나 석호가 보낸 장수 곽태에게 사로잡혀 양국으로 압송되었고 불에 구워 죽였다. 석호는 유태후가 배후인 것을 알고 폐위시킨 뒤 사약을 내렸다. 석감은 원래 전씨였으나 공로가 뛰어나 석륵이 양자로 들인 사람이다.  

 

당시 지방에는 많은 석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나누어 통치하고 있었다. 당연히 석호의 궁정 반란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관중을 지키는 하동왕 석생과 낙양의 석랑이 가장 실력자였다. 석생과 석랑은 10월 석호에 대한 토벌을 선언하고 군대를 규합했는데 석생은 곧바로 동진 조정에 항복한다는 사신을 보내왔다. 석호는 태자 석수에게 양국을 지키게 하고 기병 7만을 거느리고 낙양의 석랑을 공격했다. 석랑의 군사는 쉽게 무너졌고석랑은 잡혀서 월형(다리 절단)과 참형을 동시에 받았다. 석생은 장군 곽권을 보내 포판에 선전하며 방어하는데 성공했다. 석호가 선비족을 동원해서 석생을 공격하자 장안을 버리고 숨어버렸다. 장영이 나머지 군사로 장안을 수비하다가 석호와 선비 연합군에게 목이 날아 갔으며 석생의 부하가 석생의 목을 베고 나와 항복하자 곽권은 농우(감숙성 동부)로 도주했다. 포홍은 자진해서 나와 석호에게 항복했다. 석호는 마침내 양국으로 돌아와 대사면령을 내렸고 항복한 포홍에게는 용양장군, 요익중에게는 분무장군의 칭호를 내렸다. 포홍은 나중에 성을 부씨로 바꾸는 데 장차 전진을 세워 중국 북부를 통일하는 대업을 달성한 부견의 할아버지이고 요익중은 전진을 멸망시키고 후진을 새운 요장의 아버지이다.


(35) 석홍의 선양과 처형(AD334)

 

허수아비 황제 석홍은 황제의 인새(도장)와 인수(끈)를 싸서 직접 석호가 있는 위국의 궁으로 와서 황제 자리를 선양하겠다고 말했다. 석호가 말했다.

 

“제왕의 대업은 천하 사람들이 논의해서 결정할 일이지
 어찌 이렇게 스스로 판단을 내린단 말이오?“

 

석홍이 눈물을 흘리며 궁궐로 돌아와 모후 정태후에게 말했다.

 

“ 먼저 돌아가신 황제의 씨는 정말로 다시 남겨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석호가 왕으로 있는 위국의 상서가 당우(요임금과 순임금)의 선양 절차에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석호가 말했다.

 

“ 석홍이 아둔하고 무능하여
  상중인데도 예의를 차리지 못하였으니
  폐위시키는 것은 마땅하겠지만 양위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11월 곽은을 파견하여 석홍을 폐위시켰다. 석홍이 담담하게 말했다.

 

“ 용렬하고 아둔하여
  대통을 능력 있게 이어받지 못했으니
  어찌 다른 말이 필요하겠는가?“

 

주변의 신하들이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석호는 곧바로 석홍은 물론 그 생모 정태후와 석륵의 다른 아들 진왕 석굉, 남양왕 석회를 모두 죽였다. 이 때 석홍의 나이는 20세였다. 그리고 황제 자리에 오르라는 권고를 거부하고 그냥 ‘거섭조천왕‘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번역하면 그저 조 나라의 정치를 섭정하는 천왕이라는 의미다. 요익중은 병을 핑계로 축하하는 자리에 오지도 않았다. 몇 번이고 거듭 부르니 와서는 이렇게 꾸짖었다.

