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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의 심쿵 인터뷰] 뒤로 호박씨 까는 사회에 시비 건 ‘사라’ 때문에 인생 망쳐 -등단 40년 시집 『시선』 낸 마광수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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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7년03월03일 16시34분

작성자

  • 김동률
  • 서강대학교 교수. 매체경영. 전 KDI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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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발적인 성애 표현으로 가득 찬 D H 로런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1928)은 세계문학사의 고전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클래식으로 인정받은 것은 온갖 비난 속에 작가가 죽고 세월이 한참 흐른 뒤였다. 고전이란 원래 세월이라는 유약이 칠해져야 그 진가를 인정받는 법이다. 소설 『즐거운 사라』(1992)를 내놓자마자 대중의 몰매를 맞고 사실상 폐인에 가깝게 생을 이어 온 작가가 있다. 마광수(66·전 연세대 국문과 교수) 선생이다. 스스로 실패한 인생이라고 자조하는 그가 최근 등단 40년을 맞아 새 시집 『시선』을 냈다. 세상에 대해 불만이 많은 시인이 오래간만에 입을 열었다.


-할 말씀이 많다고 들었다. 어렵게 모셨으니 주저 말고 얘기하시라.

 

“난 실패한 인생이다. 심경이 착잡하다. 지난해 여름 연세대에서 정년 퇴직을 했다. 인생을 정리하다 보니 여러 가지 회환이 밀려온다. 문학도 인정받지 못했고 학계나 문단에서도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한 많은 인생이다. 하루 종일 멍하니 지낸다. 같이 살던 어머니마저 연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넓은 아파트에서 덩그렁 혼자 산다. 말 상대도 없다. 몹시 우울하고 외롭다. 여자 친구가 너무 아쉽다.”


-청년기는 화려했다. 아니 눈부시지 않았나.

 

“그랬다. 지금은 없어진 청계초, 대광중·고를 거쳐 연세대에 입학했다. 국문과생이지만 드물게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의기양양하게 입학했다. 연세대에는 대광고 출신이 많다. 대광고 응원가는 연세대 응원가를 그대로 사용했다. 서울중에 지원했는데 체력장 때문에 떨어졌다. 180점 만점에 체육이 20점인데 난 빵점을 받았다. 내 몸을 봐라. 엄청 부실하다. 한국전쟁 와중에 1·4후퇴 때 태어났다. 개성이 고향인데 전쟁 통에 모유는 물론이고 우유도 구경 못했다. 그게 원인인지 허약 체질에 폐병을 앓는 등 늘 병을 달고 다녔다. 나에게 체육시간이란 견학시간이었다. 중·고교 6년 동안 체육시간에 구경만 했다. 재미있는 공놀이 한 번 못해 보고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런 만큼 대학 시절이 내게는 황금기였다. 당시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계시던 시인 박두진 선생에게 인정을 받았고 선생의 추천으로 스물여섯에 현대문학을 통해 시로 문단에 데뷔했다.”


-초창기에는 문학적 업적도 상당했다고 들었다. 오늘날 윤동주 시인이 대중으로부터 폭넓게 존경받는 것은 마 선생의 공이라는 평가도 있고 요절한 기형도 시인도 선생이 발굴했다.

 

“윤동주를 몹시 좋아했다. 그가 가진 지사적인 면모보다는 인간으로 좋아했다. 내가 솔직한 것을 좋아한다. 현대인은 모두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아주 솔직한 시인, 드물게 가식이 없는 인물이다. 시 ‘자화상’을 읽어 봐라. 자아를 투명하게 숨김없이 고백하고 있다. ‘별을 헤는 밤’ ‘서시’ 등의 시에는 내면의 부끄러움이 잘 드러나 있다. 그래서 좋아했고 연구하게 됐다. 박사 논문도 윤동주 연구였다. 그의 시는 이해하기 쉽다. 나는 어려운 작품은 질색이다. 어려운 작품은 작가가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기에 그런 것이다. 쉽게 쓰여진 시, 쉽게 읽혀지는 작품이 빼어난 작품이다. 기형도의 시도 어려움 없이 가슴에 착 와 닿는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심사했다. 기형도의 시를 접하는 순간 감이 왔다. 한치의 망설임 없이 그를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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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던 교수님이 어느 날 갑자기 도발적인 성애 스토리를 발표했다. 『즐거운 사라』는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작품이다. 무엇에 홀렸나, 왜 돌연 그런 작품을 내놓았나.

