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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4> 혼군(1) 복수 때문에 오나라를 멸망시킨 손호(A)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12월10일 17시01분
  • 최종수정 2019년12월11일 14시04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9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1) 오나라 동궁의 갈등과 조정의 분열(AD245)

 

AD229년 오나라(AD229-AD280)를 세운 손권은 AD242년 18세 손화(和)를 태자로 책립하고 친동생 손패(覇)를 노(魯)왕에 봉하였다. 그리고 왕씨 소생인 그 둘을 같은 궁궐에서 같이 살게 하였다. 그만큼 손권은 손화와 손패를 차별 없이 총애했고 또 두 형제간의 사이도 매우 좋았다. 그러나 태자 손화를 모시는 태자부 관료들과 노왕 손패를 모시는 노왕부 속료들로써는 아무래도 갈등이 없을 수가 없었다. 상서복야 시의라는 사람이 노왕부로 발령나게 되자 황제 손권에게 이렇게 상소했다.(AD242)

 

“ 신이 가만히 살펴보니 노왕 손패는 천생으로 품덕이 높을 뿐만 아니라 문무의 자질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방을 진압하고 번병을 다스리는 직책을 맡겨 내어 보내    시어 형님의 덕정을 널리 선양하고 빛내도록 해야 합니다. 또 태자부와 노왕부의 격도 마땅히 차별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국가의 훌륭한 법도이고 천하가 바라는 바입니다.“        

태자 손화와 노왕의 대우가 똑같은 것이 격식에 맞지 않다는 말이다. 상서복야 시의는 네 번이나 같은 내용의 편지를 올렸지만 황제는 움직이지 않았다. 시의의 속뜻이 무엇이었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노왕을 견제하자는 것만은 확실하다. 조정의 정통 대신과 관료는 대체로 태자 손화 편이었고 관우를 죽인 그 유명한 승상 육손(손권의 사촌 매형이기도 함)이 태자지지파의 거두였다. 

 

노왕 편에는 황제 손권의 딸 손노반이 있었다. 보(步)부인 소생인 손노반은 배 다른 동생 손화를 낳은 왕씨와 사이가 매우 나빴다. 손노반의 남편 전종도 아들 전단과 전기와 전서를 노왕파에 가담하게 하였다. 태자파 육손이 전종에게 강력하게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전종과 그의 아들들은 노왕 편에 섰다. 노왕 손패 또한 자신의 신분을 낮추면서까지 유능하고 유려한 사람들과 교류를 확대해 나갔다. 점차 조정이 태자파와 노왕 편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태자부와 노왕부의 갈등이 점차 고조되자 3년 뒤인 AD245년 황제는 궁궐을 둘로 나누고 태자와 노왕의 행정부서 또한 나누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태자부나 노왕부에 선비들의 출입을 일체 금지하도록 하였다.  

 

손노반은 앞으로 태자 손화가 황제로 등극하게 되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것이 뻔했으므로 태자 손화를 극렬하게 모함하기 시작했다. 손권이 병으로 눕게 되자(AD245) 황제가 태자를 형님인 손책 사당에 제사를 하도록 보냈는데 손노반이 몰래 밀사를 보내 염탐시킨 결과 태자가 제사를 지내기는커녕 근처에 있는 태자비의 숙부 장휴의 집에서 놀면서 비밀모의만 하고 있더라고 참소했다. 손노반은 또 왕부인(태자 손화의 모후)이 손권의 와병소식을 듣고 즐거워하더라고 모함했다. 손권은 딸 손노반의 모함을 듣고 격노하였고 부인 왕씨는 걱정 끝에 홧병으로 죽었다. 

 

(2) 태자파가 궁지에 몰리고 육손의 죽음(AD245)

 

태자 문제로 온 조정이 시끄럽고 황후 왕씨 또한 죽은데다가 손노반 및 노왕파의 참소가 끊이지 않자 병마에 시달리던 손권의 태자에 대한 애정은 급격히 식었다. 걱정이 된 육손이 나서서 이렇게 충언했다.

 

“ 태자는 나라의 정통이므로 반석같이 굳건해야 합니다. 

  노왕은 번신일 뿐이므로 녹질과 총애가 차등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피차간에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하는 것이 바른 길입니다.“

 

손권은 육손의 이 말에 몹시 못마땅했다. 육손의 외조카 태상 고담도 태자를 옹호했다.

 

“ 나라를 거느리는 사람은 반드시 적서를 밝혀 주시고

  높고 낮음의 예를 분명히 해야 

  골육간의 은전이 온전하게 되고

  분수에 넘치는 욕망이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한 무제가 총애하는 신부인을 황후와 같이 자리하게 하자

  원앙이 나서서 신부인을 크게 꾸짖었습니다.

  한 무제가 화가 나서 원앙을 죽이려하자

  원앙이 상하구별의 뜻을 설명하고

  ‘사람돼지(인체)’의 사례를 설명하자 

  한무제와 황후가 모두가 깨닫지 않았습니까. 

