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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의 심쿵 인터뷰] - 서귀포서 21세기 피카소 꿈꾸는 작가 한중옥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04월17일 11시59분
  • 최종수정 2017년04월14일 17시02분

작성자

  • 김동률
  • 서강대학교 교수. 매체경영. 전 KDI 연구위원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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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크레파스는 묘한 존재다. 크레파스란 말을 들으면 우리는 그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 기성세대에게는 과거로 가게 하는 효과적인 기제다. 아, 또 있다.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한 손에는 크레파스를 사가지고 오셨어요”로 시작되는 동요다. 누구나 한번쯤 불렀고 또 들었던 그 시절의 노래였다. 그러나 크레파스는 초등 미술시간으로 끝난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그 누구도 크레파스를 찾지 않는다. 그래서 크레파스는 잊혀진 추억의 소품이었다. 그런 크레파스를 가지고 일생일대의 작업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한중옥(60) 선생이다. 제주 토박이인 그는 평생 제주를 벗어나지 않고 크레파스 하나만 가지고 제주의 풍광을 그리는 작업을 해 왔다.

 

암석·햇살 펼쳐지는 듯한 사실감

크레파스 질감 이용한 착시 현상

보는 각도 따라 빛 흐름·형상 변해

 

피카소의 기법도 처음엔 거부반응

새로운 사조로 자리 잡을 때까지

칠하고 깎아내기 고독한 작업 계속

 

-왕자 크레파스가 생각난다. 왕관을 머리에 쓴 왕자님 로고가 어제같이 선명하다. 하지만 오늘날 화단에서 크레파스로 작업한다는 소리는 처음 들었다. 왜 크레파스인가.

 

“좀 어려운 얘기를 해도 될지 모르겠다. 그림에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 화가에게도 과학자 못지않은 실험정신이 요구된다는 의미다. 그 변화의 기제로 재료가 작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왔다. 지금의 시대는 복잡하다. 뭘 표현한다는 게 상당히 지난한 작업이 된다. 그저 과거처럼 풍경이나 인물을 그리는 시대가 아니다. 재료도 마찬가지다. 과거처럼 물감으로만 표현하는 시대는 이제 갔다고 봐야 한다. 세상은 늘 바뀐다. 백남준을 봐라. 한 세대 전 이미 비디오라는 새로운 소재를 들고 나와 세계 미술계를 정복했다. 뉴욕의 MoMA(The Museum of Modern Art)에 한 시간 앉아 지켜봐라. 모네의 수련도 눈길을 모으지만 전문가들이 가장 많이 찾는 그림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인 잭슨 폴록이다. 그는 캔버스 위로 물감을 흘리고, 끼얹고, 튀기고, 쏟아 부으면서 몸 전체로 그림을 그리는 ‘액션 페인팅’을 선보였다.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이자 오늘날 팝 아트가 등장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주인공이다. 이처럼 재료나 소재의 한계를 뛰어넘어 시대를 앞서가야 하는 게 창작인들의 소망이자 소명이다.

 

나는 평생 크레파스와 칼을 가지고 작업해 왔다. 크레파스를 캔버스에 두껍게 칠하고 예리한 칼로 벗겨내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런 점에서 회화이지만 조각과도 상당히 가깝다. 붓과 달리 칼은 예민하고 또 예리하다. 입체적이다. 크레파스와 나는 궁합이 잘 맞는다.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실험적인 방법을 찾는 것도 작가에게는 중요하다.”

 

- 작업하는 크레파스는 아주 고품질의 특별히 제작된 크레파스여야겠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만 아니다. 학교 앞 문방구점에서 파는 평범한 크레파스다. 1만원이면 한 통 산다. 당연히 경비는 유화나 다른 재료에 비해 훨씬 싸다. 그러나 노력은 몇 배가 더 든다. 수십 번을 칠해 두껍게 한 뒤 칼로 깎아내는 작업은 심신을 피로케 한다. 게다가 크레파스는 화학제품이라 유해독소가 내장돼 있다. 장시간 작업하다 보면 머리가 띵해진다. 고정관념이란 게 무섭다. 많은 사람이 크레파스를 두고 회화 입문의 보조 수단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 한다. 표현의 한계성을 주장하지만 근거가 없다. 크레파스가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어떤 소재로도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초등 시절 크레파스부터 들고 미술 공부 시작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시기에 사용되는 제한된 재료로만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는 크레파스는 매력적인 재료다. 나는 두껍게 칠해진 크레파스를 깎아 내면서 새기고 긁고 문지르며 작업을 한다. 겉을 채운 피부막을 걷어내고 여린 속살을 보여주는 그런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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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토박이 화가 한중옥 선생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고독한 작업이지만 칠하고
   또 칠하고 깎아내는, 기약 없는 작업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사진 한중옥]

 

- 대부분의 작품이 제주를 배경으로 한다. 마치 바르비종에 머물렀던 밀레를 연상케 한다.

 

“‘만종’이나 ‘이삭 줍는 사람들’이 그렇다. 우리에게는 유년 시절 이발소에서 봤던, 익히 아는 낯익은 작품들이다. 밀레는 바르비종을 몹시 좋아했다. 30대 후반인 1849년 바르비종에 정착한 이후 삶을 마감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는 퐁텐블로 숲을 둘러싸고 있는 평원들의 풍경에 심취됐고 그곳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바르비종 마을의 입구를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 데생 작품을 그렸다. 이처럼 특정 지역을 선택해 집중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근·현대 미술사에 꽤 있다.

