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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38> 속주민 출신 황제 트라야누스가 등장하다(서기 98~117)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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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7월05일 17시36분

작성자

  •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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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르바가 사망하자, 트라야누스는 45세에 단독 황제가 되었다. 트라야누스는 에스파냐의 신흥 가문 출신으로서 첫 번째 속주민 황제가 되었다. 그는 황제가 된 후에 곧장 로마로 돌아가지 않고 게르마니아 방위 체제를 완비하는 일에 매달렸다. 동시에 군단 기지를 잇는 도로와 교량을 정비했다. 네로 황제 시대의 명장 코르불로는 “로마군은 곡괭이로 이긴다”고 말했다. 로마군에는 공병대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군단병 전원이 토목기사이자 근로자였기 때문이다. 

 

트라야누스는 황제가 된 후 1년 반 만에 수도 로마에 입성했다. 그가 오는 날 황제를 보기 위해 로마 시내에는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일 뿐만 아니라 황제가 되고서도 1년 반 동안이나 수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신임 황제에 대한 호기심이 높아졌다. 더욱이 그는 경력의 대부분을 속주에서 보낸 까닭에 수도 로마에는 얼굴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황제는 성문 앞에 이르자 말에서 내렸다. 말을 탄 채 입성할 거라는 예상을 깬 행동이었다. 그는 장군 출신답게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해서 엄청난 인파 속에서도 머리가 우뚝 솟아 빛나 보였다. 로마에 입성한 후 트라야누스의 검소한 생활도 화제가 되었다. 궁중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한 원로원 의원들도 그 소박함에 놀랄 정도였다. 트라야누스는 원로원에서 “국가반역죄라는 이름으로 원로원 의원을 처형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트라야누스는 다키아(현재의 루마니아)족에 대한 전쟁 재개를 결심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체결한 강화조약이 굴욕적이라는 비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마가 다키아에 참패했을 때 붙잡힌 포로들을 교환하기 위해 1인당 1년에 2아세스를 지불한다는 조항이 있었는데, 이는 공중목욕탕 입장료의 4배에 불과하다. 도미티아누스는 포로로 붙잡혀 있는 로마군을 데려오는 방법은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마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 액수가 미미하더라도 평화를 돈으로 사는 것은 로마의 전통에 맞지 않았다. 그것은 패자가 승자에게 받치는 연공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자존심의 상처 때문에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1차 다키아 전쟁은 서기 101년에 일어났다. 트라야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도나우 강 연안에 도착하여 전쟁을 준비했다. 다키아 왕은 바짝 다가온 로마군의 창끝을 피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했으나 참패했다. 다키아 왕이 강화 사절을 보냈고, 강화조약을 맺음으로써 전쟁은 마무리되었다. 

2차 다키아 전쟁은 서기 105년 다키아가 강화를 파기하고 로마군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트라야누스는 수도 로마를 떠나 전쟁터로 다시 달려갔다. 다키아 왕은 로마제국을 상대로 싸워서 완전히 이기려 한 것이 아니었다. 전쟁을 일으켜 도미티아누스 시대처럼 유리한 강화조약을 맺어 도나우 강 이북에 일대 왕국을 세우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다키아군은 가도 공사를 하고 있는 7군단을 습격하여 군단장과 일부 로마 병사를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 포로들을 이용하여 강화를 제의했다. 트라야누스는 강화 제의를 일축했다. 다키아군은 로마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다. 마침내 다키아의 수도가 함락되었다. 데케발루스 왕은 자결하고 그의 목은 로마 황제에게 바쳐졌다. 로마제국과 동등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는 왕국을 건설하겠다는 데케발루스의 야망은 20년도 지속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서기 106년 여름, 다키아전쟁이 끝났다. 트라야누스의 개선식은 수도 로마를 흥분과 열광과 승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5만 명에 이르는 포로와 막대한 왕실 보물은 오랜만에 로마인들이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게 만들었다. 트라야누스가 다키아를 로마제국의 속주로 삼는다고 공포함으로써 다키아 문제가 마무리되었다. 

 

다키아의 합병으로 로마제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고, 로마군은 최강이 되었다. 다키아 정복에 관한 사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트라야누스가 집필한 『다키아전쟁기』는 내용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로마에 있는 ‘트라야누스 원기둥’으로 불리는 승전 기념비에 새겨진 부조가 있다. 도널드 R. 더들리는 『로마문명사』에서 트라야누스 원기둥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그 기둥에는 야전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는 로마 군대의 모습이 그 상세한 전술과 장비와 함께, 지휘관에 대한 절대 복종을 강조하여 훌륭하게 묘사되어 있다. 아울러 다키아인들의 격렬한 항전과 갑옷과 무기,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요새들, 그들의 위대한 왕이자 트라야누스의 호적수 데케발루스도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그 기둥의 부조들에서 연속된 원정의 역사를 구성해내려는 학자들의 시도는 변변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따라서 106년에 데케발루스가 죽고 다키아가 로마의 손아귀에 들어갔다고 말하는 것으로 족하다.” 

 

서기 113년, 트라야누스 황제는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로마를 떠났다. 로마군의 공격으로 파르티아왕국의 수도 크테시폰(오늘날의 바그다드 근처)이 함락되었다. 파르티아 왕은 수도가 함락되기 직전에 간신히 도망쳤다. 트라야누스는 크테시폰에서 가까운 고도 바빌론을 방문해서 “내가 젊었다면 인도까지 진격했을 텐데”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페르시안 만에 도착한 트라야누스는 안티오키아로 돌아가 겨울을 나기로 했다. 그런데 그가 그곳에 도착하자 메소포타미아 곳곳에서 반란의 불길이 솟았다. 제패한 땅에 남아 있던 로마군에 대해 파르티아 진영은 게릴라 전법으로 맞섰다. 유대 지방에서도 유대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은 일단 진압되었으나, 불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서기 117년, 봄이 왔으나 트라야누스는 동쪽으로 가지 않고 돌연히 로마로 향했다. 트라야누스가 중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대신 파르티아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하드리아누스를 임명했다. 로마로 돌아오는 도중 병세가 악화되어 서기 117년 8월 트라야누스 황제는 눈을 감았다. 그는 죽기 직전에 원정군 총사령관인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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