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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4> 혼군(1) 복수 때문에 오나라를 멸망시킨 손호(C)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12월24일 17시01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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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13) 서릉전투의 승리와 육항의 간청

 

당시 오나라는 북쪽 진나라와 양자강을 두고 다투고 있었다. 오나라 서릉(의창) 감독 보천이 반란을 일으키고 진나라에 항복하자(AD272) 오나라는 진군대장군 육항을 보내 서릉을 포위했다. 육항은 육손의 아들이다. 육항(陸抗)은 좌대사마 시적이 죽자 양자강 상류지역 군사총책임자가 되었는데 황제의 군사와 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육항은 황제에게 이렇게 상소했다.

 

“ 신이 듣건대 황제가 베푸는 은덕이 같다면 

  인구가 많은 나라가 이기고

  힘이 비슷하다면 안정된 나라가 위태로운 나라를 이긴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적(晉)이 점령하고 있는 땅은 광대한 지역인데

  우리는 밖으로 원조하는 나라도 없고

  안으로는 잡풀만큼의 강함도 없는데도

  정치는 문드러지고 지지부진하며 백성들도 평안하지 못합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장강을 끼고서 

  험준한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걱정이 없다고들 하는데

  장강과 험산과 같은 이런 것들은 아주 작은 도움일 뿐이라서

  지혜로운 사람들이 기대는 것이 못 됩니다.

  신은 매번 나라의 위태로움을 생각할 때

  밤새 베개만 어루만질 뿐 잠을 못 이루고 음식도 먹는 것을 잊을 뿐입니다.

  임금을 섬기는 도리란 뜻을 거스를 지라도 속여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믿어

  해야 할 일 17조를 올려 보고 드리나이다.“  

 

육항의 17조가 무엇인지는 사료로 전해지지 않았으나 손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육항의 군대가 서릉을 포위하자 진나라에서도 거기장군 양호를 보내 응수했다. 소위 오와 진의 ‘서릉전투’였다. 이 전쟁에서 육항이 이끄는 오나라가 승리하고 진나라 양호나 서윤, 양조는 모두 북쪽으로 물러났다. 오나라 손호는 서릉전투의 승리를 자신의 정치에 대한 하늘의 뜻이라고 보고 오만한 폭정을 계속했다. 

 

오나라에 이상한 징조가 보였다.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광주리에 담겨진 것이 여러 집에서 발견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길조라고 생각하여 황제가 시중 위소(韋昭)에게 물었다. 위소는 많은 사람의 집에 흔히 나타나는 일이므로 길조라 할 것이 없다고 폄하했다. 황제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 당시 위소는 국사를 편찬하고 있었는데 손호가 아버지 손화의 제기(帝紀), 즉 황제의 기록을 써 달라고 요청했다. 위소는 손화가 비록 문황제라는 시호를 받기는 했으나 실제로 황제에 즉위한 적이 없었으므로 제기를 쓸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 황제는 격노했다. 이 때 병이 들기도 했던 위소는 시중과 사관의 직책을 사양하고 물러나려고 했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주연이 있게 되자 손호는 모든 참석자에게 술을 7되 이상 마시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다른 신하에 대해 단점이나 조롱하는 말을 강제로 말하게 하였다. 술을 취하면 본심이 나타날 것이므로 강제로 취하게 하여 신하들의 본심을 보자는 목적이었다. 병중에 있던 위소에게는 평소 차를 마시게 했었으나 이번에는 위소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취한 위소는 다른 신하의 단점을 지적하는 것이 옳지도 않고 또 화목함을 깨는 일이므로 단점 대신 매우 까다로운 경전을 인용하여 그 모르는 것을 가지고 수치심을 갖도록 할 뿐이었다. 손호는 위소가 황제를 존중하지도 않고 황명을 따르지도 않는다는 명분으로 감옥에 가두고 말았다. 갇힌 위소는 자신의 억울함을 씻어 보이려고 황제에게 드리는 책을 저술했다. 그러나 그 책에 오래된 먼지가 묻어있다는 것을 꼬투리로 잡아 위소가 황제를 무시했다고 하여 위소를 주살하고 말았다.(AD273)

 

손호는 공경의 딸을 선발하여 6궁에 충당했는데 이를 어긴 집은 불경죄로 다스렸으며 간택이 끝날 때까지 전국의 모든 혼사는 중단되었다. 이 모든 일은 양황후가 주관하였는데 양황후는 키가 크고 피부가 흰 사람만 뽑았을 뿐 미인은 뽑지 않았다. 황제는 불만스러우 직접 뽑는 일에 나섰다. 공경의 딸은 3부인과 9빈으로 삼았고 이천석(장관급)과 장군의 딸은 그보다 급이 낮은 양인 이하로 삼았다.  

