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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16 고구려의 천적 전연(E)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08월01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7월31일 14시42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8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25) 석호의 삼차 전연 공격(AD340) 

 

강력한 영토를 자랑하는 후조의 석호는 자그마한 변방의 나라 전연을 멸망시키지 못한 것에 격분해 있었다. AD340년 세 번째로 전연을 공격했다. 이번에는 전에 없는 대군을 동원했다. 사주, 청주, 서주, 유주, 병주 및 옹주의 일곱 주에서 가호 당 사람을 차출했는데 다섯 명의 장정이 있는 가호에서는 세 명, 네 명의 장정이 있는 가호에서는 두 명을 뽑았다. 이렇게 해서 약 50만의 대군을 모았고 배를 1만 척 마련하고 군량미 천백만 곡을 낙안성(하북성 낙정현)으로 운반했다. 그리고 북경 주변의 1만 여 호를 남쪽 여러 주로 옮겨서 전연에 호응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지역 백성들의 말을 모두 동원했으며 거역하면 요참에 처했다. 이렇게 해서 말 약 4만여 필을 얻었다. 근래에 보기 드문 대군의 동원이었다. 40여 년 뒤인 AD389년 전진 부견이 동진을 치기 위해 일으킨 비수대전 때와 맞먹는 군사동원이다. 모용황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 석호가 지금 낙안성만 방어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분명히 계성(북경 서남쪽)방어는 치밀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저들을 속여서 그들이 방비하지 않은 뒷길로 습격해 들어가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10월 모용황은 제군을 이끌고 영옹새(거용관)으로부터 군사를 몰아서 계성을 습격했다. 후조의 유주자사 석광은 수만 명의 군사를 가지고서도 나오지 않고 버티었다. 모용황의 군사들은 계성 부근을 헤집고 다니면서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다. 모용황은 군사를 몰아서 계성 남쪽으로 침입해 들어가 고양(하북성 보정)까지 다다랐다. 석광은 나약하다고 죄를 물어 소환되었다. 

 

[그림] 후조의 전연 삼차공격(AD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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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전연의 사신 유상의 동진 설득(AD341) 

 

모용황이 동진 조정에 파견한 유상이 건강에 도착하였다. 황제 성제 사마연이 유상에게 모용황이 평안한지를 물었다. 유상이 잘 있으며 겸손한 마음으로 동진조정을 섬긴다고 말했다.그리고 모용황에게 대장군 및 연왕의 글이 새겨진 인새를 요청했다. 조정 신료들이 말했다.

 

“ 옛 고사를 보면 대장군이 변방에 있었던 적이 없었고

  또 한과 위 이래로 이성(異姓)은 왕으로 책봉된 적이 없었습니다.“     

유상이 발끈하며 나섰다.

 

“ 유연(전조)과 석륵(후조)이 천하를 혼란에 빠뜨려 

  장강 이북이 융족들의 온상이 되었습니다만

  그 잘난 중화의 공경들 중에서 어깨를 걷어붙이고 나서서

  창과 칼을 휘둘러 저 역적들을 깨뜨렸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직 모용황 장군의 부자만이 힘과 마음을 다하여 

  조정을 섬기면서 여러 차례 융적들을 섬멸하였습니다.

  공로가 매섭기 그지없는데

  저 북쪽의 땅을 애석하게 생각지 않으시고 

  왕읍으로 책봉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옛적 한 고조는 한신과 팽월에게 왕작을 주는 것을 아끼지 않았으므로

  황제의 대업을 이루지 않았습니까?  

  항우는 인새를 새겨놓고 차마 주지 않다가 

  끝내 위험이 닥치고 망하게 되었습니다.

  제 지극한 마음은 그 맡은 일을 잘 수행한 것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바라는 마음도 마음이지만

  충성을 다 바치는 의로운 나라(전연을 의미)를 조정이 멀리하여 

  모든 사람에게 

  조정을 사모하라고 권고할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 자못 아쉬울 뿐입니다.“       

 

동진의 상서 제갈회는 유상의 자형이었는데 이렇게 말했다.

 

“ 이적들이 서로 싸우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도 해가 될 것이 없습니다. 

  비록 모용황이 석호를 제거한다고 해도 

  또 다른 한 사람의 석호가 만들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어떻게 조정이 기뻐할 수 있겠소.“

 

유상이 나서서 말했다.

 

“ 과부라도 나라가 망하는 것을 어찌 걱정하지 않겠소.