  지금 신이 말씀 올리는 것은 어느 한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태자의 안전과 노왕의 온전함을 모두 위함입니다.“ 

  

고담의 말을 전해 듣고 노왕 손패 또한 매우 불쾌해 했다. 노왕파인 전종의 아들 전단과 전서가 고담의 동생 고숭과 장휴를 참소했고 결국 손권은 고담과 그 아들 고숭을 귀양보냈고 태자비의 숙부 장휴는 사약을 받았다. 노왕에게 경사를 떠나 지방을 수비하라고 재촉한 태자태부 오찬을 모함하여 결국 참수하였고 오찬과 내통하였다고 하여 육손에게 책임을 물었다. 억울하고 분통해하던 육손은 화병으로 죽었다.(AD245)     

 

(3) 태자 손화 폐위와 손량 옹립과 반대파 숙청(AD250)

 

태자 손화와 틈이 있었던 전공주(즉 손노반, 남편의 이름이 전종이었으므로 그렇게 불림)는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 아버지 손권의 애첩 반부인과 그의 아들 손량을 몹시 칭찬하며 가까이 하였다. 그리고 남편의 조카 전상의 딸을 손량에게 시집보내게 하였다. 노왕 손패의 무리들이 형 손화를 해치려고 음모를 꾸리는 것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던 손권은 시중 손준을 불러 이참에 손화와 손패를 동시에 물리치고 오히려 반씨 소생 손량을 세울 뜻을 넌지시 드러내었다. AD250년 가을 손권은 손화를 유폐시켜 버렸다.

 

표기장군 주거가 태자는 나라의 근본임을 들어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손권은 듣지 않았다.

상서복야 굴황은 모든 장군들을 대동하고 머리에 진흙을 바르고 온 몸을 결박하고서 매일같이 궁궐에 나와 손화를 용서해 줄 것을 빌었다. 손권이 매우 노하여 내뱉었다.

 

“ 할 일이 되게 없는 모양이구나.(无事匆匆=無事悤悤)”    

 

무난독장군 진정과 오영독장군 진상은 편지로 황제의 태자 폐립을 반대하다가 온 가족이 주살당하였다. 주거와 굴황이 반대를 그치지 않자 황제는 궁전으로 끌어왔는데 그래도 입에서 피가 나도록 반대를 외치며 그치지 않자 결국 귀양을 보내었다. 귀양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주거에게는 사약이 내려졌다. 이 후에도 태자 폐립에 반대하다가 목숨을 잃은 자는 수십 명에 달하였다. 손화는 폐서인시되어 절강성 장흥으로 귀양 보냈고 손패에게는 사약을 내렸다. 손패에게 붙어 손화를 참소한 양축, 전기, 오안, 손기 모두 주살되었다. 그 해 11월 8세의 손량을 태자로 옹립하였다. 태자의 모후인 부인 반씨는 다음 해 5월에 황후로 승격시켰다.   

 

(4) 손권의 때늦은 후회(AD251)와 사망(AD252)

 

태자를 갈아치운 손권은 그 다음 해(AD251)에 풍질로 건강이 나빠졌고 손화가 죄가 없음을 깨닫게 되어 손화를 귀양지인 절강성에서 소환하려고 했다. 전공주와 시중 손준과 중서령 손홍이 모두 반대하고 나섰다. 폐립문제로 조정이 한바탕 홍역을 치른 마당에 손화가 다시 오게 되면 더 큰 불화가 일어날 것은 당연했다. 결국 병든 손권은 나이어린 태자 손량을 대신하여 조정을 맡아 줄 사람을 물색하였다. 시중 손준이 무창에 있는 대장군 제갈각을 추천했다. 제갈각은 제갈근의 아들로 제갈량의 조카인 셈이다. 손권은 그가 강퍅하고 잔혹하여 믿음이 가지 않았다. 손준이 단호하게 말했다.

 

“현재 상황에서는 제갈각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결국 무창의 대장군 제갈각을 소환했다.   

 

건업(남경)으로 길을 떠나려는 제갈각에게 상대장군 여대가 충고의 말을 올렸다.

 

“매사 열 번씩 생각하고 행동하시오.”

 

제갈각이 언짢은 듯 대꾸했다.

 

“옛날 계문자(춘추시대 노나라 대부)는 세 번 생각하고 실행했고

 공자께서는 두 번 생각하면 족하다고 했는데

 그대가 나보다 열 번 생각하라고 하니

 나 제갈각이 확실히 그들보다 열등하다는 말이구려.“  

 

연말에 건업에 도착한 제갈각은 대장군 및 태자태부가 되었고 손홍은 태자소부의 역할을 맡았으며 등윤을 태상으로 삼았다. 손량의 어머니인 반황후는 성격이 사나웠고 탐욕스러웠다. 손권이 병들어 눕게 되자 아들이 곧 황제가 될 것이므로 태자소부 손흥에게 악명 높은 전한 여태후(呂太后)의 칭제 사례를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깜짝 놀란 조정대신들이 모의하여 반황후를 질식사 시키고는 갑자기 병사했다고 발표했다. 나중에 사건 전모가 드러나 6-7명이 죽었다. 병이 깊어지자 황제 손권은 제갈각, 손홍, 등윤, 여거, 시중 손준을 침실로 불러 훗날을 부탁하고는 곧 사망했다(AD252년 4월, 71세). 