 

“ 저 요익중은 항상 대왕을 일세의 영웅이라고 생각했는데
  석홍에게 어깨를 도닥거리며 부탁을 받을 것이지 어찌 찬탈을 한단 말입니까?“

 

요익중은 AD280생으로 석륵(AD274년생)의 친구이기도 하려니와 석호보다 나이가 열다섯 살 많았으니 꾸짖을 민 했다. 석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 나라고 어떻게 이런 짓을 좋아하겠소,
  석홍이 나이도 어리고 집안일을 제대로 처리 할 수가 없을 것 같아
  내가 대신 하려고 한 것일 뿐이오.“

 

속으로는 불편했지만 강단있는 발언과 또 그동안의 충실함과 성실함을 생각하여 요익중에게 죄를 내리지는 않았다. 요익중은 앞으로 석호 밑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


(36) 석호의 수도 이전과 불도징과 불교 창성(AD335)

 

석호는 종묘 제사와 인사, 그리고 군사에 관한 일을 제외한 모든 업무를 태자 석수에게 맡겼다. 석수의 권한이 크게 커지자 석수의 보모, 즉 의성군 유지의  권한도 매우 커져서 벼슬을 구하려는 사람들로 그에게 줄을 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양국(형태)에 도읍했던 석호는 도읍지를 업으로 옮겼다.(AD335년 9월) 그리고 신통한 능력을 몇 번 보인 인도승 불도징을 매우 숭앙하면서 불교를 신봉했다. 신하들이 한족은 부처를 숭배한 적도 할 수도 없다고 강조하자 자신처럼 한족이 아닌 이민족이나 조국의 신민들은 모두 자유롭게 불교를 믿도록 허락했다. 중국 전역에 불교가 퍼지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이 석륵이다.   
 

(37) 태자 석수의 반란시도와 석선으로의 교체 (AD337)

 

태자 석수는 원래 날쌔고 용맹하여 석호가 매우 아끼는 아들이었다. 그러나 정사에 깊이 간여하게 되면서 점차 음란하고 잔인해졌으며 괴이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여인을 화려하게 화장시킨 뒤에 목을 베어 쟁반 위에 놓고 여러 사람들과 즐겼다. 동생 석선과 석도가 아버지에게 귀여움을 받자 이를 혐오하며 질투했다. 아버지 석호도 정신 상태가 극도로 이상해졌다. 술과 여자에 빠지는 것은 물론 기뻐하고 화를 내는 것이 정상적인 적이 없었다. 정사를 처리하는 석수에게 극단의 불만을 표하면서 욕을 해댔다.

 

“ 이 따위로 사소한 일을 보고할 것이 무엇이냐?”

 

석수가 보고를 하지 않으면 보고를 하지 않는다고 호통을 쳐댔다.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채찍을 들어 때리거나 회초리를 들기도 하였다. 한 달에 여러 번 씩 그런 일이 있게 되자 석수가 중서자 이안을 불렀다.

 

“ 관가(아버지)가 하는 일을 참기가 어려우니
  내가 묵돌(아버지를 시해하고 자립한 난제묵돌)처럼 하려고 하니
  어떤가, 그대는 나를 도우려는가?“

 

엎드려 감히 대답을 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수는 7월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500의 기병을 이끌고 하간공(동생 석선)을 처단하겠다고 나섰지만 기병들이 모두 도망가고 말았다. 이안이 그런 석수를 말려 다시 동궁으로 돌아왔다.

대화상 불도징이 석호에게 경계하며 말했다.

 

“ 주상은 동궁에 드나들지 마십시오.”

 

병문안을 가려던 석호가 언짢은 듯 말했다.

 

“ 내가 명색이 천하의 주인인데
  부자지간에 서로 믿지도 못한단 말인가?“

 

석호는 몰래 여안을 동궁에 보내 염탐하게 하였다. 석수는 그것을 알아채고 그 여인을 부러 그 자리에서 목을 내리쳤다. 석호가 화가 나서 이안을 소환해서 문초했고 이안이 모든 모반 시도의 상황을 낱낱이 고하자 이안과 함께 30여명을 처형했다. 석수는 동궁에 유폐시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면했는데 조회에 나온 석수는 사과하지도 않고 퇴청하고 말았다. 화가 난 석호는 석수를 폐서인하고 그날 밤 석수와 그의 비 장씨를 죽였으며 아들과 딸 26명을 한 관에 넣고 묻어버렸다. 하간왕 석선을 황태자로 올렸다.
 

