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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3> 최측근 전횡(A) 진(秦)의 조고(趙高)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10월22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10월29일 11시36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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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나라가 망하는 이유가 어찌 단순하겠는가마는 그 중에서도 최고권 황제에 붙어서 정치와 재정과 인사와 군사권을 마음대로 주무른 최측근만큼 국가존망에 치명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따로 없다. 수천 년 중국 역사를 통해 나쁜 이름을 남긴 수많은 측근들의 면면을 깊이 살펴보면 나라를 망가뜨리는 그들의 행동양식을 관통하는 몇 가지 중요한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첫째로,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오로지 자신의 위엄과 복록이다. 그들에게서 국가에 대한 충성이라든가 효도라든가 우애와 같은 전통가치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축재에 매우 적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나라에 대한 충성이나 백성에 대한 어짐(仁)이나 혹은 부모형제에 대한 효제와 같은 고상한 유가적 가치에 대해서는 아는 바도 별로 없거나 알아야 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도 않았다. 

 

둘째로, 최측근들이 모색하는 최고의 절실함은 오로지 최고 권력자인 황제의 눈에 들고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 뿐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지식에서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총애가 그들 권력의 원천적 뿌리였기 때문이다. 황제가 즐기는 오락이라든지 황제가 즐겨 찾는 여자를 찾아서 공급함으로써 끊임없이 황제의 환심을 사는 것이 그들의 지상과제가 된다. 어떤 황제는 특히 오래 살고 싶어서 장생술 혹은 방생술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탁월한 도술을 가졌다는 사람을 찾아 소개하는 일이 내관의 주된 일이 되기도 했고 또 내관 스스로가 중독성이 큰 독약을 황제에게 불로장생약이라고 속여 먹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머리나 입에서 황제의 뜻과 다른 생각과 말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셋째, 황제의 눈과 귀와 성총(聖聰)을 가림으로써 의도적으로 황제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그렇게 황제의 판단을 흐리게 해야만 황제가 자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비정상적인 권력이 계속 유지되기 때문이었다.

 

넷째, 권력을 오로지하기 위해서는 쓴 소리를 마다않는 충신들이나 황제와 가까운 종친 혹은 인척 등 경쟁자를 지방으로 내치고 제거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 되었다. 정적이라면 황제의 친인척은 물론 사대부세력들을 가차 없이 처단하고 제거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황제마저도 제거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다섯째, 최측근은 무리를 이루어 세력을 이루었지 절대로 홀로 따로 놀지 않았다. 배경이나 실력이나 모든 면에서 황족이나혹은 사대부에 비해 떨어졌으므로 그들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지속하기 위해서는 똘똘 뭉칠 필요가 있었다. 

 

여섯째, 측근들은 권력영역을 무한정 넓혀 나갔다. 처음에는 황제의 옷과 치장, 목욕, 음식제공 및 심부름 등과 같은 허드렛일로 시작하여 점차 조정의 재정 인사와 같은 국내정치는 물론 외교군사 방면으로 권력영역을 넓혀 나갔다. 

 

(1) 진시황의 사망을 숨기다.(BC210년 7월 20일)

 

BC211년 어느 날 중국 하북성 복양 근처에 큰 운석이 떨어졌다. 어떤 사람이 재빠르게 그 운석에다 이런 말을 새겨 넣었다. “시황제가 죽을 것이고 땅이 갈라질 것이다.(始皇死而地分)” 시황제가 서둘러 그 돌을 거두어 땅에 묻게 하고는 어사를 시켜 범인을 수색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화가 치밀어 오른 시황제는 그 돌이 나온 지역 근처의 모든 사람을 죽여 버리고 그 돌마저 불로 구어 녹여버렸다. 그 다음해(BC210) 10월 시황제는 좌승상 이사와 사랑하는 아들 호해를 데리고 지방순찰에 나섰다. 서안을 나와 남동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호북성 안륙에 이르러 구의산에서 순임금에게 제사를 지낸 뒤 장강을 따라 동북쪽으로 내려와 마안산 아래 당도를 지나 항주와 절강에 까지 갔다. 절강성 소흥지역에서 우임금에게 제사를 지낸 뒤 북상하여 바다를 끼고서 산동성 교남과 연태지방을 거쳐 평원부근까지 왔을 때 시황제에게 큰 병이 났다. 시황제는 입으로 죽는다는 것을 말하지 못할 정도로 죽음을 두려워하였으므로 자신의 사후 일에 대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병이 더욱 심해져서 일어나지 못할 것이 확실해지자 시황제는 조고를 불러 아들 부소에게 부치는 편지를 써서 보내도록 하였다. “네가 함양에 와서 상례에 참여하고 장례를 치르도록 하라.(与丧会咸阳而葬)” 마침내 진시황제가 7월 20일 하북성 평향현 사구에서 49세로 죽었다. 그러나 조고는 봉함된 편지를 즉시 부치지 않고 들고 있었다. 조고는 장자인 부소를 급히 부르라는 시황제의 유지마저 거역한 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 할 것인지 상황을 저울질 한 것이다. 