 

손호가 아끼는 희첩이 사람을 시장에 보내 백성의 물건을 빼앗아 오게 한 일이 있었다. 사시중랑장 진성이 관련자들을 모두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진성 도한 손호의 총애를 받던 사람이었다. 희첩이 손호에게 울면 호소하자 손호는 다른 사건에 관련시켜 불에 달군 톱으로 진성의 목을 자르고 시체를 사망산 아래에 던져 버렸다.(AD273) 

 

손호의 좌부인 왕씨가 죽자 슬픔에 쌓인 손호는 몇 달씩이나 바깥에 나타나지 않았다. 당연히 손호에게 변고가 일어났으며 손호와 모습이 비슷한 하도(손호의 외사촌)가 임금이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조정 실권자에는 손호의 어머니 하씨 종족들이 특히 많았었다. 그러자 소문은 덧붙여져서 하도는 정통성이 없으므로 당연히 손분이 천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들이 떠돌았다. 임해태수 해희가 회계태수 곽탄에게 조정의 정치를 한탄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이 일로 곽탄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곽탄은 해희의 조정정책 비판만 전했을 뿐 손분에 관한 쿠테타 예기는 일체 하지 낳았으므로 결국 방면되었으나 해희에게는 체포령이 떨어졌다. 군사를 가지고 있던 해희가 저항해보았으나 결국 부하들에게 잡혀 잘린 목이 건강으로 보내졌다. 손호는 소문이 떠돌던 손분과 그 가족을 모두 죽였으며 손분의 죽은 어머니 묘소를 정돈한 장준의 삼족을 이멸시켰다.(AD274)    

 

병이 들자 나라가 걱정이 커진 육항은 황제에게 편지를 올렸다.

 

“ 선친(육손)께서 말씀하시기를 ‘서릉지역은 나라의 서쪽 문이니

  지키기도 쉽지만 도한 잃기도 쉬운 곳이다.

  이곳을 지키지 않으면 형주를 잃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온 나라를 기울여서도 찾아야 할 것이다.‘  

  서릉(의창)지역 방위군을 8만 명으로 보강하시고

  여러 잡다한 국가 업무를 줄이시어

  힘을 합쳐 방어에 매진하셔서 저의 걱정을 덜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시면 진실로 염려스럽습니다.

  신이 죽은 뒤라도 서쪽(서릉지역)에 관심을 두십시오.“

 

그리고 육항은 죽었다. 황제는 서릉지역의 통할권을 육항의 다섯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육항의 군사력을 보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산시키고 약화시켰기 때문이다.(AD274) 

  

중서령 하소는 중풍에 걸려 말을 잘 할 수가 없게 되자 몇 달 동안을 조정을 떠나 일을 처리하지 못했다. 손호는 하소가 자신을 속이는 것으로 의심했다. 그를 체포하여 술 창고에 가두고서는 1천여 번 이상 말을 하라고 고문했다. 끝내 말을 못하자 불에 달군 톱으로 머리를 잘랐고 그의 가족들도 임해지방으로 귀양을 보냈다. 귀양 와 있던 누현의 가족들도 이 때 피살되었다. (AD275)

 

손호의 폭정은 그치지 않고 계속 되었다. 가뭄이 들어 부세를 면제해 주기를 요청한 회계태수 차준을 효수하였고 인두세가 부적절하다고 거부한 상동태수 장영도 참수했으며 몇 마디 간언을 올린 상서 웅목 또한 칼자루로 때려 죽였다.(AD276) 

 

손호는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을 질투하여 배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시중이자 중서령인 장상은 말이 민첩하고 분명하였으므로 황제가 질투와 원망을 느끼던 사람이었다. 손호가 장상에게 물었다. 

