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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비, 그들은 누구인가?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4년11월14일 22시19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9일 12시32분

작성자

  • 정현주
  • (사) 역사ㆍ여성ㆍ미래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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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조선의 왕비, 그들은 누구인가?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사극의 꽃은 왕비이다. 화려한 옷차림은 물론이고, 궁중내 여성들간의 암투와 권력 투쟁과 같은 것은 극을 재미있게 만드는 요인들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인자하고 후덕한 왕비 역할을 하는 배우들은 우아한 모습으로, 표독한 후궁 역할을 맡는 배우들은 개성이 뚜렷한 배우로 역량을 기를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왕비 외에 궁중에 살았던 왕실여성으로는 대왕대비, 왕대비, 대비, 세자빈, 후궁, 공주, 옹주가 있다. 왕비는 왕의 처이며, 국모로 불리운다. 남편이 죽고 아들이 왕이 되면 왕의 어머니로서 대비가 되고 할머니가 되면 대왕대비가 되었다. 빈(嬪)은 세자의 적실인 왕세자빈과 왕의 후궁에 사용한다. 조선시대 왕비나 대비, 후궁은 모두 임금 하나만 바라보며 사는 구중궁궐의 외로운 여인들이다. 그들의 삶은 어땠을까? 왕비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조선왕비, 25개 가문에서 배출
조선의 왕비는 어느 가문 출신인가? 조선 시대 왕비는 폐위된 왕인 연산군, 광해군과 사후 추존된 왕인 덕종, 진종의 왕비와 폐비까지 모두 합하면 모두 47명이었다. 왕비는 모두 25개 가문에서 배출되어 많은 가문에서 왕비가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청주 한씨가 5명의 왕비를 배출하였고, 여흥 민씨와 파평 윤씨가 각각 4명으로 그 뒤를 이었다. 그외 안동 김씨, 청송 심씨, 경주 김씨가 각각 3명의 왕비를 배출하였다.
이런 가문의 여성들은 조선에서 가장 큰 행사인 국왕과 왕세자의 혼례를 통해 왕비가 되었다. 왕실의 혼례를 가례(嘉禮)라 하였다. 왕비는 왕비후보자를 놓고 왕과 왕실 어른들이 직접 보고 선발하는 간택을 거쳐, 혼례의 본행사인 여섯 가지 예식 즉 육례(납채, 납징, 고기, 책비, 친영, 동뢰)를 통해 왕비가 된다.
왕의 여자들의 목표는 왕자를 생산하는 것이다. 대통 승계가 중요했던 만큼 왕비의 임신과 출산은 왕실의 최대 경사였다. 왕비들은 임신 7개월에 이르면 궁에는 산실청(産室廳)이 설치되어 임신과 출산을 관리하였다. 출산 이후 왕비 역할이 오히려 그리 크지 않아 유모와 보모가 있어 육아를 거의 전담하였다. 왕비의 왕자 생산에 대한 국가적 관심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27명의 왕 중 적장자(嫡長子)가 왕위에 오른 왕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등 7명에 불과했다. 장자 아니더라도 적자가 왕위에 오늘 경우도 10명이며, 선조, 인조, 고종은 방계가 왕위에 올랐고, 정조의 아버지는 서자였고, 영조는 서자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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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 있는 왕비의 처소인 교태전과 교태전 뒤뜰 아미산에 남아있는 화려한 굴뚝

기구한 왕비의 삶, 수렴청정하여 권력을 누리기도

조선의 왕비는 간택에서부터 잠자는 곳, 옷 입고, 먹는 것 등등에서 궁궐의 예의와 법도를 따라야 했다. 궁중 생활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인내가 필요했다. 외척을 척결한다고 하여 친정 집안이 화를 당하기도 하였고,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불행한 삶을 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성종의 후궁으로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있다. 숙종때 극적인 삶을 살았던 인현왕후 민비와 희빈 장씨가 잘 알려져 있다.

왕비 중 이런 어려움을 견디고, 권력을 손에 쥔 대비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선왕이 죽은 후, 즉위하는 왕이 어린 경우 왕의 할머니나 어머니가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수렴청정하는 대왕대비나 대비는 왕을 지명하고, 국왕과 함께 국가의 일을 처리했다. 왕은 상소나 징계를 직접 보고 받지만 대왕대비에게 알리고 논의했다. 역모나 군사적인 일과 같은 중요한 일은 대비가 직접 결정했다. 국정 운영의 중요한 몫은 대비가 담당했다. 조선에서 최초로 수렴청정이 시행된 것은 성종 대였다. 성종은 예종이 즉위 14개월 만에 승하하자 정희왕후(세조비)의 후사 지명으로 13세에 왕이 되었다. 이후 7차례, 6명의 대비가 수렴청정을 했다.

 

* 이 글은 사단법인 역사․여성․미래가 여성가족부의 예산지원으로 실시한 ‘여성사강사양성과정’의 제7강: 조선 왕실 여성이야기, 한희숙(숙명여자대학교)를 정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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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4년11월14일 22시19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9일 12시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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