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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총선 핵심 이슈 세가지는 경제, 혁신, 통합 - 마크롱식 혁신정치냐 문재인식 디지털 독재냐?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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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11월12일 17시00분

작성자

  • 장성민
  • 세계와 동북아 평화포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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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권의 임기가 절반의 반환점을 넘어섰다. 지난 2년 반 동안, 현 정권에 대한 민심은 경악과 좌절을 넘어 화염과 분노가 하늘을 찌를 지경이다. 하지만 이 민심은 지금 새로운 둥지를 찾지 못해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다. 이유는 ‘대안 정당’이 없기 때문이다. 집권 여당의 실정(失政)에 분노한 민심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애타게 호소하는 한 마디는 “그런데 대안이 없다. 대안이”라는 말이다. 지금 한국 정치는 부도 사태를 맞았다. 그래서 ‘정치적 IMF’ 상황이다. 그런데도 여당의 지지율은 여전히 제1야당의 지지율보다 훨씬 높게 나온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제1야당의 혁신 부재(不在)이다. 지금 문 정권이 이렇게 국민을 무시하고 독선적으로 국정운영을 하는 것도 야당의 견제력 부족이다. 한마디로 대안 세력 부재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다가올 4월 총선은 정부여당에 대한 심판선거가 아니라 야당에 대한 심판선거가 될 지도 모른다.


지금 야당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작금의 민심은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민심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경제, 둘째, 혁신, 셋째, 통합이다. 그런데 야당은 지금 민심과 거꾸로 가고 있다. 현재 국민들이 생각하고 있는 집권 여당의 최대 악폐(惡弊)는 경제파산이다. 공자(孔子)의 주장처럼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 이 없다’는 현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민심이 현 정권으로부터 떠난 것은 경제파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문 정권의 패거리 부패이다. 독선(獨善), 독단(獨斷), 독주(獨走)식의 패거리 부패. 이름하여 자기들만의 폐쇄적 공간 속에서 모든 문제를 음성적으로 논의하고 결정하는 전체주의 방식의 주사파식 국정운영이다. 이런 사례는 지난 2일 동해에서 나포한 북한 주민 2명을 살인 혐의자로 인식한 후 곧장 다시 비밀리에  북한으로 되돌려 보낸 밀실행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지난 6월 삼척항을 통해 어부로 위장해 남하한 위장 간첩 4명중 2명도 아무런 대국민 보고 없이 극비리에 북으로 돌려 보냈으며, 국정원에서 조사하고 있다는 나머지 2명의 실체도 온데간데 없이 실종되고 말았다. 이 모든 일들이 국민보고 없이 청와대의 주도하에 극비리에 이뤄지고 있다.

이런 참혹한 정권을 보면서 민심은 새로운 변화를 갈망한다. 그 변화는 개방된 사회, 공정한 나라, 투명한 세계이다. 그런데 이런 민심에 부합하는 야당이 없다. 민심은 추락하는 경제를 일으켜 세울 창조적 비전을 갖춘 대안 정당을 찾고 있다. 하지만 대안이 안 보인다. 소비자인 유권자는 신(新)상품을 찾고 있는데 생산자인 제조자는 계속 구(舊)상품을 생산해 내고 있기 때문에 시장은 이를 외면한다. 그래서 보다 개방되고 공정하고 투명한 나라를 만들어 낼 정치적 리더십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야당은 이런 민심을 못 읽고 있다. 이런 와중에 여당은 자기 변신에 발 빠르다. 마치 카멜레온처럼 속도감 있게 변신하고 있다. 지난  2년 반 동안 여당은 자신들의 실책이 빚어낸 서민 고통을 퍼주기 복지예산으로 덮으면서 순식간에 고통의 생산자가 고통의 보호자로 둔갑하고 있다. 어제까지는 마치 공동묘지처럼 정적이 흘렀던 집권 여당이 선거철이 돌아오자 마치 새로운 장날을 맞은 것처럼 북적댄다. 대신, 야당은 갈수록 역동성을 잃어가고 있다. 이로 인해 집권 여당의 실정에 따른 분노와 화염의 민심은 야당에 대한 지지로 연결되지 않는다. 