 

(2) 조고의 역모(沙丘의 역모) : 태자의 비밀교체 음모(BC210년 8월) 

 

시황제가 갑자기 죽자 조고는 여러 아들들이나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킬 것이 걱정되어 승상 이사와 함께 시황제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기로 하고 함양(진나라 수도, 장안 서쪽)으로 돌아가는 길을 서둘렀다. 시체가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해 통풍이 잘되는 수레를 만들었고 또 황제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환관 한 명을 호위하는 척 가장하기도 했다. 도착하는 곳마다 식사를 올리고 백관들이 중요한 안건을 보고하는 척하였으며 호위하는 내관이 상주한 요청에 대해 매번 황제대신 허락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시체가 부패하여 냄새가 심하게 나자 수레에 생선을 실어서 썩는 냄새를 위장하기도 했다.   

 

조고는 일단 자기가 가르친 열아홉 살짜리 호해(BC229-BC207)를 유혹했다. “부황(시황제)께서 유언으로 말씀하시기를 형 부소를 죽이라고 하셨고, 호해를 태자로 삼으라고 지시하셨다”고 말하라고 설득했다. 호해가 동의했다. 조고는 호해에게 승상 이사도 설득해야 한다고 했다. 호해도 수긍했다. 조고는 먼저 이사에게 가서 슬쩍 마음을 떠보며 말했다. “시황제가 부소에게 내린 편지가 아직 제게 있고 옥새는 지금 호해의 수중에 있습니다. 태자를 정하는 일은 그대와 저 조고의 입에 달려 있는 셈인데 장차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사가 펄쩍 뛰면서 말했다. “어찌 나라를 망칠 말을 하시오. 이런 일은 유언대로 하는 법이지 신하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오.” 조고가 날카롭게 찔러 물었다. “재능과 꾀를 내는 것과 큰 공로를 세운 것과 원망을 받지 않는 것과 부소가 신임하는 것 이 다섯 가지 면에서 승상은 몽염장군과 비교하여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사가 미치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조고가 말했다. “그렇다면 장자인 부소가 즉위하면 반드시 몽염장군을 승상으로 임명할 것이고 승상께서는 열후의 훈장도 받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시게 될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호해는 어질고 부드러워서 후사가 되고도 남을 사람입니다. 바라건대 깊이 생각하셔서 행동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침내 이사도 동의했다. 조고가 이사와 짜고 황태자를 교체해버린 것이다.  

 

(3) 정적 부소와 몽염 제거 (BC210년 9월)   

 

이사와 조고는 부소에게 사신을 보내 땅을 개척하여 공을 세우지 못하고 사졸을 많이 잃은 죄, 편지를 올려 황제와 조정을 비난한 죄, 밤낮으로 원망한 죄를 묻고 태자를 파함과 동시에 그를 보필하지 못한 몽염과 함께 죄를 물어 죽음을 내렸다. 조고가 몽염에게 원한을 가진 것은 꽤 오랜 전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원래 조나라 먼 왕족이었던 조고는 나면서부터 환자로써 일찍 궁에 들어왔었다. 매우 힘이 좋았고 또 법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므로 시황제는 조고를 궁문을 지키는 중거부령으로 임명하면서 동시에 아들 호해에게 법과 재판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도록 하였다. 조고가 죄를 지어 당시 실력자이던 몽의에게 재판을 받았는데 몽의는 조고의 죄가 사형에 해당된다고 판결하였다. 그러나 시황제는 조고의 능력을 아껴서 사면해주고 직책도 모두 되돌려 주었다. 당연히 조고는 몽의와 그의 형 몽염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 조고는 이번 기회에 몽의와 몽염을 제거하기 위해 같이 사약을 내리자고 했다. 그러나 호해는 형 부소가 이미 자살했으므로 큰 걱정거리가 하나 없어졌고 또 몽씨 일족은 오랫동안 진나라에 대단한 충신가문이었으므로 반란의 염려가 없다고 생각하여 살려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원한이 깊은 조고는 그럴 수가 없었다. 조고가 호해에게 말했다. “시황제께서 정작 호해를 태자로 삼고 싶어 하셨으나 끝까지 반대한 사람이 몽의입니다. 어찌 살려둘 생각을 하십니까? 죽이는 것만 못합니다.” 결국 몽의는 처형되었고 몽염도 몇 번 거부하다가 자살했다.(BC210년 9월)    