 

“고가 술을 먹는 것을 누구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장상이 이렇게 대답했다.

 

“ 200되 정도의 주량이십니다.”

 

손호가 말했다.

 

“ 너는 왕 노릇도 못한 공구(즉 공자)와 나를 견주는구나.”

 

공자 주량이 약 200되 쯤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화가 난 황제가 즉시 장상을 가두어 버렸다. 공경 이하 100여 조정 신료들이 모두 나와 전 아래 꿇어 엎드려 사죄하며 용서를 빌었다. 황제는 장상을 풀어주고 건안에서 배를 만드는 일에 복역시켰다가 곧 사약을 내려 죽였다.(AD278)  

 

(13) 진나라 사마염의 통합과 용서와 화해의 정치

 

당시 북쪽에서는 사마염이 조조가 세운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진(晉)을 건국(AD265)하여 부현, 이희, 양호라는 걸출한 충신들의 도움을 받아 개혁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때였다. 특히 사마염은 처음으로 간관(諫官)이라는 제도를 도입하여 무슨 말이든 거리낌 없이 황제에게 할 말을 하도록 하고서 산기상시 부현과 황보를 간관에 임명하였다. 부현은 이렇게 사마염에게 말했다.

 

“ 아직도 장차 깨끗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예의를 갖춘 신하를 선발하지 아니하시고 

  기강과 풍기 및 절도를 돈독하게 하지 않으시며 

  공허하고 비루한 인사를 물리치시지 않으시고

  근신하지 않는 인사를 징계하시지 않으시니   

  신은 이를 심히 걱정하옵니다.“

 

사예교위 이희가 관료들의 비리행위를 맹렬히 탄핵하고 나섰다. 현령 유우와 전상서 중산왕 사마목과 상서복야 무해가 관청의 공공 경작지를 훔쳤다고 비판했다. 사마염은 이희를 전한시대 직언을 올리는 사직(司直)의 전설과 같은 양포(兩鮑, 즉 鮑永과 鮑恢)와 같다고 칭찬하고 관련자를 전부 처벌하도록 하였다. 사마염의 작은 할아버지 사마목의 관직을 파면하고 이미 죽은 무해는 시호를 깎아 내렸다.    

 

진의 대사마 석포는 제갈탄의 반란(AD258) 진압 이후 10년 동안 회남지역에 주둔하면서 선정을 펼쳐서 명망과 평판을 높이 쌓아왔었다. 회북지역 감군(군사책임자) 왕침이 이런 석포를 질투하여 사마염에게 참소를 올렸다. 석포가 오나라와 내통한다는 것이다. 이 때 오나라 또한 북쪽을 넘보고 있던 터라 석포도 보루를 쌓고 하수를 막아서 대비를 하던 참이었다. 사마염은 그런 석포의 행위가 의심이 갔다. 진나라 최고의 충신 양호(羊祜)가 황제에게 간곡히 말했다.

 

“ 단언컨대 석포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황제 사마염은 양호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곧바로 의양왕 사마망에게 군사를 주어 보내  석포를 소환하게하고 그의 관직을 삭탈했다. 쓸데없는 공사를 일으켜 백성을 힘들게 했다는 죄목이었다. 석포의 참모 손삭은 지나가다가 친구인 사마준의 병영(허창에 있었음)을 들렀는데 거기서 조정의 군사가 석포를 소한하기 위해 발동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마준은 석포의 일에 손삭이 끼어들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손삭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석포가 있는 수춘으로 말을 달렸다. 그리고 석포에게 당신이 지금 조정의 의심을 받고 있으니 당장 수춘도정(행정중심)에 나가서 석고대죄 하라고 충고했다. 석포는 손삭의 말대로 따랐고 황제 사마염이 그 말을 듣고 의심을 풀었다. 업으로 소환된 석포는 낙릉공의 신분으로 안전하게 귀향했다.(AD268)

 

(14) 진나라 양호의 오나라 정벌과 오 멸망(AD280)

 

오나라 손호의 폭정이 거듭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오의 운명이 거의 다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사마염은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오나라 정벌 계획을 병으로 누어있는 양호에게 장환을 보내 물었다. 양호가 대답했다.

