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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貨) 리디노미네이션, 지하경제 양성화 가능한가?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6년07월07일 18시13분
  • 최종수정 2016년07월08일 11시05분

작성자

  • 박종규
  •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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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화폐단위변경(redenomination) 주장이 또다시 불거지고 있다. 2004년에 처음 등장했다가 수그러들더니 2015년 가을에 되살아났고, 곧 이어 물밑으로 가라앉는가 싶더니 금년 들어 총선 이후 또다시 살아난 것이다. 

 

 화폐단위변경이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커피 전문점들은 이미 4,500원하는 커피 값을 4.5로 표시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커피 전문점들은 1000:1의 화폐단위변경을 벌써 자체적으로 시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만약 우리사회가 이참에 정말로 1000:1의 화폐단위변경을 단행한다면, 다름 아닌 커피 전문점 종업원들의 기발한 발상(發想)이 그 계기였다고 역사는 기록해야 할 것이다. 

 

 화폐단위변경을 주장하는 여러 논거들 가운데 이 글에서는 다만 화폐단위변경이 필요하다는 이유 가운데 “화폐단위변경을 하면 지하경제 양성화에 도움이 된다.“라는 주장에 관해, 그것이 얼핏 그럴 듯하게 들리긴 해도 실상은 그럴 수 없다는 점을 자세히 논의(論議)해 보고자 한다. 

 

 우리나라는 사실 지하경제 1)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註1) 지하경제란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 경제활동을 말한다. 반드시 마약이나 총기거래, 밀수 같은 것만이 지하경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현찰거래는 지하경제를 의심케 할 만한 부분이다. 선량한 시민이라도 현찰거래를 한다면, 그리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당연히 내야 할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게끔 도와준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금액만큼 지하경제에 종사한 셈이 된다.>

 

 박근혜 정부도 여기에 부응(副應)하여, 임기 첫해이던 2013년 봄, 대통령이 직접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겠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한바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달 뒤인 여름 무렵에는 백화점마다 가정용 냉장고 반 정도 크기의 개인금고가 불티나게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 해 여름, 나도 시내 어느 백화점에 들렀다가 엘리베이터 주변 빈 공간에 빼곡이 진열된 물건들이 소형 냉장고가 아닌 개인금고라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금고라면 모름지기 첩보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시커먼 색깔에 투박하고 육중한 철제문(鐵製門)이 달려있고 그 한 복판에는 큼지막한 다이얼이 붙어 있을 거라는 내 머리 속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보라색, 하늘색 또는 핑크색 등 파스텔 톤의 우아한 꽃무늬로 장식된 소형 냉장고처럼 생겼었다. 외관상으로는 전혀 금고처럼 보이지 않았었다. 

 

 개인금고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기 시작한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아 소위 “신사임당(申師任堂) 실종사건”이 발생했다. 그때까지 꾸준히 증가하던 5만원권의 시중 유통량이 대통령의 ‘지하경제 양성화’ 발언을 계기로 급격한 감소세로 급반전된 것이다.

 

 “신사임당 실종사건”이란 ‘그 많던 (신사임당 초상화가 있는)5만원권이 다 어디로 갔느냐?’는 의미였다.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겠다는 담화를 듣고 너도나도 5만원권으로 바꾸어 금고에 쟁여놓았던 게 아니냐는 추측을 가능케 하는 대목이었다. 

 

 화폐단위변경을 단행하기만 하면 정말로 금고 속의 5만원권을 제도권으로 끌어 내어올 수 있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화폐단위변경만으로는 지하경제를 양성화시키지 못한다. 

 1000:1로 화폐단위변경을 하면, 신권(新券)으로 교환된 현찰은 부피가 1000분의 1로 작아진 채, 다시 금고로 되돌아갈 뿐이다. 지하경제는 양성화되기는커녕 지금보다 1000배 이상 더 창궐(猖獗)할 공간이 생긴다.

 우리나라에서 지하경제 양성화는, 또는 적어도 기성세대의 살아 생전(生前)에는, 불가능해질지 모른다. 

 

 우리나라는 두 차례의 화폐단위변경 경험을 가지고 있다. 100원을 1환으로 바꾸었던 1953년 2월의 화폐개혁과 10환을 1원으로 바꾸었던 1962년 6월의 화폐개혁이 그것이다. 

