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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19> 운명을 바꾼 『갈리아 전쟁기』 (기원전 58~51)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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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2월22일 16시07분

작성자

  •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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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는 지금의 서유럽에 해당하는 갈리아에서 기원전 58년부터 51년까지 8년 동안 전쟁을 수행했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카이사르는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다. 역설적인 가정을 해보자. 

“카이사르에게 갈리아 전쟁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카이사르가 역사적인 인물로 평가받기는 어려웠을지 모른다. 갈리아전쟁은 그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로마 시민 입장에서 갈리아는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북방의 국경선에 접해 있는 까닭에 국가 안보상 중요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국방의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카이사르 입장에서도 갈리아는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굳힐 수 있는 적임지였다. 경쟁자인 폼페이우스는 이미 지중해에 출몰하는 해적을 소탕하여 제해권을 장악했고, 소아시아와 동방을 정복하여 명성을 떨친 당대의 영웅이었다. 폼페이우스와 비교할 때 공적이 적었던 카이사르가 자신의 공적을 세울 목표물로 서북쪽의 갈리아 지역을 선택한 것은 전략적인 결정이기도 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 첫 페이지에서 “갈리아족 중에서는 헬베티족이 가장 용감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토에서 게르만족을 물리치거나, 적의 영토로 쳐들어가 거의 날마다 게르만족과 교전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소개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속주 방어 작전으로 시작된 갈리아 진입은 갈리아 지역의 여러 부족과 맞대결하면서 갈리아 지역 전체의 정복 사업으로 확장되었다. 그 과정에서 카이사르는 가장 용맹하고 전투력이 강한 헬베티족을 제압하고, 다수의 부족을 회유하거나 무력으로써 전 지역을 평정해나갔다.

 

그런데 갈리아전쟁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고 무려 8년이나 걸렸다. 왜 그랬을까? 보이지 않는 갈리아인들의 저항 정신 때문이었다. 카이사르에게 최대의 위기의 순간은 전쟁의 막판에 운명처럼 다가왔다. 갈리아전쟁 7년째인 기원전 52년이었다. 갈리아 한 부족의 왕족 출신인 베르킨게토릭스가 나타나 탁월한 리더십을 보이며 로마에 대한 갈리아인들의 반감과 저항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그는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던 갈리아인들에게 자유의 쟁취를 호소하며 놀라운 리더십으로 여러 부족을 설득하여 대다수 갈리아 부족의 군사력을 연합시키는 데 성공했다. 

 

카이사르에게 최대의 위기이자 도전이었다. 최후의 결전은 부르고뉴 지방의 작은 성채 도시 알레시아에서 일어났기에 ‘알레시아전투’로 이름 지어졌다. 카이사르는 5만 명도 안 되는 병력으로 성안 8만 명, 성 밖 26만 명을 합하여 무려 34만 명이나 되는 적을 무찔렀다. 앞뒤로 포위된 상태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카이사르는 역사적인 전투의 마지막을 담담하게 기록했다. 

 

“아군들은 창을 던져버리고 칼로 싸웠다. 갑자기 배후에 아군 기병대가 나타나고 더 많은 대대가 앞에서 다가오자 적군은 등을 돌려 도주했다. 그러자 아군 기병대가 추격하여 도주하는 적군을 도륙했다. 그 많던 군사들 가운데 무사히 진지로 돌아간 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도시 안에 포위되어 있던 자들은 전우들이 도주하다가 도륙당하는 것을 보고 승산이 없다고 보고 방어 시설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갈리아족이 패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원군으로 와 있던 자들은 곧바로 진지를 떠났다.”

 

갈리아의 젊은 총사령관 베르킨게토릭스는 최후의 결전인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패배하여 항복함으로써 로마군을 축출하려던 갈리아인의 꿈은 좌절되었다. 그는 후일 로마에 포로로 끌려가 투옥되었다가 끝내 교수형에 처해졌다. 살려두기에는 너무나 위험하고 뛰어난 인재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인의 후손인 프랑스인들에게 특별한 영웅으로 기억된다. 그가 추구하던 자유와 자치에 대한 열망의 가치가 프랑스인들의 자유 정신과 맥이 닿는다고 믿는 까닭이다. 

 

카이사르가 부하들을 복종시키는 남다른 비책은 소통이었다. 부하들이 막연하게 적을 두려워할 때, 그는 연설을 통해 그 두려움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규명하여 그 허상을 일깨워주었다. 나아가 로마군이 용감하게 난관을 극복한 사례를 상기시켜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 용기를 북돋웠다.

 

또 아군이 밀리는 위태로운 상황이 되면 자신이 병사의 방패를 빼앗아 들고 최전선으로 나섰고, 주변의 백인대장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그들을 독려했다. 카이사르의 솔선수범하는 모습은 병사들에게 희망과 용기의 불씨를 되살렸고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런 리더십이 바탕이 되었기에 전투를 벌일 때마다 카이사르의 상징이 된 진홍색 망토가 휘날리면 장병의 사기가 올랐다.

 

플루타르코스가 카이사르에 대해 “카이사르는 군사들에게 충성심을 심어주고 호감을 사는 데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지금껏 전투에서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군인들도 카이사르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라면 저항할 수 없는 불패의 용사가 되었으며, 어떤 위험이든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었다”고 평가했다. 

 

카이사르는 첫해부터 ‘갈리아 전쟁기’를 직접 기록해서 매년 본국에 보냈다. 현지의 출장 보고서인 셈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갈 무렵 기원전 52년에 『갈리아 전쟁기』 7권을 모아서 한 번에 발간했다. 이 책에서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역(오늘날의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독일 서부, 스위스)에서 벌어진 전투와 정복 상황, 군사적 전략과 기술에 얽힌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적었다. 전쟁을 직접 수행한 장수가 실제 작전 상황과 전쟁 수행 과정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희귀한 사례다. 이 책은 최고의 전쟁 회고록이고, 보고문학의 백미이며, 라틴 문학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는 출판되자마자 당시 로마인들에게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모았다. 용감하지만 야만적인 갈리아인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게르만인에게서 용맹스럽게 로마를 구해낸 이야기, 알지 못했던 나라 브리타니아(영국)에 대한 호기심, 이국적인 나라와 신, 로마 정신의 승리담 등이 로마 시민들을 매혹시켰다. 로마 대중은 이 책에 푹 빠져 로마 시민으로서 자긍심과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젊은이들이 열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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