 

나는 제주도에서도 남쪽 끝인 서귀포에서 나고 자랐고 초·중·고를 거쳐 제주대를 다녔다. 결혼하고 아이들 낳고 인생의 전부를 서귀포에서 보냈다. 서귀포는 같은 제주지만 바람도 다르고 바다의 물빛, 바위들의 질감·형태도 다르다. 사실 제주도를 소재로 한 작품은 요즘 차고 넘친다. 사진 작품도 많이 있고. 돌을 다룬 작품도 많다. 제주의 용암석이 주는 색상과 질감은 독특하고 기이하다. 당연히 매력적인 소재가 된다. 나는 오랜 세월 제주도의 돌에 집착해 왔다. 그러나 나의 그림은 기존의 작업과는 거리가 멀다. 칼로 한 겹 한 겹 벗겨내며 속을 드러내는 방식, 일정 부분 조각적인 공정으로 이뤄졌지만 그러나 엄연히 회화 작품이다. 평면으로 들어가 입체적인 이미지를 발굴해 내고 있다. 용암석이란 화산 폭발로 분출한 용암이 수십억 년 흙에 덮여 변성암이 되고 다시 수억 년의 세월이 흘러 수성암이 되면서 탄생한다. 돌·바위는 세월·인고·고요·침묵·깊음 등등 동양인들이 천착해 온 사유의 구상물쯤 된다. 그래서 시나 노래,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나는 돌 중에서도 제주도의 돌, 즉 구멍이 숭숭 뚫린 흉측한(?) 용암석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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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겹의 크레파스를 덧칠한 후 칼로 긁어내고 새기는 작업으로 완성한 한중옥 화백의 돌

   시리즈 중 하나. 자연이 남긴 흔적이자 시간의 완성품인 돌의 표면을 통해 약육강식의 세계

   를 표현했다. [사진 한중옥]

 

- 그림을 보면 사진인지 그림인지 모를 정도로 사실적이다. 이른바 1960, 70년대 서구 화단계를 강타했던 하이퍼 리얼리즘의 세계를 다시 보는 것 같다.

 

“60년대 후반부터 유행했던 서구의 하이퍼 리얼리즘, 포토 리얼리즘, 래디컬 리얼리즘과는 다르다. 그들은 주관을 극도로 배제하고 사진처럼 극명한 사실주의적 화면 구성을 추구했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좀 더 다르게 접근하려고 애썼다. 찬찬히 보고 있으면 알게 된다. 암석과 햇살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사실감이 서서히 나타난다. 그러나 이는 크레파스의 질감을 잘 이용한 시각적 착시 현상일 뿐이다. 대단히 사실적이지만 단순한 돌의 재현에 있지 않다. 가만히 지켜보면 느낌이 다르다. 보는 각도에 따라 빛의 흐름은 물론이고 형상까지도 변한다. 음각이 양각이 되기도 하고 양각이 음각이 되기도 한다. 혼란스러운 장면이다. 푹 파인 바위 구멍이 보기에 따라 툭 튀어 나온 돌출부가 되고 그래서 보는 이들이 상당히 혼란스러워한다. 나는 이처럼 내 그림에 복선을 심었다. 내가 주장하는 미, 심미의 가치다. 덧칠해 깎아 낸다는 것은 풍파에 씻기며 아로새겨진 돌의 역사를 읽어 내고 기록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아직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혼자만의 고독한 작업이다. 세상 이치가 다 그런 것 아닌가. 20세기 미술을 지배한 피카소도 큐비즘(입체파)이라는 낯선 기법을 세상에 선보일 때 거부반응이 많았다. 그러나 예술 전반에 혁명을 일으키며 미술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20세기의 모든 미술가는 피카소에 눌려 숨도 쉬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그는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실험적인 시도를 해 왔다. 독창적이었고 때로는 도발적이기까지 했다. 서울도 아닌 제주 촌구석에 있지만 나는 늘 피카소를 꿈꾼다. 언젠가 크레파스로 그린 작품이 화단에 하나의 새로운 사조로 자리 잡기를 기대하며 칠하고 또 칠하고 그리고 깎아 낸다. 누구는 나를 두고 시시포스산의 프로메테우스 같은 기약 없는 작업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설사 도로(徒勞)라도 결코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한중옥 화백은 한동안 서귀포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화가 이중섭을 무척 닮았다. 영화 ‘이중섭’의 주연 배우가 한중옥 화백이었으면 딱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과 얘기를 주고받다 보니 크레파스가 언젠가 한국 그림판의 주요 소재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불현듯 들었다. “그릴 것은 너무 많은데 하얀 종이가 너무 작아서/ 아빠 얼굴 그리고 나니 잠이 들고 말았어요./ 밤새 꿈나라에 아기 코끼리가 춤을 추었고/ 크레파스 병정들은 나뭇잎을 타고 놀았죠.” ‘아빠와 크레파스’를 들었던 사람들에게 그가 보여준 크레파스 그림은 달콤 씁쓸한 그리움의 오브제가 된다.

 

<위 글은 중앙선데이 제526호 (2017.4.9)에 게재된  [김동률의 심쿵 인터뷰] ‘ 서귀포서 21세기 피카소 꿈꾸는 작가 한중옥’을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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