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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3> 최측근 전횡(E) 양기(梁冀)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11월19일 17시0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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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효질제(재위 AD145-AD146)를 독살한 대장군 양기

 

두 살짜리 황제 한나라 효충제 유병이 즉위한지 일 년 만에 죽었다(AD145년1월16일) 많은 조신들이 모든 종친을 경사로 소환할 때까지 국상발표를 미루자고 했다. 황위계승권을 가진 사람들이 여러 지방에 웅거하고 있으니 반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충신 태위(총리) 이고는 반대했다.“국상을 숨기는 것은 천하가 금기시 하는 것입니다.” 실권자 양태후는 이고의 말대로 즉각 국상을 발표하도록 했다. 후사문제가 대두되었다. 죽은 효충제는 세 살에 불과했으므로 아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대부분 대신들은 너무 나이 어린 종친보다는 어느 정도 나이가 있어서 친정을 할 수 있는 자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양태후(효충제 직전 황제 효순제의 황후)와 그의 오빠 양기로서는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나이 어린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했다. 양태후는 효충제의 팔촌이자 여덟 살짜리 유찬을 황제로 세웠다. 이 사람이 효질제(재위 AD145-AD146)다. 효질제는 나이가 어렸지만 똑똑했다. 양태후의 오빠이자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양기를 쏘아보며 “그대가 발호장군이라는 사람인가?”라고 물을 정도로 강단이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효질제 배후세력들의 사주가 있어서 그랬겠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여덟 살짜리 아이로서 대단한 총기라 아니 할 수가 없다. 양기는 불쾌한 정도가 넘어 불안했다. 저런 아이가 장차 장성해서 전권을 장악한 황제가 되는 날이면 자신의 목숨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결국 사람을 시켜 독을 넣은 떡을 효질제에게 먹였다. 고통 속에서 효질제는 태위 이고를 불렀다. 곁에 있던 양기가 달려왔다. 효질제가 목이 마르다고 했다. 양기는 물을 마시면 토할 것이므로 마시면 안 된다고 말렸다. 곧바로 효질제가 죽었다. 효질제 죽음을 수상하게 여긴 태위 이고가 시의를 보내 조사를 시키려했으나 양기가 차단시켰다.   

 

(2) 누구를 황제로 옹립할 것인가?(AD146)

 

효질제가 죽은 뒤 조정에서는 후사를 누구를 세울 것인지에 대한 의논에 들어갔다. 조정 대신 태위 이고와 사도 호광과 사공 조계는 이 문제에 국가흥망성쇠가 달려 있다고 보았다. 당연히 나이가 성숙하여 친정할 수 있는 죽은 효질제의 사촌 형 청하왕 유산을 지지했다. 그러나 대장군 양기는 보다 나이 어린 사람을 원했다. 마침 평원왕 유익의 아들 여오후 유기가 양태후 여동생과 결혼하기 위해 상경 중에 있었다. 내시세력의 우두머리 중상시 조등도 유산에게 원한과 앙심을 품고 있었으므로 양기에게 다가가 이렇게 속삭였다. “ 여오후 유지를 세워 부귀를 오래 보전하십시오.” 양기는 유지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조정 대신들을 칼로 협박하여 유지를 세운다고 선언했다. 모두들 꼼짝하지 못했다. 딱 두 사람 태위 이고와 대사농 두교가 반대했다. 양기는 서둘러 회의를 파하고 여동생 양태후에게 달려가 황제후자 결정사항을 알렸다. 그리고 이고를 파면시켜버렸다. 태위자리에는 고분고분한 호광을 임명했고 사공 조계는 사도로, 사도에는 원탕을 임명했다. 효환제 유지(AD132-AD168)가 15세의 나이로 제위에 올랐다.(AD146년 6월7일)    

 

(3) 충신 이고(李高)와 두교(杜喬)의 옥사(AD147) 

       