  헌데 지금 동진 조정은 큰 위험에 직면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대는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 되어서 어찌 근심하는 마음이 

  그토록 없단 말이오. 

  미와 격의 공로가 없었다면 어찌 소강의 하나라 제사를 지켰겠으며

  환공과 문공의 승리가 없었다면 

  어찌 주나라가 좌임(오랑캐 복속)을 면할 수 있었겠소

  모용황 장군께서 창을 베고 아침을 기다리면서 

  흉적을 섬멸하는 것에 뜻을 두셨는데

  그대는 잘못되고 현혹하는 말로써 충신을 꺼리고 이간질하는 것이요.

  사해가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대와 같은 사람이 조정에 있어서 그런 것을

   내가 오늘에야 알았소.“

 

유상이 일 년 이상 건강에 머물렀지만 모용황의 왕작 수여 문제가 결정되지 못했다. 유상이 마침내 중상시 욱홍에게 말했다. 

 

“ 지금 석호는 여덟 주를 장악하고 장강과한수를 병탄하고자

  10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여러 이민족들이 석호를 숭상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오로지 모용황 장군 만이 석호를 맞서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데도 특별히 예우하지 않으신다면 

  천하 백성들은 마음을 옮겨갈 것이고 국체를 해체할 것입니다.

  공손연은 오나라에 한 치의 땅도 덧붙여주지 못했지만   

  주군은 그를 연왕으로 책봉하고 구석을 얹어 주었습니다.

  모용황 장군은 석호가 내린 후한 상과 요위대장군과 요서왕의 자리를 

  부정하고 불의하다고 하여 마다하고 받지 않았습니다. 

  헛된 명분 하나만으로 이름 하나를 아끼려고

  충성스럽고 순종하는 사람을 막고 억누른다면 어찌 장구한 

  사직의 계획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나간 다음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중상시 욱홍이 놀라 황제에게로 달려가서 왕작을 주자고 졸랐다. 황제가 마침내 그것을 허락했다. 모용황에게 사지절, 대장군, 도독하북제군사, 유주목, 대선우 및 연왕의 긴 칭호를 내리고 필요한 물건과 법전과 책서를 갖추어 내렸다. 세자 모용준에게는 가절, 안북장구느 동이교위, 좌현왕으로 삼고 상응하는 물자를 내렸다. 유상에게도 대군태수와 함께 임천향후와 원외산기상시라는 직책을 내렸지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당시 동진의 고관대작들은 나라형편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교만하고 사치하며 방종을 일삼으면서 서로를 추켜세워 주고 있었는데 유상은 이런 분위기야 말로 망국의 병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연회 자리에서 유상이 이렇게 말했다.

 

“ 사해가 전쟁과 노략질로 폐허가 된지 삼 세대가 지났고 

  종묘와 사직이 빈터가 되어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으니

  모든 신료들이 묘당에 참회하면서 근신해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강가에 모여 연회나 즐기면서 

  제멋대로 사치하고 방탕하고 있소.

  게다가 오만하고 방자한 것을 현명함으로 여기고

  공정하고 솔직한 말은 듣지 아니하고

  정벌하는 공로를 폄하하면서 조롱을 하고 있으니

  장차 어떻게 무엇으로 주군을 높이고 백성을 지키겠소?“ 

  

유상은 장차 후조 석호가 파촉의 성도를 기점으로 웅거하고 있는 성한의 주군 이수를 침탈 한 뒤에 동진으로 칼끝을 돌릴 것이라고 경계하면서 그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할 것을 주문하였다. 

 

(27) 전연의 수도 이전 : 극성(요녕성 금주)에서 용성(요녕성 조양)으로(AD342) 

 

동진 조정에서는 돌아가는 유상과 함께 곽희를 사절로 보내었는데 떠난 지 6개월이 지난 AD341년 7월에 극성으로 돌아왔다. 모용황은 유상의 공로를 높이 사서 동이호군, 영대장군부 장사로 임명하고 당국내사 양유는 좌사마, 이홍은 우사마로 삼았다. 

 

모용황이 아들 모용각을 도요장군으로 삼고서 평곽에 진수하도록 했다. 모용각이 평곽에 도착하고서 백성들을 위무하면서 새 이주민들을 진심으로 보살피자 민심이 크게 그를 따랐다.여러 차례 군사를 내어서 동쪽의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고구려가 모용각의 위용에 눌려 국경을 감히 넘어 올 생각을 못했다.

