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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는 되어야 소통하는 군주다.(#1) -애첩(척비)대신 충신을 택한 유방-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6년09월13일 16시39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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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소통(疏通)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서 듣는 것이다.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듣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명령이고 지시이고 하달이다.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교화되고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소통은 그냥 듣는 것이 아니고 ‘듣고 고침(聞改)’이다. 소통은 매우 어렵다. 첫째, 높은 사람들이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고치려고도 하지 않는다. 둘째,  낮은 사람들이 말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육단여친(肉袒輿櫬), 즉 죽음을 각오하는 의미로 웃옷을 벗고 관과 상여를 끌고서 곧은 말을 하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렵다. 셋째,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의 말이 통하는 길, 즉 언로(言路)가 대부분 막혀있다. 결국 소통은 듣는 자와 말하는 자와 길(언로)의 삼박자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듣는 사람이다.  

역사상 보기 드문 몇 가지 소통의 사례를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수록된 중국 역사에서  간추려 시리즈로 엮어본다. 

 

 

(1) 유방과 척비(戚妃)와 황태자 교체문제

 

□ 황태자 교체를 강력히 반대한 주창(周昌)과 숙손통(叔孫通) 

 

유방(재위 BC206년-BC195년)은 10여명의 비빈들 중에 유난히 척(戚)비를 아꼈다. 당연히 그에게서 난 조왕(趙王) 유여의를 황태자로 세우고 싶어 했다. 자기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데다가 본부인 여후에게서 난 지금의 황태자 유영이 나약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모 척비 또한 자기 아들을 황태자로 바꾸어 달라고 자꾸 울면서 졸랐으니 유방도 그럴 생각이었다. 거의 모든 조정 대신들이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확고한 황제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어 다만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 많은 신하 중에 말을 심하게 더듬는 어사대부 주창(周昌)이 나섰다. “신, 신, 신이 입, 입, 입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신, 신, 신은 그것이 옳, 옳, 옳지 않다는 것만은 확, 확,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폐, 폐, 폐하께서 태자를 폐하라는 명, 명, 명령을 내리시더라도 신, 신, 신은 조, 조, 조서를 절, 절, 절대로 받들 수가 없, 없, 없습니다.“ 말을 더듬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다고 느낀 황제가 웃었다. 황후 여씨는 주창에게 감사하며 말했다. “그대가 아니었으면 우리 아들이 폐위될 뻔했소.” (BC 197년) 

 

마침 경포가 회남(淮南, 지금의 안휘성)에서 그리고 진희가 대(代, 지금의 북경 서쪽 대동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황태자 교체 문제는 당분간 수면 아래로 잠겨 있게 된다. 2년 뒤인 BC 195년에 반란이 수습되자 바로 유방이 이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당시 유방의 병이 매우 나빠지고 있었으므로 더욱 더 황태자 교체를 서둘렀다. 강력히 반대했으나 황제가 듣지 않자 장량(張良)은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하고 말았다. 태부 숙손통이 나섰다. “춘추전국시대 진 헌공이 총애하는 여희 때문에 태자 대신 여희 아들 해제를 세웠다가 전국이 수십 년 혼란에 빠지고 웃음거리가 되지 않았습니까. 또 진시황제는 적장자 부소 대신 조고의 꾐에 넘어가 호해를 세웠다가 스스로 제사를 끊기게 한 것을 직접 두 눈으로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폐하와 황태자의 모후인 여후는 평생을 같이 고생하면서 맛없는 식사를 나누었는데 어떻게 배신하신다는 말씀입니까? 폐하께서 적자를 폐위하고 두 살짜리 간난 아기 유여의를 세우신다면 신을 먼저 죽이시어 제 목의 피로써 땅을 더럽히게 해 주신 다음에 그리 하십시오.” 

 

 유방이 깜짝 놀라서 대꾸했다. “아니, 아니 장난으로 그리 말해 본 것일 뿐이야.” 숙손통이 더욱 놀라서 말했다.“태자 후계 문제는 천하의 근본문제인데 근본이 한 번 흔들리면 천하가 진동하는 법입니다. 어찌 천하를 가지고 장난질 하시는 것입니까?” 대신들의 생각이 완고하다는 것을 알아 챈 유방은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었지만 태자 교체 문제를 접기로 하였다. 늙은 본처 여황후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안 본지도 오래 되었고 곁에는 총애하는 척후가 매일 가까이 보살피며 독촉했지만 유방은 자기 생각을 포기했다. 그 해 얼마 뒤 유방은 죽었고 황태자 유영이 바로 한나라 2대 황제 혜제(惠帝)가 된다. (BC195년 5월 20일 즉위) 만약 여기에서 황태자를 폐위시키고 척비의 아들 유여의를 세웠다면 아마도 한나라는 진나라 전철을 밟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한나라가 전후하여 460여년 지속되는지 안 되는지의 여부가 여기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 황제를 조고(趙高)에 빗댄 번쾌(樊噲)의 지적을 받아들임

