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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15 자만심으로 멸망한 틈새왕국, 남량(H)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06월21일 09시45분
  • 최종수정 2019년06월21일 09시42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10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37) 독발이록고 죽음과 동생 독발녹단에게 위임(AD402)

 

남량의 2대 군주 독발이록고가 갑자기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국가의 모든 권세를 동생 독발녹단에게 위임했다. 원래 그들의 아버지 남량의 창업주 독발사복건이 독발녹단을 매우 아끼면서 이렇게 말했다.

 

 “ 독발녹단의 식견과 지략은 너희들이 따라갈 바가 아니다.” 

  

이 말을 깊이 새겼던 여러 형제들은 큰 형 독발이록고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도 이미 팔짱만 낀 채 모든 국사를 독발녹단에게 맡겼었다. 이제 독발이록고가 죽자 아무런 이의 없이 독발녹단을 후계자로 옹립하고 남량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서진이 AD400년 1차로 멸망하고(걸복건귀 아들 걸복치반이 AD409년 다시 서진을 건국했다가 AD431년 그의 아들 걸복모말 때 2차로 멸망함) 서녕에 인질로 와있던 걸복치반이 도망가자 그의 처자를 모두 돌려보내주었던 사람도 독발녹단이었다. 

 

 (38) 후량 여륭이 후진에 항복 후량멸망(AD403)

 

다음해 AD403년 남량의 독발녹단과 북량의 주군 저거몽손이 고장의 여륭을 집요하게 공격해 들어왔다. 북량이나 후진이나 남량 모두에게 고장은 전략적 요충지였으므로 먼저 점령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곳이다. 여륭은 걱정에 가득찼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던 후진의 한 지략가가 요흥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 여륭은 조상들의 덕을 입어서 전략적 요충지 고장을 겨우 지키고 있습니다.

    곡식이 크게 부족하여 백성들이 거의 굶고 있지만 

    스스로 지켜내는 것을 보면 앞으로 다시 풍요로워지고 부흥하게 되면 

    결코 우리 땅이라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여기서 가는 길이 멀어도 

    비옥한 양주 땅을 지금 빼앗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요흥이 사신을 보내 여초를 조정에 들어오라고 했다. 여륭은 끝내 강토를 지키지 못할 것으로 여겨 후진조정이 자신을 영접하게 해 줄 것을 들어가는 여초에게 부탁하도록 했다. 요흥이 그 제안을 수락했다. 상서좌복야 제난과 진서장군 요힐과 좌현왕 걸복건귀와 진원장군 조요를 보내 보기병 4만 명을 이끌고 하서에서 여륭을 맞이했다. 남량왕 독발녹단은 창송(감숙성 무위시 남쪽)과 위안(감숙성 고랑현 동쪽)에 수비대를 보내 후진의 군대를 경계하도록 했다.

 

8월 여름 후진의 제난이 고장에 도착하자 여륭은 소거백마(素車白馬)로 길옆에서 이들을 맞이했다. 항복하는 여륭이 강하게 독촉하자 상서좌복야 제난이 고장을 괴롭히던 저거몽손을 공격했다. 저거몽손은 장막해를 보내 후진군을 방어했다. 마침내 북량의 저거몽손과 후진의 제난이 화해맹약을 맺고 저거몽손은 아우 저거나를 후진 조정에 보내 조공을 약속하도록 했다. 제난은 군사 3천명을 사마 왕상에게 배속시켜 고장에 주둔시키고 염송은 창송태수, 곽장은 반화태수로 임명한 다음 여륭의 온가족과 100만 호의 후량 주민을 이끌고 장안으로 들어왔다. 이로써 AD386년 여광에 의해 건국된 후량은 17년 만에 후진에 흡수되면서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요흥은 여륭에게 산기상시, 여초에게 안정태수를 임명하고 여륭의 신하들을 재주에 따라 발탁하여 선임했다.    

 

(39) 독발욕단이 연호를 버림(AD404)

 

후진은 평소에 남량의 거만한 태도를 못마땅해 하고 있던 차였으므로 사신 관상을 남량의 수도 낙도로 보내어 상황을 탐문하도록 했다. 요흥이 관상에게 말했다.

 

  “ 거기장군(독발녹단)은 공물을 바치고 스스로 번국이라고 하면서도

    멋대로 군대를 일으키고 성곽을 쌓으니

    이것이 신하의 도리인가?“

 

관상이 이렇게 대답했다.

 

  “ 왕공이 험난한 곳에 성을 쌓고 방어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이전의 모든 왕이나 공들이 하던 일입니다.

