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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 회항‘이 남긴 숙제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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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5년01월14일 20시52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6일 19시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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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 회항‘이 남긴 숙제들
‘땅콩 회항’은 갑을관계의 표상.
 
우리 사회 전반이 갑을관계로 되어 있다.  대등한 거래관계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어떤 관계에서든 한 쪽은 우월적 지위의 갑이고 상대방은 그에 얽매여 있는 을이다.  대기업은 갑이요 협력업체(납품업체, 하도급업체, 가맹점, 대리점 등)는 을이다.  대기업도 규제당국 앞에서는 을이다.  심지어 교수가 학생에게 스승이 아니라 갑으로 행세하기도 한다.
 
‘갑을’ 문제의 심각성은 2013년 남양유업의 막말 사건, 배상면주가 대리점주 자살사건 등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사람들의 비판과 시정 요구가 거세졌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항공의 일명 ‘땅콩 회항’이 발생하자 총수일가의 ‘슈퍼 갑질’에 대한 사람들의 공분이 터져 나오고 있다.

문제의 본질과 귀결을 올바로 인식해야.
 
갑을 문제가 큰 사회적 이슈가 되곤 하지만, 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과 논의는 표피적이다.  ‘땅콩 회항’에 대해 언론은 재벌 3세 개인의 일탈을 탓하거나, 대기업의 위기대응 미숙, 권위주의와 불통 등을 지적한다.  친재벌의 소위 자유시장주의자들은 침묵한다.  정치권은 여론 눈치만 살피며, 일각에서는 범법 기업인 가석방・사면에 미칠 영향을 걱정한다.
 
대개 좌파에서는 갑을 문제를 강자와 약자 간의 이익배분 문제로 보고, 직접적 정부규제를 통해 을의 이익을 보호할 것을 주장한다.  반면, 우파는 “협상력에 적절한 균형을 맞추는 것”은 필요하지만, 글로벌 경쟁 하에서 “갑의 잘못을 응징하려다 공생관계에 있는 을이 먼저 죽을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하지만 두 시각 모두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갑을관계는 이익 배분의 문제를 넘어서 시장경제의 기본 원칙과 규율에 관한 문제이며, 우리 경제의 효율성에 큰 함의를 갖는 이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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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은 갑의 ‘매 맞는 아내’
   
갑을관계의 핵심 문제는 갑이 거래상 지위를 남용해 사익을 취하고자 을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히는 것이다.  왜 을은 갑의 횡포를 감내하게 되나?  을이 갑에게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경쟁적인 시장에서 일회적・즉시적 거래를 할 때는 상대방에게 얽매일 일이 없고, 그래서 갑을관계도 없다.  예를 들어, 미혼 남녀는 상대방이 무례하면 다시 안 보면 그만이다.  다른 사람을 찾으면 된다.  그러니 데이트에서 상대방을 부당하게 대할 수 없다.
 
그러나 결혼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결혼은 무기한의 거래계약이다.  부부 각자는 상대방의 계약이행 약속에 기대어 가정에 인생을 투자한다.  이 투자는 오직 배우자에게만 가치를 갖는 ‘관계 전속적’(relation-specific) 투자다.  결혼이 깨지면 투자는 물거품이 된다.  대개 여성이 출산과 육아로 인해 더 많이 투자하며, 투자 가치를 지키고자 배우자의 부당행위를 더 많이 인내한다.  투자자산의 가치상실 때문에 거래단절이 어려울 때, 일방이 상대방을 학대할 수 있다.
 
이 기회주의적 행위의 위험은 이윤추구 사업자들 간의 거래에서 더욱 높다.  대개 대기업은 여러 협력업체와 거래하는 반면, 협력업체는 특정 대기업과의 거래를 위한 투자를 하고 전속 거래를 한다.  이는 즉시적・일회적 시장거래가 아니라 장기 거래관계다.  거래가 끊기면 협력업체는 자산의 가치를 잃게 되며, 그래서 ‘매 맞는 아내’가 되기 쉽다.
 
