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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기자의 유쾌한 명상 체험기 쉐우민 이야기, 열아홉 번째 이야기 소년 비구가 몰고 온 상념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10월28일 17시58분
  • 최종수정 2017년12월08일 14시02분

작성자

  • 김용관
  • 동양대학교 교수(철학박사), 전 KBS 해설위원장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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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조주가 남전을 만났을 때

  조주의 닉네임은 古佛이다. ‘옛 부처’라는 뜻이다. 부처님의 화신으로 믿어질 만큼 그의 생애는 특별하다. 아주 어려서 출가했고, 평균수명이 50도 안되던 당나라 시대에 무려 120년을 살았다. 

 

 

  60살이 되어 다시 행각을 시작했다. (행각은 ‘도장깨기’의 점잖은 말로 이해하면 된다.) 선불교 간화선 수행의 대표적 화두인 ‘무자 화두’의 본원이 바로 조주선사다. 당시 최고의 선사 남전에게 열 살이 안 된 동승 하나가 찾아와 인사했다. 남전 선사는 누운 채로 인사를 받으며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서상원(瑞像院)에서 왔습니다."

  "서상원에서 왔을 진대는, 상서로운 상(像)을 보았느냐?"

  "상서로운 상은 보지 못했지만, 누워 계시는 부처님은 뵈었습니다."

  남전이 놀라 일어나 앉으며 다시 물었다.

  "네가 주인이 있는 사미(沙彌)냐, 주인이 없는 사미냐?"

  "주인이 있습니다."

  "너의 주인이 누구인고?"

  "스님, 정월이 대단히 추우니 스님께서는 귀하신 법체(法體) 유의하시옵소서."

  선어록의 기록인데, 조주와 남전의 상면 이 첫 장면은 그의 생애에 비추어 몽땅 썰이라고 보기보단 어딘지 진실성이 있어 보인다. 암튼 선어록에는 이런 일화나 선사들의 깨달음 장면이 부지기수로 많다. 선사들은 깨달음을 얻고 오도송을 읊는다. 오도송이 없거나 시원찮으면 대우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수십 년을 이 방면에 마음 쏟아온 본인은 어록 속의 이런 극적 장면을 직접 목격한 적은 없다. (유사한 장면은 본 적이 있다.) 그러나 혜능이나, 조주, 임제 같은 종교의 천재들이 사람의 역사 속에 이따금 등장하는 건 사실이라고 믿는다. 다만 본인의 눈에 띠지 않을 뿐. 왠 느닷없고 긴 사설인가? 수행처에서 만난 나이 어린 비구가 불러일으킨 상념 때문이다.

 

 

  의젓하도다! 경이롭도다! 

  젊은 시절 ‘전강선사 일대기’를 오디오 테잎으로 들은 적이 있다. 한 시간짜리 테잎이 십여 개나 됐는데, 스님 자신이 찐한 전라도 사투리 육성으로 하는 법문으로 너무너무 리얼했다. 내용이 하도 재밌어서 수 십 번 반복해서 들은 기억이 있다.

 

  요즘 한국 선종에서는 ‘북 송담, 남 진제’라고 일컬어지는데 전강스님은 송담스님의 스승이시다. 스님은 스물 전에 출가해서 일찌감치 선방을 다니다가 깨달음의 기연을 만났다. 약관 스물 셋에 만공, 효봉, 한암 등 당시 내로라하는 여섯 선지식으로부터 모조리 인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 일화는 젊은 시절 내게 가슴 설레는 감동이었다. 그 시절의 감동이 쉐우민에서 되살아났다. 어느 날 선방에 스물이 채 될까 말까 한 사미가 앉아있었다. 검은 피부의 미얀마 소년, 사미승들 사이에 끼여서 사미학교에 다닐 만한 나이로 보이는데 선방에 앉아 좌선 수행하는 모습이 의젓함을 넘어 경이로웠다.

