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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책의 실패가 잦은 이유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4년08월25일 23시58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9일 15시13분

작성자

  • 김경근
  • 고려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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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교육정책의 실패가 잦은 이유

 교육열이 유별난 한국인에게 교육정책은 초미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다. 기본적으로 한국인의 교육열은 공리적 가족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때문에 자녀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교육정책이 궁극적으로는 가족의 운명도 일정 정도 좌우하게 될 것으로 믿는 국민들이 꽤 있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유리한 교육정책은 드물다. 한 쪽이 혜택을 입으면 다른 한 쪽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로 인해 교육정책이 발표될 때마다 이해를 달리하는 집단 간에 첨예한 갈등과 대립이 발생하곤 한다. 계층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뜨거운 교육열 때문에 이 같은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기 쉽지 않은 게 우리의 현실이다. 

상술한 어려움도 작용했겠지만 우리 교육정책은 실패로 귀결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실패로 끝난 교육정책을 대하는 국민들의 태도도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하지만 실패한 교육정책이 남기는 부정적 유산은 결코 간단치 않고 청산하는 일 또한 쉽지 않다. 따라서 정책실패의 배경이나 원인을 심도 있게 성찰하여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교육정책이 자주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몇 가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문제의 본질에 대한 표피적 이해에 따른 잘못된 처방     

 참여정부 이래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정책당국은 사교육비 경감에 골몰했고, 이를 겨냥하여 다양한 정책들을 쏟아낸 바 있다. 과중한 사교육비 부담의 폐해를 생각할 때 당연한 조치였지만, 사교육비 지출은 별로 줄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무엇보다도 사교육 발호의 근인(根因)에 대한 이해와 진단에 오류가 있었다. 이 때문에 처방도 잘못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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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교육이 기승을 부리는 것은 패자부활의 기회조차 갖기 어려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어떻게든 남보다 앞서가야 한다는 절박함이 일상적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잘 가르치기 경쟁을 유도하거나 대안적 학습수단을 제공하여 전체적으로 학생들의 성적을 끌어올리는 것은 그 자체로는 바람직할지라도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략으로서의 타당성은 약하다. 학생들 간의 경쟁을 격화시켜 낙오와 실패에 대한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킬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고 나름대로 성취를 거둔 학생들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응분의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주는 방향에서 문제 해결의 단초를 찾아야 한다. 

 

 기실 그간 교육문제를 해결하려는 숱한 시도들이 대부분 무위로 끝났던 것은 문제의 근인에 대한 잘못된 진단에 근거하여 대증요법 차원의 처방을 내리는 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사교육 발호처럼 사회적 난제로 남아 있는 교육문제일수록 단순히 학교교육의 실패에 기인하고 있다기보다는 사회의 기회구조 및 관행에 의해 촉발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이런 교육문제를 교육제도나 교육정책에만 메스를 가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소기의 성과를 얻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는 마치 심장기능의 이상 때문에 격심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가 머리에만 찜질을 하고 침도 맞으면서 통증이 해소되지 않음을 호소하는 것과 똑같은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일수록 긴 호흡으로 사안의 본질을 적확하게 파악하여 근본적인 처방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경주할 필요가 있다.  

 