태위 이고가 파면될 당시 대사농 두교는 좌천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다음해(AD147) 태위호광이 파면되고 두교가 태위 자리에 올랐다. 당시 이고와 두교는 실력있고 청렴하고 강직하여 온 조정과 국민의 두터운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두교는 신랄하게 대장군 양기의 정치농단을 황제에게 비판했다. “공도 없는 주위 측근이나 환관에게 높은 자리와 작위를 수여하면서 공신들의 봉지(토지)를 빼앗아 넘겨주고 있습니다. 간사하게 악을 행해도 벌을 받지 않고 흉악무도한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장차 몸이 죽고 나라가 망할 징조이니 신중하셔야 합니다.” 황제나 양기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양기는 범궁이라는 사람을 상서로 임명하고 싶어서 두교에게 부탁했다. 두교는 그의 과거 범죄 사실을 들어 거부했다. 양기가 앙심을 품었다. 다음 달 지진이 일어나자 그것을 핑계로 두교를 파면시켜버렸다.(9월9일) 그 자리에 사도 조계를 옮겨 심었다.(10월) 양기의 사주를 받은 환관 당형과 좌관이 두교를 참소했다. “ 이고와 두교는 항상 황제에게 반대 의견을 늘어놓았습니다.” 효환제도 이고와 두교를 싫어하기 시작했다. 

 

그 때 청하(지금의 산동성 임청현과 하북성 청하현 일대)에 사는 유문이라는 사람이 산적 유유라는 사람과 왕래하면서 “황제는 지금 유지가 아니라 유산이 되어야 한다.”고 떠들고 다녔다. 그 사실이 조정에 들어가서 유문과 유유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유문이 청하국 재상 사고에게 이렇게 독촉했다. “청하왕을 세워야 한다.” 군사를 일으켜 쿠테타를 일으켜야 한다는 말이다. 사고가 유문을 크게 꾸짖었다. 화가 난 유문은 사고를 죽여 버렸다. 유문과 유유는 결국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양태후와 양기는 그 배후에 청하왕 유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유산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고 유산은 자결을 선택했다. 양기는 유산의 배후에 이고와 두교가 있다고 믿었다. 이고와 두교는 효환제 이전인 효질제나 효충제 선택 때마다 유산을 지지했었기 때문이었다. 양태후는 이고와 두교의 충심을 믿었으므로 참소를 믿지 않았다. 그러자 양기는 양태후 몰래 그 두 사람을 가두어 버렸다. 이고의 문하생 왕조가 형구를 메고 나아와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신이 죄를 대신 받겠다고 외쳤다. 조승 등 유생 수십 명도 도끼를 차고 나와 궁궐 앞에서 이고와 두교의 방면을 호소했다. 양태후가 그 사실을 알고 두 사람을 풀어주었다. 양기는 모든 유생과 백성들이 이고와 두교 편임을 알고 놀랐다. 사람을 시켜 또 다시 유문과 유유의 반란 사건으로 연결시켜 이고와 두교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고는 옥사했다. 임종 직전에 이고는 호광과 조계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황제의 수족역할을 하면서 죽음을 돌보지 않았고

  황실을 보존하며 효문제나 효선제(전한 정성시대를 말함) 보다 융성하게 하고자 했소.

  그러나 공들이 양씨일족에게 하루아침에 미혹되어 굽신거리게 되므로써

  길조가 흉조가 되고 

  이루어질 일들이 그르치게 되었소.

  한(漢)나라 쇠퇴는 여기서부터 시작될 것이오.

  공들이 후한 복록을 받고서도

  나라가 넘어지는 것을 부축하지 못했고

  큰일을 기울어지고 무너지게 했으니

  후세 역사가가 어찌 사사롭게 처리하겠소.

  나의 몸은 끝나나

  의로움에서는 얻은 것이 있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소.“      

 

화가 난 양기는 두교에게 자결하라고 강요했다. 두교는 거부했다. 두교를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다. 두교도 옥에서 죽었다. 맞아 죽었던지 독살했을 것이다. 자결을 하지 않고 버티겠다던 두교가 옥 안에서 자결했을 리는 만무하다. 두교는 이렇게 생각했다. “양기 네 말대로 자결한다는 것은 역적의 말에 순응하는 것이다.” 이고와 두교의 시신을 성 밖에 던지고서 아무도 곡하지 못하도록 명했다. 제자 곽량과 동반이 곡을 하며 시신을 떠나지 않은 죄로 잡혀왔다. 그들은 말했다. “대의로 움직이는데 어찌 내 생명을 돌 볼 것이며 어찌 죽음을 두려워할 것인가?” 그 소식을 들은 양태후가 용서하고 풀어 주었다.(AD148) 두교의 옛 부하 양광이 간청하여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받았다. 양광과 곽량과 동반은 평생 은거하며 살았다. 

