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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비를 배워야 희망이 생긴다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5년10월07일 20시11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6일 19시03분

작성자

  • 이덕환
  •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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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비를 배워야 희망이 생긴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세계를 선도하는 선진‧창조형의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변해야 한다는 주장이 무성하다. 우리를 선진국 문턱에 바짝 다가설 수 있도록 해줬던 추격형의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전략이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모방과 추격으로 얻은 작은 성과에 취해서 머뭇거리다가는 선진국의 견제와 후발주자의 추격에 떠밀려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버릴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도 있다. 지금 당장 변하지 않으면 끔찍한 재앙이 닥쳐올 것이라는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새로운 목표라는 선진‧창조형 퍼스트 무버의 정체가 무엇이고, 퍼스트 무버가 되기 위해 필요하다는 전략이 묘하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양성‧창의성을 장려하는 사회를 만들자는 주장이 듣기에는 그럴 듯하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하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가 되고, 어떻게 하면 다양성과 창의성을 장려하게 되는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정치적·사회적 선동의 구호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는 뜻이다. 

  아마도 퍼스트 무버는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마크 주커버그, 마윈과 같은 성공적인 벤처 창업가가 쏟아내자는 뜻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영국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존 호킨스의 ‘창조경제’를 실천하고, 낯선 이스라엘의 후즈파 정신과 요즈마 펀드를 흉내 내야 한다고 야단들이다. 정보통신기술(ICT)만 융합시키면 선진‧창조사회의 꿈이 실현될 것이라는 환상도 한 몫을 하고 있다.

  과거 우리의 추격형 전략은 선진국의 제품과 기술을 베끼는 것이었다. 텔레비전을 베꼈고, 자동차도 베꼈고, 반도체도 베꼈다. 그런데 이제는 제품과 기술이 아니라 ICT 분야에서 성공적인 벤처 창업가를 길러내는 사회의 제도·정책·문화를 베끼자고 한다. 문제는 제품이나 기술을 베끼는 것과  제도와 정책과 문화를 베끼는 것이 모두 본질적으로 추격형 발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ICT 분야에서 성공적인 창업자가 쏟아져 나온다고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경제부흥‧국민행복‧문화융성의 꿈이 실현된다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

  우리의 과거 경험도 기억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경제가 본격적으로 살아나기 시작했던 20여 년 전에는 치열한 무한경쟁의 세계화가 대세였다. ‘오로지 1등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거친 주장에 우리 모두가 꽁꽁 얼어붙어버렸다. 2등과 꼴찌가 살아남지 못하면 결국 1등도 무의미해진다는 만고불변의 평범한 진리는 철저하게 무시됐다. 결국 조지 루카스와 스티븐 스필버그를 들먹이면서 ‘무엇이나 한 가지만 잘 하면 된다’는 황당한 교육철학까지 등장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융합’의 열풍이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하기 직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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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회는 한 순간에 맹목적인 무한경쟁을 위한 강압적‧형식적으로 획일화된 평가가 압도하는 차가운 사회로 변해버렸다. 불합리한 평가에 짓눌린 우리는 오로지 1등을 목표로 죽을 각오로 열심히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과정에서 끔찍했던 IMF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도 극복했다. 그런데 모두가 1등이 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현실은 냉혹했다. 우리 모두가 1등이 아니라 꼴등으로 전락해버렸다. 

  무차별적인 경쟁에 지쳐버린 우리는 극단적인 길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으로 곤두박질치고,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정체불명의 ‘힐링’을 앞세운 어쭙잖은 말잔치에 정신을 팔던 청년들이 이제는 취업절벽 앞에서 꿈을 포기하고 있다. 정신없이 남을 흉내 내고 베끼는 일에 청춘을 받쳤던 노인들도 희망의 끈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사회적으로 격차‧분열‧갈등은 더욱 심화됐고, 경제는 활력을 잃어버렸고, 행복은 오히려 더 멀어졌고, 문화도 시들해졌다. 불합리한 평가가 만들어낸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이다.

  물론 우리가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지속적인 변화를 거부하는 사회는 정체되고 퇴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역사적 진실이다. 새로운 변화를 위한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고 제품과 기술 대신 제도‧정책‧문화를 베낀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제 우리 스스로에 대한 패배주의적 생각을 버리고, 우리 스스로의 능력과 특수성이 충분하고 확실하게 반영된 우리만의 독창적이고 고유한 새 길을 찾아야 한다. 자신의 체형에 맞는 독창적인 스윙으로 세계 여성프로골프계를 확실하게 제패한 ‘골프 여제’ 박인비 식의 변화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박인비의 골프 역사는 여러 면에서 우리 사회의 역사와 닮은꼴이다. 다른 선수들이 그렇듯이 박인비의 골프도 교과서적 스윙을 흉내 내는 추격형으로 시작했다. 세계적인 스윙코치인 데이비드 레드베터와 부치 하먼의 골프 아카데미에서 무려 7년 동안 집중적인 훈련을 받았 덕분에 LPGA 입성 이듬해인 2008년 US여자오픈 우승이라는 놀라운 성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교과서적 스윙의 모방에는 한계가 있었다. 박인비도 JLPGA까지 기웃거리는 슬럼프를 경험했다. 

  박인비의 부활은 2011년 약혼자 남기협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무명의 프로골퍼였던 약혼자는 세계 최고의 골프 스윙 코치도 아니었고, 세계 최고의 골프 스쿨 교육에 대한 전문가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박인비에게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스윙을 가르칠 수는 없었다. 그 대신 경직된 체형을 가진 박인비만을 위한 정말 독창적인 맞춤형 스윙을 개발했다. 데이비드 레드베터나 부치 하먼의 골프 아카데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형적인 스윙이었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새로운 스윙으로 무장한 박인비는 2013년 3개 메이저 대회 연속 우승이라는 화려한 기록으로 부활했고, 2015년에는 드디어 커리어 그랜드 슬램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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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회의 경험도 박인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도 박인비의 경우처럼 추격형 전략으로 놀라운 성과를 거둔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병이라고 부르던 혈연‧지연‧학연에 대한 감성적인 집착을 포기할 수 없는 우리에게 선진국의 제도‧정책‧문화가 어울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우리에게 전혀 다른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스라엘을 배우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박인비의 독창적인 스윙처럼 우리 사회의 능력과 특성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독창적인 우리만의 발전 목표와 전략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과감한 창업 정신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지난 3월에 발표된 OECD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고용에서 자영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31개 회원국 중 관광 산업 위주의 그리스, 터키, 멕시코에 이어 4번째로 높고, GDP 대비 사업체의 수는 회원국 중 가장 높다고 한다. 비록 취업난에 따른 비자발적 창업이 많다고 하지만, 우리처럼 창업에 적극적인 사회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 우리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것은 공허한 지표가 아니라 진정으로 우리 경제를 살려주고,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고, 문화를 창달시켜 줄 수 현실적인 목표와 전략이다. 대박이 될 것이라는 통일이 그런 목표와 전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허영에 들떠 선진국을 베끼겠다는 허영심을 버리고, 진심으로 박인비를 배우겠다는 각오를 실천해야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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