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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신(良臣)을 찾습니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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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4년07월20일 20시00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9일 16시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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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신(良臣)을 찾습니다
당(唐) 태종(太宗)과 위징(魏徵)의 관계는 인재를 어떻게 구하여 쓰고,  그리고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일천삼백 년을 훌쩍 뛰어 넘는 시대의 간격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큰 가르침이 되기에 충분하다. 『정관정요(貞觀政要)』에서 당 태종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방현령은 51번 언급되는 반면에, 위징은 무려 101번 나와 태종의 “정관(貞觀)의 치(治)”에서 차지하는 위징의 비중을 가름하게 한다.  
  위징은 본래 당 고조(高祖)의 태자인 이건성의 책사로 이세민을 죽일 것을 간했다고 한다. 당의 건국에 이세민의 공이 가장 컸음에도 불구하고 적장자 후계 명분에 밀려 맏아들 이건성이 태자로 책봉되자, 이세민의 불만으로 인해 왕자들 간의 권력 투쟁이 심각해진다. 결국 이세민은 황제의 이름을 빌려 형제들을 궁에 들게 하고 현무문(玄武門)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태자인 형과 아우를 주살하는 이른바 ‘현무문의 난’을 전기로 하여 권력을 잡고 태종에 오르게 된다.
 
<이야기 1>
  이세민은 위징에게 “그대가 세자에게 나를 죽이라고 했다니 형제들을 이간질한 그 죄가 크다”고 질책하자, 위징은 “세자가 저의 간언을 들었으면 오늘 같은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고 당당하게 답하였다고 한다. 당 태종으로 등극한 이세민은 위징의 인격과 당당함을 높이 사 목숨을 구하는 것은 물론 간의대부라는 직책을 맡겼다.
 
<이야기 2>
  위징은 황제가 듣기 불편해 하는 까칠한 소리를 많이 한 것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하루는 태종이 조회를 하다말고 박차고 나와 내전에 들어서 화를 참지 못하여 칼을 뺐다 꼽았다하며 으르렁 거렸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장손 황후는 황제에게 큰 절을 하고, 황제가 바른 말을 하는 충신을 얻었으니, 황제가 성군이 될 것임을 경하 드린다고 했다고 한다. 기분이 좋아진 황제는 조회로 돌아가 위징의 의견을 기꺼이 받아 들였다고 한다.
 
<이야기 3>
  위징:“폐하가 신을 양신(良臣)으로 만들고자 하시면, 충신(忠臣)이 되지 않도록 하옵소서”.
  당 태종: “양신과 충신의 차이가 무엇인가?”
  위징: “양신은 스스로 근사한 이름을 얻고, 군왕에게는 숭고한 칭호를 누리게 합니다...반면에 충신은 자신의 몸은 주살되고, 군왕은 큰 악명을 뒤집어 쓰게 합니다. 집안과 나라가 모두 큰 훼손을 입지만 오직 홀로 충신의 명예를 누리게 됩니다”
  
<이야기 4>  
  태종: “명군(明君)과 암군(暗君)은 어떻게 다른가?”
  위징: “군주가 밝은 것은 두루 듣기 때문이며, 군주가 우매한 까닭은 한쪽 말만 믿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다양한 경로로 이야기를 들어 소통을 잘하면 실정을 잘 아는 군주가 되고, 측근(inner circle)들의 이야기만 들으면 실정을 모르는 답답한 군주가 된다는 뜻으로 예나 지금이나 측근들에게 너무 의지하면 군왕의 눈과 귀는 가려지고 어두워져 백성들과 멀어지기 마련이다.  
 
