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분노하는 쌀과 ‘513%의 덫’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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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초유의 모판반납 시위
2015년 5월 21일. 사상 초유의 ‘분노하는 쌀’의 모판반납시위가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졌다. 모내기가 한창인 농번기에 논으로 가져가야 할 모판을 들고 농민들이 서울시내에 나타난 것이다. 2015년 5월 8일 정부가 2015년도 5%의 저율관세할당에 의한 의무수입물량(TRQ) 가운데 7만 5378톤에 대한 수입입찰공고를 내면서 밥쌀용 쌀 1만 톤을 포함시킨 것에 대해 항의하기 위한 것이다. 농민들은 지난 해 수입된 밥쌀용 쌀 재고가 11만 톤이나 쌓여있고 최근 쌀값폭락으로 쌀 7만 7000톤을 매입 시장격리조치를 취하고 있는 마당에 쌀값하락을 부채질 할 밥쌀용 쌀을 수입하겠다는 박근혜 정부의 정책이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농민들은 정부가 지난해 9월 18일 쌀 관세화 추진계획을 발표하면서 관세율은 513%로 결정하고 최소시장접근(MMA, Minimum Market Access)보장을 위한 저율관세에 의한 의무수입 물량 40만 8700톤의 수입은 계속하지만 2004년 관세화 유예기간 재 연장 (2005-2014) 협상 당시 새로 생겨난 의무수입량 가운데 밥쌀용 쌀 30% (12만 2610톤) 수입이나 국가별 수입쿼터(20만 5228톤)등과 같은 조치들은 모두 폐지한다고 발표한 것을 문제 삼았다. 당시 정부는 국회에서 밥쌀용 쌀 의무수입규제가 없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한 야당의원의 질문에 “나라가 뒤집힐 정도의 특별한 사정이 발생하지 않는 한 밥쌀용 쌀 수입은 하지 않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정부와 새누리당은 당정협의를 거쳐 쌀 관세화에 대한 정부 방침을 확정 발표하고 “우리 쌀 반드시 지켜내겠습니다!”라는 현수막을 전국의 농촌과 도시 방방곡곡에 내 걸었다. 농민들은 2015년부터 정부방침대로 밥쌀용 쌀 수입도 국가별 쿼터도 폐지 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런 정부가 이제 와서 밥쌀수입을 다시 재개하는 것에 대해 약속을 뒤집는 것이라며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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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소속 농민들은 지난 5월 12일부터 전남 나주에 있는 한국농산물유통공사(aT센터)본사 앞에서 밥쌀용 쌀 수입중단을 촉구하는 시위를 시작으로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와 부산 김무성 당대표 사무실을 항의 방문하는 등 20일부터 전국각지에서 밥쌀용 쌀 수입을 규탄하는 시위와 기자회견을 열었다. 21일 오후에는 서울역 광장에서 “밥쌀용 쌀 수입 결사반대”를 외치며 모판반납시위를 했다. 농민들은 6월에도 밥쌀수입반대를 위한 농민대회를 계속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정부는 21일 전자입찰까지 마치고 수입업체 선정을 위한 절차를 강행했다. 밥쌀은 쌀 수확기가 되는 오는 9-10월 겅 수입될 전망이다.
쌀 관세화협상은 이제 시작단계
그렇지 않아도 쌀값폭락으로 농민들이 깊은 시름에 빠져있는 마당에 정부가 밥쌀 수입을 서두르는 이유가 무엇일 까. 그 것도 하필이면 박근혜 대통령의 6월 방미를 앞둔 시점에서 정부가 밥쌀수용 쌀 수입을 추진해야만 하는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있는 것 인가. 아니면 정부의 정치적 무감각일 뿐인 가. 그도 아니면 우연일 뿐인 가.
