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46> 국토를 제대로 지켜라 (V) 동북방 경략과 6진 설치①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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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1 경원부(慶源府)의 설치와 경원부 이동
함경북도 최북단 두만강 하류지역은 조선왕조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다.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목조 이안사가 전주에서 안변 의주를 거쳐 알동(경흥부 동쪽 30리)에 터를 잡고 살다가 1274년 12월 죽자 장사지냈던 공주(경흥)가 이 지역이다. 그러나 두만강을 접하고 있는 이곳은 빈번하게 야인들의 침입하는 지역이어서 국가의 방어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다. 특히 바다와 멀리 떨어질수록 주민을 보호하거나 침략을 방어하는 능력이 떨어졌다. 항상 야인들이 출몰하므로 불안을 느낀 태종은 목조의 능인 덕릉을 아예 남쪽 함흥으로 옮기기까지 하였다(태종 10년 10월 28일).
조선조에 들어와 태조 이성계는 목조의 근원지이던 공주에 행정관청 부를 설치하고 이름을 경원부(慶源府)라고 하였다. 북쪽으로 영토를 더 넓히고 싶었던 태종은 9년에 경원부를 100여리 더 북쪽에 있는 소다로로 옮겼다. 그러나 그 다음해 태종 10년 동맹가첩목아 등의 무리가 쳐들어와 경원부사 한흥보 등이 살해되는 사건(경인년의 변)이 일어나자, 주민들을 다시 남쪽 경성군으로 옮기고 경원부 지역은 비워두었다. 그리고 7년 뒤인 태종 17년에 경성 두롱이현 이북 땅 부가참에 경원부를 다시 설치하고 경원도호부를 두었다. 그러니까 이름은 같은 경원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지역에 같은 이름의 고을을 세운 것이다. 그만큼 ‘경원’이라는 단어는 조선에게는 중요한 뿌리였다. 세종 15년에 동맹가첩목아와 그 아들 동권두가 올적합에게 피살되자 세종은 이 지역을 회복하기 위해 옛 경원부 땅 소다로의 조금 북쪽에 있는 회질가에 부(府)를 세우고 사람을 옮겨 살게 했다. 이것이 세종 육진의 하나인 경원진이다.
V.2 경원부의 남쪽 이전 찬성론
[경원부 남천론 거부]
두롱이 현 경원부를 남쪽지역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은 오래 전부터 제기되었었다. 함길도 감사 정초는 세종 7년(1425)에 두롱이현 경원을 남쪽 경성이북의 용성으로 옮기자고 건의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목조의 덕릉과 그 부인의 릉인 안릉을 이미 경원에서 함흥으로 옮겼으니 경원이 따로 있을 이유가 없고, 또 용성의 지형이 양면이 산으로 둘러싸는 자연요새라 적합하다는 것이다. 의정부좌참찬 최윤덕도 이에 맞장구를 쳤다. 자기가 그 지역은 잘 아는데 지난 번 경인년의 난에서도 봤지만 경원은 매우 위태로운 지역이어서 다시 뺏기기 쉽다는 논리로 이전옹호론을 펼쳤다.
세종은 아주 못마땅했다. 대신들로 하여금 의논을 해보라고 하긴 했지만 생각은 달랐다.
“의정부와 육조와 과거 그 읍에 임명되었던 자들과 함께 의논한 뒤
보고하라. 그러나 내 뜻은 뒤로 물러나는 것이 몹시 불편하다.
(政府六曹與曾經其邑之任者 會議以聞 然吾意以爲 退縮未便
: 세종 7년 11월 14일)”
두 달 뒤 함길도 감사 정초가 다시 경원부를 용성으로 옮기는 문제를 제기 해왔다. 지금 현재 경성군 북쪽 고랑기 목책과 경원부 치소를 동시에 방어하기 위하여 안변의 군사가 15, 16일을 걸어와서 교대로 방어하는데 사람과 말이 모두 지쳐서 힘든 것이 첫째 이유이고, 야인들이 쳐들어오면 두 곳을 모두 방어하기 어려우므로 고랑기는 함락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용성은 방어하기가 매우 쉽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세종 8년 1월 24일). 둘 다 타당한 말이긴 했다. 세종은 의정부와 육조가 다시 의논해보라고 지시했다. 두 달 전 세종의 뜻을 확실히 읽은 의정대신들은 정초의 의견을 다소 반영하되, 경원부 이전문제는 건드리지 않는 쪽으로 건의했다. 즉, 고랑기와 경원의 동시 방어가 어려우면 경원을 남쪽으로 옮길 것이 아니라 고랑기 주민을 용성으로 옮겨 방어하자는 안이었다. 세종은 일단 이 수정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경성의 북쪽 어유간천을 경원에 귀속시키고 대신 아래 길주 북쪽의 몇 개 읍을 경성으로 붙였다(세종 8년 1월 24일).
