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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16 고구려의 천적 전연(K)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09월12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19년09월10일 14시19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9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62) 전연과 동진의 양곡(동아)전투(AD359)

 

동진의 태산태수 제갈유가 수륙 2만 군사로 하남성 형양으로부터 황하를 타고 내려와 전연을 쳤다. 전연에서는 모용평과 장낙태수 부안이 보기 5만 군사로 동아(산동성 양곡 동북쪽)에서 제갈유와 맞붙었다. 제갈유의 군사가 대패했다.  

 

동진에서는 예주자사 사만과 서주자사 치담이 전연에 대비하고 있었다. 예주자사 사만이 오만하게 시나 읊고 사병들을 돌보지 않자 그의 형 사안이 걱정하면서 말했다.

 

“  너는 한 군대의 원수가 아니냐.

   의당 장수들과 사병들을 접대하면서 그들을 기쁘게 해야 할 것인데

   이처럼 오만방자한 행동을 하다니

   어떻게 큰일을 처리할 수가 있겠느냐?“

 

사만이 병졸들을 불러 모은 다음에 말 한마디 없이 뚫어지게 보다가 등 긁기를 쳐들면서 말했다.

 

“ 보아하니 제장들은 강병 같구먼 ! ”

 

그 소식을 들은 사안은 사만이 죽음을 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 대신 장졸들을 직접 만나서 후하게 대접하여 앞으로의 전투를 부탁했다. 사만이 군사를 이끌고 회하를 거슬러 낙양을 도우러 갔는데 치담은 병으로 치소가 있던 팽성(강소성 서주)로 돌아왔다. 사만은 치담이 물러난 까닭이 전연군사가 강해서 그런 것이라고 판단하고 자신의 군대를 뒤로 물려 후퇴했다. 이 때를 놓치지 않은 전연 군대가 습격하자 동진의 군대는 무너졌다. 동진군대 내에서 반란의 기미가 있었지만 명성 높은 사안을 꺼려 일으키지 못했다. 사만은 폐서인이 되었고 치담은 강등되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전연의 영토는 황하 이남의 하남 땅, 즉 영천(하남 우현), 허창, 박주(안휘성 호주) 및 서주(강소성 서주) 일대를 장악하게 되었다.

        

(63) 모용준의 와병과 후계논의(AD359)

 

AD359년 겨울 모용준이 병으로 눕게 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만 40 이었다. 바로 밑의동생 대사마 태원왕 모용각에게 말했다. 

 

“ 내 병은 반드시 나지 못하는 병이다.

  지금 두 방면(동진과 전진)이 평정되지 못했는데

  경무(모용위, 아홉살)는 아직 어리기만 하구나.

  국가의 어려움이 많은 데 

  송나라 선공(동생 목공에게 양위)처럼 

  너에게 양위하려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떤가?“

모용각이 펄쩍 뛰면서 말했다.

 

“ 태자가 비록 어리기는 하나 

  해로움을 이기고 치세를 이룰 군주이십니다.

  신이 어떻게 감히 끼어들겠습니까?“

 

모용준이 화를 내며 말했다.

 

“ 어떻게 형제 사이에 이런 수식의 말을 한단 말이냐.”

 

모용각이 말했다.

 

“ 신이 천하를 짊어질 자격이 있다면

  어찌 어린 조카 군주를 보필할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모용준이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말했다.

 

“ 너는 능히 주공이 될 수 있을 것이니

  내가 무슨 걱정을 하겠느냐.

  이적은 청렴하고 방정하며 충성스럽고 밝은 사람이니

  네가 그를 잘 대우해 주어라.“

 

그리고는 서둘러 요동에 가있던 동생 모용수를 업으로 불러 들였다.(AD359년 12월)  

 

(64) 모용준의 사망과 모용각의 리더십(AD360)

 

AD360년 정월 20일 모용준이 업에서 동진을 치기 위한 대군을 징집하여 대열병식을 올렸다. 대사마 모용각과 양무가 전군을 지휘하여 동진을 침입하려던 차에 모용준이 위독해졌다. 모용준은 서둘러 모용각, 양부, 모용평, 모여근을 불러들여 유조를 내렸다. 모용준은 그 다음날 죽었다. 모용위가 만 11세의 나이로 전연 2대 황제에 즉위했다.   

 

2월에 모용준의 처 가족혼씨를 태후로 올리고 태원왕 모용각이 태재가 되어 조정 정치를 도맡았으며 상용왕 모용평(모용준의 숙부)을 태부, 양무는 태보, 그리고 모여근이 태사가 되어 조정 정치에 참여하였다.   

 

모여근은 나이가 많아서 모용황 시절부터 공이 컸고 또 강직하고 지기를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자신이 보기에 모용위도 그렇지만 황실의 모용각이나 다른 모용씨들을 존대하는 마음이 엷었다. 그런 모여근이 난을 일으키려 모용각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 주상이 어리고 모후가 정치에 간여하니 

  전하께서 당연히 변고를 사전에 막아 스스로를 보전하셔야 합니다.  

  지금 나라를 세운 공은 오로지 전하의 몫인데

  형이 죽으면 동생이 잇는 것은 민족 대대로의 전통입니다.

  산릉의 장례작업이 끝나는 대로 

  주상을 폐위시키고 왕으로 강등시킨 후

  전하께서 높은 자리를 밟으시면

  위대한 전연의 무궁한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용각이 깜짝 놀라 모여근에게 말했다.

 

“ 공께서는 취하셨습니까?

  어찌 말씀하시는 것이 이렇게 패역합니까.