 

 이 두 차례의 화폐개혁에 모두 핵심적으로 간여했던 김정렴(金正濂) 전(前) 대통령 비서실장의 회고록 2)에 따르면 첫 번째 화폐개혁은 매우 성공적이었지만 1962년의 2차 화폐개혁은, 본인의 표현을 빌자면, “실패로 끝났다. 그것은 단지 구권(舊券)의 액면(額面)을 10분의 1로 바꾸는 데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서, 국가 경제의 작동에 불필요하게 개입한 것이었다. 나의 34년 공직생활 동안 내가 간여되었던 다양한 경제정책들 가운데 제2차 화폐개혁은 ‘쓰디쓴 실망’으로 두드러지게 남아있다.” 3) 

 

 註2) Kim, Chung-yum, Policymaking on the Front Lines: Memoirs of a Korean Practitioner, 1945-1979, EDI Retrospectives in Policymaking, The World Bank, Washington D.C., 1994.   

 

 註3) Kim(1994) p.27: “The second currency reform ended in failure, merely denominating old money to one-tenth of its former value, and unnecessarily interrupted the workings of the national economy.

 Among the various economic policies I have been involved in during my 34 years of public life, the second currency reform stands out as a bitter disappointment.”

 

 제2차 화폐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핵심원인은 구권을 전액(全額) 신권으로 교환해주었기 때문이었다. 화폐단위변경 과정에서 장롱 속의 지하자금을 양성화시키려면 구권의 일부를 강제로 예금시켜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른 바 장롱 속의 돈을 강제예금 시킨 분량만큼 제도권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2차 화폐개혁도 원래는 구권의 일정 비율만 신권으로 교환해 주고 나머지(전체 예금액의 15% 정도)는 동결계좌(凍結計座)에 1년 정도 강제예금 시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행정부가 국가자본주의(國家資本主義: state capitalism)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미국 대사관이 강력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예금동결은 시행 한 달 만에 전면 해제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Kim 1994, p.26-27). 

 

 그 결과 2차 화폐개혁의 당초 목표 중 하나였던 지하자금 양성화 내지 경제개발계획을 위한 내자동원(內資動員)은, 앞서 인용한 대로, 실패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반면, 아직 전쟁 중이던 1953년 2월의 제1차 화폐개혁 때에는 생활비 명목으로 일인당 500환까지 만을 신권으로 교환해 주고 나머지(현금통화의 1/3 정도에 해당)는 모두 만기 1∼3년의 특별정기예금 또는 특별국채예금으로 강제 전환시켰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금통화량을 대폭 축소시켜 6.25 사변에 따른 전쟁 인플레이션을 단번에 진정시켰을 뿐 아니라 그 때까지 국내에 돌아다니던 중국 돈과 북한의 인민폐를 모두 한꺼번에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하자금 규모가 상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현재의 우리경제에서 지하자금 양성화는 매우 중요한 정책과제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화폐단위변경을 하기만 하면 지하자금이 양성화된다는 말은 근거가 없어 보이는 얘기다. 구권을 신권으로 바꾸어줄 때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는다면 장롱 속의 돈들은 일단 은행으로 나와 신권으로 교환된 뒤 그 즉시 장롱 속으로 되돌아 갈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폐단위변경을 하면 지하자금이 양성화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무슨 복안(腹案)을 가지고 있길래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인지 밝힐 필요가 있다. 

 

 과거 1차 화폐개혁 때처럼 구권의 일부분만 신권으로 교환해 주고 나머지는 강제저축을 시키겠다는 생각인가?

 요즘 같은 세상에, 살인적(殺人的) 인플레이션이 만연(蔓延)해 있는 것도 아니며, 다른 나라 화폐가 대량으로 돌아다니면서 화폐질서를 교란시키는 것도 아니고, 무슨 전쟁이나 경제 비상상황도 아닌데, 강제저축처럼 국민의 재산권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조치를 시행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素地)가 없지 않을 것이다. 

 

 강제저축을 시키려는 게 아니라면, 누가 얼마나 바꾸어 가는지 실명(實名)을 확인하고 이름을 적어두었다가 나중에 세무조사 자료로 활용하겠다는 의미인가? 지하자금 양성화도 좋지만 정말로 그렇게 하는 방법밖에는 없는가?

 

 만약 그런 것도 아니라면 새 돈으로 바꾸어진 돈이 개인금고가 아닌 은행 예금통장으로 돌아가도록 만드는  마법(魔法)이란 과연 무엇일지 궁금하다. 

 

 화폐단위변경을 하면 그것은 우리나라 화폐단위를 반세기만에 바꾸는 것인 만큼 그 자체로서 중요한 정치적 치적(治績)이 되고,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길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오늘날을 회고(回顧)할 때, 그렇게 해서 남긴 이름이 국민들 사이에 아름다운 이름으로 기려질지 아니면 그렇지 않을지는 신중(愼重)에 신중을 거듭하여 숙고(熟考)해 볼 일이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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