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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8H 37년 만에 망한 수(隋)나라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11월23일 17시40분
  • 최종수정 2017년11월24일 14시32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31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36) 수양제 양광 즉위(AD604)

 

 

양견은 본처 독고황후가 죽은 뒤 진나라 황제 진욱의 딸 영원공주 진씨를 가까이 하였다. 양견이 인수궁에서 병으로 누워있는 동안 상서좌복야 양소, 병부상서 유술, 황문시랑 원암 세 사람이 병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 황태자를 대보전으로 불러 가까이 두었다. 양광은 양견의 일거수일투족을 양소로부터 보고받아 듣고 있었는데 양소가 양광에게 보내는 쪽지편지가 실수로 황제에게 들어가는 일도 있었다. 양광은 아버지의 후궁 진씨를 탐내 겁탈을 하였는데 진씨가 울면서 양견에게 모든 것을 일러바치고 말았다. 양견은 분하여 침상을 걷어차며 말했다.

 

“ 짐승 같은 놈에게 어찌 나라를 맡길 수가 있겠나.

  독고황후가 나를 오도하였구나.“

 

유술과 원암을 불러 말했다.

 

“ 내 아들을 데려오라.”

 

유술과 원암은 태자 양광인 줄 알고 부르려던 참이었다. 양견이 말했다.

 

“ 양용 말이다.”

 

유술과 원암은  황제의 명에 따라 양용을 부른 조서를 썼다. 양소가 그 소식을 듣고 황급히 양광에게 보고했고 양광은 조서를 고쳐서 유술과 원암을 체포하여 가두고 동궁 군사를 발동하여 우문술과 곽연에게 지휘를 맡기고 황궁을 포위 차단했다. 후궁들은 모두 내 보내 가두고 태자궁 우서자 장형만이 병든 양견을 시중들게 하였다. 이러던 와중에 양견이 죽었으므로 자치통감은 당시 안팎으로 양견 독살 가능성이 제기되었다고 기록했다. 

 

AD604년 7월 21일 발상하고 태자가 된지 4년 만에 양광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수나라 양제(煬帝)다. 이 때 나이 이르지 않은 35세였다. 양견이 죽고 양광이 황제가 되었지만 아직 장안에서는 모르고 있었다. 인수궁과 장안의 거리가 약 200KM 가까웠으므로 말로 달려도 이틀 이상 걸리는 거리였다. 양광은 양소의 동생 양약을 장안으로 급파하여 양견의 명이라고 속여 형 양용을 교살로 죽였다. 그런 다음에야 양견의 사망소식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유술을 용천(광동성 혜주)으로, 원암을 남해(광동성 광주)로 유배했다. 유술의 부인은 양광의 막내 여동생 난릉공주 양아오였는데 양광이 강제로 이혼시키려 했으나 강력히 반대하면서 남편과 같이 유배를 떠나겠다고 간청했다. 양광이 허락하지 않자 분함에 쌓여 죽었다.  

  

 

(37) 양량(楊諒)의 반란(AD604)

 

한왕 양량은 양견의 막내아들(AD575-AD605)로 병주총관이었다. 지금의 하북성과 산서성의 52개 주를 총괄하는 막강한 실세였다. 셋째형이 양광이 큰 형 양용을 죽이고, 넷째 형 양수를 쫓아냈으니 병으로 죽은 둘째 형 양준을 빼면 이제 남은 것은 자신 밖에 없었다. 양량은 불안했다. 게다가 아버지가 계실 때에 돌궐에게 크게 패하여 조정으로부터 모든 부장들을 해임하고 가두라는 명령까지 내려왔다. 양량은 선처를 바란다는 편지를 양견에게 올렸지만 양견은 가혹하게 양량을 질책한 적이 있었다.

 

“ 어찌 사정에 따라 국법을 훼손하겠느냐.