       

(5) 손홍의 잔꾀가 부른 재난(AD253)

 

태자소부 손홍은 평소에 제갈각과 사이가 나빴다. 자신의 직급 태자소부가 제갈각의 태자태부보다 낮기도 했지만 원래 제갈각이 교만하고 안하무인 군인이어서 앞으로 조정 정치가 매우 어려워질 것이 염려되었다. 일단 제갈각을 먼저 제거하려고 손권의 장례를 발표하지 않기로 손준 등 조정 대신과 의논했다. 손준에게 계획을 누설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제갈각을 추천했던 손준은 바로 그 사실을 제갈각에게 알렸고 제갈각은 중대한 문제를 의논하자고 손홍을 유인한 뒤 죽였다. 제갈각이 사실상 군권과 조정의 전권을 쥔 셈이다.(AD252)    

 

(6) 제갈각의 위공격 실패와 손준의 제갈각 처형(AD253)

 

태자 손량이 10세의 나이로 오나라 황제에 올랐다. 제갈각은 즉각 감세조치를 내리고 행정을 간소화했다. 여러 황실의 친왕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임지를 전부 옮기도록 조치했다. 제왕 손분이 옮기려하지 않자 겁박하여 옮겨 가도록 했다.(AD252) 이 때 북쪽 진나라 사마사가 세 갈래 길로 오를 침략하려다가 제갈각에게 크게 패하였다. 이 승리에 도취된 제갈각은 그 다음해인 AD253년 20만의 대군으로 진나라 정벌에 나섰다. 많은 장군들의 반대에도 군사를 일으켰던 제갈각이 전쟁에서 크게 패배하여 성과 없이 돌아왔다. 군사들과 백성들은 전쟁에 지치기도 하였고 또 제갈각의 인사전횡이나 가혹한 형벌에 두려움을 느꼈다.

이를 알아차린 손준은 제갈각을 반란혐의로 무고하였다. 황제 손량은 손준과 짜고서 연회를 열어 제갈각을 초청한 다음 군사를 풀어서 제갈각 무리를 죽여 버렸다. 사실 연회에 모종의 계략이 숨어있을 것이라는 첩보가 있었지만 손량이나 손준을 어린아이쯤으로 가볍게 생각했던 제갈각이 결국 피살되었다. 손준을 태위, 승상 겸 대장군으로 삼고 등윤을 사도로 삼았다. 손준은 귀양 가 있던 옛 태자 손화에게 독약을 보내 죽였다.(AD253)

 

이 때 손화에게는 첩 하씨가 있었는데 손화의 모든 첩들이 손화와 함께 자살했지만 하씨는 자기 아들과 다른 첩이 나은 손화 아들을 기르기 위해 자살을 택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이 중에 손호가 나중에 오나라 마지막 황제가 된다.(아래(11)참조)

 

(7) 손준 암살모의(AD254, AD256)와 손준의 병사와 손침의 집권(AD256)

 

손준이 병권을 쥐고 정치를 농단하자 손준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움텄다. 사마 환려가 손준을 죽이고 소화가 태자이기 전에 원래 태자였던 장남 소등의 아들 소영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발각되어 모두 몰살당했다.(AD254)  전공주가 동생 주공주를 손준에게 참소했다. 주공주의 남편 주거가 이번 역모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손준은 주공주도 죽였다(AD255). 다음해(AD256) 7월 오나라 장군 손의와 장이와 임순 등이 손준을 암살하려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10여명이 죽었다. 병권을 잡은 손준은 제갈각과 마찬가지로 위나라를 침략하여 영토를 넓히고 싶었다. 군사를 모아 북으로 진격하려는 도중에 손준은 병에 걸려 죽게 되자(AD256년 8월14일) 사촌동생 손침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였다.  

   

(8) 등윤과 여거의 손침 제거 실패(AD256)

 

표기장군 여거는 물론 조정 대신들은 손준에 이어 손침이 전권을 잡은 것에 불만이었다. 여거가 주동이 되어 등윤을 승상으로 삼아 달라고 황제에게 간청했다. 손침은 등윤을 대사마로 임명하고서 얼마 전에 죽은 여대를 대신하여 무창에 주둔하도록 명령하였다. 여거는 등윤과 함께 손침을 몰아내기로 밀약하고서 군사를 일으켰다.(AD256) 손침은 즉각 군사를 발동하여 여거에게 반격을 가했다. 무창으로 가려던 등윤도 군사를 돌이켜 손침을 반역자로 규탄하고 건강으로 진격했다. 등윤과 그 군사는 손침 군사에게 패하여 등윤의 삼족이 멸족됐다. 손침은 대장군으로 승진하고서 병권을 장악했다.(AD256년 11월) 사촌 형 손헌 또한 손침을 죽이려고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하여 결국 자살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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