이번 수입계획을 발표하면서 정부는 처음에는 ‘밥쌀에 대한 국내수요가 있어서’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다가 사실은 ‘513% 관세율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애매한 설명을 하면서 의구심만 키웠다. 그러나 그것이 설사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왜 하필 모내기철인 5월이냐’라는 의문에 대한 설명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TPP 때문이라는 억측이 생겨나고 미국측으로부터 강력한 미국산 밥쌀 수입요구가 있었던 것이 아닌 가하는 의문도 나돈다. 정부는 이러한 억측들은 근거 없는 것이라고 일축하면서도 모두가 납득이 가는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일련의 조치와 해명을 접하면서 정부가 지난 해 9월 쌀 관세화 조치(513% 고율관세부과, 최소의무수입물량 40여만톤 수입보장, 밥쌀용 쌀 30%와 국가별쿼터폐지)를 발표하면서 쌀 관세화를 반대하는 농민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우리의 조치계획을 WTO에 통보하기만 하면 2015년부터는 밥쌀 수입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정치적 호기’를 부린 것이 이제 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부가 스스로 친 ‘513%의 덫’에 결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솔직히 정부의 쌀 관세화 조치는 한마디로 우리의 주장일 뿐이고 우리의 주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나라들이 있으면 그 나라들과 ‘검증’이란 이름으로 진행되는 양자협상을 통해 합의 점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정부는 물론 전문가 어느 누구도 이 것은 우리의 희망사항일 뿐 앞으로 협상상대국들과 검증결과에 따라서는 달라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모두가 농민들 눈치보기에 급급했다. 알만한 전문가들은 침묵했고 일부 전문가들은 513%가 모범답안이고 용도지정이나 국가별쿼터 폐지도 WTO규정에 맞는 조치라며 반드시 관철되어야 만 할 사항이라며 정부의 조치를 환영했다.
그러나 쌀 관세화협상(검증)은 현재 우리가 WTO에 제출한 양허계획에 대한 관계국들간의 공람이 끝났고 이에 대해 미국, 중국, 호주, 태국, 베트남 등 5개국이 이의를 신청한 상태다. 쌀 관세화 협상은 이제 본격적인 양자 협상의 개시를 앞두고 있다. 과거 일본이나 필리핀, 대만 등의 협상선례를 보더라도 쌀 관세화협상 타결까지는 앞으로 2-3년의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따라서 쌀 관세화 협상이 종료될 때까지는 우리는 2014년도 쌀 수입조건에 따라 쌀 수입을 계속할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WTO의 관점에서 보면 이의를 제기한 상대국들과의 검증절차가 모두 끝나 확정될 때까지는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확정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 것은 40여 만 톤의 쌀 수입은 물론 밥쌀용 쌀 수입도, 국가별 쿼터도 그대로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것이 아니라면 밥쌀용 쌀 수입을 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수입은 그러한 절차를 이행하는 것이라는 점을 정부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솔직하게 농민과 국민과 언론에 설명하면 된다. 그런데 정부가 명쾌하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 일까..
‘513%의 덫’
정부 말 대로 513% 관세율을 지키기 위해서 빱쌀용 쌀 수입을 해야만 한다면 그 이유를 솔직하게 설명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자면 그 동안 쌀 관세화 협상의 모든 가능성에 대한 점검을 다하지 못한 책임과 그로 인한 전략부재와 신중하지 못한 협상추진 등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고 이에 대해 농민과 국민에게 사과하고 정치적, 행정적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상황을 넘어가려다 보니 일이 복잡하게 꼬이고 있는 것이 아닌 가하는 생각도 든다. 정부의 속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WTO 시장개방협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WTO 협상에서는 이미 양허가 이루어진 시장개방조건을 후퇴시킬 수 없으며 그렇게 하려면 사전에 이해당사국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고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상대국에게 지불해야 만 한다. 이것은 WTO협상의 불문율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누구도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협상상대국들은 513%의 고율관세로는 한국시장으로 쌀 수출이 사실상 불가능해 지기 때문에 우리의 조건을 그대로 수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특히 미국과 중국은 지난 해 우리의 쌀 관세율 수준은 150-200%선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언론보도도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513%의 고율관세를 관철시키려 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 지금까지의 시장개방은 당연한 것이고 ‘+a’의 시장개방을 추가로 요구해 올 수도 있다는 협상의 현실을 솔직하게 농민들과 전문가, 언론 등에 설명했어야 했다. 