이 지역 방어를 맡고 있는 함길도 도절제사 하경복이 방어 상의 애로를 제기하였다(세종 8년 6월 16일). 방어전략 상 경원과 용성이 모두 중요한데 경원에 수비가 치중되다 보니 용성수비가 어려우므로 경성의 군사를 용성의 방어에 동원하게 허락해 주시라는 요청이었다. 세종은 의정부와 육조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좌의정 이직과 우의정 황희 등 다수 대신들은 하경복이 요청한 대로 하자고 했다. 그러나 참찬 최윤덕과 예조, 공조, 호조, 형조판서는 아예 경원부를 용성으로 옮기자고 건의했다. 세종은 하경복과 이직의 의견을 따라 경원부를 옮기지는 않고 병력이동만 허락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일 이후에 하경복은 여러 번 보고서를 올려 경원부방어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경원부를 남쪽으로 이전하기를 요청해왔다. 세종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조참의 김효손을 조용히 불렀다.
"나는 공험진 이남의 땅이 조종의 강토라 생각하는데 내 때에 와서 방어
를 포기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가서 하경복과 함께 편하고 어려움을
깊이 심사하고 또 방어가 어려운 이유를 소상히 알아 와 보고하라.
(予以爲公嶮以南 祖宗封疆 及至寡人 不能守以棄之 不可 以往與敬復
孰審便否 詰其所難來啓 : 세종 9년 7월 7일)”
한 달 만에 김효손이 경원으로부터 돌아와 용성으로 옮기는 것의 이점을 조목조목 보고했다. 임금은 한편으로는 실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저 계획(경원의 용성이전)은 조정대신들이 이미 여러 번 개진했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종의 봉토를 줄일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 여러 번
야인이 우리 땅을 침범했었는데 뒤로 물러나자는 것은 버리고 지키지
않는 것과 같다. 성보를 넓게 쌓고 많은 사람을 옮겨와 방어하면 되는
것이다. 내 생각은, 경원으로 옮기는 것이 편하다는 논리는 여연과
거제의 경우가 똑같은 것이다. 또 위축의 전략을 따르는 것은 조종의
개척정신과 심히 배치되는 것이다.
(此計在朝大臣己皆陳之 然予心以爲祖宗奉土 不可縮也 往者 野人侵占
我地己多 今又退移 則是棄而不守也 若廣築城堡多取民戶以守禦 則可矣
予以慶源退縮爲便 則閭延巨濟亦是一體 又從而爲退縮之計
甚非朝宗拓地之意也 : 세종 9년 8월 10일)”
세종이 용성이전의 불가능성을 단호하게 잘라 말하자 이젠 대신들이 강력하게 들고 일어났다. 먼저 허조가 이의(異意)을 제기하며 말했다. “임금의 뜻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경원은 적의 공격에 매우 취약하여 사람들이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병졸들도 방어가 어려움을 알고 있으니 변고가 생기면 사력을 다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옮기려고 하는 용성은 경원에서 30여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니 버리고 지키지 않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예조판서는 신상은 용성 땅이 오히려 기름지므로 많은 백성을 먹일 수 있는 좋은 입지라고 거들었다. 병조판서도 같은 생각이었다. 대다수 대신들이 반대하니 세종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잠깐 다시 생각해 보고나서 정해야겠다.
(須更商確 然後可定 : 세종 9년 8월 10일)”
세종은 2품 이상의 전, 현직 관련자를 바로 불러 의논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의논을 해보라고 하명한 것은 “세종의 뜻을 더 생각해 보라.”는 뜻이었지, 그들의 의견을 더 들어보고 세종 자신의 생각을 고쳐보겠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었다. 세종은 송인산을 경차관으로 하여 함길도에 다시 보냈다(세종 9년 8월 16일). 한 달 뒤 허조가 다시 경원으로 옮길 것을 건의하였으나 세종은 꿈쩍도 않았다.
“그 말은 내 이미 상세히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조종의 성헌이라
쉽게 바꿀 수 없다. 뒤로 물러서 방어하는 것이 다들 상책이라고 하나
상책이라도 성헌에는 구속을 받으므로 불가능한 것이다. 부득이 중책이
상책이 되는 것이다.
(予其詳知矣 然此朝宗成憲 不可輕易也 退排之意
皆以爲上策 上策拘於成憲 而不可行 則不得己以中策爲上策也 : 세종 9년 9월 24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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