 

(28) 모용황의 고구려 공략(AD342)

 

AD342년 겨울 모용황은 동진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연왕의 직책을 내려 받자 수도를 극성(금주)에서 약 100KM 서북쪽에 있는 용성(조양)으로 옮겼다. 그리고 전국에 사면령을 내렸다. 서형 모용한이 이렇게 건의했다.

 

“ 지금 우문씨 들의 세력이 매우 강성해졌습니다.

  자리를 찬탈한 우문일두귀가 난폭하고 실정하므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위에 용렬하기 짝이 벗고 아둔하며 

  장수들 또한 형편없는 무리들입니다.

  방위시설이 엉망이고 군사들의 대오나 기강도 해이하기 짝이 없습니다.

  소신이 그 나라에 있으면서 지리를 제대로 새겨 두었습니다.

  비록 갈족(후조)에 의지하고 있지만 난이 일어날 때

  실제로 구원해 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거사 하시면 백번거사에 백번 승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고 

  그들 또한 우리를 훔쳐보려는 생각을 한 시도 버린 적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문씨를 친다면 다음이 자신들일 것이라고 알고 

  곧바로 우리 후미를 공격해 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슴 속과 뱃속의 걱정이오니 

  의당 이들부터 먼저 쳐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세력을 보건대 한 번 거병이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우문씨들은 오직 지키기만 하는 오랑캐들이니 

   이 번 공격을 틈타고 후미를 공격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먼저 고구려를 빼앗은 다음에 우문씨를 치고 나서

   군대가 강성하고 백성이 부요해 지고 나면

   중원 사해를 도모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모용황이 모용한의 대범한 계략에 찬사를 보냈다.

 

“ 훌륭한 말이요.”

 

장차 고구려를 치려고 했는데 가는 길은 두 길이었다. 하나는 북쪽으로 평원을 가로지르는 길이었고 다른 한 길은 남쪽 길로써 험하고 가파르면서 위험했다. 모두 들 북쪽 길로 가자고 했다. 모용한은 북쪽 길은 방비가 삼엄할 것이므로 남쪽 길로 가자고 했다. 다만 일부 군사를 나누어 북쪽으로 보내어 고구려군의 방어를 분산시키는 것은 좋은 계략이라고 말했다. 모용황도 모용한의 생각을 수용했다. 11월 모용황이 직접 강병 4만을 이끌고 남쪽 길로 나섰고 모용한과 모용패를 선봉으로 세웠다. 별도로 장사 왕우와 군사 1만 5천을 북쪽으로 보내 고구려로 향하게 했다.

 

고구려에서는 고구원왕이 고소가 5만 군사와 동생 고무를 파견하여 북쪽의 왕우 군사를 대적했다. 고소는 직접 노약한 병사를 이끌고 남쪽 길에서 막았다. 모용한이 먼저 도착하여 고소와 싸웠고 곧바로 모용황의 대군이 들이닥쳐 뒤를 받쳐 주었다. 과거 후조의 장수였던 좌상시 선우량이 자신을 살려 준(AD338년) 모용황에게 은혜를 갚겠다면서 몇 명의 기병을 이끌고 고구려 진영으로 쳐들어갔다. 선우량 무리가 고구려 진영을 크게 휘젓는 동안에 고구려군은 혼란에 빠졌고 사기도 많이 떨어졌다. 모용황의 군대가 고구려군을 무너뜨리고 진격하여 수도 환도성에 들어갔다.   

 

고구려 고국원왕 고소는 단기로 달아났고 모여니는 고소의 처와 어머니를 사로잡았다. 모용황이 군사를 되돌리려고 하자 장수 한수가 말렸다.

 

“ 고구려 땅은 반드시 수비부대를 세워 두셔야 합니다. 

  지금 주군이 도망쳤고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졌지만 

  우리가 군대를 물리고 나면 저들은 다시 비둘기처럼 모여들어

  다시 세력을 키울 것이니 장차 걱정거리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고소 아버지(미천왕)의 시체를 파헤쳐서 싣고 

  그 어미를 인질삼아 고소가 자신의 몸을 묶고서 항복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런 다음에 모두 풀어주는 정책이 가장 좋은 정책입니다.“ 

 

모용황은 한수의 말대로 미천왕의 묘를 발굴하여 시체를 싣고 모든 고구려 왕실 보물을 거두고 남녀 5만 호를 포로로 잡고서 환도성 궁실을 모두 불 태우고 파괴한 뒤 돌아갔다. <다음에 계속>

 

[그림] 전연 및 후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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