  어린아이야, 너는 우리 집안의 불쌍한 닭과 같아서     

  양광에게 밥이 될 뿐이니 경거망동하면 안 된다.“

 

양량의 수하에는 왕규라는 자못 꾀가 있는 사람이 자의참군으로 봉직했다. 이 사람은 양견에게 잘 보이지 못하여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양량에게 붙어 뜻을 펼 생각을 품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소마가라는 옛날 진나라 장수도 크게 등용되지 못하여 양량에게 의지하면서 난을 부추기던 사람이다. 양견이 죽고 양광이 즉위하자 곧바로 굴돌통이라는 장수를 보내 양량을 장안으로 소환했다. 그러나 양견은 양량과 비밀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의 칙서에는 반드시 칙자 옆에 점 하나를 첨가할 것이니 점이 없으면 진짜 칙서가 아닌 줄 알라는 약속이었다. 양광이 보낸 칙서에는 점이 없었다. 가짜 칙서이니 분명히 무슨 일인가 벌어진 것이다. 양량은 소환에 응할 수가 없었다. 양량은 소마가와 왕규의 말을 믿고 군사를 일으키기로 작정했다. 황보탄이 만류했다. 양량의 군대는 양광을 감당하지 못하며, 군시의 지위가 이미 결정되었고, 하늘의 별의 움직임 또한 심상치 않으므로 실패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양량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리 죽든 저리 죽든 마찬가지였다. 양량을 따르는 주는 관할 52개 주 중에서 달랑 19개 밖에 없었다. 당시 수나라 주의 숫자가 약 190개였으니 거의 10대 1의 불리함이었다. 

 

양량은 결국 양광에게 패배하고 만다. 그러나 패인은 전략실패와 내부분열이었다. 숫적으로 열세인 양량의 군대는 기습공격을 바탕으로 신속하게 장안을 점령했어야 승산이 있었다. 장안만 점령하면 평판이 나쁜 양광의 정부는 금새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그것이 양량의 장수 배문안과 측근 왕규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양량은 지구전을 택했다. 게다가 양량의 처남 두로육의 건의도 번번이 묵살되어 안으로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것을 두로육의 형이자 양광의 참모인 두로현이 알고 있었다. 양광의 허락을 받은 두로현은 몰래 사람을 보내 동생 두로육과 내통했다. 양량에게 등을 돌려 항복하면 나중에 큰 공을 세운 셈이 된다고 꼬드겼다. 결국 두로육은 양량에게 배반했다. 양량은 배반한 두로육을 죽였다. 양량의 근거지 태원이 양소에게 포위되자 끝내 양량은 실패하여 항복했고 먼저 폐서인 된 다음 유폐되었다가 죽였다.(AD604) 사실 양견의 다섯 아들은 모두 독고황후가 낳았다. 따라서 다섯 아들에게 골고루 땅을 나누어 친왕으로 다스리게 하면 서로 균형이 유지되면서 통치될 것으로 양견은 믿었다. 이렇게 형제지간에 처절하게 싸워서 서로 죽일 줄 전혀 예견하지 못했다. 사마광은 이에 대하여 양견이 하나를 얻고(즉, 세 아들이 나라를 나누어 다스림) 셋을 잃었다(총신을 둠, 애첩을 둠, 지방을 수도만큼 높임)고 평했다.

 

 

(38) 양광의 운하 건설과 행정개혁(AD605-AD607)

 

음탕하기도 하고 교활하기도 한 양광이 황제가 되어 맨 먼저 한 것은 동경(낙양궁)을 수축하고 또 장안과 강도(건강) 사이에 약 20여 개의 이궁(별궁)을 대대적으로 건축하는 일이었다. 동시에 대규모 운하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장안에는 둘레가 200여리 되는 서원을 건설했고 또 호화스럽기 그지없는 거대한 유람선 배(龍舟,용주)를 여러 척 건조했다.(AD605) 전란이 없고 큰 기후재난도 없어서 국가재정은 유례없이 풍족하고 튼튼했으므로 양광의 대역사를 뒷받침하고도 남았다. 사마광은 당시를 근세에 따라 잡을 것이 없었다고 쓸 정도로 문물이 풍부했다. 양광은 인재선발에도 심혈을 기우렸는데 인재선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일곱 명(選曺七貴)는 납언 소위, 좌익위대장군 우문술, 좌교위 장근, 내사시랑 우세기, 어사대부 배온, 황문시랑 배구, 그리고 이부상서 우홍이었다. 이 중에서도 우세기는 가장 영향력이 높은 최측근이었다. 양광이 인재선발에 힘을 쏟은 이유는 인재의 중요성을 알아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인물들을 자신의 인재로 바꾸기 위한 것이었다. 아버지 때의 인재들을 점차 갈아치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AD606년) 집권한 양광은 대대적인 행정개혁을 서둘렀다. 주를 군으로 바꾸고 도량형은 옛날 방식으로 되돌렸다. 오성(상서성, 문하성, 내사성, 비서성, 전내성)체제를 갖추었고, 삼대(알자대, 사예대, 어사대)를 만들었다. 백, 자, 남의 훈작을 폐지하고 대신 왕, 공, 후작으로 변경했다.(AD607년 4월) 

