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동의 예술시평<50> 백지 광고 시대의 예술 소환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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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마르셀 뒤샹이 <샘>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변기는 현대미술의 새로운 차원을 제시한 기념비적 작품이 되었다. 미술사가들은 이 작품으로부터 개념미술이 비롯되었다고 평가한다. 개념미술은 미술작품의 본질을 제작된 결과물이 아니라 작품의 창작을 촉발한 사고 자체로 본다. 작품의 본질은 창작의 결과물로서의 물질이 아닌 비물질적인 것으로서의 개념이란 것이다. 개념미술은 1970년대 초반, 형식주의 모더니즘의 정점에서 구현된 기하학적 형식의 미니멀리즘과는 또 다른 맥락에서 탄생했는데 언어와 의미를 중시했다. 뒤샹의 <샘>은 변기라는 사물보다는 욕탕 설비를 파는 상점에 있는 변기를 전시장이라는 맥락에 옮겨온 아이디어가 본질이다. 하지만 <샘>은 전시되지 못하였다. 참가비만 내면 누구나 출품할 수 있는 전시였고 뒤샹 자신이 전시의 운영위원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출품이 거부되고 말았다. 당시 가장 현대적인 전시를 표방하였지만, 작가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닌 공산품, 그것도 남성용 소변기를 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개념미술은 이렇듯 기존 미술에 대해 강력한 부정의 어법을 사용하였다. 이후 이러한 흐름은 점차 현실과 정치적 비판의 입장을 띄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개념미술의 경향은 <ST>라는 젊은 작가 그룹이 결성된 1960년대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70년대 중·후반에 정점을 이루었다. 이들 중 이건용과 성능경은 그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들은 현재는 한국현대미술의 원로가 되었고 최근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순회전을 가진 <한국 실험미술 60~70년대>(2023-24) 전시의 주역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는 실험정신으로 무장된 무명의 청년 작가들이었다. 1970년대 초·중반 그들의 시대는 유신 정국의 엄혹한 시대로, 전위적인 작가들의 경우 불온 세력으로 의혹을 받아 수사당국의 관심 대상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그들의 작품은 정치나 사회를 직설적으로 비판하기보다는 우회적이며 추상적인 방식으로 시도했다. 그들은 정치적 탄압에 간접적인 방식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이건용은 억압된 자유를 갈구하듯 신체의 제약 조건 아래에서 제작한 드로잉을 시도했다. 전시장 벽을 등지고 서서 두 팔을 벌려 벽에 원형의 드로잉을 하는 <신체 드로잉> 연작(76)이나 쪼그리고 앉아 바닥에 분필로 드로잉을 하면서 그 드로잉의 흔적을 지우며 전진하는 <달팽이 걸음>(79) 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성능경은 좀 더 구체적인 암시를 드러내고 있다. <신문 1974.6.1. 이후>(74)와 <신문 읽기>(76)등은 그 대표작이다. 전자의 경우, 해당 일로부터 시작하여 신문지의 모든 기사를 매일 면도칼로 오려내어 오려낸 부분은 아크릴 통에 담고 오려낸 신문지는 패널에 부착하여 전시 작품으로 진열한 것이고, 후자의 경우 신문 기사를 큰 소리로 읽고 해당 기사를 오려내는 작업인데, 당시 정부의 언론 탄압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이었다. 물론, 탄압에 맞서 직설적 투쟁을 한 것은 아니지만 작가가 느끼는 당시의 사회적 정황을 표출한 것이다. 실제 그는 사실 보도 기능을 가진 신문이란 매체가 역설적으로 가지는 불확실성과 비실재성의 측면을 다루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공교롭게도 그해 12월 26일 언론 탄압을 받던 동아일보는 광고가 실리지 않은 채 발간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가 그것이다.
1974년 12월 박정희 유신 정권의 언론 탄압으로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기로 했던 회사들이 무더기로 해약하고, 그 결과로 동아일보에서는 광고를 채우지 못한 부분을 백지로 내보내거나 아예 전 지면을 기사로 채워버린 것이다. 이러한 사태의 원인은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이 비상 계엄령과 국회 해산을 포함한 유신 헌법을 발효시킨 데서 비롯되었다. 많은 지식인, 종교인, 언론인들에 의한 저항이 시작되자 정부는 74년 여러 번의 긴급조치를 발동했다. 이를 통해 수많은 지식인과 정치가들에게 장기형이 쏟아졌고, 모든 언론을 대상으로 정부에 비판적인 보도를 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제대로 된 기사를 내보내지 않는 언론의 보도 태도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이 동아일보사 앞에서 동아일보를 불태우자, 기자들은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수호대회’를 열고 그들의 입장을 신문에 게재하고자 했다. 하지만 경영진의 반대로 실리지 못했고 기자들은 기사 제작 거부로 경영진의 방해에 저항했다. 결국 10월 25일 자 신문에 결의문이 게재되었고 이후 지면에는 그동안 실리지 못했던 인권운동가나 야당 인사에 관한 내용의 기사가 실리게 된다.
언론 탄압으로 기업의 광고가 끊기게 되자 개인이나 정당, 단체들이 소액 광고를 실어 격려했다. 시민들이 낸 광고의 내용들은 보통 동아일보를 지지하거나, 언론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암울한 현실을 "오! 자유"라는 문장 등으로 안타까워하는 내용이었으며, 아예 단체 이름이나 사람 이름만 적어서 광고를 내는 일도 있었다. 동아일보의 경영난을 지원하기 위해 개인이나 사회단체 등에서 큰 노력을 하였지만 결국 동아일보는 기자들을 대량 해고하며 문제를 매듭지었다. 이때 해직된 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국민주 모금 형태로 1988년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다.
역사는 유사한 유형으로 반복되는 것인가? 최근 계엄과 탄핵정국에서 나타난 한 언론의 백지광고 사태는 50년 전 과거를 소환케 한다. 며칠 전 야당 대표가 은행장 간담회에서 특정 매체에 광고를 많이 게재하고 있는 한 은행을 언급했는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그 즉시 해당 은행은 매체에 광고 중단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그러자 이 매체는 항의 차원에서 아예 광고를 뺀 채 신문을 발행했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는 예전과는 달리 언론의 수도 많아졌고 전통적인 신문, 방송매체 말고도 온라인 매체나 유튜브 등으로 다원화되었다. 많은 사람은 신문을 구독하거나 방송매체를 보는 대신 자신이 관심 가진 유튜브나 SNS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언론이 자본과 결탁하여 특정 정치세력에 유리한 편향적 보도를 양산하여 가짜 뉴스 또한 창궐한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을 논하며, 기술 복제를 통해 아우라를 상실한 사진이나 영상예술이 정치적으로 악용되면 파시즘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음을 경고한 바 있다. 오늘날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언론이 신뢰를 크게 잃고 있다. 급기야 정치권에서는 가짜 뉴스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개인의 카톡을 검열하겠다는 비상식적 논의까지 제기되고 있다. 최근 신문 매체의 백지 광고 사태를 보며, 과거의 그것과 양태는 다르지만 21세기 문명국가에서 아직도 권력에 의한 언론 억압이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에 참으로 믿기 어려운 안타까움을 느낀다. 게다가 바람보다 먼저 눕는 풀처럼 광고를 중단해 버린 은행의 처사는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만든다. 오늘 우리는 미증유의 시절을 보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반세기 전 언론 탄압을 받았던 동아일보도, 그 퇴직 기자들이 창간한 한겨레신문 역시 여전히 시장 논리나 편파 뉴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이다. 우리 시대 개념예술가들은 이런 상황을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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