 

BC196년, 그러니까 유방이 사망하기 꼭 일 년 전 몸이 매우 불편해진 유방(당시 60세)은 모든 사람의 궁궐 출입을 금지시켰다. 주발이나 관영 같은 초특급공신들도 전혀 유방을 만나 볼 수가 없게 된 것이 열흘이 넘었다. 그러나 명령이 워낙 엄한지라 대신들 모두 끙끙 앓으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번쾌가 그 사실을 듣자마자 궐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대신들도 그제야 번쾌를 따라 우루루 몰려서 궁궐로 따라 들어갔다. 당시 황제는 환관 한 명을 베고 누워있었다. 

 번쾌가 울면서 말했다. “폐하의 병환이 이토록 심하시어 온 나라와 대신들이 걱정이 떨고 두려워하는데 어찌 대신들과 국사를 계획하실 생각은 않고 오로지 한 명의 환관과 더불어 세상과 단절되시려고 하십니까. 전에 지록위마의 조고가 대신들을 차단한 채 시황제 후계자를 호해로 바꿔치기하여 국가를 망가뜨린 일을 정녕 기억하지 않으십니까?“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앉으며 유방이 웃었다. “내가 잘못했네.” (BC196년 5월)

   

□ 황제의 정원을 마음대로 폐쇄해버린 소하(蕭何)와의 다툼

 

상국(相國,즉 재상) 소하(蕭何)는 나라 땅은 좁은데 황제의 궁원 상림원은 쓸데없이 넓은 것에 화가 났다. 백성을 황실의 넓은 정원에 들여보내 농사를 짓도록 하고 정원의 동물을 줄여서 번거롭게 먹이풀 공급하는 일을 확 줄여버렸다. 화가 난 유방이 소리 질렀다. “상인들의 재물을 실컷 받아쳐먹은 상국 네 놈이 이제 내 동산까지 내놓으라는 거냐?” 수사관을 보내 소하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 지난해(BC 196년)에 공신 중의 공신인 한신을 참하고 멸족시킨 데다가 팽월(彭越)마저 죽여서 젓을 담갔으므로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며칠 뒤 유방의 호위 왕위위가 유방에게 상국 소하가 무슨 죄를 지었냐고 물었다. 유방이 말했다. “옛날에 말이야 진나라 이사(李斯)는 좋은 일은 다 황제에게 돌리고 나쁜 일은 모두 자기가 다 덮어썼다는데 소하라는 녀석은 상인들 뇌물을 다 받아쳐먹고는 그것도 모자라 내 정원까지 빼앗아 백성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다니 괘씸해서 쳐 넣었지.” 

 왕위위가 말했다. “만약에 백성에게 편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요청하는 것이 상국의 직무인데 어찌 상국을 의심하십니까. 폐하께서 전에 초나라 항우와 대치하신 것이 몇 년이고 또 진희·경포의 반란을 진압하신다고 장안을 비우실 때 마다 상국께서는 관중을 굳게 지키셨는데  그 때 상국이 관중을 지키지 못했으면 지금 폐하의 땅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정작 백성의 마음을 얻으려는 나쁜 생각이 있었다면 그 때 그랬을 것 아닙니까. 어찌 지금까지 기다렸다가 상인들의 돈이나 백성의 마음을 뜯으려고 하겠습니까. 진이 망한 것은 이사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황제가 자기의 허물을 고치지 않아서였는데 어찌 그것은 읽지 못하시고 상국만 헐뜯으십니까?”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상국을 불러 풀어주며 말했다. “나는 하나라 걸(桀)왕이나 주나라 주(紂)왕 같은 폭군에 불과하고 경은 현명한 재상이 되었구려. 내가 일부러 재상을 가두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나도 잘못을 저지른 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가둔 것이니 용서하시오.” (BC195년 1월)        

 

 

(2) 효문제 총희 신(愼)부인과 원앙(袁盎)의 모욕 줌

 

효문제(5대 황제. 재위 BC180년-BC157년)는 신(愼)부인을 몹시 아꼈으므로 항상 황후 곁에 자리를 같이 놓게 하였다. 이 때 효문제는 22세였고 황제가 된지 2년 되었을 때였다. 하루는 황제의 경호실 격인 중랑부에서 황제를 모시게 되었는데 신부인이 황후 바로 곁에 앉자 중랑장 원앙(袁盎)이 신부인을 끌어내려 뒤로 물러나 앉도록 하였다. 화가 난 신부인이 앉지 않으려 하자 효문제도 일어나 같이 궁중으로 들어가 버렸다.

