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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27>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만남(기원전 42~37)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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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4월19일 17시30분

작성자

  •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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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투쟁에서 권력투쟁으로.”

카이사르 암살에서 브루투스가 죽을 때까지 2년 동안 진행된 로마의 내전은 정치 투쟁이었다.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을 유지할 것인가, 한 개인이 통치하는 군주정을 채택할 것인가?” 하는 공화정과 군주정이라는 로마의 국가 시스템을 두고 싸운 정치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정치 투쟁에서 군주정이 승리를 거두었다. 다음 순서는 누가 군주가 되느냐를 놓고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앞으로 10여 년 동안 벌어질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싸움은 권력투쟁인 동시에 정치 투쟁 성격으로 변질되었다. 카이사르가 설계해놓은 로마 세계의 청사진을 계승하느냐, 마느냐도 쟁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청사진의 전체 조감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야심 때문에 정치 투쟁의 성격도 포함하게 되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5권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과 영욕 그리고 옥타비아누스가 1인자가 되는 과정을 흥미롭게 소개한다. 

 

기원전 42년 카이사르 암살자들을 격파한 필리피 회전이 끝난 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동쪽과 서쪽으로 영역을 분할했다. 카이사르 암살 후 2년 동안 정치 투쟁으로 방치된 로마 세계를 각각 분담하여 복구한다는 것이 표면상의 이유였다. 로마 세계의 동부는 안토니우스가, 서부는 옥타비아누스가 맡기로 한 결정은 안토니우스가 주도적으로 내렸다. 필리피 회전의 사실상 승자는 안토니우스였다. 허약한 체질의 옥타비아누스는 전쟁 기간 중 걸핏하면 앓아누워 전투에 지기도 하면서 가까스로 승리한 까닭이다. 이런 역학 관계에 자신감을 얻은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다시 불태우게 되었다. 

 

안토니우스가 동부를 선택한 것은 파르티아 원정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파르티아 원정은 로마인의 아킬레스건이다. 크라수스가 전쟁에 패하여 목숨을 잃었고, 카이사르가 원정을 앞두고 암살당한 까닭에 미완의 숙제로 남겨진 땅이다. 카이사르가 생전에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룬다면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 누리는 권위는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결국 로마 세계는 자신의 손에 들어오리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여기에다 동부의 경제력이 서부보다 월등하다는 점도 작용했다. 속주세만 놓고 볼 때 동부의 징수액은 서부의 징수액보다 규모 면에서 비교가 안 되었던 것이다. 

 

로마 세계의 명실상부한 1인자인 안토니우스 앞에 거칠 것이 없었다. 동쪽으로 가는 그 앞에 제후들은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동방의 제후들은 항상 승자 편에 서왔다. 경제력은 우월하지만 군사력에서 로마를 상대할 수 없는 그들의 생존 방식이기도 했다. 이제 안토니우스 앞에서 복종을 맹세했다. 동쪽으로 가는 안토니우스는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행군을 계속하다가 소아시아 남동부의 속주 킬리키아의 수도 타르수스에 당분간 머물렀다. 그곳에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소환했다. 강요당했다고는 하지만, 클레오파트라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연합군을 군사적으로 지원한 과오가 있기 때문에, 이를 질책하기 위해 불러들인 것이다. 

 

불리한 상황에서 안토니우스를 만나러 가는 클레오파트라에게는 남다른 면이 있었다. 키케로는 안토니우스를 “독재자요, 깡패요, 주정뱅이요, 겁쟁이”라며 “몸이 건장하다는 것을 빼고는 아무 장점도, 교양도 없는 사람, 술에 취해 천박한 창녀와 시시덕거릴 줄밖에 모르는 검투사 같은 사내”라고 비난한 적이 있다. 그녀는 안토니우스의 성격과 재능을 파악했다. 안토니우스의 허영심을 자극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안토니우스를 매혹시킨 클레오파트라는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승자가 된 것이다. 그녀는 대범하게 안토니우스를 이집트 왕국의 수도인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41년 가을부터 기원전 40년 봄까지 이집트 궁정에서 여왕이 제공하는 호화로운 생활과 안락한 삶을 누렸다. 반면에 옥타비아누스는 본국에서 악전고투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설상가상으로 안토니우스의 동생 루키우스와 아내 풀비아가 군대를 모아 반란까지 일으켰다. 이것은 옥타비아누스를 흔들기 위한 안토니우스의 책략이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기원전 40년 2월 진압에 성공한 옥타비아누스는 반란 주모자인 풀비아와 루키우스를 그리스로 추방하는 것으로 반란을 마무리했다. 반란에 실패하자 안토니우스는 반란의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해버렸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아내는 도망간 그리스 땅에서 분을 이기지 못해 죽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3두정치의 주역인 세 사람이 브린디시에서 다시 만나 각자의 세력권을 3분하는 ‘브린디시협정’을 맺었다. 로마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안토니우스는 동부, 옥타비아누스는 서부,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맡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협정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인척 관계를 맺었다. 아내의 죽음으로 홀로 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인 옥타비아와 결혼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전처 폴비아와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클로디아와 약혼했다. 훗날 옥타비아누스는 이 약혼을 파혼하고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의 처고모인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했다. 여기서 옥타비아누스의 유일한 혈육인 율리아가 태어났다. 

 

재혼한 안토니우스는 아테네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로마 남자의 일상으로 돌아가 가정에 충실했다. 딸도 태어났다. 클레오파트라를 피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안토니우스가 오직 파르티아 원정에 성공하기 위해 몰입하는 것처럼 보여 부하들도 안심할 정도였다. 

 

기원전 37년 가을, 파르티아 원정을 떠나기로 결심한 안토니우스는 둘째 아이의 해산을 앞둔 아내에게 로마로 돌아가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동쪽으로 떠났다. 동시에 클레오파트라에게 안티오키아에서 재회할 것을 약속하는 편지를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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