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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궤양 서너 번 앓아야 실력 있는 이발사, 100년 채워야죠 [김동률의 심쿵 인터뷰] ‘90년 된 이발소 주인 이남열’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01월26일 17시41분
  • 최종수정 2017년01월26일 17시42분

작성자

  • 김동률
  • 서강대학교 교수. 매체경영. 전 KDI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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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너 살 때 기억이다. 아버지를 따라 이발소란 곳을 처음 가 봤다. 아마 그 전에도 갔겠지만 기억은 없다. 이발사 아저씨는 성인용 의자 팔받침에 주름진 나무 빨래판을 걸치고 나를 앉혔다. 처음 들어 본 바리캉의 기계소리에 나는 놀라 움찔거렸고 아저씨는 박하사탕 하나를 가만히 쥐어 주었다. 내 생애 이발소의 첫 기억이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이발소를 언제 가 봤는지 가물가물하다. 오늘날 이발소는 ‘그때를 아십니까’에 가끔씩 등장하는 과거로 인정된다. 그런 구시대의 유물쯤 되는 이발소가 서울 중심에 아직도 턱 버티고 있다. 성우이용원이다. 아는 사람은 아는 전설적인 이발소다. 문을 여는 순간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것 같은 착각에 젖게 된다. 주인장인 이발사 이남열(69) 선생을 만나 그 시절로 한번 돌아가 보자.

 

-1927년 개업했으니 올해로 꼭 90년째다.

 

“외할아버지(서재덕)가 개업했다. 원래 앙꼬(단팥)빵 기술자였으나 일본인에게서 이발을 배워 개업했다. 조선인으로 두 번째 자격증을 땄다고 들었다. 아버지(이성순) 역시 일본인에게서 배워 자격증을 땄다. 212호다. 당시 시공관(옛 명동 국립극장 건물) 구내 이발관에서 일했으나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출퇴근이 어렵자 장인어른 이발소에서 일하게 됐다. 장인과 사위가 동업자로 만났으니 묘한 인연이다. 1935년 일제강점기 때 일이다. 모두가 헐벗고 못 먹던 그 시절, 이발소도 괜찮았지만 난 이발에 흥미를 못 느꼈다. 5남2녀가 단칸방에서 살았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 집이 모두 10평이다. 이발소가 4평, 그리고 붙어 있는 살림집, 부엌을 합쳐 6평이다. 어릴 때는 좁은 집이 싫어 늘 밖으로만 돌았다. 1평짜리 재래식 화장실은 도시계획으로 10여 년 전 잘려 나갔다.”

 

-어떡하다 이발사가 됐나? 운명인가?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그래도 내가 꼼꼼하고 손재주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은근히 내가 진학보다는 이발소에서 일하기를 기대했다. 가끔 청소를 도와 드리면 용돈으로 50원을 받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때 흰 쌀밥 먹기란 참으로 힘들었다. 그래서 늘 배가 고팠고 신촌 일대는 영양을 보충하는 데는 최고였다. 여름날 작대기·소금·성냥만 들고 나가면 포식했다. 구워 먹는 뱀과 개구리는 최고의 보양식이었다. 가끔 기차도 몰래 탔다. 이대 캠퍼스 근처 신촌역 쪽에 개구멍이 있어 그쪽으로 곧잘 신촌역 안으로 진입해 몰래 기차를 탔다. 파주·문산 등으로 다니면서 철없이 놀았다. 그러다가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대신 면허증을 따고(1970년) 가위를 잡은 게 지금의 이발사 인생이다.”

 

-지금은 외려 유명해지고 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이발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나도 놀랐다. 저기 딱딱한 나무벤치에 앉아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가 머릴 깎았다. 혼자 꾸벅꾸벅 졸면서 기다리는 모습을 보니 왠지 즐겁더라. 재벌회장이라고 해서 이발하는 데 차이가 있겠는가. 그냥 순서대로 정성껏 깎아 드리면 그뿐이다. 다만 수행원들이 있을 공간이 없어 밖에서 불편해했다. 딱딱한 나무벤치에 반시간만 앉아 봐라. 무척 피곤하고 좀이 쑤신다. 편하고 푹신한 의자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등받침 없는 저런 의자는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많은 사람이 힘들어 한다. 하지만 좋은 의자 놓을 공간도 없다. 저 의자 또한 나와 함께 늙어 간다. 박원순 시장도 왔고 노회찬 의원도 가끔 오신다. 언론에 등장하는 유명한 분들도 심심찮게 들른다. 근래 들어 외국인 손님이 조금 늘었다. 특히 일본 분들이 방한하면 어디서 소문 듣고 찾아온다. 수백 년 가업을 계승하는 그네들의 정서에 90년 된 늙은 이발소가 먹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만리동은 달동네 중에서도 달동네다. 미화원·노점상·노가다(막일꾼의 일본어 표기)들이 주 고객이다.”