    거기장군이 머나먼 땅에 치우쳐 있으면서

    끝없는 오랑캐들을 효과적으로 막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성곽을 쌓는 것입니다.

    어찌 의심하려 드십니까?“

 

요흥이 관상의 말과 독발녹단의 생각이 모두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후진의 막강한 전력을 두 눈으로 확인한 독발녹단은 사신까지 보내어 자신을 염탐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스스로를 낮추어 연호 홍창을 버리고 후진의 연호 홍시를 채택하기로 하였다. 동시에 조정의 관직을 낮추거나 없애서 후진을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서 양주(후량의 수도 고장)를 통치하겠다고 요청했으나 요흥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40) 서량의 이고가 북량 압박 위해 천도(AD405) : 돈황에서 주천으로

 

후량이라는 막강한 나라가 멸망하면서 하서회랑 삼국에게는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일단 서쪽에 치우쳐있던 이고의 서량은 수도를 돈황에서 주천으로 옮겼다. 장액을 중심으로 웅거하고 있던 북량을 압박하자는 것이었다. 동시에 아들에게 정치를 제대로 하는 일곱 가지 방편을 적어서 가르쳤다.

 

  “ 첫째로,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은 마땅히 상벌을 신중하고 조심하여 내려야 한다.

    둘째로, 사물을 처리할 때 좋아하거나 미워함으로 처리하면 안 된다.

    셋째로, 충성스럽고 올바른 사람을 항상 가까이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

    넷째로, 주변 사람들이 권한을 남용하여 상벌을 오남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다섯째로, 비방이나 칭찬이 올라오더라도 마땅히 진실인지 아닌지 깊이 

             밝혀 들어야 한다.

    여섯째로, 송사나 옥사를 처리할 때에는 반드시 온화한 얼굴로 이치에 따라 

             처결해야 한다.

    일곱째로, 힘써서 자문하고 묻되 절대로 혼자서 오로지 결정하지 마라. 

 

    내가 통치한 지 5년이 되어 비록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는 못 하였으나 허물이

    있어 숨어서 사는 사람들을 포용하여 아침에는 원수도둑이었으나 저녁에는 가장 

    신임하는 신하가 되어 일을 맡겼고 누구에게든 빚을지는 일이 없었으며 

    항상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니 흠이 없었지만 

    처음에는 거부반발도 있었고 불평도 없지 않았다. 

    가까이 보면 부족하고 손해인 것 같으나 멀리 보면 마침내 

    여유가 있게 되었으니 역시 선조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음을 알겠다. “    

 

(41) 독발녹단의 천도 : 서녕에서 고장으로(AD406)

 

AD402년 독발녹단의 동생 독발문진이 허락도 없이 후진 장수 왕송충과 여륭이 지키고 있던 고장을 공격하여 왕송충을 사로잡은 일이 있었다. 요흥에게 부탁한 고장 통치를 요흥이 거절한 직후였다. 독발녹단은 크게 화를 내고 포로로 있던 왕송충을 장안으로 보내 진심이 아니었음을 요흥에게 사과했다.     

이고의 서량이 동쪽으로 수도를 옮겼으니 저거몽손의 북량도 마음대로 군사를 움직일 형편이 되지 못했다. 후진 또한 시벽에서 북위와의 한판 대전을 패한 참이라(AD403) 군사를 움직일 형편이 되지 못했다. 독발녹단은 이 때다 싶어서 요흥이 주기를 거부했던 고장을 접수하고 수도마저 서녕에서 고장으로 옮겼다. 허약했던 걸복건귀는 후량 대신 남량 독발오고의 압력을 받게 되었으므로 더욱 더 후진 조정에 의존하게 되었다. 걸복건귀는 그 해 겨울 장안으로 직접 들어가서 충성을 표시하였다. 후진 요흥은 언제 배반할지 모르는 걸복건귀를 장안에 억류하고 그의 세자 걸복치반을 행서이교위로 삼아서 아버지 대신 부족민들을 통치하게 하였다.

 

(42) 후진과 북위의 화해와 유발발의 대하 건국(AD407)  

 

북위 탁발규는 6년 전인 AD401년 겨울 고평을 공격할 때 사로잡힌 후진 장수 당소방을 돌려주었다. 적대관계를 풀자는 신호였다. 후진 요흥 또한 북위와 적대관계를 풀고 싶었기 때문에 좋은 말 1천 필 탁발규에게 보내면서 포로가 된 후진 장수 적백지도 돌려 줄 것을 요청했다. 탁발규가 허락했다. 요흥의 후진과 탁발규의 북위가 우호관계를 맺는 것을 절대로 용납 못할 사람이 유발발이었다. 왜냐하면 북위는 AD391년 아버지 유위진을 죽인 원수였기 때문이다. 

