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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쌀’이 익어가고 있다 -쌀 관세화, 협상이지 정답풀기가 아니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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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4년09월22일 21시31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9일 14시20분

작성자

  • 최양부
  • 전 대통령 농림해양수석비서관

메타정보

  • 32

본문

‘분노의 쌀’이 익어가고 있다  -쌀 관세화, 협상이지 정답풀기가 아니다.

2014년 가을과 쌀 관세화

 

2014년 가을 들녘에는 쌀 관세화 문제로 20년 만에 또다시 ‘분노의 쌀’이 익어가고 있다. 관세화란 특별법 등의 수입규제조치로 관세만으로 수입이 자유롭지 못한 농산물을 예외 없이 모든 나라(개도국은 제외)가 일시에 국내외 가격차(‘관세상당치’)만큼 관세를 매겨 시장을 개방하고 수입을 자유화하자는 것으로 GATT UR농업무역협상(1986-1994)(이하 ‘UR협상’이라 칭함)의 핵심의제다. 관세화는 GATT체제 출범이후 줄 곳 자유무역규범의 예외 품목으로 분류되어온 농산물을 GATT체제로 끌어들이는 (Bring Agriculture into GATT!) 전면적인 농산물 수입자유화, 시장개방화의 또 다른 이름이다. 쌀 관세화협상의 핵심과제는 관세화를 위한 관세화율 등 관세화 조건을 정하는 문제다. 그런데 관새화율 등은 협상 상대국들 간의 ‘협상결과’로 정해지는 것이지 교과서에 나온 공식에 따른 ‘정답풀기’가 아니다. 한가로운 국제회의나 학술논쟁도 아니다. 관세화율을 정하는 문제는 그 자체가 무역협상이다. 

 

WTO 무역협상은 ‘시장 뺏기 전쟁’ 

 

1990년 8월 어느 날, 우리 농업과 농촌과 농민의 장래를 위해 UR협상 정부대표로 일해 달라는 당시 강보성 농수산부장관의 간청을 받고 UR협상에 뛰어든 이후 UR협상이 마무리되는 1994년까지 5년여 동안 나는 협상현장에서 실전경험을 쌓으며 협상전략과 전술을 몸으로 읽혔다. 그 때 터득한 것이 GATT(WTO)무역협상은 국익을 건 ‘무역전쟁’이라는 사실이다. 총칼대신 세치 혀를 앞세운 ‘시장(땅) 뺏기 전쟁’이라는 현실이다. 그리고 협상은 이해당사국들 간의 밀당과 흥정, 압박과 위협 등의 허세(bluff) 부리기 등 모든 전략과 전술을 동원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고도의 심리전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UR협상과 같이 100여개가 넘는 국가가 참여하는 다자간 무역협상은 상대적으로 무역량이 많은 몇몇 협상주도국들이 협상을 이끌며 양자협상을 통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고 이를 다자화 시킨다. 그래서 UR협상에서 모든 결론은 주요국들 간의 합의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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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년이나 지난 옛 이야기이지만 ‘협’도 몰랐던 나에게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협상에 임하는 외국 정부대표들의 협상자세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독자적인 입장없이 자국 내 이해관계단체의 입장을 지키고 대변하기위해 협상에 나선 대리인이라고 했다. 협상대표들은 협상진행상황을 이해관계단체에게 수시로 브리핑하고 그들의 자문을 받아가며 협상에 임한다.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이해관계단체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법률적으로 잘 대변하기 위해 자문변호사를 선임하여 정부대표들과 협의 하도록 하며 그들은 시작부터 끝까지 협상에 관여한다. 어떻게 보면 정부대표는 협상상대국과 협상(‘대외협상’)하면서 동시에 자국의 이해관계단체들과도 협상(‘대내협상’)하는 형국이다. 그리고 그들은 협상 상대국에 나가있는 자국의 대사관이나 무역관을 통해 상대국 협상동향을 모니터 하고 상대국의 주요 언론 등에 나온 협상관련 기사 등을 수집 자국어로 변역한다. 그들은 상대국의 법률자문회사등과 용역계약을 맺고 ‘입 없는 변호사’를 고용 상대국의 입장에 대한 크고 작은 정보를 지속적으로 조사 보고받기도 한다.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협상력이며 이것은 자국 내 이해관계단체와의 긴밀한 소통과 협력, 그리고 상대국의 수를 읽기 위한 사전 정보수집에 대한 투자와 노력의 산물이다. 당시 무역협상을 처음 경험하는 나에게 정부대표와 이해단체간의 이해와 협력이 놀라웠고, 그것을 가능하게 상호신뢰와 정부대표들의 대리인으로서 자세와 자신들의 이익관철을 위해 자문변호사를 선임 협상을 지원하는 이해관계단체들의 성숙된 협상자세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우리의 쌀 관세화협상을 보면 20년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 정부는 여전히 협상은 정부가 하는 것이고 정부가 알아서 잘 해 줄 테니 정부를 믿고 따라오라는 식의 권위주의적이고 고압적인 협상자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협상비밀주의’에 빠져 협상관련 정보공유를 거부하고 있고, 이 때문에 쌀 생산단체들은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정부와 갈등을 빚고 있다. 무역전쟁이란 협상장에 나가기도 전에 우리는 우리끼리 소모전을 치르느라 진을 빼고 있는 것이다. 