 

-내부 인테리어가 장난이 아니다. 일부러 이렇게 꾸미기도 쉽지 않겠다.

 

“인테리어라고 할 것도 없다. 그냥 외할아버지·아버지 때부터 주욱 내려온 비품들이다. 의자는 바론이라는 메이커인데 폐업한 지 오래다. 바론(baron)이 뭔가. 남작이라고 어떤 손님이 알려줬다. 저 의자에 앉아 머리를 깎을 때만큼은 귀족의 기분을 내 보라는 의미인데…. 그런데 내가 봐도 너무 낡았다. 바리캉도 그렇고 드라이어 등 기기들 대부분 100볼트짜리다. 기본적으로 30년은 훨씬 넘은 골동품들이다. 쌍둥이칼로 유명한 헨켈 면도칼은 제작된 지 100년도 넘었지만 여전히 위력적이다. 저 파란 날을 한번 봐라. 가슴이 서늘하다 못해 움찔하지 않은가. 겁나는 면도칼이다. 그러나 가장 압권은 세면대와 물탱크다. 물탱크는 1955년에 만들었다. 직사각형 시멘트 물탱크에 물조리개를 통째 넣어 찬물을 담아 연탄난로 위 들통의 더운물을 섞어 손님들의 머리를 감겨 준다. 샤워기는 없다. 플라스틱 물조리개를 보고 ‘물조리개로 머리를 감다니, 이거 참 오랜만인데’ 하고 감탄하는 분이 꽤 많다.”

 

-참으로 오래 해 왔다. 이발과 궁합이 맞는 모양이다.

 

“이발, 이거 아무나 못한다. 우선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 웬만한 사람들이 가위를 잡으면 속에서 ‘무두질이 난다’(속이 울렁거린다는 의미를 이렇게 표현했다). 속이 답답해지고, 그래서 위궤양 환자가 많다. 일종의 직업병인 셈이다. 위궤양 서너 번 앓아야 실력 있는 이발사가 된다는 말이 있다. 상당한 내공이 필요하다. 한국인의 급한 성정에 이발사란 쉽지 않은 직업이다. 요즘은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진상 손님도 많았다. 가난한 동네, 생계형 불량배 응대도 큰 골칫거리다. 그래서 오래된 가위는 있어도 오래된 이발사는 찾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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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째다. 4대를 기대해도 될까.

 

“희망이 보인다. 경제가 잘 돌아가면 4대째는 어렵다. 이발은 사양산업이 된 지 오래다. 누가 이어받겠는가? 지금 직장에 다니는 아들의 눈치만 보고 있다. 경기가 좋지 않아 살기가 힘들 때쯤이면 내게 말을 걸어오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소금장수와 우산장수를 둔 부모의 마음이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이곳에서 생을 이어 왔다. 세상이 많이 변했지만 그래도 만리동 고개는 여전히 유년 시절의 향수를 느낄 수 있어 좋다. 성우이용원이 100년 되는 날까지 가위를 잡을 수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이발사는 오래된 직업이다. ‘효자동 이발사’란 영화도 있고 ‘세비야의 이발사’라는 오페라도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발사는 인간사회에 꽤나 사연 많은 직업인가 보다. 그러나 성우이용원은 이제 너무 낡았고 주인장 이남열 선생도 잡으면 바스러질 정도로 섬약해 보인다. 두어 시간 지켜보던 나는 그에게 때이른 이발을 부탁했다. 그는 바닥에 놓여 있는 목침 위에 올랐다. 작은 키를 커버하느라 목침을 발판 삼아 이발을 한다. 사각사각 가위질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불현듯 조니 뎁이 주연한 영화 ‘가위손’(1990)을 떠올렸다. 팀 버튼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아름답고 슬픈 동화다. 세상의 온갖 정원수를 아름답게 트리밍하고 머리를 멋지게 손질하는 그 가위손 말이다. 서울의 남루한 골목 만리재 고갯길, 90년 된 성우이용원에는 낡은 가위손이 저 홀로 야위어 가고 있다.

 

 <위 글은 중앙선데이 제514호 (2017.1.15.)에 게재된  [김동률의 심쿵 인터뷰] ‘90년 된 이발소 주인 이남열’을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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