 

(4) 학정을 통한 권력 장악 : 황실제거와 극형의 도입과 3대 멸족제도(BC209년 4월)

 

BC 210년 황제가 된 호해는 다음해 승상 이사와 함께 동쪽으로 순행을 갔다가 4월 2일 돌아왔다. 호해가 이렇게 조고에게 말했다. “세상을 사는 것이 마치 6마리 말 마차를 몰고서  좁은 골목 샛길을 다니는 것과 같소. 내 이미 천하를 얻었으니 눈과 귀가 좋아하는 것을 모두 하고 마음에 즐거운 일을 끝까지 하면서 생을 오래 즐기려고 하는데 어찌 하면 그렇게 되겠소?” 조고가 아부하며 대답했다. “그것은 오직 똑똑한 황제만이 할 수 있는 것이지 아둔한 황제에게는 엄격히 금지하는 것입니다. 지금 황제께서 하실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지난 번 시황제께서 돌아가실 적에 내린 조서에 대해 의심을 하는 자들이 매우 많습니다. 특히 여러 황자들과 시황제께서 임명하신 대신들이 특히 더 그렇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처음으로 황제가 되셨는데 이들이 의심하고 원망하여 반란이나 일으키면 어찌 폐하의 소망을 이루실 수가 있겠습니까?” 호해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되물었다. “어떻게 하면 되겠소?“ 조고가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첫째로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형벌을 혹독하게 시행하시며, 둘째로 죄 지은 자를 서로 연좌시켜 시황제의 공신과 종실 사람들을 모두 제거하시며, 셋째로, 그런 다음에 지방 유민들을 불러 들여와 요직에 앉히시고 재물과 복록을 더하시어 그들의 환심을 사시면 모든 음덕이 폐하께 돌아오게 되어 베개를 높이하고 마음먹은 대로 즐기실 수가 있겠습니다.“ 호해가 그렇게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시황제의 아들 공자 12명이 함양에서 제거되었고 공주 10명 또한 처형되었으며 그들과 연좌되어 죽은 사람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재물은 모두 국고로 몰수되었다. 아방궁을 재건축했고 황실 동물원에 먹일 사료를 인근에서 강제 차출하는 바람에 수도 함양근처 300리에 먹을 것이 없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추락한 민심을 되살리기는커녕 거꾸로 조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억압정치가 강화된 것이다. 

 

(5) 전국적인 반란과 악화되는 가혹한 정치 (BC209년-208년)

 

조고에게 조종되는 허수아비 황제 호해의 학정에 반발하여 전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BC 209년 7월에 진승과 오광이 안휘성 기현 부근에서 반란을 일으켜 장초라는 나라를 세웠고 그 휘하에 있던 무신, 소소, 장이 ,진여 등은 지금의 하북성 중부인 옛 조나라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하북성 남부 한단 부근에서는 위구와 주시가 일어났다. 9월에는 유방이 강소성 패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항우는 강소성 오지역(지금의 회계)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북경 북쪽인 연에서는 한광이 독립적인 군사력을 행사하였다. 