 

“남들은 시대를 앞서갔다고 얘기하지만 나는 그런 거대한 소명의식은 없었다. 다만 나는 한국 사회의 이중성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이다. 겉으론 근엄한 척하면서 뒤로는 호박씨를 까는 우리 사회의 행태에 한 번 시비를 걸어 본 것이다. 성에 대한 알레르기 현상을 깨부수고 싶었다. 그러나 대가는 너무 컸다. 내가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손봉호 선생은 나를 두고 ‘마광수 때문에 에이즈가 한국 사회에 창궐한다’고 비난했다. 성에 대한 담론과 에이즈가 무슨 상관관계 있나. 문학의 본질은 사랑이다. 사랑을 빼면 문학은 시체다. 그리고 단언하건대 사랑의 본질은 섹스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도 공부하고 나름대로 자신이 있어 발표한 작품이 『즐거운 사라』였다. 음지에 있던 성적 담론을 양지로 끄집어낸 죄밖에 없다. 지금 이 순간 주위를 둘러보라. 거의가 내가 얘기한 대로 가고 있지 않나. 아니 내 얘기보다 훨씬 더 나갔다. ‘섹드립(섹스에 관한 애드리브)’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라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 한동안 재임용에서도 탈락하고. 학교 권력에 관심이 없는데 동료 교수들조차 나를 콕 찍어 밀어냈다(이 대목에서 그는 눈물을 글썽였다).”

 

마 선생은 소설 『즐거운 사라』 출판으로 음란문서 유포죄에 걸려 구속 기소됐다. 92년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받고 상고했지만 대법원에서도 유죄가 확정됐다. 98년 김대중 정부에 의해 사면 복권되긴 했으나 『즐거운 사라』는 지금도 출판 금지 상태다.


-사라양 때문에 콩밥 구경도 했다.

 

“문학을 법이 심판하는 나라는 공산주의 국가나 독재 국가뿐이다. 이른 새벽에 검찰 수사관들이 쳐들어와 나를 끌고 갔다. 영장도 없었다. 표현의 자유는 모든 자유를 자유롭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유다.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on liberty)』에서 평생 주장한 인류 최고의 진리다. 개개인의 자유는 자신의 사고와 말, 행위가 다른 사람들을 해치지 않는 모든 범위에서 절대적이다. 국가의 법률이나 일반적인 도덕적 판단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 특히 문학의 경우 평단의 비평을 통해 평가받아야 한다. 사상의 공개시장(the marketplace of ideas)이 작동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권력이 문학에 칼을 들이댄 것이다. 나를 잡아간 검찰도, 형을 선고한 재판부도 문학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더라. 속수무책, 그냥 사회적인 분위기에 힘입어 나를 마녀 취급하며 감옥에 가둔 것이다. 덕분에 해외에서 유명세를 치렀다. 격려편지가 날아들고 해외 유명 언론들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특히 섹스 천국이라는 일본의 관심은 대단했다.”


-인터뷰하는 나도 그 시절이 비교적 생생하다. 그렇지만 회고하건대 지지자는 드물었다. 왜 그랬을까?

 

“나도 모르겠다. 성에 대해 지나치게 솔직한 게 죄인지 아니면 시대를 너무 앞서간 것인지…. 다만 장정일·강준만 같은 이가 일간지 기고를 통해 나를 변호했다. 연세대 국문과 재학생 동문들이 ‘마광수가 옳다’는 제목의 두꺼운 단행본을 발간해 나를 음으로 양으로 지원해 줬다. 그러나 지지자는 극소수였고 나를 도와줘야 할 문단에서도 외면하거나 기껏해야 양비론으로 일관했다. 결국 심한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았다. 결혼생활도 원만하지 못했다. 85년에 결혼했으나 90년에 이혼했다. 내 인생의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올해가 윤동주 탄신 100주년이다. 난 윤동주 연구로 박사가 됐고 교수가 됐다. 윤동주처럼 멋진 시인이 꿈이었다. 하지만 후세 사람들이 나를 변태, 색마, 미친 말(광마)로 기억할까 두렵다.”

 

마광수 선생과의 인터뷰는 시집 『시선』을 두고 문학적인 담론으로 근사하게 시작했으나 결국 섹스에 관한 논박으로 끝났다. 늘 느끼지만 마 선생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삶을 사는 듯하다. 어찌 보면 나이나 교수·시인·소설가라는 사회적 위치와는 무관하게 순연한 자신만의 생을 추구하는 ‘나이브’한 이단아쯤으로 보인다.

 

그와의 인터뷰를 마칠 때쯤 문득 한 세기 전 보수적인 빅토리아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파격적인 성애를 즐기다 나라 밖으로 쫓겨나 비참하게 객사한 오스카 와일드가 떠오른다. ‘비록 우리 모두 시궁창에 살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들 중 누군가는 별을 바라보고 있다’. 런던 트래펄가광장 귀퉁이에 있는 그의 묘비명이다. 불현듯 마 선생이 추구하는 별과 와일드가 추구했던 별이 사촌 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바라본 지가 너무 오래됐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겨울이 한껏 깊었다.

 

<위 글은 중앙선데이 제515호 (2017.1.22)에 게재된  [김동률의 심쿵 인터뷰] “뒤로 호박씨 까는 사회에 시비 건 ‘사라’ 때문에 인생 망쳐-등단 40년 시집 『시선』 낸 마광수”를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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