 

(4) 양태후의 죽음과 양기의 포악한 독재(AD148-AD159)

 

AD148년 효환제 나이가 17세가 되어 일종의 성년의식인 원복제를 치렀다. 이년 뒤 양태후가 죽고 황제가 친정에 나섰지만 조정의 전권은 외삼촌 대장군 양기에게 돌아갔다. 양씨 집안은 조정의 모든 요직을 독점했다. 후작이 10명이었고 세 명의 황후(효공제, 효순제 및 효환제)를 배출했으며 6명의 귀인(황제의 첩)과 2명의 대장군과 7명의 군(君)이 양씨 가문에서 나왔다. 양기의 처 양성군 손수도 자신의 씨족을 요직에 심고 백성의 땅과 재산을 빼앗아 원성을 높이 샀다. 양기는 자신을 경유하지 않고 유생을 인사 추천한 학열과 호무라는 사람의 일족 60명을 죽였으며 자신의 은퇴를 권유한 원저라는 사람을 잡아들였다. 원저가 이미 죽었다고 하며 장례를 치르자 숨어있던 관을 들추어내 때려 죽였다. 양기 자신을 지록위마에 빗대어 비판한 최기를 수색하여 죽였다. 

최기라는 사람이 <외척잠>이라는 경계의 시를 지었다.

“ 지위가 높다고 자랑마라.

  하늘이 꺽을 수가 있느니라.

  미모를 자랑하지 마라.

  저절로 추해지는 날이 올 것이니라.

  황제가 계속 총애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아끼는 것도 순식간에 무너지리라.“

양기가 이 시를 보고 발끈했다.(AD159)    

 

(5) 효환제의 역쿠테타와 환관 5인방(AD159)

 

양기의 독재에 신물이 난 것은 비단 조정이나 백성만이 아니었다. 나이가 성숙한 효환제 스스로도 양기를 가만 둘 수는 없었다. 효환제가 환관인 소황문사 당형을 조용히 불러 물었다. “누가 양기 씨족들과 내통하지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당형이 말했다. “ 중상시 선초와 소황문사 좌관이 양불의(양기의 동생)과 사이가 벌어져 있고 중상시 서황과 구원은 외척의 전횡을 분개해 하고 있습니다.”

효환제가 은밀히 선초와 좌관을 불러 양기척결의 뜻을 보이며 의견을 물었다. 여러 환관들이 한 마디로 대답했다. “ 마땅히 죽였어야 함이 오래되었으나 저희들이 용렬하여 성상의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효환제가 명령을 내렸다. “심히 그렇다. 상시들이 비밀리에 도모하라.” 

선초와 좌관이 앞으로 나와 다시 확인했다. “ 양기를 처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사오나 과연 황제의 속뜻에 다른 마음이 계실까 걱정이 됩니다.” 황제가 확답했다. “ 간신이 나라를 어지럽히는데 내가 어찌 다른 생각이 있겠느냐.”  선초가 다시 확인했다. “폐하께서 결정하셨으니 두 번 다시 말씀하지 마십시오. 비밀이 새어 나갈까 두렵습니다.” 효환제는 서황, 구원, 당형, 선초 및 좌관의 다섯 환관들과 피를 나누어 마시며 양기를 축출하기로 밀약했다. 이들이 환관 5인방, 즉 오후(五候)이다.