 

전국의 반란군들이 호해를 타도하기 위해 점점 수도 함양으로 죄여오자 호해는 승상 이사를 자주 나무랐다. “공이 승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어찌 이렇게 도적들이 날뛰는가?” 이사가 두려워 떨며 말했다. “모든 권력을 황제께서 쥐시고 아래 신하들이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시며 엄격하게 정치를 행하시면 감히 거역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자기 허물벗기도 힘들 텐데 어느 겨를에 반란을 일으킬 여유가 있겠습니까?” 호해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여 더욱 더 권력을 장악하고 법을 가혹하게 행사하면서 형벌을 엄격하게 집행하였다. 세금을 혹독하게 거두는 자를 충신이라고 하였고 무거운 형벌을 내리는 자를 훌륭한 신하라고 평가하니 형벌을 받은 자가 길에 반쯤 되었고 굶는 자와 죽은 자가 거리를 메웠다고 자치통감은 기록하였다.(BC208)  

 

(6) 호해황제 봉쇄와 이사 처단 (BC208년)

 

조고는 그동안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서 사적으로 원한이 있는 사람들을 무수히 죽였으므로 혹시나 대신들이 조정에 들어와 그 사실을 고해바칠까 걱정이 많았다. 조고가 조용히 호해에게 다가가 말했다. 

 

“황제가 진정으로 귀하게 되는 이유는 목소리만 들을 수 있을 뿐 모습을 좀체 드러내지 않도록 하여 군신들이 황제를 볼 수 없도록 하는 것에 있습니다. 더욱이 황제께서는 아직 어리시므로 여러 사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그런 형편에 조정에 앉으셔서 잘못이 없는 대신을 실수로 꾸짖으신다면 천하에 신명하심을 보여주는 일이 못되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는 팔짱끼고 궁궐깊이 계시기만 하시고 법을 잘 아는 저와 다른 시중들이 업무를 처리하도록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대신들은 감히 의심스런 일들을 번거롭게 주청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따라서 폐하를 성스러운 임금이라 하시지 않겠습니까.” 어리석기 짝이 없는 호해는 조고의 계략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하도록 했다. 이제 모든 일은 조고에게만 보고되었고 모든 일을 조고가 결정했으며 황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승상인 이사조차 황제를 만날 수가 없었다.  

 

이사가 황제를 만날 수가 없다고 자주 불평한다는 말을 들은 조고가 이사를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간교한 계략을 세웠다. 조고가 승상 이사에게 말했다.“지금 동쪽에는 수없는 도적들이 날뛰고 있는데도 주상께서는 급하게 공사를 일으키시어 아방궁을 다시 지으면서 개나 말과 같은 쓸데없는 것들을 집착하여 모으고 계시오. 제가 간절히 말씀드리고 싶으나 직위가 낮아 감히 말씀을 올리지 못하고 있는데 공은 승상이나 되시면서 어찌 아무 말이 없으십니까?” 이사가 조고의 손을 붙들고 말했다. “아니 내가 말씀을 드리려고 한지 오래 되었지만 도대체 말씀을 드리지 못한 것은 도무지 어디에 계신지 알 수도 없고 또 아무도 만나지 않으시려하기 때문이었소. 제발 황제를 만나게 다리를 좀 놓아 주시오.” 조고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호해 황제가 한참 연회를 즐기며 여자들과 어울려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 때 조고는 이사에게 사람을 보내 이렇게 알렸다. “지금 황상께서 한가하시니 하실 말씀을 이 때 올리도록 하시지요.” 승상이 급하게 궁궐에 이르러 한참 재미있게 놀고 있는 황제에게 골치 아픈 일들을 주청을 올렸다. 조고는 이런 일을 세 번이나 꾸몄다. 황제는 황제대로 화가 났다.“아니 내가 한가할 때에는 도무지 나타나지 않더니 꼭 연회를 할 때마다 나타나 번번이 귀찮게만 하다니 승상 이사는 나를 어린이로 보는 것이 아닌가. 어찌 그렇게 교활하고 고루하기만 하단 말인가” 조고가 이 틈을 이용하여 이사를 모함했다. “부소 대신 황제를 옹립한 사람 중에 하나가 이사였습니다. 그 이후 승상자리에서 더 이상 승진하지를 못하고 있으니 분명히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고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또 그의 장남 이유는 낙양성의 수장인데 지금 천하의 도적 지승은 이사의 출신지역(여남 상채 출신)과 가까운 곳 출신(하남 영천)이기도 하고 또 낙양성을 자유로이 드나들어도 제지하지도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심상치 않은 관계인 듯합니다. 그들 사이에 편지가 오고갔다는 소문이 있는데 물증이 없어서 보고를 올리지는 못하고 있으나 조만간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이사는 바깥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실권은 황제보다 더 높습니다.” 황제는 그 말을 믿고 이사의 역모에 대한 뒷조사를 몰래 지시하였다.  