정책대상 집단의 특질에 대한 이해의 부족   

 한국인의 교육열을 묘사할 때 ‘유례가 없는’이란 수식어를 자주 사용한다. 교육열이 그만큼 뜨겁고 절박함을 담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런 교육열 때문에 자녀의 교육문제에 관한 한 상황윤리가 만연해 있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우리 사회의 최고 엘리트 집단을 대상으로 실시되는 인사청문회에서 자녀교육을 위한 위장전입으로부터 자유로운 후보자가 별로 많지 않았다. 요즘은 위장전입 자체를 결격 사유로 여기지 않는 분위기가 얼추 자리를 잡은 게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받는다. 지도층이 이러할지니, 일반 국민들이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것을 크게 나무라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앞서 밝혔지만 한국인의 교육열은 기본적으로 자녀의 입신출세와 가문의 번창을 지향하는 공리적 가족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이 같은 목적을 달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교육적 시도는 효용성이 낮아 학부모들로부터 거부되거나 배척될 수밖에 없다. 다양한 교육수요의 충족을 위해 도입된 자사고가 원래의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채 입시위주 교육의 첨병이라는 비난과 함께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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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사고 학부모들은 자녀를 선호하는 대학에 진학시키는 데 조금이라도 유리한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집단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학부모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자사고가 유용한 지렛대가 될 수 있다는 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 이 같은 자사고 학부모들의 욕구와 믿음은 자녀를 특목고에 보낸 학부모들에 비해 한층 더 간절하고 절박할 것이기에 절충이나 타협의 여지도 별로 없다고 보아야 한다. 만일 상황이 이러하다면 자사고에서 다양한 교육과정을 운영하며 지덕체 전반을 함양할 수 있는 교육을 실시하는 것은 분에 넘친 짓이자 사치로 치부될 수밖에 없고, 오로지 입시위주 교육만 남게 된다. 이것이 작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렇게 볼 때 교육정책의 수립이나 시행에 관여하고 있는 공무원이나 전문가들은  한국인과 한국사회의 특질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갖추는 데 각별한 관심을 쏟을 필요가 있다. 다른 어느 사회보다도 한국에서는 “강남의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타당성을 갖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울러 교육열은 지극히 보편적이고 본능적인 동기체제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억제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학부모들이 자녀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책을 무력화시키고 교묘하게 허점을 파고들 가능성에 대해서도 치밀하게 대비할 수 있다. 

 

성과에 대한 조급증과 정치 논리의 개입    

 한국사회에 만연한 ‘빨리빨리’ 문화는 교육 영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에 따라 교육정책도 충분한 공감대 형성이나 설득의 과정을 결여한 채 시행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빨리 성과를 내겠다는 조급증 때문에 비싼 대가를 치르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교육은 속성상 과실을 맺기까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며 그 과실이 가시적이지 않은 경우도 흔하다. 따라서 씨는 자신이 뿌리지만 그 과실은 후대에 다른 누군가가 거두어도 무방하다는 마음가짐으로 정책을 수립해야 국가와 사회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사례를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게 국내 현실이다. 

 

 일을 더욱 꼬이게 만드는 것은 교육정책을 담당하는 수장이 너무 자주 바뀐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교육에 대한 위정자들의 무지도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취임하면서 적어도 교육부장관만은 자신과 임기를 함께할 것이라 언명했던 노무현 대통령조차도 평균 9.7개월에 한 번씩 교육부 수장을 새로 임명한 바 있다. 다른 대통령들의 경우에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장기적 안목에서 교육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성공적 공교육의 전범으로 핀란드 교육을 자주 언급한다. 그런데 핀란드 공교육이 이처럼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에르끼 아호가 1971년부터 근 20년에 걸쳐 국가교육청장을 지내며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점진적으로 교육개혁을 주도했기에 가능했다. 그가 국가교육청장을 지내는 동안에 정권이 수없이 교체되고 교육부장관의 얼굴도 많이 바뀌었지만, 그는 정치권의 합의에 힘입어 오로지 국가와 사회의 미래만을 염두에 두고 교육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오늘날 모두가 부러워하는 핀란드 교육의 골간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교육정책이 정치적 고려대상이 되면 그 수명이 짧아질 수밖에 없다.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 교육정책부터 손대는 일이 빈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백년대계가 되어야 할 교육정책이 주기적으로 이런 운명에 노출된다는 것은 국가와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교육정책의 안정성, 중립성,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는 독립기구의 설치를 통해 교육정책이 정치 논리에 휘둘리어 조변석개로 바뀌는 일이 없도록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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