 원앙이 곧바로 따라 들어가서 말했다. “신이 듣기를 높고 낮은 것에 순서가 있어야 평화롭다고 했습니다. 폐하께서 두(竇)황후를 세우셨고 신부인은 첩에 불과한데 첩과 주인이 어찌 같은 자리에 앉을 수가 있습니까. 또 폐하께서 총애하신다고 상을 많이 내리시는데 그것이 바로 그에게 화가 되는 일임을 왜 모르십니까. 어찌 다른 사람이 다 아는 사람돼지(인체,人彘)를 폐하께서만 알지 못하십니까?” 여기서 사람 돼지란 바로 유방에게 총애를 받다가 유방이 죽자 본부인 여후에게 사람돼지처럼 취급을 받아 비참하게 죽은 척(戚)부인을 말한다. 

 

효문제가 마침내 크게 깨닫고 기뻐하며 신부인을 설득했고 신부인 또한 원앙에게 금50근을 사례로 내렸다. 사냥하고 모험하는 것을 즐기는 효문제가 험한 산비탈 길을 말을 몰아 달리고자 할 때 원앙이 말을 타고 달려 와 효문제의 수레 말고삐를 잡아 당겨 멈추어 세웠다. 황제가 겁이 나서 그러냐고 묻자 원앙이 답했다.“신이 듣기로 천금을 가진 사람은 모퉁이에 앉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성스러운 군주께서는 요행을 바라고 위험한 일을 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여섯 마리 말이 끄는 큰 수레를 타고 험준한 산을 내려가시는데 만약 말이 놀라서 넘어져 수레가 부서지고 폐하 스스로가 다치는 일이 벌어진다면 고조(아버지 유방)나 태후(생모 박씨)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효문제가 깨닫고 즉시 중지했다. 효문제는 조회 때마다 낭관이나 시종관들이 올리는 서소(書疏)를 연(황제 가마)을 멈추고서 읽어 보았고 받아들이지 않는 법이 없었다. 혹 말한 것이 쓸 만하지 못하면 묵혀 두었고 쓸 만한 것은 꼭 채택하고 훌륭하다고 칭찬하지 않는 법이 없었다. (BC 178년)         

 

 

(3) 효무제와 동언(董偃)과 동방삭(東方朔)의 극간

 

효무제(7대 황제.재위 BC141년-BC87년)는 고모 두태주의 집에서 열린 잔치에서 소개받은 동언(董偃)이라는 구슬장사 귀소년을 매우 총애하였다. 그에게 호화스런 의관을 내려주고 이름대신 ‘주인양반(主人翁)’이라고 부를 정도로 좋아했다. 잔치마다 황제를 동행했고 사냥이나 유희나 개싸움이나 말 시합에도 빠지는 적이 없었다. 효무제가 동성애라는 소문이 이것 때문에 나올 정도였다. 황상이 그런 그를 소개해준 고모를 위하여 정궁인 미앙궁의 정당인 선실에서 술자리를 열고서 동언을 들어오게 하였다. 

 

 창을 들고서 미앙궁을 호위하던 중랑장 동방삭(東方朔)이 창을 내던지며 앞으로 나와 황제에게 말했다. “동언은 목을 베어야 할 죄가 세 가지 나 되는데 어찌하여 그를 들어오게 하십니까?” 효무제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무슨 말이오?” 

 동방삭이 대답했다. “동언은 신하로써 사사로이 두태주의 시중을 들었으니 첫째 죄입니다. 남녀교화를 파괴하고 혼인의 예를 어지럽혔으며 왕실의 제도를 상하게 했으니 둘째 죄입니다. 육경(六經)을 보살피셔야 할 황제 곁에서 학문을 권하지는 않고 헛되고 쓰러지는 것만 내세우며 사치를 즐기고 개, 닭싸움과 같은 오락만을 자극하였으니 셋째 죄입니다.” 

