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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진(問津): 진정한 융합의 길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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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4년10월07일 22시37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9일 13시51분

작성자

  • 이덕환
  •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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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진(問津): 진정한 융합의 길

융합의 열기가 뜨겁다. 우리에게 화려한 미래를 보장해줄 것이라는 창조경제도 과학기술과 ICT의 융합으로 규정된다. 어렵사리 2만 달러의 고지에 오른 우리가 이제 3만 달러의 꿈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융합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융합을 외면하면 당장이라도 떨어져버릴 것처럼 야단들이다.

​물론 느닷없이 밀려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열기와 광풍(狂風)이 우리에게 결코 낯선 것은 아니다. 20여 년 전에는 무한 경쟁을 앞세운 ‘신자유주의’와 낯선 글로벌 스탠다드를 강요하는 ‘세계화’가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궜고, 지난 정부에서는 어설픈 녹색 바람이 우리의 혼을 앗아갈 정도로 뜨거웠다. 그리고 이제는 융합이다.

 

융합(convergence)은 2002년 미국의 과학재단(NSF)이 ‘NBIC(Nano-Bio-Info-Cogno) 보고서’를 내놓으면서 세계적인 대세로 자리를 잡았다. NBIC 융합은 인류 문화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전혀 새로운 연구와 자연과학·사회과학·인문학이 긴밀하게 연결된 지식의 통합을 추구한다. NBIC 융합에는 글로벌 네트워크로 연결된 인류가 융합 기술을 기반으로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유토피아적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의 시대를 열어보겠다는 야심찬 꿈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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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융합(融合)은 ‘녹여서 합친다’는 뜻이다. 서로 다른 둘을 뜨겁게 녹여서 서로 구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합쳐진 하나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휴대전화와 컴퓨터를 하나로 합쳐서 만든 ‘스마트폰’이 융합의 가장 성공 사례이고, 스마트폰을 만든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융합을 실천한 기업가로 소개된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에도 이질적인 기능을 하나의 제품으로 통합한 제품이 있었다.

 대학을 중퇴해버린 잡스를 문학·역사·철학으로 대표되는 인문학의 가치를 분명하게 인식한 인문학자나 컴퓨터에 정통한 과학기술자였다고 보기도 어렵다. 더욱이 잡스가 강조했던 ‘liberal arts’(교양학)가 사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인문학이 아니라는 사실도 무시되고 있다. 잡스의 ‘인문학’은 GUI(graphic user interface)를 활용해서 사용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사용되는 독특한 사고방식을 뜻한다. 개념조차 정확하게 정립되지 못한 우리의 융합이 여전히 어설픈 도구적 수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융합의 열기에 빠져버린 소비자들이 ‘전기전자 + 화학 + IT + 신소재 = 자동차’라는 광고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자동차 산업의 미래를 위해서는 전기전자, 화학, IT, 신소재와 같은 다양한 분야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자동차를 전기전자, 화학, IT, 신소재의 융합적 산물이라고 우긴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아무리 세상이 달라져도 자동차의 핵심은 여전히 기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간과되었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정체성이 사라지면 융합의 의미도 함께 사라져버린다.

​그렇다고 기계가 우뚝 서고, 전기전자, 화학, IT, 신소재가 장식적 조역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미국의 NBIC의 경우처럼 진정한 융합에는 거시적인 목표도 필요하고, 현실적인 수단도 필요하다. 오로지 융합 그 자체만을 위한 융합에서는 의미를 찾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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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합의 대세를 거스르기는 어렵다. 우리도 융합을 통해 새로운 도약을 시도해야 한다. 융합으로 놀라운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가능성은 누구나 인정한다.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궈 주었던 ‘통섭’(統攝)이 융합에 대한 사회적 기대치를 한껏 높여 놓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통섭의 진정한 성공 사례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통섭이 생물학 중심의 일방적인 흡수통일을 목표로 한다는 오해도 통섭의 확산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문과·이과 구분’이라는 일제의 잔재가 더욱 심각한 장애 요인이었다. 인간의 의미와 가치를 연구한다는 문과 출신의 인문학자들은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과학의 진정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경제적 가치 창출을 위한 기술 개발이 과학기술의 핵심이라고 믿는 이과 출신의 과학자들은 인간의 깊은 고뇌에 대한 관심을 상실해버렸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문과와 이과 출신이 넘쳐나는 우리에게 융합은 결코 쉬운 과제일 수가 없다. 적극적인 융합은커녕 평화로운 공존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에게 ‘나루터를 묻는다’는 ‘문진’(問津)은 진정한 융합을 실천하는 새로운 방법론이 될 수 있다. 본래 ‘문진’은 「논어」의 ‘미자’(微子)편에 나오는 말이다. 어느 날 길을 가던 공자가 함께 가던 제자 자로에게 ‘나루터가 어디인지 물어보고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루터는 단순히 강을 건너가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 아니다. 나루터는 다양한 목적지로 향하는 출발지이기도 하다. 나루터를 통하면 세상 어디라도 찾아갈 수 있다. 나루터는 무한한 확장성을 함축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나루터는 그동안의 여정을 점검하고 새로운 출발을 준비를 하는 중간 기착지이도 하다. 그렇다고 나루터가 단순한 쉼터의 역할만 하는 곳은 아니다. 나루터는 전혀 다른 출발지를 떠나 다양한 능력과 전문성을 배경으로 나름대로의 목표를 향해 각자의 목적지를 찾아가는 여행객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나루터는 다양한 경험과 배경을 가진 여행객들이 적극적으로 소통・교류하고,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각자 자신의 목표를 점검하고 다듬는 곳이기도 하다. 나루터는 다양한 경험과 전문성의 융합을 함축적으로 상징하는 곳이다. 융합을 요구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것이 바로 나루터를 찾는 공자의 지혜다.

 

나루터는 기본적으로 열린 공간을 추구한다. 은밀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높은 담을 쌓는 도시의 폐쇄적 독립성으로는 나루터를 찾는 여행객을 맞이할 수 없다. 그렇다고 낯선 여행객들이 활개를 치는 나루터에서는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도 안심할 수 있는 한적하고 평화로운 농촌 마을의 개방성을 함부로 흉내 내기도 어렵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좋은 담이 좋은 이웃을 만든다’고 했다. 나루터는 여행객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독립성도 제공해줘야 하지만, 동시에 다양한 여행객들과 자유롭게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개방성도 보장해줘야만 한다.

오늘날 우리가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융합에 유난히 뜨겁게 열광하는 이유가 있다. 혈연・지연・학연도 모자라 이념・계층・세대・성별・전문성을 핑계로 만들어진 숨 막히는 칸막이 문화에서 비롯된 피로감 때문이다. 그런 우리에게 독립성과 개방성을 동시에 보장하는 좋은 담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나루터는 무한한 확장성을 가진 융합의 상징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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