대장군 양기도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자신의 심복인 환관 장운에게 궁궐 안에 숙직시키면서 경계를 강화하라 지시했다. 오후의 일원인 구원이 자신의 부하인 장원을 가두어 버렸다.그리고는 양기가 환관을 움직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고 황제에게 보고했다. 황제는 상서회의를 소집하고 궁권수비를 지시하는 한 편 군사를 보내 즉각 양기 체포령을 내렸다. 구원은 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양기의 집을 포위했다. 광록훈 원우를 보내 대장군의 인수와 인쇄를 회수시켰다. 모든 공직에서 파면한다는 뜻이다. 양기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인식하고 전 가족 자결을 선택했다.(AD159) 양씨 일족 수 십 명이 같이 족멸되었다. 조정 대신이었던 태위 호광, 사도 한연, 사공 손랑이 저항하지 않았으므로 죽음을 면하고 폐서인 되었다. 일등공신은 선초에게로 돌아갔다. 식읍 2만호를 수여받았다. 나머지 환관 네 명은 각각 식읍 만호를 내려 받았다. 

 

(6) 양기보다 더한 효환제와 환관 5인방의 독재(AD159-AD164)

 

독재자 양기가 처단된 후 나라는 더 심하게 혼란했다. 무엇보다도 현명한 인재들이 조정에 나오기를 꺼렸다. 이고와 두교가 억울하게 옥사하는 것을 본 조사들은 한결같이 천거되는 것을 기피하고 준양시회(遵養時晦), 때를 기다리고자 했다. 충신 진번이 추천한 서치, 강굉, 원굉, 위저 및 이담 모두 나오는 것을 거절했다. 위환이 천거되자 이렇게 말했다. “ 봉록을 받고 조정에 나아가는 것은 고칠 희망이 있기 때문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궁이 천 명이나 되는데 덜어낼 수 있습니까? 마구간에 말이 만 필이나 되는데 그걸 줄일 수가 있겠습니까? 좌우의 척족과 환관들을 걷어 낼 수가 있습니까? 어렵습니다. 나더러 살아서 들어가서 죽어서 나오라는 것인데 그런들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현신들이 나타나지 않자 조정은 환관들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일등공신 환관 선초가 죽자(AD160) 남은 네 명의 환관들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자치통감은 이들의 전횡을 이렇게 기록했다.

“ 좌관은 하늘을 돌려놓았고, 

  구언은 홀로 앉자 있으며,

  서황은 누운 호랑이 같았고,

  당형은 비를 퍼붓듯 했다.“  

 

상서 주목이 환관의 발흥을 황제에게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제거하기를 청원했으나 황제가 듣지 않았다. 분통이 치밀어 오른 주목은 울분에 의한 화병으로 종기가 나서 죽었다. 구순이라는 충신의 증손자 구영은 고결하고 엄숙하여 황제에게 총애를 받았다. 그의 조카는 황제의 누이동생 익양공주의 남편이었으므로 사돈지간이기도 했다. 황제의 아낌이 극진하자 좌우 환관과 조정대신들이 모두 그를 참소하여 죽이라 했다. 구영이 황제에게 편지를 올렸다. “ 오자서를 내쫓고 계포를 수색하는 것보다 더 저를 심하게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충신은 몸을 죽여 임금의 분노를 풀어주고

효자는 목숨을 버려 부모의 원한을 풀어 줍니다.

신은 감히 제 목숨을 버려서 책임을 지겠으니

부디 제 죄목을 다시 살펴보셔서

제 가족이나 형제의 목숨은 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효환제는 더욱 화가 치밀어 올라 구영을 주살시켜 버렸다.

 

(7) 환관 5인방과 후한 멸망의 결정타

 

AD25년 광무제가 세운 후한은 효충제(AD144-AD145) 이후 급격하게 붕괴된다. 그 이유로는 외척과 환관의 발호가 가장 결정적인 이유라고 할 수가 있다. 특히 환관들은 무리를 이루면서 외척세력에 대항함은 물론 유림세력과도 대척점에 서면서 여러 번에 걸친 변고, 즉 당고의 화를 초래하게 되면서 결국 후한의 멸망과 삼국분열의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선초가 주축이 환관5인방(오후)의 양기의 축출과 정권 장악은 안으로는 세 번에 걸친 당고의 화를 통하여 후한조정의 내부조직을 와해시켰고 바깥으로는 지방 군벌세력들에 대한 통제력을 급격히 떨어뜨림으로서 사실상 후한멸망(AD168년, 역사적 멸망은AD220)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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