 

황제가 자신에 대한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이사가 입수하였다. 바로 황제께 조고의 단점을 조목조목 써서 올렸다. “조고는 권익과 형벌을 자기 멋대로 행사하는 것이 황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악하고 방자한 뜻을 품고서 개인 저택은 그 어느 제후보다도 더 화려하며 욕심이 끝없습니다. 폐하께서 도모하지 않으신다면 반드시 변란을 일으킬까 걱정입니다.” 호해 황제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짐은 조고 그가 진실로 충성스럽고 현명하다고 생각하는데 공이 그를 의심하다니 정말로 놀랍소. 짐이 그에게 맡기지 않으면 누구에게 맡길 수가 있겠소. 조고의 사람됨은 아주 깨끗하고 강한 사람이어서 아래로 인정 많고 위로는 짐의 생각을 정확하게 읽어내니 그대는 그를 의심하지 마시오.” 황제는 이사가 혹시 조고를 죽일지 두려워 이사와의 대화 내용을 모두 조고에게 알려주었다. 조고가 말했다. “바로 그것입니다. 승상 이사가 바라는 바는 바로 저 조고를 제거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역적 짓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황제도 머리를 끄덕이며 그럴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럴 즈음 도적들은 동쪽에서 함양을 향해 조여오고 있었다. 우승상 풍거질과 좌승상 이사와 장군 풍겁이 황제에게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세금과 부역을 과감히 줄여주고 아방궁 공사도 중단시킬 것을 요청했다. 황제가 대답했다. “천하를 소유한 황제란 지극히 하고 싶은 뜻과 욕심대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중요한 국정을 주관하여 마음대로 하며 아래로 법을 어기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주된 임무 아니겠소. 그대들은 짐이 즉위하여 2년이 되도록 도적들도 소탕하지 못하면서 또 선황께서 짓던 아방궁도 완성하지 못하도록 하니 위로는 선황과 금상에게 보답을 하지 못하는 것이고 또 충성을 다하지 않는 것이니 어찌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있단 말이오.” 이사와 풍거질과 풍겁을 감옥에 넣었다. 풍거질과 풍겁은 자살했고 이사의 아들 이유는 모반혐의를 뒤집어 씌워 처형하고 말았다.(BC208)

 

이사는 옥중에서 황제에게 편지를 써서 과거의 공을 세운 것과 반란할 마음이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함으로써 황제의 동정심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고가 그 편지를 가운데에서 가로채고서는 혹독한 매질과 고문으로 반역의 허위자백을 받아내었다. 황제가 그 자백의 진위를 시험해보려고 사람을 보내 다시 심문했는데 이사는 조고의 매질이 다시 시작되는 줄 잘못알고 재차 모반을 자백하였다. 호해황제가 반기며 말했다. “조고가 없었더라면 승상이 거의 나라를 말아먹을 뻔 했소.” 이사는 모반의 죄로 오형에 내려졌고 함양 저자에서 요참되었다. 조고가 마침내 승상이 되어 그 권력이 하늘을 찔렀다.(BC208년)    

            

(7) 지록위마와 호해제거와 자영옹립(BC207년 7-8월)

 

이사를 죽이고 나서 조고가 승상이 되었으나 여러 대신들이 자기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 두려운 조고는 제거해야 될 신하를 파악하기 위해 사슴을 가져다가 황제에게 바치면서 말했다.(호해는 동물 모으기를 좋아했다.) “말입니다.” 황제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아니지요. 어찌 사슴을 말이라고 생각하시오.” 황제가 주위의 사람들에게 물었다. 어떤 이는 침묵하고 어떤 이는 말이라고 했으며 어떤 사람은 사슴이라고 대답했다. 조고는 그날 사슴이라고 말한 사람을 모조리 법으로 처리했다. 죽였다는 말이다.