 

때마침 유연부락의 욱구려사륜이 종주국 북위에게 보내는 말 8천 필을 보냈는데 유발발은 가운데에서 말들을 약탈하고 욱구려사륜의 무리 3만명 마저 탈취하여 무리를 몰고 고평(고원)으로 갔다. 장인 몰혁간에게는 사냥한다고 거짓말 한 뒤 몰혁간을 죽이고 그의 무리마저도 병합해버렸다. 유발발은 마침내 후진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대하(大夏)라는 나라를 건국했다. 스스로 대하천왕 및 대선우라고 하면서 도읍을 대성, 즉 통만(지금의 산서성 유림)으로 정했다. 

 

(43) 하 유발발의 남침(AD407)

 

통만에서 대하를 건국한 유발발은 근방의 선비족 설천 등 3개 부락 함락하여 포로 약 만 여명을 흡수한 뒤 곧바로 후진의 북쪽 북경인 삼성을 침범해 들어갔다. 그 전투에서 후진 장군 양비와 요석생을 사로잡고 참수했다. 유발발의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 폐하께서 관중을 장악하시려면 의당 먼저 근본을 단단하게 한 다음

    사람들의 신임을 얻으셔야 합니다.

    고평(영하성 고원)은 땅이 넓고 산천이 함하며 견고하고 또 비옥하므로

    도읍으로 정할 만합니다. “

 

유발발이 말했다.

 

   “ 경등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소.

     나의 대업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어서 병사가 많지 않고

     또 요흥이 한 시대 영웅으로 굳게 버티고 있으니

     아직은 관중을 예기할 때가 아니오.

     내가 지금 한 성만을 지킨다면

     그는 반드시 대군을 몰아서 공략해 올 것인데

     그것은 수적으로 불리한 우리가 앉아서 멸망하는 길일뿐이요.

     용맹스런 기병을 날려서 그들이 예기치 않은 곳으로 나아가서

     앞으로 오면 뒤를 공격하고

     뒤로 오면 앞을 공격하여 

     그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한다면 

     적이 몇 백만 대군이라도 감당할 수가 있소.      

     10년이 되지 않아 영북(섬서성 예천 이북)과 하동(산서성 서남부)은

     모두 우리 소유가 될 것이요.

     요흥이 죽기를 기다리면

     못 난 그 아들(요홍)은 어리석고 나약하니  

     장안은 힘들이지 않고 내가 차지할 수가 있는 것이요.“

 

 유발발은 영북지역을 지속적으로 공략했다. 요흥이 탄식하며 말했다.

 

“ 내가 황아(요옹)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이 되었구나!”

 

(44) 유발발 청혼과 독발녹단의 거절과 심각한 패전 (AD407)

 

기세가 등등해진 유발발은 남량의 독발녹단에게 딸을 달라고 요청했다. 말하자면 연대하자는 뜻이었다. 독발녹단이 거절하자 유발발은 기병 2만 군사를 이끌고 지양(감숙성 난주시 북서쪽 영등)을 공격하여 1만여 명을 사상하고 3만여 가축을 약탈하고 돌아왔다. 독발녹단은 유발발을 반격할 계획을 세웠다. 부하 장수 초랑이 반대하고 나섰다.

 

  “ 유발발의 군대가 엄격하고 정돈이 잘 되어 있습니다.

    결코 아직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다른 장수 하련이 반발했다.

  “ 유발발 잔당은 유위진 패잔병의 무리일 뿐입니다.    

    어찌 그들을 피하여 약함을 드러냅니까?“

 

독발녹단은 하련의 말을 좇아 공격에 나섰다. 유발발은 독발녹단 군사의 움직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양무(감숙성 정원현) 골짜기에 병사 매복시켜 놓고 얼음 깨고 수레를 묻어 독발녹단 군사의 길을 막았다. 추격해 오는 독발녹단의 군사가 막힌 강 앞에서 허둥대는 틈을 타고 습격하여 크게 대패시켰다. 독발녹단의 장수 10 중  6-7명이 전사했고 독발녹단 홀로 도주했을 뿐 근위병은 거의 모두 체포되거나 잡혀 죽었다. 유발발은 죽은 시체를 쌓아 올려 촉루대라고 이름 붙였다. 유발발은 또 독발녹단을 지원해 온 후진 장군 장불생도 격파하고 군사 5천을 참수해버렸다. 독발녹단은 남은 주민을 몰아서 고장(감숙성 무위)으로 도망가 버렸다.(AD407)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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