지금 야당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다시 말하지만, 세 가지가 핵심이다. 첫째, 경제, 둘째, 혁신, 셋째, 통합이다. 경제는 여당의 입장에서 그 어떤 정치적 프레임을 걸고 나오더라도 백약이 무효인 야당만이 가질 수 있는 특효의 선거 프레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정치혁신은 국민불신이 최악인 상황에서 정치변화를 선도할 수 있는 최적의 이슈가 될 것이며, 통합은 분열의 정치에 식상한 절대다수의 국민들의  마음을 포용할 수 있는 최선의 선거프레임이 될 것이다. 여기에 적대적 관계나 적진으로 인식된 진영까지를 통합의 대상으로 선포하고 나선다면 4월 총선 국면은 분열 대(對) 통합의 구도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야당은 절대 다수의 중도층 표를 유인해 낼 수 있을 것이고 이로 인한 선거결과는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야당에 압승을 가져다 줄 것이다. 물론 보수 야권진영의 민심은 보수대통합을 원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원하는 것이 과연 ‘탄핵과 반(反)탄핵의 조건 없는 통합’인 ‘적폐통합’일까? 기성 정치판의 낡은 통합의 재판, 삼판을 바라는 것일까? 민심을 이렇게 읽었다면 그것은 오판이다.
이런 식의 양적통합은 야당의 지지를 오히려 추락시킬 것이다.

지금 민심은 ‘창조적 혁신통합’을 원하고 있다. 그럼 창조적 혁신통합이란 무엇인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어 나갈 차세대들과의 통합이다. 즉 최소한 ‘82년생 김지영 세대’와 ‘80년대 초반 이후
2000년대 초까지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들을 대거 통합해 나가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곧 오늘을 위한 기성 정치는 뒤로 빠지고, 내일을 위한 미래 정치를 통합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삼으라는 의미이다.
어제의 일꾼들을 무조건 한군데 모아 두는 것이 능사(能事)가 아니다. 이런 식의 통합은 ‘썩은 사과들의 통합’으로 생각하는 것이 정치혁신을 바라는 지금의 민심이다. 세대갈등을 극복할 수 있고, 젠더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새로운 밀레니얼 세대를 정치권 전면으로 수용하고 전폭 포용해서 이들을 흡입하는 통합을 민심은 갈구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주도해 나갈 수 있는 새로운 세대를 정치권으로 대거 수혈시켜 국가의 틀을 미래 지향적으로 구축해 나가는 그런 정치적 통합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민심이 바라는 통합이다. 이런  통합이 곧 혁신통합이다. 반면에 기성세대들만의 통합은 기득통합이고 낡은 통합이며 감동이 없다. 이런 식의 통합은 강력한 정치혁신을 바라는 민심의 저변에 새로운 변화의 싹을 틔우는 혁신적 통합이 아니다. 민심은 이런 통합을 기존의 낡고 썩은 부패들 간의 '형제애의 결합'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런 식의 통합으로 지난 2년 반 동안 국민과 국익을 가로막는 문재인 정권의 '부패한 장벽정치'를 타파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다가올 총선의 핵심 이슈는 첫째, 경제, 둘째, 혁신, 셋째, 통합이다. 누가 이런 이슈에 이니셔티브를 쥐고 가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갈릴 것이다.

지금 문재인 집권 절반의 기간에 가장 심각한 적폐는 대한민국 3대 기둥이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적 민주주의, 경제적 자유시장주의, 군사안보적 한미동맹관계가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다. 그러면서 사회, 경제적 불평등 또한 빠르게 심화되고 있다. 이는 사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 국가의 핵심축대가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국부(國富)를 훔친 주역들이 법률을 내세워 합법을 가장하고 위선과 변명의 몸짓을 습관적으로 반복해도 야당은 없다.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갖고서 국민을 피해자로 만들고 자신들은 수혜자로 돌변해도 이를 비판할 야당이 없다. 삼권 분립과 법의 지배의 민주주의 원칙을 대통령의 명령과 사람의 지배로 바꾸어도 이를 감시, 감독할 야당이 없다. 정권이 부패를 독점해서 정권 핵심들의 패거리 잔칫상을 차려도 이를 견제할 야당이 없다. 현재의 불평등 심화와 국정운영의 실패를 과거 정권의 탓으로 돌리며 자신들의 실정을 정당화해도 이를 비판하는 야당이 없다. 자신들의 개혁은 순결(純潔)이라 말하고 과거 정권의 개혁은 불결(不潔)이라 말해도 이를 적폐로 규정하는 야당이 없다. 권력이 함부로 기업활동의 자유를 침해하여 기업이 해외로 쫓겨나가도 이를 막아 주고 보호할 야당이 없다. 가짜 민주주의에 위선과 도둑정치(kleptocracy: 권력자가 막대한 부를 독점하는 정치체제)를 해도 이를 공격하는 야당이 없다. 