  작달만한 키에 은테 안경을 코끝에 걸쳐 쓰고 좌선 시 미동도 않는 것이 나이든 수행자들보다 더 안정된 모습이었다. 선정에 든듯한 고요한 표정으로 그렇게 앉아있는 모습만 봐도 신심이 났다. 경행할 때 시선도 코끝을 벗어나지 않았다. 공양을 위해 바루를 들고 줄을 서있는 모습은 탱화 속 아난존자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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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과 대화하는 모습 역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늘 心一境(마음을 한 곳으로 모음)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조주나 전강이 이 나이 때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들어 감동이 돋아났다. 저 소년수좌도 사야도를 찾아 점검을 받겠지? 두 사람의 문답의 장면이 못내 궁금해지면서 나의 상상력은 조주와 남전의 해후 장면으로 달음질 쳤다. 또 다시 만날 날이 있을까? 소년 수좌의 안부가 궁금하다.

 

  세 번 묻고 세 번 두들겨 맞다 

  소년 수좌의 얘기를 쓰다 보니 나의 상상력은 당나라 시대의 선승 임제에게로 닿는다. 임제는 후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선의 거봉이다. 우리나라 조계종도 임제의 선맥을 이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한다. (학자들은 조선 선맥의 중간조 서산휴정이 법안문익의 계통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말과 행적을 기록한 임제록은 ‘선어록의 왕’으로 불린다. 임제록에 기록된 임제의 깨달음 장면은 드라마틱하기 그지없다. 그 역시 스물 정도의 약관이었을 게다. 선배의 권고대로 스승 황벽을 찾아가 물었다. 

 

  “불법의 정확한 뜻이 무엇입니까?”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황벽은 임제를 방망이로 후려갈겼다. 이렇게 세 차례 묻고 세 차례 얻어맞았다. 인연이 없다고 생각한 임제가 황벽을 하직했다. 황벽은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대우에게 갈 것을 권했다. 대우에게 간 임제는 ‘방망이를 맞은 자신의 허물이 뭔지 모르겠다’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황벽이 그대를 불같이 반겼는데, 무슨 불평인가”라는 대우의 말에 임제는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말했다. 

 

  “황벽의 법이 별 게 아니로군”

 

  그러자 대우가 임제의 멱살을 쥐고 말했다.

 

  “이 오줌싸개 새끼야! 무슨 도리를 봤길래 그 따위로 말하는가? 말해봐라, 말해봐!”

 

  그러자 임제는 대우의 갈비뼈 밑을 세 차례 쥐어박았다. 

  임제록의 이 일화는 무척 유명하다. 후대의 각색이 있긴 하겠지만, 그런 비슷한 일이 일어나긴 했을 거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상상하고 기대한다. 그런 비슷한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지기를.

  본인의 인생도 이제 황혼녘, 현존하는 선지식들도 많이 만나보고 법문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선어록의 얘기들과 옛 선사들의 말을 되뇌이는 게 보통이어서 번번히 좌절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헤메인다. 그리고 매일 다시 시작한다.

 

 

 

  마음은 왕이다

  마음은 특정한 대상에 대해 일어난다. 대상 없이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대상을 알아차리는 일이 마음이 하는 일이다. 알아차리는 마음에 따라 여러 가지 심리현상들이 수반된다. 비유하자면 마음은 왕이다. 여러 심리현상들을 이끌고 갖가지 대상들에 존재적 지위를 부여한다. 마음은 대상에 대한 주체이며, 수반되는 심리현상의 주체이기도 하다. 마음은 욕망이나 분노의 주체가 되기도 하고 자비와 지혜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 붓다는 세상을 바르게 보고(正見) 번뇌의 마음을 지혜의 마음으로 바꾸어가라고 가르쳤다. 그리하면 마음은 해탈과 열반의 주체가 된다. 

