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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16 고구려의 천적 전연(M)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09월26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19년09월25일 15시34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10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70) 모용각의 낙양 함락(AD364-AD365) 

 

전연의 모용진이 성공적으로 허창가 여남을 잇는 회북지역을 장악하자 동진의 반격위험은 크게 줄어들었다. 전연 태재 모용각은 이제야말로 낙양을 공략할 적절한 시점이라고 판단했다. 먼저 사람을 낙양에 침투시켜서 성 안 사람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조만간 전연의 대군이 들이닥칠 것이니 병란을 미리 피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많은 사람들이 성을 버리고 나간 뒤 열희를 보내 맹진(낙양 북동쪽 황하 나루)에 주둔시키고 낙양공격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예주자사 손흥이 성고(하남성 형양 사수진)에 진을 쳤다.  

 

낙양을 지키는 동진 관군장군 진우의 병력은 2천이 되지 못했다. 스스로 역적 왕돈과 함께 변을 일으키다 죽은 아버지의 치욕을 갚기 위해 아들 심경이 직접 낙양 수비에 참여하겠다고 나서자 동진 조정도 관군장군의 장사로 임명하여 허락했다. 심경은 직접 사람들을 설득하여 약 1천 여명의 병력을 만들어 전장 낙양으로 떠났다. 심경의 군대가 적은 병력으로도 훌륭하게 싸워 많은 전과를 내었지만 진우는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허창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가지고 심경을 낙양에 남겨두고 빠져 나왔다. 심경은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 나는 마음 속으로 목숨을 바칠 생각이었는데

  이제야말로 그 때를 얻었구나.“

진우는 이미 허창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한수를 따라 서쪽 신성(섬서성 안강)으로 달아났다. (AD364)

 

낙양태수 진우가 낙양을 포기했다는 소식을 들은 동진 사도 사마욱이 당도현에 있던 환온을 만나 함께 전연을 토벌할 것을 의논했다. 그러나 황제 애제 사마비가 25세 나이로 붕어함에 따라 계획을 수행하지 못했다. 사마비의 후사가 없었으므로 그의 동생 사마혁이 황위에 올랐는데 이 사람이 6년 뒤 환온에게 폐위되는 동진 폐제이다.  

 

AD365년 3월 전연의 태제 모용각과 오왕 모용수가 함께 낙양침공에 참여했다. 모용각이 제장들에게 말했다.

 

“ 경들은 항상 내가 공격에서 미적거린다고 불평했었는데

  지금 낙양성이 높지만 저쪽 군사들이 피폐하므로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나가 싸우라.“

 

성을 힘겹게 지키던 심경이 사로잡히고 낙양성은 함락되었다. 후환을 꺼려 심경을 죽였다. 

모용각은 심경을 죽인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고 부끄러워했다.

 

(71) 사마광의 심경 칭찬

 

사마광은 용맹한 동진 양무장군 심경에 대해 이렇게 칭찬했다.

 

“ 심경은 능력있는 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악함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죽음으로써 이를 씻어서 흉악한 반역의 집안이라는 오명을

  충성스럽고 의로운 집안으로 바꾸었습니다.

  <역>에서 말하기를 아버지의 허물을 없애는데 자신의 명예를 사용한다고 했고

  <채중의 명>에 이르기를 네가 앞 사람들의 허물을 덮는 것은 

  오로지 효성뿐이다 라고 했는데 

  그것은 심경과 같은 경우를 말함입니다.“  

   

낙양이 허물어지자 서쪽의 대국 전진의 부견은 군사를 거느리고 섬성(하남성 삼문협 서쪽)에 대기하면서 전연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방어했다. 전연에서는 모용축을 낙주자사, 모용수를 도독형양낙서연예옹익량진십주제군사 및 형주목으로 삼고 1만 군사를 주어 노양(하남성 노산)에 주둔시켰다. 이로써 전연의 서쪽 영토는 태원과 낙양과 남양을 남북으로 잇는 선으로 전진과 대치하게 되었다. 

 

(72) 전연의 명신 양무(AD365)

 

AD365년 4월 전연의 태위 봉혁이 고령으로 죽고 대신 사공 양무가 태위로 승진하고 사공 자리에는 황보진이 보임되었다. 양무는 전연의 네 황제를 섬겼는데 모용외로부터 모용준,모황, 모용준 및 모용위였다. 나이가 많아서 황제는 물론 모용각과 그 이하 모든 사람들이 양무에게 존경을 표시했다. 그러나 양무는 항상 겸손하기를 이 전보다 더 했고 자손들에게도 항상 경계할 것과 겸손할 것을 가르쳤으므로 법도를 어기는 일이 없었다.         

 

(73) 전연 태재 모용각의 죽음(AD367) 

 

새로운 황제 모용위가 어린 10세에 등극해서 이제 열여섯 살이 되었으니 정치를 관장하던 삼촌 태재 모용각과 종조부 모용평이 정치를 황제에게 돌려 드리고 개인 사저로 돌아가겠다고 간청했으나 모용위가 허락하지 않았다.(AD366) 

 

일 년 쯤 지난 AD367년 어느 날 모용각이 황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  폐하, 오왕 모용수의 재주는 신보다 열 배나 되지만

   먼저 돌아가신 황제께서 장유의 법칙에 따라 

   저를 오왕보다 먼저 세우셨습니다.   