지금 이대로 간다면 다음 총선에서 야당에 대한 기대도 희망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집권 여당이 악정(惡政)에 실정(失政)을 펼치더라도 선거결과는 보나 마나한 ‘안 봐도 비디오’ 게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야당이 총선에 참패하면 대선은 ‘묻지마 선거’가 될 공산이 크다. 드루킹 댓글 조작과 같은 디지털 독재(digital dictatorship)가 절정에 이르고 반민주적 선거부정이 창궐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급기야 대한민국 3대 기둥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위대한 자유와 민주의 역사는 여기서 쓰러지고 말 것이다. 이런 비극적 역사의 종말을 맞게 된다면 이 거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국민에게 있을까? 여야 정치 지도자들에게 있을까? 민주주의 원리는 ‘무한책임’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하의 민주주의 원리는 ‘무책임’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래서 역사의 종언에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고통과 시련은 고스란히 국민이 떠안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번 다가올 선거의 키(key)는 이제 혁신(革新)이란 화두에 집중될 것이다. 모든 정당은 혁신게임에 전력투구할 것이다. 혁신의 주도자만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도태될 것이다. 특히 야당은 전면적 혁신을 단행하지 않으면 한증탕의 수증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왜 혁신인가? 결론은 간단하다. 여야로 나누어진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은 이러나저러나 각 진영을 지지할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 핵심키는 결국 중도세력이다. 이들이 이번 선거판의 캐스팅보트를 쥐고 흔들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마음이 지금 한국 정치의 일대 혁신을 바라고 있다. 이들이 바로 한국 정치의 창조적 파괴를 희망하고 있고, 그것을 실현하는 사활적 역할을 담당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모든 정당은 이제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살아남기 위해서도 혁신경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혁신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철학자 마르쿠제(Herbert Marcuse)의 주장처럼 '혁신은 혁명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혁명이 구체제에 대한 단순한 파괴에 있다면, 혁신과 개혁은 구체제의 파괴를 넘어 구체제를 대체할 현실적 대안체제의 구축까지를 완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적 불만을 수용해서 안정화시켜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파괴에 집중하는 혁명은 창조에 집중하는 혁신과 개혁보다는 쉽다. 그러나 창조적 파괴는 단순한 창조보다도 훨씬 어렵다.
 

야권 통합의 1차적 시도가 실패로 귀결됨에 따라 한국 정치는 이제 더욱 치열한 혁신경쟁에 돌입했다. 혁신을 외면한 정당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혁신에는 절대로 요행이 있을 수 없다. 혁신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수반되고 피를 흘리게 되지만, 구각(舊殼)을 벗지 않고서 새살이 돋기를 바라는 것은 결국 내 몸속에 고름이 농익도록 방치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국민은 지켜보고 있다. 역사철학자인 헤겔(Hegel)은 ‘파국을 진보의 조짐’으로 봤다. 위기를 기회로 보고, 절망과 어둠을 빛과 희망의 징조로 해석할 수 있는 정치인이 있는 정당이라면 ‘정치혁신’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정당이 민심을 얻어 내년 4월 총선의 승자가 될 것이다. 반면에 국민의 요구인 정치혁신을 거부하고 외면한 정당은 국민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받고 버림받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 정치는 치열한 혁신경쟁이 시작되었다. 누가 혁신의 주도권을 쥘 것인가? 민심이라는 월계관을 쓴 승리의 여신은 그곳을 향할 것이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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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11월12일 17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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