  아비담마가 마음을 분류하는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89가지 또는 121가지로 분류하지만 기본적인 분류는 4가지이다. 마음이 일어나는 장소에 따른 분류이다. (여기서 마음이 일어나는 장소는 순전한 비유적 표현이다. 마음의 일어남 이전에 세상이 먼저 존재한다는 주장은 자가당착일 수 있다. 하지만 불교의 세계관은 이를 구체적 공간으로 이해하는 방향으로 변천해 왔다. 교리는 삼계를 중생이 윤회하는 장소로 이해하기도 한다.) 마음은 보통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에서 일어난다. 또 삼계를 떠나서 일어나기도 한다. 전자를 ‘세간의 마음’, 후자를 ‘출세간의 마음’이라고 부른다. 뒤집어 말하면, 마음의 일어남에 따라 욕계세상, 색계세상, 무색계세상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마음은 삼계의 세상을 벗어나기도 한다. 이를 해탈 또는 열반이라고 부른다. 

  이런 마음의 주체성을 간파하고 강조했던 唐代의 선사가 있다. 임제의현 선사가 바로 그 분이다. 임제록의 다음 구절들을 음미해보시라.

 

  “마음의 근원적인 법칙은 형상이 없으나 순수하고 유연하게 온 누리를 관통한다. 눈으로는 보며, 귀로는 듣고, 코로는 냄새를 맡으며, 입으로는 대화하고, 손으로는 잡고, 발로는 걷고 있지 않은가? 이는 본래 한 개의 신비한 구슬인데 쪼개져 여섯 조각으로 나누어진다. 즉, 근본적인 한 마음이 六根의 작용을 나누어 하는 것이다. 그 한 마음이 본래 空한 것이므로 서는 곳마다 해탈의 법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山僧은 왜 이렇게 설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구도자 여러분이 밖으로 향해 찾아 헐떡이는 마음을 쉬지 못하고 저 옛사람의 쓸데없는 언어와 행위에 매달려 흉내를 내려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살아있는 진리는 결코 지나간 언구와 형상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임제록 상당 10.6)

 

  ‘隨處作主 立處皆眞’

  본인이 임제를 만난 건 23살 때였다. 임제록을 읽고 가슴이 벅차오르고 두근거렸다. 말년의 임제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매일 황금 만 냥을 쓰는 삶’이라고 한 그런 삶을 나도 살고 싶었다. 임제의 사상은 내 삶의 나침반이 됐고, 급기야 학위논문의 테마가 되었다. 임제사상을 얘기하면서 빠질 수 없는 임제록의 구절이 ‘隨處作主 立處皆眞’이다.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는 자리마다 참되리라’라는 말이다. 나는 이 구절이 임제의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했다고 생각한다. 멋지고 유명한 구절이지만 누군가 도대체 그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을 때 설명해주기란 결코 쉽지 않다. 쉽지 않아서 설명은 어렵고 번잡해지기 십상이다.

  임제사상에 대한 해석 가운데 최근 가장 설득력을 갖는 이론이 임제와 장자를 연관시켜 보는 시각이다. 이런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장자사상의 진정한 계승자는 임제’라고까지 말한다. 그럴 듯한 주장이다. 임제 이후 선종사의 전개에서는 기실 老莊의 향취가 짙게 풍긴다. 삶의 절대적 자유와 주체성을 강조한 장자의 철학과 임제의 사상은 닮았다. 임제가 살았던 시대에 엘리트들 사이의 상식이었고, 임제의 공부 폭이 불교의 유식 뿐 아니라 유학과 노장까지 퍼졌을 것이라는 후대 전기 작가들의 말이 퍽 근거가 있다고 해도, 그러나 선사인 임제를 해석하는 가장 기본적 툴은 불교의 교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본인은 ‘수처작주 입처개진’의 여덟 글자를 ‘마음의 주체성’을 유식과 노장의 배경에서 뚜렷하게 드러낸 법문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백 마디 설명보다 원전에서 이어지는 구절들이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구도자 여러분!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는 자리마다 참되리라. 어떤 경계에서도 잘못 이끌리지 않으리라. 오랫동안 지은 나쁜 버릇과 무간지옥에 떨어질 카르마가 있어도 삶은 자연스레 해탈의 큰 바다로 변하리라. 오늘날 수행자들이 진리의 자유로운 본성을 이해하지 못함은 마치 코에 닿으면 무엇이든 입으로 몰아넣는 염소와 같다. 종과 주인, 손님과 주인도 구별할 줄 모른다.”

(임제록 시중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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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17년12월08일 14시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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