 

조고는 처음부터 동쪽에서 일어 난 도적들을 가볍게 여겼다. 백성들의 조정에 대한 불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즉 진승, 오광, 항우 및 유방 등이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했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정치개혁을 통한 민심수습 따위는 호리만큼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강력한 진의 군사력만 있으면 모든 것이 잘 해결되리라고 확신했었다. 그러나 진의 장수 장한이 자주 패하고 진의 관리들이 하나같이 도적 떼들에게 항복하고 배반하면서 항우와 유방의 군사들이 점점 수도 함양을 향해 조여 오자 조고는 자신의 판단잘못과 그로인해 주살 당할 것이 두려워 병을 핑계로 조정에 아예 출석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호해가 어느 날 흰 호랑이가 자기 수레의 말 한 마리를 물어 죽이는 흉흉한 꿈을 꾸었다. 점쟁이에게 그 뜻을 물었더니 “경수(涇水, 감숙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위수로 들어감)에서 문제가 발생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호해는 목욕재계하고 흰 말 네 마리를 경수에 바치는 제사를 올리고서는 조고에게 도적의 책임을 묻는 사신을 보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 조고는 사위 함양령 염락과 동생 조성과 쿠테타 계획을 꾸몄다. 호해를 제거하고 백성들에게 평판이 좋은 부소의 아들 자영을 세우기로 모의했다. 궁궐 안에서 호응할 사람으로 낭중령을 포섭한 뒤 사위가 배반할지 몰라서 그의 어머니를 조고의 집에 인질로 삼았다. 사위 염락이 큰 도적이 들었다고 소리치며 군사를 이끌고 궁궐 문에 도달하자 낭중령이 문을 열어줬고 염락과 함께 궁중으로 들어가 호해에게 죄를 일일이 지적하였다. 호해는 조고를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염락은 거절했다. 호해는 작은 군 하나만이라도 주면 그 땅을 다스리면서 왕 노릇 하겠다고 애걸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면 식읍 만호만 줘도 좋겠다고 애원했으나 그것도 거절당했다. 마지막으로 호해는 일반 백성처럼 관직이 없이 처자식하고 살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했다. 염락이 말했다. “승상 조고의 명을 받아서 천하를 위하여 족하(호해를 낮추어 말함)를 주살하는 것이요. 그대가 말을 많이 하였으나 나는 그것을 승상께 보고하지 않을 것이오.” 염락이 군사를 들어오게 하자 호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고는 조정 대신들을 소환하고 호해를 주살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부소의 아들 자영을 세우고 황제라는 명칭 대신 전국시대 형세에 맞추어 진왕이라고 낮춰 부르게 하였다.(BC207년 7-8월)

 

(8) 조고의 피살(BC207년 9월)과 진의 멸망(BC207년 10월)

 

조고는 새로 옹립한 자영에게 종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옥새를 받아오라고 종용했다. 자영이 두 아들과 함께 의논하며 말했다. “조고가 호해황제를 죽이고서 신하들이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 거짓 마음으로 나를 세웠다. 내 생각에 조고는 반드시 항우의 초나라와 짜고 진나라를 멸망시킨 뒤 관중에서 왕 노릇 하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다. 나를 종묘로 오라고 하는 것은 나를 죽이려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내가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누워있으면 다급한 그는 반드시 올 것이고 그 때 그를 처단하면 어떻겠느냐?” 자영과 두 아들이 계획을 세우고 누워있자 조고는 여러 번 사람을 보내 독촉했다. 그래도 종묘에 오지 않자 조고가 직접 와서 말했다. “종묘제사는 가장 중요한 일인데 왕께서 어찌 가시지 않으십니까?” 자영이 숨겨둔 군사에게 지시하여 조고를 죽이고 삼족을 멸하였다.(BC207년 9월) 

 

그즈음 패공 유방은 함양 동남쪽의 남전에서 진나라 군사를 크게 격파하고 함양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한 달 뒤 10월 자영은 인수를 목에 걸고 흰 구슬을 입에 물고 흰 말 흰 수레를 타고 지도(함양 서북쪽의 지도정)의 길가에 서서 패공을 영접하며 항복의 뜻을 알렸다. 주위에서 모두 그를 죽여야 한다고 했지만 유방은 이렇게 말했다.“당초에 회왕(김종직의 조의제문으로 유명한 초나라 의제. 항우와 유방은 형식적으로 회왕을 주군으로 여겼음)이 나를 살린 것도 그의 관용 때문이었소. 항복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짓이오.” 자영과 온 가족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BC221년 천하를 통일한지 10년 만인 BC210년에 시황제가 죽고 그 3년 만인 BC207년에 진나라가 망한 것은 어찌 조고 때문이 아니라 하겠는가?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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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10월22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10월29일 11시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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