(38) 석호의 1차 요서 북벌 실패 (AD338)

 

비록 서쪽의 전조를 함락시키기는 했어도 후조에게는 남쪽의 동진과 북쪽의 단(段) 이라는 나라의 단요가 있었다. 단요는 서진 시대 요서공이라는 직책을 가진 단아의 아들로써 지금의 요녕성 북부와 서부를 장악하고 변경을 자주 침략해 왔었다. 지난 해(AD337) 연이라는 나라를 세운 모용황은 후조에게 속번을 자처하고 동생을 인질로 보내면서 군사를 일으켜 단요를 정벌하는 것을 허락해주기를 요청해왔다. 석호도 북방의 두통꺼리 단요를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모았다. 요익중과 지웅에게 7만 보병기병을 주고 도표와 왕화에게는 수군 10만을 주어 황해바다로 나아가게 하였다. 단요는 석호의 대군이 쳐들어온다고 하자 서북쪽으로 멀리 도망가고 말았다. 석호는 곽태와 마추와 2만 기병을 붙여서 끝까지 단요를 추격하게 하였다. 곽태는 단요의 어머니와 처를 생포하고 3천명의 목을 처단하였지만 단요를 생포하지는 못했다. 단기로 도망에 나선 단요는 아들 단걸특진에게 명마 한 필을 보내 사과했고 석호는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석호는 단국 백성 2만호를 내륙으로 이주시켰다.(AD338년3월)
 
그러나 이번 정벌에서 전연의 모용황은 같이 단요를 공격하자고 해 놓고는 실제로는 자신의 실속만 챙겼다. 석호는 그런 모용황을 괘씸하게 생각하고 토벌할 마음을 먹었다. 태사령 조람이 별자리 움직임을 들어 마땅한 시일이 아니라고 지적하자 채찍으로 내리쳤다. 모용황은 전략회의를 열고 대비책을 강구했다. 수비가 최선책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석호는 사신을 각지에 보내 사방의 군사를 모았다. 36개 성이 호응해 왔다. 석호는 대군을 이끌고 극성(요녕성 의현:조양 동쪽 60KM)을 포위했다.(AD338년 5월) 조의 군사들이 10여일을 벌떼처럼 성벽을 공격했지만 모용황은 필사적으로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후조 군사들은 5월 13일 퇴각했다. 퇴각하는 후조 군사를 모용황의 군사가 추격하여 거의 3만 명이 몰사했다. 석첨(원래 염첨이었으나 양자로써 석씨 성을 하사받았음)의 아들 석민의 군대만 온전하게 돌아왔다. 석호는 그런 석민을 매우 아끼고 사랑했다. 석민은 나중에 석호의 아들 석감(위의 石堪과 다른 石鑒)을 죽이고 후조를 멸망시키게 된다. 단요의 무리들은 지속적으로 모용황에게 투항했고 모용황은 승리의 기세를 타고 계속해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39) 동진 유량의 북벌(후조토벌)계획 포기(AD339)

 

동진의 정서장군 유량은 중원회복을 꿈꾸며 석호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후조의 석호를 공격하기 위해 한수 서쪽 끝 한중에서부터 안강, 양번 및 무한에 이르기까지 여러 요충지에 병력을 배치해 두었다. 동쪽으로는 장강을 끼고 주성(황강)과 구강에도 수군을 깔아두었다. 명령만 내리면 수십만 대군이 동시에 북쪽으로 진격할 태세였다. 유량의 계획에 대해 사도 왕도도 찬성했다. 그러나 태위 치감이 말리며 나섰다.

 

“ 쓸 만한 밑천이 준비되지 않았으니 크게 거동할 수 없습니다.”


태상 채모도 같은 생각이었다. 긴 상소문을 올려 반대에 나섰다.

 

“ 때에는 될 때와 안 될 때(否泰)가 있는 법입니다.   
  법에도 굽은 것과 바른 것(曲直)이 있습니다.
  진실로 강함과 약함을 깊이 따져보지 않고 가벼이 움직인다면
  망하는 것은 해가 떨어지기 전의 일입니다.
  기다리는 것이 상책입니다.
  석호가 백번을 이기고 한 번 양양을 못 뽑았다고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백번 쏘아 백번 맞추는 사람이
  한 번 실수 했다고 무능하다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큰 강으로도 소준을 막을 수가 없는데
  면수(즉, 한수)를 가지고 석호를 막다니 어렵기 짝이 벗는 말씀입니다.“

 

대부분 조정 대신들의 의견도 대체로 채모와 같았다. 동진 황제 성제 사마연은 후조 공격계획을 철회하라고 명령했다.  


<다음에 계속> ​ 

5
  • 기사입력 2020년04월17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3월06일 23시43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