 

“ 손호는 포학함이 심하여 지금은 싸우지도 않고 이길 수가 있습니다.

  만약 손호가 죽게 되어 오의 사람들이 영명한 군주를 세운다면

  백만 대군을 가지고도 장강을 넘볼 수가 없을 것이니

  장차 후환이 클 것입니다.“

  

양호는 장환에게 모든 것을 당부하며 말했다.

 

“ 내 꿈을 이룰 자는 그대뿐이요.”

 

황제 사마염은 누워서라도 오나라 정벌의 선봉에 서주기를 바랐다. 양호가 말했다.

 

“ 오를 빼앗는 일에 반드시 제가 갈 필요는 없습니다.

  평정되고 나서 성스러운 수고를 더하셔야 할 것입니다.

  공명에 관해서는 소신이 뜻이 없으니

  일이 끝난 뒤 

  부디 훌륭한 인재를 잘 살펴 임명하십시오.“(AD278년 6월)

 

그 다음해(AD279) 8월 익주자사 왕준이 오나라 정벌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청했다.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7년이나 준비했던 배 조차 썩어가고 있다는 보고였다. 사마염도 속으로 내년쯤 공격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오나라에서도 북진정책을 쓸 생각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두예는 서둘러야 한다고 편지를 올렸다. 장화와 바둑을 두던 중에 두예의 편지를 읽은 사마염이 아무런 대꾸가 없자 장화가 말했다. 

 

“ 의심하지 마십시오.“

 

드디어 사마염이 즉각 오 정벌에 나서기로 마음을 굳혔다.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가충, 순욱, 풍담 등이 전쟁에 반대했다. 황제가 크게 화를 내자 전쟁에 반대하던 자들이 모두 관을 벗고 꿇어앉아 사죄했다. AD279년 11월 사마염은 총 20만의 대군을 몰아 내려왔다. 사마주는 장강의 동쪽, 왕준은 서쪽, 두예는 의창, 호분은 하구, 왕융은 무한, 왕혼은 환성 등 여섯 지역으로 나누어 동시에 남하했다. 그리고 석 달 뒤 AD280년 3월 오나라 수도 건업이 왕준의 군사에게 함락되고 손호는 진나라에게 항복하였다. 사마염은 이 모든 전공이 양태부(양호)의 것이라고 치하했다. 가충은 특히 여러 번 전쟁을 반대하고 거짓으로 진격하라는 황명을 바꾸어 군사행동을 중지하라고까지 했으나 사마염은 모두 죄를 묻지 않았다.  

 

진나라 표기장군 손수는 10년 전 진나라에 귀화했었는데 사촌 형 손호의 오나라를 멸망시키자 축하드리지 않고 혼자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옛날 토역장군(손책)은 약관의 나이에 

  교위라는 신분으로 창업했는데(昔讨逆弱冠以一校尉创业)

  뒷날 주군이 강남지역을 통째로 버려(今后主举江南而弃之)

  종묘와 산릉이 폐허가 되었구나.(宗庙山陵,于此为墟)

  유유한 하늘아 저것이 무슨 인간이냐(悠悠苍天,此何人哉)!“

      

(15) 오나라 멸망의 근본 원인 : 손호의 복수정치와 사마염의 통합정치  

 

오나라는 건국한 지 50년, 창업자 손권이 죽은 지 4대 28년 만에 망했다. 물자가 부족해서도 아니고 지형이 험준하지 않아서도 아니며 또 충신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오로지 군주 때문이었다. 복수에 타오르는 분노와 무능함과 폭정과 신하를 무참하게 처형하는 공포정치 때문에 전쟁 개시 불과 석 달 만에 오나라 수도는 함락되고 말았다. 반면에 사마염은 태자책봉에 대한 위태로움이 있었고 촉한 멸망 이후의 등애종회의 반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하를 믿고 반대파를 용서하며 귀화한 적군들을 포용하는 정책을 썼기 때문에 조조나 사마의가 해내지 못한 중국 통일의 대업을 달성할 수가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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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12월24일 17시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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