 

 

(39) 양광의 충신제거(AD607)

 

양견 때부터 양광 편을 들면서 권력을 장악해 오던 상서령 양소(素)는 AD606년 죽었다. 양광은 자신을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양소를 겉으로는 우대하는 척했으나 속으로는 매우 경계하고 박대했다. 태사(점을 치는 사람)가 하늘 별자리의 수(隋)지역에 큰 상(喪)의 기운이 보인다고 하자 양소를 그 자리에 해당하는 초(楚)공으로 삼았다. 대신 죽으라는 뜻이 숨어있다. 그 해 양소는 병으로 죽었지만 적어도 뜻으로는 양광이 죽인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양견의 충실한 신하 고경과 하약필과 우문필도 이 해에 죽음을 내려 받았다. 고경은 음악을 관장하는 태상경직을 맡고 있었는데 산악(散樂,유행음악)에 빠진 양광이 산악전문가를 등용하려하자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지만 양광은 듣지 않았다. 고경이 부하 ㅇ의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나라 천원(우문빈)은 천한 음악을 좋아하다가 나라가 망했고

 은나라의 거울도 그리 멀리 있지 않은데

 어찌 회복할 수가 있겠소?“

 

양광이 돌궐의 계민가한을 너무 심하게 예우하는 것을 본 고경은 태부경 하조에게 불평을 털어 놓았다.

 

“ 이 돌궐 놈들은 이쪽저쪽 지형을 꿰뚫고 있는 놈들인데

  저렇게도 후히 대접하게 되면

  앞으로 어떤 흉측한 일을 저지를지도 모르는 놈들이요. 참으로 걱정되지요.“    

 

그러면서 두루 다니면서 국가의 기강이 무너졌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예부상서 우문필 또한 고경에게 양광의 사치는 천원과 비교해도 못하지 않을 거라고 맞장구치면서 장성을 수축하는 것이나 운하를 파는 것이 시급한 일이 아니라고 양견을 비판했다. 광록대부 하약필도 양광의 연회잔치는 너무 사치스러운 것 같다고 꼬집었다. 양광은 조정을 비방하는 죄로 조서를 내려 모두를 죽였다.(AD607년7월29일)

 

 

(40) 유력한 황자 양간(楊暕)의 몰락(AD608)

 

양광의 장자 양소(昭, AD584-AD606)는 비만으로 열여덟 살에 죽었다.(AD606) 양광은 황태자 양소가 병으로 죽자 황태자를 책봉하지 않았다. 다만 양소의 동생이자 한 살 아래 차남 제왕 양간(AD585-AD618)에게 형의 모든 직위와 군대를 물려주면서 황태자 자격과 능력이 있는지 여부를 판단할 심산이었다. 광록소경 유건지에게는 양간의 교육을 맡겼다. 이렇게 되자 세간의 관심은 양간에게 쏠리는 것이 당연했다. 양간의 집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는데 대부분은 권력의 끄나풀을 잡으려는 소인배들뿐이었다. 게다가 양간은 전혀 인물이 못되었다. 측근들을 보내 여색을 섭렵하는데 몰두했다. 양광의 큰 누님 낙평공주 양려화(북주 선제 우문빈의 처)는 예쁜 미인 유씨를 골라 양광에게 바친 적이 있었는데 양광이 무관심해 내팽개치고 말았다. 낙평공주는 그런 유씨를 장래가 있어 보이는 조카 양간에게 보냈고 양간은 큰 고모가 추천한 유씨를 덥썩 받아 들였다. 그런데 양광이 갑자기 유씨를 찾은 것이다. 나중에 양간이 이미 유씨를 차지한 것을 알고 양광은 양간에게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한 번은 양광과 아들들이 같이 사냥을 나갔는데 양광은 별로 수확이 없었으나 양간은 큰 수확을 올렸다. 양광이 양간의 성공의 이유를 측근에게 묻자 측근들은 양간이 사람을 풀어서 사냥감을 그 쪽으로 몰아갔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양광은 괘씸하다고 생각하고 양간의 죄상과 허물을 찾으라고 몰래 지시했다. 양간의 부하 이궐 현령 황보후가 이유 없이 경계를 벗어난 사건을 꼬투리잡아 어사 위덕유가 그 우두머리 양간을 탄핵했다. 게다가 양간이 상처하고나서 처형 원씨와 통정하여 딸까지 얻었는데 관상쟁이가 그 원씨를 보더니 아들을 낳으면 황후가 될 상이라고 치켜세웠다. 이 말은 원씨의 서방(즉 양간)이 황제가 된다는 말이었다. 이말에 고무된 양간은 세 조카(즉 형 양소의 세 아들 , 양염, 양동, 양유)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몰래 엽승(주술)을 펼치기까지 하다가 들켰다. 양광은 양간의 측근 간신 교령칙 무리를 모두 처형했다. 양간의 애첩 원씨도 죽였다. 그리고 양간에 대한 총애를 거두었다. 양간의 스승 유건지는 폐서인 했다. 