그들은 우리의 입장을 고려해서 생색내기로 최소한 밥쌀용 쌀 30%와 국가별 쿼터는 유지할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런데 513%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리가 지켜야 하는 ‘정치적 목표’가 될 경우 협상상대국들이 513%을 인정해 주는 대신 현재의 의무수입량 40만 9000톤은 물론이고 밥쌀용 수입도 더 늘리고 국가별 쿼터도 더 늘리라는 ‘+a’ 를 요구해 온다면 관세화의 실익은 없어지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관세율513%을 낮추는 협상을 할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요구하는 ‘+a’를 들어주거나 최소화하기 위한 협상을 할 것인지, 어느 쪽이 우리 쌀 산업을 보호하고 농민들을 보호하는 ‘덜 나쁜 차선의 대안’이 될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쌀과 같이 민감한 ‘정치재’가 되어있는 ‘쌀의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513%의 관세율을 건드리는 것도 ‘+a’를 수용 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이러한 험난한 쌀 관세화 협상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이런 현실에서 보면 2014년도 쌀 수입조건인 의무수입량 40여 만 톤의 수입과 밥쌀용 30% 수입 및 국가별 쿼터 보장은 앞으로 있을 513%의 쌀 관세화율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불가피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될 쌀 관세화 협상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할 수 있는 최선의 협상이 어쩌면 현상유지가 아닐 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정부도 513%을 지키기 위해서는 밥쌀용 쌀 수입과 국가별 쿼터유지가 협상의 기본요소가 될 수 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밥쌀용 쌀 수입폐지도 국가별 쿼터폐지도 사실상 지킬 수 없는 공약(空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추리가 가능해 진다.
정부는 이제라도 쌀 관세화 협상의 진실을 알려야
이러한 예상이 모두 잘못된 것이기를 바라지만 UR농업협상에 참여했던 과거의 경험(1990-1993)으로 미루어 볼 때, 그리고 기 확보된 쌀 시장개방조건을 후퇴시키는 협상은 불가능하다는 WTO협상의 본질에서 볼 때, 정부는 모든 가능한 협상시나리오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설명을 생략한 채 농민의 저항을 무릅쓰고 밥쌀용 쌀 수입을 결정하고 추진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서 정부는 자신들이 한 말을 뒤집으면서도 그에 대한 솔직한 설명도 사과도 없고 책임지려고도 하지도 않는 다는 것이다. 농민들도 바로 정부의 그러한 무책임한 태도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라도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 당은 쌀 관세화 협상의 현실을 솔직하게 농민과 국민들에게 알리고 정부의 방침변경에 대해 사과하고 그 동안의 신중하지 못한 협상추진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정부는 ‘쌀 관세화협상은 정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쌀 농민들과 같이 하는 것이다’라는 자세로 협상추진체계를 새롭게 바로 잡기 바란다. 경제적 이해관계가 걸린 WTO협상의 경우 정부는 국내 이해단체의 입장을 협상에 반영하기 위해 싸우는 협상대리인 일뿐 자신이 협상의 주체라는 낡은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협상추이에 따라 유연하게 명분과 실리에서 농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협상결과를 같이 만들어 가기 바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남은 협상에서 정부가 대외적으로는 비밀주의를 유지하되 대내적으로는 협상 관련 모든 정보를 쌀 생산자단체와 공유하면서 그들과 긴밀히 협의하는 개방적이고 투명한 협상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분노의 쌀’이 익어가고 있다-쌀 관세화, 협상이지 정답풀기가 아니다”, 2014. 9.22 블로그) 쌀 관세화는 국익이 걸린 검증이고 협상이지 모범답안 찾기가 아니기 때문에 협상의 추이를 보아가며 쌀 산업과 농민 보호를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안인가를 이해당사자인 농민단체들과 긴밀히 협의 결정해 야만 한다. 명분과 실리가 걸린 협상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고민은 정부 혼자서 할 일이 아니라 쌀 생산 농민들과 같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쌀 협상을 둘러싼 불필요한 국가적 에너지 소모를 막는 길이다. 다른 대안이 없다. 그렇게 못한다면 우리는 쌀 관세화 협상이 마무리 될 때까지 이번과 같은 갈등을 수없이 되풀이 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정부에게나 농민에게나 불행한 일이다. 쌀 관세화 협상은 이해 당사국끼리만 하는 것이 아니다. 국내의 쌀 농민들과도 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협상에서 최상의 전략은 상대를 감동시키는 진정성이다. 정부가 진정성을 가지고 농민단체들과 소통하면서 최선을 다 하는 쌀 관세화 협상을 추진해 나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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