   신이 죽거든 부디 나라를 들어 오왕을 곁에 두시고 

   그의 의견을 들으십시오.“

 

며칠 지나 모용각 병이 위독해지자 모용위기 친히 그의 집에 가서 후사에 관해 물었다. 모용각이 대답했다.

 

“ 신이 듣기로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훌륭한 사람을 천거하는 일보다 중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이 비록 판축(담장 쌓는 막노동 일)하는 곳에 있다 하더라도

  재상으로 삼을 수 있는 법인데

  하물며 아주 가까운 친척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오왕은 문무의 재주를 다 갖추어

  관중이나 소하 다음 가는 사람이오니 

  폐하께서 만약 큰 정치를 맡기신다면

  반드시 국가는 안전할 것이나 

  만약 등용치 않으신다면 동진이나 전진이 틈을 만들어 

  계책을 꾸밀 것입니다.“   

 

그 말을 마치자 곧바로 모용각이 숨을 거두었다. 이 때 그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40대 전반이었을 것이다.(동생 오왕 모용수 나이가 이 때 41세였음)   

 

(74) 전진의 전연의 틈을 엿봄(AD367)

 

전연의 모용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전진에서는 그 틈을 노렸다. 일단 부견에게 항복했던 흉노 좌현왕 조곡을 시켜서 전연에 조공을 하도록 지시했다. 조공하는 척하면서 전연의사정을 염탐하려는 의도였다. 사신으로는 곽변을 보냈다. 곽변이 전연의 수도에 도착한 뒤 사공 황보진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특별히 황보진을 만난 이유는 황보진의 형제들이 모두 전진에서 높은 벼슬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제가 원래 전진 사람입니다만 

  집안이 전진에게 몰살되어

  할 수 없이 조왕(조곡)에게 붙어서 살아왔습니다만 

  전진에서 크게 쓰이시는 그대의 형님과 조카들을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황보진이 크게 노하며 곽변을 꾸짖었다.

 

“ 나는 경계 밖의 사람(형제친척을 의미)들과 

  사귄 일이 없는데 어찌 이런 말을 나에게 하는 것이요?

  그대는 간사한 인물 같으니 

  인연을 가지고 나에게 부탁하려는 생각 아니요!“

 

모용위에게 곽변의 저의를 말하고 끝까지 추궁하여 엄단할 것을 종용했으나 모용평이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곽변은 서둘러 전연을 빠져나와 장안으로 돌아온 뒤 부견에게 이렇게 말했다. 

 

“ 전연의 조정과 정치를 보니 

  기강이 벗고 형편없이 무너져 있습니다.

  기회를 보고 변화를 아는 사람은 황보진 밖에 없었습니다.“

 

부견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 여섯 주(유주, 병주사주, 연주, 예주)를 장악한 전연에 

  제대로 된 신하가 어찌 황보진 하나 뿐 이겠는가! “

 

(75) 모용평의 실패(AD368)

 

태부 모용평은 모용황의 동생이고 모용준과 모용각의 숙부였으며 지금 황제 모용위에게는 작은 할아버지였다. 태재 모용각이 중병에 들었을 때 한 가지 걱정이 시기심 많은 삼촌 모용평이 인재를 잘못 골라 쓸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제 모용위의 서형 모용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  지금 형국이 남으로는 동진이,    

   서로는 전진이 틈을 보면서 국력을 쌓아 가고 있구나.

   무릇 국가 흥망과 성쇠는 오로지 재상의 능력에 달려있는데

   특히 대사마(모용각이 쥐고 있던) 자리는 

   6군을 전체적으로 통제하는 자리이므로 

   적당하지 않은 인물을 절대로 그 자리에 앉혀서는 안 될 것이다.

   내사 죽는다면 친소로 볼 때

   그대 모용장 아니면 모용충(冲)일 텐데

 

   비록 재주와 식견이 있다고 한 들 

   아직은 나이가 어려서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왕이 천부적으로 자질이 뛰어나고 지략도 세상을 뛰어넘을 것이므로

   그대들이 대사마 자리를 뒤로 미루었다가(사양하라는 의미) 

   오왕에게 줄 수만 있다면 그가  반드시 사해를 하나로 만들 것이다.“ 

   

이런 뜻을 삼촌 모용평에게도 여러 차례 당부하였다. 그러나 모용각이 죽자 모용씨의 대 원로 모용평은 모용각의 말을 듣지 않고 거기장군 모용충을 대사마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오왕 모용수에게는 시중, 거기장군의 자리를 주었다. 이제 확실히 권력의 중추는 모용각-모용수에서 모용평-모용위 형제에게로 바뀐 셈이다. 

 

[그림] 전연 및 후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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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19년09월25일 15시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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