 

효무제가 한 참 동안 말이 없다가 대답했다. “내가 이미 마실 것은 다 준비했으니 다음부터 스스로 고치겠다.” 동방삭이 물러나지 않으며 말했다. “선실이란 황제의 정궁정실로써 법도가 아닌 일로는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음란함이 점차 물들면 차차 변하여 찬탈이 됩니다. 그랬기 때문에 제나라 환공 시절에 수초(豎貂)가 음란해졌고 역아(易牙)가 환란을 만들었으며 반란을 일으킨 노나라 경보(慶父)가 죽고 나서야 노국(魯國)이 안전해지지 않았습니까?” 수초와 역아는 모두 제 아들을 삶아 바쳐 제나라 환공의 병을 치료할 정도로 지극 정성으로 보필했으므로 제환공이 아끼는 신하였다. 

 

그러나 관중이 병이 들자 제환공이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냐고 물었을 때 관중은 수초와 역아는 멀리하라고 했었다. 자기 아들까지 바칠 정도이면 무슨 일이든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경계한 말이었다. 관중 말대로 결국 수초와 역아는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효무제가 말했다. “훌륭하오.” 조서를 내려 중지시키고 북궁으로 잔치장소를 옮겼다. 이 일로부터 동언에 대한 효무제의 총애는 식어졌고 동방삭에게는 황금 30근을 상으로 내렸다.(BC130년)      

 

   

(4) 효원제와 설광덕(薛廣德)의 깨우침

 

효원제(재위 BC49년-BC33년)가 가을 종묘제사를 지내려고 궐문을 나서서 강가 배에 올라가려고 하였다. 어사대부 설광덕이 황제의 가마를 막아서며 관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마땅히 다리로 가셔야 합니다.” 황제가 모자를 쓰라고 말했다. 설광덕이 말을 듣지 않으며 대꾸했다.“ 폐하께서 신의 말을 듣지 않으시면 신은 자살을 하여 제 피로 가마에 더렵혀서 사당에 오르지 못하게 하여 종묘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황제가 몹시 불쾌하였다. 길을 인도하는 선구인 장맹이 말했다. “신이 듣기로는 군주가 성스러우면 신하는 곧다고 합니다. 배를 타는 것이 위험하오니 다리로 안전하게 가시라는 것입니다. 성스러운 군주는 위험을 즐기지 않는 법입니다. 어사대부의 말은 들을 만합니다.” 효원제가 말했다. “사람을 깨우쳐 주려면 마땅히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소?”(BC 43년 3월)    

 

 

(5) 사마염과 사예교위 유의(劉毅)의 혹평 

 

후한이 망하고 삼국을 통일한 위(魏)나라를 붕괴시키고 진(晋)나라를 세운 진무제 사마염이 정월 초하루 하늘 제사를 남교에서 지냈다(AD282년). 한껏 기분이 고양된 진무제가 곁에 있던 사예교위 유의(劉毅)에게 물었다. 

“나는 한나라 때 어느 황제와 견줄 수가 있겠소?” 

유의가 말했다. “후한의 환제(桓帝)나 영제(靈帝) 정도가 될 것입니다.” 

실망한 진무제가 물었다.“어찌 그런 형편없는 황제에게 나를 견주는가?” 

유의가 대답했다.“환제나 영제는 관직을 판돈을 국고에 넣기라도 했지만 폐하께서는 관직을 판돈으로 사사로운 개인 수중에 넣었으니 그 보다도 못하면 못했지 잘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잠깐 침묵하던 진문제가 웃으며 말했다. “ 환제·영제 시대에는 황제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런 말 하는 사람을 살려 줬다는 말도 듣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대와 같은 곧은 신하가 있고 또 그런 곧은 신하의 말을 들을 줄도 아는 사람이니 환제·영제 그 보다는 낫다고 해주면 안 되겠는가?”(AD282년 1월) 

 

황제에게 대들었다가 허리가 잘려 죽거나 사지가 찢겨 죽거나 젓을 담긴 허다한 경우에 비해 진무제 사마염의 관용과 통찰은 가히 탁월한 구석이 있다. 

후한 안제(6대, 재위 AD106-1125)때 상서 진충(陳忠)이 황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이 듣기로 군주는 도량이 산과 호수 같아서 절실하고 곧은 의견을 받아들이며 충신 또한 기탄없이 충절의 말씀을 올리는 법입니다. 고조는 주창이 걸주와 비교하는 것을 용납했고 효문제는 원앙이 사람돼지라고 지적한 것을 달게 받았으며 효무제는 동방삭의 비판을 수용했고 효원제 또한 설광덕의 자결협박 또한 받아들였습니다. 좋은 계책을 받아들이시고 망령되고 비웃고 풍자하는 말이 비록 입맛을 쓰게 하더라도 이 또한 너그럽게 용서하시어 성스러운 조정에는 아무것도 거리낌 없이 말 할 수 있음을 널리 보여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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