갑을관계에서 창의와 혁신은 없다.
 
장기 거래관계에서는 예측 불가의 상황변화에 맞춰 거래조건을 효율적으로 조정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이자 난관이다.  관련 제품의 수요감소, 비용증가, 경쟁격화, 생산차질 등이 발생하면, 당사자들이 협력해서 거래조건을 조정해나가야 비즈니스의 경제적 효율성을 유지・제고할 수 있다.  이런 조정은 당사자들이 상호 신뢰 위에서 협력할 때 가능하다.
 
하지만 대기업은 협력업체가 자기에게 얽매여 있음을 이용해 단가 후려치기 등 일방적으로 사익만 추구하는 ‘기회주의적 강탈’(opportunistic hold-up)을 할 수 있다.  이런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려 상황변화에 대응한 협력과 조정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예컨대, 을은 ‘파이’ 자체를 키울 투자나 연구개발 프로젝트가 있어도 하지 않을 것이다.  소위 ‘갑질’은 을에게 부당한 피해를 입힐 뿐만 아니라 경제적 효율성을 파괴하고 국부를 잠식하는 것이다.
 
‘땅콩 회항’에서 드러난 총수일가와 근로자 간의 관계도 이와 다를 바 없다.  고용관계는 장기 거래관계다.  근로자는 장기간에 걸쳐 ‘회사 전속적’(firm-specific) 투자를 한다.  회사에서 ‘잘리면’ 투자 가치가 날아가므로 ‘매 맞는 아내’로 살 수밖에 없다.  이런 근로자들에게 자발적 협력, 창의와 혁신은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이병남 LG인화원장의 말대로, “최악의 경영자는 조직구성원이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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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취적’ 갑을관계를 ‘협력적’ 대등관계로 전환해야 한다.   
 
작금의 지식기반 경제에서, ‘착취적’ 갑을관계를 ‘협력적’ 대등관계로 바꾸지 않으면, 창조경제와 지속가능 성장은 기대할 수 없다.  갑을관계 청산은 경제민주화의 핵심 과제며,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한대로 창조경제와 경제민주화는 불가분의 관계다.  ‘땅콩 회항’사건은 이 전환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사건의 본질과 근원을 생각해본다.
 
‘땅콩 회항’은 재벌기업들의 지배구조의 결함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다.  나쁜 기업지배구조는 지배주주의 전횡, 공권력과의 유착, 위법행위, 불투명 경영, 연고주의 등 많은 문제를 유발한다.  하지만 총수일가의 전횡을 통제해야 할 기업 내외의 견제장치들은 여전히 작동하지 않고 있다.
 
‘땅콩 회항’은 재벌 3세의 법(항공법, 항공안전 및 보안에 관한 법률 등)과 공권력에 대한 무시를 드러낸 사건이다.  공권력은 국민이 권익보호를 위해 국가에 위임한 것이나, 공권력은 재벌들의 영향력 앞에 엄정성을 상실했고, 국민이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근본적으로 갑을관계는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서 발생한다.  경제적 약자를 지켜주는 것은 시장경쟁과 기업책임법제다.  잠재적 거래상대방이 많고 사업자 평판이 중요한 경쟁적 시장에서는 ‘갑질’을 하기 어렵다.  상품, 노동, 요소시장에서의 독점적 기업이 갑이 되는 것이다.
 
을이 직접 갑의 부당행위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으면 ‘갑질’을 하기 어렵다.  하지만 집단소송제, 징벌적 손해배상제 등 기업책임법제가 미비하며, 그래서 기업과 경영자들은 거래상대방에게 책임을 지기보다 정부당국에게 소명하고 책임을 진다.  을이 정부당국의 가부장적 보호에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은 을의 지위가 아니라 정부당국의 갑 지위를 강화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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