  나와 공이 함께 들어가서 황제의 유조를 받은 지가 언젠데

  이렇게 갑자기 이런 의논을 일으킨단 말입니까?“

 

모여근이 얼굴을 붉히며 사과하고 물러났다. 모용각이 동생 모용수에게 그 사실을 알리자 모용수는 즉각 모여근을 죽여야 한다고 권하였다. 모용각이 머리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 지금은 새로 대상을 당했네.

  지금 두 나라(동진과 전진)가 틈새를 엿보고 있는 터에 

  재보들이 서로 죽이면 먼 곳과 가까운 곳 사람들의 

  희망을 어그러뜨리는 일이 아니겠나.

  좀 참아야 할 것일세.“

 

비서감 황보진이 모용각에게 말했다.

 

“ 모여근이 원래 용렬한 사람이었는데 

  먼저 돌아가신 황제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 고명까지 받았습니다.

  소인이 잘 알지는 못하나 국가의 슬픈 일이 있고 부터는  

  더욱 더 교만해지니 장차 화란의근원이 될 것입니다.

  밝으신 공께서 주공의 자리에 계시면서 

  사직을 위해 깊이 도모하시고

  일찍 그를 처단해 주십시오.“

 

그러나 모용각은 또 다시 듣지 않았다. 자신의 위상이 위태롭다고 느낀 모여근은 태후 가족혼씨와 황제 모용위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 태재(모용각)과 태부(모용평)가 장차 불궤한 짓을 꾸미고 있습니다.

  청컨대 신이 금병을 이끌고 가서 저들을 죽이게 해 주십시오.“

 

태후 가족혼씨가 그러려고 할 참에 모용위가 (어머니 가족혼에게) 말했다..

 

“ 두 공은 짐과 매우 가깝고 현명하신 분들이요.

  그렇기에 돌아가신 선제께서 특별히 뽑아서 

  고아와 과부를 의탁하신 겁니다.

  반드시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인데 

  태사께서 난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님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마침내 중지하였다. 그러나 모여근은 끈질기게 고향을 그리는 가족혼태후와 모용위를 꼬드겼다.

 

“ 지금 천하는 쓸쓸하고 외부의 침략이 여럿이어서

  나라에 큰 걱정거리가 깊으니

  동쪽으로 돌아감만 못합니다.“

 

모용각이 그 소식을 듣고 급히 숙부 모용평을 찾아가서 모여근의처리방안에 관하여 의논을 했다. 모용각과 모용평은 우위장군 부안을 보내어 역모를 획책한 모여근과 그의 일족을 모두 죽이도록 했다. 나라가 대상을 치르는 가운데 황실 핵심 중신의 일족이 피살되면서 어수선하고 흉흉한 분위기가 조정을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모용각은 침착했고 걱정스런 기색을 전혀 띄지 않았으며 호위병도 딱 한 명만 데리고 다녔다. 어떤 사람이 엄하게 경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하자 모용각이 말했다.

 

“ 사람의 마음이 바야흐로 모두들 두려워하고 있는데

  마땅히 평안하고 진중하게 해야지

  어찌 사람들을 놀라게 하겠느냐.“

 

모용각은 비록 조정의 가장 큰 중책을 맡고 있었지만 

항상 예의바르고 조심조심했으며 매사 부지런하게 담당했다.   

마음을 비우고 선비들을 대했으며 훌륭하게 자문해 주었고

재주를 헤아려 임무를 주었으니

잘못을 저지르는 자들이 거의 없었고  

혹 잘못을 범하더라도 조용하게 다른 자리로 옮기게 하였으므로        

원래의 신분을 잃지를 않았을 뿐더러

이를 경계삼아 더욱 온전히 행하도록 은밀하게 격려를 한 셈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 당시 관리들 사이에 가장 부끄러운 욕이 ‘재공으로부터 관직을 옮겨 받은 사람’일 정도였다.     

 

모용준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동진 조정은 이 때야 말로 전연을 공격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오직 환온만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 모용각이 아직 살아있으니

  걱정거리는 더 커진 셈이오.“

 

태재 모용각은 동생 오왕 모용수를 사지절, 정남장군, 도독하남제군사, 연주목, 형주자사로 삼아 여대(하남성 상구시)에 진수하게 하고 손희를 병주자사로 고 부안을 호군장군으로 임명하여 2만 군사로 황하 이남의 지역을 순무한 뒤 회하를 거쳐 돌아오게 하였다. 이로써 전연은 확실히 이 지역을 영토로 확보한 셈이 되었다.  

 

(65) 이적의 억울한 죽음(AD360)

 

이적은 모용준이 죽을 때 태재 모용각에게 잘 대해 줄 것을 신신 당부했던 사람이었다. 모용각이 황제 모용위에게 이적을 우복야로 삼자고 건의를 올렸는데 황제가 그것을 거부했다.모용각은 그 후로도 여러 번 이적의 중용을 간청하였으나 황제가 거부하면서 말했다.

 

“ 만 가지 국사를 제가 다 숙부께 위임하였으니

  한 가지만이라도 저 모용위가 처리하게 해 주십시오.“

 

이적에게 모용위가 앙심을 품었던 것은 일 년 전 이적이 모용준에게 모용위는 사냥을 너무 좋아하고 음악에 묻혀 사는 것은 좀 고쳐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 뒤 불평을 가슴속에 깊이 묻어 둔 때문이었다. 황제는 이적을 내보내 장무(하북성 대성)태수로 강등시켰다. 이적은 스스로 깊은 걱정을 하다가 병사하고 말았다.   

 

[그림] 전연 및 후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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