 

예외없는 협상은 없다 

 

UR협상타결 직전인 1993년 초까지 만해도 ‘관세화에 예외는 없다’는 것이 UR협상장의 일반적인 분위기였지만 우리와 일본은 ‘2인3각 경기’를 하듯 정보를 공유하며 끈질기고 집요하게 협상의 막바지까지 쌀 관세화 예외를 요구했다. 당시 국내외 언론들은 UR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하나같이 한국과 일본의 요구는 UR협상의 ‘예외없는 관세화’란 대원칙을 무시하고 대세를 거스르는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나는 ‘협상은 협상일 뿐이다’라는 전략 전술적 판단에 따라 우리요구를 협상 막바지 단계까지 밀고 나갔다. ‘모든 것이 합의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합의된 것은 없다(Nothing is agreed until everything is agreed.)' 라는 협상의 ’황금률‘ 을 믿으며 나는 쌀에 대한 관세화 특례조치가 UR협상 막바지 단계에서 이루어 질수도 있다는 1%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매달렸다. 

 

관세화란 원칙수용은 피할 수 없는 대세라는 것을 알았고 이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알았지만 이것을 조기에 수용하면 우리는 관세화조건협상(유예기간, 감축율, 최소수입의무량 등)에서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협상의 막바지 단계에서 2인3각의 끈을 풀고 관세화원칙을 수용하면서 관세화조건협상에서 일본보다 더 나은 특례조치를 이끌어 내야 한다고 전술적 판단을 했다. 이를 위해 협상주도국인 미국을 상대로 워싱턴을 찾아가 UR협상 핵심관계자들을 만나 물밑접촉을 갖고 우리와 일본의 입장 차이를 설명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막바지 단계에서 대통령이 미국대통령과 직접 협상에 나설 것을 정부에 건의했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UR협상이 벌어지는 제네바와 정부의 협상 동향을 국내의 농민단체들에게 알리고 그들이 어떻게 대응해야하는 지에 대해 평소 농민단체와 교분을 맺고 있는 모교수를 창구로 은밀하게(?) 만나 협상동향을 전하고 농민단체가 해야 할 일들을 주문하는 등 생산자단체와 간접적으로 소통했다. 결과는 기대이상이었다. 일본이 먼저 끈을 푸는 바람에 우리는 일본과 달리 개도국지위를 인정받아 일단 협상의 대원칙인 쌀 관세화조치를 수용하되 그 적용시기를 10년간 유예시키고 유예기간 중 최소의무수입량도 연간 국내 쌀 소비량의 1%에서 4%까지 늘리는 협상에 성공했다. 1993년 12월 김영삼대통령이 최종적으로 나서 미국 클린턴대통령과 전화협상을 갖고 쌀 관세화 특례조치협상의 대미를 장식 쌀 수입을 최소화 했다. ‘한국은 최고의 쌀 협상을 했다’는 당시의 GATT협상장의 분위기와는 달리 쌀시장개방을 막지 못한 정치적 책임 때문에 김영삼 대통령은 TV앞에 나와 국민에게 사과했고, 국무총리와 관계 장관은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10년 뒤인 2004년 노무현 정부는 정치적 부담을 피해 관세화보다는 관세화 10년 재연장을 선택하고 관세화실시기를 10년 뒤인 2014년으로 미뤘다. 그 결과 우리 쌀 산업은 갈수록 많아지는 최소의무수입량의 중압 때문에 중병을 앓아왔다. 

 

쌀 관세화율, 협상이지 정답풀기가 아니다 

 

2014년 쌀 관세화 여부를 결정해야 할 입장이 된 박근혜 정부는 더 이상의 쌀 관세화유예기간 연장은 국내 쌀 산업에 악영향을 줄 뿐이고 판단 지난 7월 18일 쌀 관세화방침을 정하고 관세화율 협상에 나서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농식품부 장관은 언론을 상대로 관세화율 산정은 WTO의 정해진 방식에 따르면 500% 수준이 되겠지만 300%까지만 되어도 수용이 가능할 것이라며 협상을 시작하기 전부터 우리 협상카드를 꺼내 협상상대국에 보이는 협상의 미숙함을 보였다. 어떤 전문가는 공식에 대입해 보니 504%가 된다며 협상에 대한 기대 목표치를 높혔고, 정부는 지난 9월 18일 당정협의를 갖고 쌀 관세화율을 513%로 정했다며 이를 WTO에 통보하고 협상에 나서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언론을 통해 전해진 협상상대국인 미국과 중국은 150-200%선을 넘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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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관세화율이 최종적으로 몇%로 결판날지 현재로서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숫자들만 놓고 보면 150%에서 500%사이, 더 좁힌다면 200%에서 300%사이 어디로 결정 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나의 이런 추측이 틀리길 바라지만 만에 하나 그렇게 정해진다면 500%가 모범답안이라며 한껏 기대치를 높힌 정부는 협상실패라는 농민적 저항에 쌀 생산농민들은 분노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정치적 책임은 장관이나 국무총리, 대통령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앞으로 남은 협상에서 나마 정부는 대외적으로는 비밀주의를 유지하되 대내적으로는 협상 관련 모든 정보를 쌀 생산자단체와 공유하면서 그들과 긴밀히 협의하는 개방적이고 투명한 협상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제부러라도 우리도 관습에 젖은 관료적 협상자세에서 벗어나 성숙한 협상문화를 만들어 갈 때가 되었다. 가을 들녘에 분노가 아닌‘기쁨의 쌀’이 익어가기만을 간절히 소망한다. 그 모든 책임은 정부와 청와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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