<이야기 5>
  당 태종: “근자에 조정대신들이 국사를 제대로 논의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위징: “폐하가 마음을 비우고 허심탄회하게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면 응당 말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똑 같이 침묵을 지키고 있으나 사람에 따라 그 이유가 다릅니다. 나약한 자는 속마음이 충직해도 말을 하지 못하고, 군왕의 신임을 얻지 못한 자는 신임을 받지 못할 가 두려워 감히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녹봉을 생각하는 자는 자신에게 불이익이 있을까 염려하여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 서로 침묵하며 남의 말에 고객만 끄덕이며, 시간을 보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대화는 정관 15년(641년)에 있었던 일로 무려 1373년 전의 일이나 지금 국무회의의 모습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 6>
 위징이 병이 들어 죽자, 당 태종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한 것으로 남아 있다.
 “무릇 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을 단정히 할 수 있고, 옛날로 거울을 삼으면 흥망을 알 수 있으며, 사람으로 거울을 삼으면 득실을 밝힐 수 있다. 짐은 일찍이 이 세 가지를 가져 내 허물을 막을 수 있었다. 지금 위징이 세상을 떠나니, 거울 하나를 잃어 버렸도다.” 
  당 태종도 양신 위징이 죽고 난 후 고구려 원정과 후계자 선정에 실패함으로써 큰 오점(汚點)을 남기게 된다. 
 
양신의 조건
  이상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위징은 당 태종에게 자신을 양신이 되게 해 줄 것을 간청했으며, 자신이 정의한 양신과 같이 아름다운 이름을 빛내고 가문을 영광되게 했으며, 당 태종으로 하여금 “정관의 치”를 이룩한 성군으로 빛나게 했으니, 역사에 보기 드문 양신(良臣)의 전형이라고 할 것이다. 위징이 양신이었던 이유는 위징은 까칠한 간언만 한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에 당 태종의 선정과 위업을 칭송하여 태종의 신임을 두텁게 얻었으며, 군주의 심기를 살펴 군주의 용린을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바른 길로 이끌어 냄으로써 당 태종을 성군으로 만든 지혜로운 신하였다는 점이다.   
  양신과 충신의 공통점은 군주가 허물을 보일 때 바른 말을 하는 간신(諫臣)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군주에게 간함에 있어 양자는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양신은 군주의 심기를 살펴 간하지만, 충신은 군주의 심기에 상관없이 자기주장만으로 군주를 압박하여 노여움을 사 뜻을 이루는 것은 고사하고 흔히 죽음을 면치 못했다.   
  한편 양신과 간신(奸臣)은 군주의 심기를 살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차이점은 양신은 군주가 바른 통치를 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군주의 심기를 살피고 적합한 때를 가려 간하지만, 간신은 군주의 심기를 편하게 하는 것을 빌미로 군주의 눈과 귀를 막고 군주가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을 유혹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는 신하를 말한다. 한마디로 양신은 때를 살펴 군주를 바른 길로 이끌어 내는 지혜로운 신하이며, 군주에게 이롭고 천하에도 이로운 신하이며, 군주가 세상을 제대로 알 수 있도록 소통하는 신하를 말한다. 
 
양신은 군주가 만든다
  당 태종과 위징의 고사가 주는 시사점은 위징이 이야기했듯이 양신·충신·간신은 군주가 만든다는 것이다. 첫째, 태종은 충성도보다 능력을 보고 인재를 썼으며, 필요하다면 적(敵)이라도 과감하게 품었다. 
둘째, 당 태종은 신하의 까칠한 소리(直諫)에 귀 기울이고, 그런 신하를 귀하게 대우했다. 셋째, 당 태종은 신하들의 의견을 단순히 의견으로 들은 것이 아니라 정치가 바로 가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자신의 거울로 삼았다.
  역사의 교훈은 간신(諫臣), 그 중에서도 양신을 허용하는 군주는 양신으로부터 바른 정치를 보호 받아 태평성대를 이룸으로써 역사에 위대한 이름을 남겼으며, 반면에 간신(諫臣)을 용납하지 않고 간신(奸臣)의 말에 의지하는 군주는 대부분 “나쁜 정치”로 오명(汚名)을 남기거나 나라를 잃기도 했다. 
  이 역사의 교훈에 비추어 보건데 1400년 가까운 시공(時空)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의 현실은 간신(諫臣)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양신”의 존재를 더욱 절실히 필요로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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