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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6년02월08일 19시28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6일 16시55분

작성자

  • 나은영
  • 서강대학교 지식융합미디어학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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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연초부터 아동학대 관련 기사들이 줄을 잇는다. 지난 연말 인천 11세 여아의 탈출 사건 이후, 무려 3년이 지나서야 밝혀진 부천 초등학생 시신 훼손 사건, 이어 최근에는 목사이자 독일 박사 아버지의 여중생 학대와 시신 방치 사건 등, 글로 옮기기에도 끔찍한 범죄들이 ‘가정’이라는 미명 하의 그늘 아래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가정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또 한 가지, 자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부모가 원하는 방향대로 ‘맞춤 성장’ 시키려 하는 가정도 역시 자녀를 하나의 독립된 개체가 아닌 부모의 소유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유난히 한국에 가족의 동반자살이 많은 것도 역시 부모가 자녀를 본인들의 소유물로 여기기 때문에 발생하는 사건 중 하나다.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하는 학대 가정

학대에 노출된 아이들에게는 더 이상 가정이 안전지대가 아니다. 밖에서 이런저런 일로 상처받고 들어와도 가정의 따뜻한 품 안에 들어오면 위로받고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는 가정의 기능은 이와 같은 학대 가정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오히려 가정이 바깥세상보다 더 위험하고 무서운 곳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이들이 장기결석을 할 때 그 원인이 부모에게 있을 확률보다 자녀에게 있을 확률이 더 높다고 판단하는 경향은 ‘가출’이라는 단어에 잘 나타난다. 아동학대 사건들이 불거지기 전까지는 어떤 아이가 오랫동안 학교에 나타나지 않으면, 그리고 가정에서도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그것은 사춘기 청소년의 ‘가출’일 것이라 짐작해버리는 것이다. 어른의 악행보다 청소년의 비행 쪽으로 편견을 갖고 판단하는 이 사회의 경향성을 말해 준다. 이 사회의 기준이 마치 ‘어른’인 것처럼... 그러나 이 사회의 기준은 ‘인간’이지 ‘어른’이 아니다. 아이들도 인간이기에 당연히 우리 사회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아이들의 인성이 발달하는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는 바로 가정이다. 그런데 이 가정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은 개인의 일로만 치부하기에는 우리 사회에 너무나 중요한 숙제들을 던져주고 있다. 가정 내의 학대를 더 이상 ‘집안 일’로 치부하며 눈감아버리기보다 우리 사회 전체가 발 벗고 나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아이들은 좌절한 부모의 화풀이 대상은 더더욱 아니다. 부모가 실직으로 좌절했든 이혼으로 좌절했든, 또는 재혼가정에서 이복형제자매를 키워야 한다는 이유로 짜증이 났든, 자신의 분노나 좌절 또는 짜증을 약하고 어린 아이들에게 풀어버리려 하는 부모는 이미 부모가 아니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 중 일부가 어린 시절에 당연히 키웠어야 할 기본적인 인간성과 도덕성을 무시한 채 성장해 오다 보니, 부모 자신이 미성숙한 인격체로서 그들이 낳은 자녀들을 마치 자기 마음대로 처리해도 되는 짐짝이라도 되는 양 취급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몸만 성숙한 채 마음은 성숙하지 못한 어른이 자녀를 가질 때 그 자녀를 어떻게 존중받는 인격체로 대우할 수 있겠는가.

기본이 중요하지만 기본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더욱 더 기본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자녀의 인생을 부모가 관장하는 감옥 가정

또 다른 형태의 자녀 학대는 지나친 교육열과 왜곡된 애정에서 비롯된다. 모래를 너무 꽉 잡으면 모두 손에서 빠져나가듯, 자유를 구속하는 경쟁의 역효과는 참담할 정도다.

이미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졌지만, 2010년 상반기 쯤 공부 잘 하던 유명한 외고의 한 학생이 엄마가 이야기한 성적의 목표에 도달한 후 “이제 됐어?”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며 퍼졌었다. “이제 됐어?”라는 이 마지막 말은 아무리 노력해도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이제 됐어.”란 말을 그 학생이 생전에 얼마나 갈망했었는지를 말해 준다.

자녀의 자유를 구속하며 강박적 경쟁의 세계로 내모는 어머니의 압력! 그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선택한 경우도 있지만, 끔찍한 살인을 선택한 경우도 있었다. 2011년 어느 날, 전교 1등을 넘어 전국 1등을 요구하며 폭력적으로 체벌하는 어머니의 압력을 벗어날 길이 없어, 유능했던 고3 학생이 상상도 하기 힘든 존속살인을 저지르고 수감생활로 접어든 불행한 사례가 그것이다.

겉보기에는 다른 형태로 나타났지만, 이 두 사건 속의 청소년이 느꼈을 암담함, 좌절, 본인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었던 무력감, 희망이 보이지 않는 끝없는 경쟁 등은 공통적이었을 것이다. 경쟁이 힘들더라도 본인이 스스로 좋아서 선택한 일을 하며 경쟁하는 것은 그렇게 자신이나 어머니의 생명을 마감할 정도로 심한 괴로움을 주지는 않는다. 여기서 가장 중요했던 요소는 스스로의 자유, 선택권, 통제력을 박탈당한 상태의 무력감과 좌절이다.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에게 선택권을 주고 스스로의 인생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들은 기계로 만들어진 로봇도 아니고, 어른의 소유물인 꼭두각시도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을 할 때 재미있는지, 자기가 무엇을 상대적으로 더 잘 하는지 찾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어린 시절에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이 과정에서 또래들과 함께 지내는 방법도 터득하게 된다.

상당수의 한국 부모는 자신이 원하는 자녀의 길을 정해 두고 그 쪽으로 유도하는 경향이 있다. 아이가 다양한 경험을 한 후에 스스로 택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아이가 보고 듣는 것을 어른이 선택한 범주 이내로 가둬버린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주도학습’을 시킨다며 이것을 알려 주는 학원에 보내기도 한다. 자기주도학습은 말 그대로 자기가 주도해서 학습을 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마저 학원에서 틀을 제시해 주고 그에 따라가도록 만들다니, 이처럼 모순되는 단어가 또 있을까.

아이들에게 선택권을 돌려주어야 한다. 아이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각자 귀중한 재능을 타고난다. 그 재능이 무엇인지 부모가 미리 예단하기보다는 내부에서 무엇이 끓어오르고 있는지 스스로 찾아 “저 이거 하고 싶어요.” 할 때까지 시간을 두고 기다려 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남보다 조금 늦더라도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내부의 열정을 쏟을 때 그 재능의 참된 가치가 정상적으로 발현될 수 있다.

 

 ‘내 자녀’는 ‘우리 사회’의 미래다

‘나의 자녀’가 온전히 ‘나의 소속’은 아니다. 엄연히 독립적인 인격을 가진 개체다. 부모는 자녀가 스스로 인생을 설계하고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자녀의 인생 전체를 좌지우지할 권리는 없다. 심지어 자녀의 생명과 신체적 안전에 위해를 가하는 것은 중대한 범죄다.

우리 사회의 미래인 한국의 아동들을 위해 사회적, 제도적 장치들이 촘촘히 마련되어야 한다. 아이들은 한 가정의 소유물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미래이기에, 이들의 안전과 성장 중 상당부분은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 아이들에게 투표권이 없다고 하여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 소홀하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아이들도 인간이다. 어른의 소유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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