  

 

(41) 간신 6인방(배구-배온-우문술-우세기-탁온-왕세충)과 설도형의 죽음

 

이즈음 수나라 국력은 최고에 달하고 있었다. 군이 190개, 현은 1255개. 전국 총 호수는 890만호. 호당 인구를 4명으로 잡아도 3천5백여만의 인구였다. 설도형은 재주와 학식으로 크게 이름을 떨쳐서 이부시랑에서 국가기밀을 다루는 내사시랑으로 옮겨졌고 양견의 말기에는 양주총관으로 갔었다. AD588년 진나라를 함락시킬 때 고경이 설도형에게 전쟁의 승부를 점치도록 하자 “아군은 도를 지키는 대군이요(我有道而大) 적군은 덕이 없으니 소군입니다.(彼無德而小)“라고 대답했던 인물이 설도형이다. 양광이 즉위한 뒤 설도형은 비서감으로 징소 되어 양견을 칭송하는 글을 지어 올렸다. 그러나 그 내용 중에 시경 소아 어조(魚藻)편에 실린 옛날 주나라 유왕(幽王,서주의 12대 마지막 왕. 웃지 않는 미인 포사 때문에 나라를 망침)을 죽인 신후(申候)의 고사로 양견을 빗댄 것이 문제가 되었다. 양광이 말했다.

 

“ 설도형이 북주조정을 지극히 찬양했는데

  여기에는 어조(魚藻)의 의미가 숨어있다.“

 

사예대부를 준 뒤 죄를 물을 생각이었다. 사예자사 방언겸이 그 사실을 알아채고는 설도형에게 빈객교류를 끊고 극히 행동을 조심하라고 귀띔했다. 그러나 설도형은 조정의 정책실패를 계속 비판했다. 특히 고경을 죽인 것이 정치 난맥상의 근본원인이라고 은근히 양광을 책망했다. 양광이 그 말을 듣고 설도형을 수사하도록 지시했다. 간신 어사대부 배온이 나서서 설도형을 매도했다. 시경을 빗대어 애매모호하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패역한 생각을 품은 것이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양광이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어릴 적부터 그와 같이 출정을 했지만 

  항상 나를 어리다고 깔보고 무시했었다.

  특히 고경이나 하약필 등과 함께 권세와 위엄을 마음대로 하다가

  이제 내가 즉위하게 되어서 마음이 편하지 않지만

  천하가 태평이어서 반란을 일으킬 수가 없을 뿐이다.

  공(배온)은 그의 패역한 속내를 정확히 꿰뚫은 셈이오.“

 

설도형은 자신의 기술이나 비판이 전혀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으므로 재판에 부치더라도 아무 탈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판결은 의외로 자진명령이었다. 설도형이 받아들이지 않자 관원들이 강제로 목을 졸라 죽였다.(AD610) 처자는 신강성 차말로 유배되었다. 

 

이 때 양광의 주변은 여섯 명의 아첨하는 간신들로 둘러 쌓여있었다. 어사대부 배온과 우익위장군 우문술과 내사시랑 우세기와 이부시랑 배구와 광록대부 곽연이 그들이다. 우문술은 특히 상사를 대접하는 일에 뛰어났고 곽연은 양광의 게으른 성격을 잘 알아서 양견 때 하던 조정회의를 대폭 줄여서 편하게 정치를 해야 한다고 꾀었다. 그런 곽연을 양광은 크게 칭찬하였다. 서역 출신 왕세충 또한 양광의 사치스런 성격을 잘 알고서 궁궐이나 건물을 극도로 호화롭게 건설함으로써 양광의 환심을 사고 총애를 입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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