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김찬동의 예술시평 <53> 원천 콘텐츠로서의 다채로운 향토사와 지역 문화의 가치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5년03월17일 21시29분
  • 최종수정 2025년03월18일 16시04분

작성자

  • 김찬동
  • 전시기획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초빙교수

메타정보

  • 3

본문

필자는 지난 3월 10일부터 신설된 나주시문화재단의 대표로 일하게 되어 나주로 내려와 생활을 시작했다. 나주는 마한과 백제의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고도이며 고려와 조선시대 전라도 지역을 관할하는 나주목이 있던 문화의 중심지였다. 19세기 말 행정 중심지가 광주로 옮겨지면서 도시의 규모는 축소되고, 근자에 들어 노령화와 인구 감소로 작은 도시가 되고 말았지만 10여 년 전부터 혁신도시가 들어서며 새로운 활력을 되찾아가고 있다. 임시 숙소가 나주 원도심의 금성관과 나주 목사의 숙소로 사용되던 내아의 인근이어서 나주 목사들이 관련한 자료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철종 때 목사를 지낸 이정현이란 인물을 중심으로 나주와 프랑스의 숨겨진 외교사를 알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문화재단이 위치한 죽림동의 구 나주역사(驛舍)를 돌아보다가 일제 강점기에 벌어졌던 광주학생운동의 발원지가 바로 이곳이며, 광주로 통학하던 한국과 일본 학생들 사이의 싸움이 차별적인 교육 제도 문제에까지 번지며 증폭된 사건임도 알게 되었다. 나주를 알아가고 있는 외지인인 필자는 시내 주요 지역들을 탐방하고 지역의 전문가들과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지역의 역사 문화가 품고 있는 내밀한 내용들을 차근차근 알아가는 일부터 우선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을 계기로 한국과 프랑스 간의 공식 수교가 체결된 지 내년이면 140주년을 맞는다. 이를 계기로 양국은 다양한 교류프로그램이 준비될 것이다. 하지만 한불의 관계는 조선 후기 프랑스 선교사들이 포함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탄압인 기해박해와 병인박해가 외교 문제로 비화하면서 이를 빌미로 프랑스 군대와 조선군이 격돌하는 병인양요(1866)를 통해 불행한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1837년 프랑스 선교사 피에르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가 기해박해로 희생되었으며, 병인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6천 명의 평신도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 선교사들을 처형하는 병인박해가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 함대 7척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자에 대한 처벌과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로즈 제독의 요구를 묵살한 뒤 완강히 저항하자 프랑스 해군은 40여 일 만에 물러났다. 이를 병인양요라 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쇄국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대원군 하야 후 각국은 1882년부터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였지만, 프랑스와는 병인양요의 앙금으로 다른 국가들보다 늦은 시기인 1886년 6월 4일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조선과 프랑스 간 우호적 첫 만남의 시기는 이보다 35년 앞선 1851년이다. 그해 4월 당시 나주목이 관할하던 비금도 해역에 프랑스 포경선이 난파되었다. 나르발(Le Narval)이란 명칭을 가진 배의 선원 20여 명이 풍랑에 피해를 당한 것이다. 비금도의 섬 주민들은 이들을 잘 보살펴 주었다. 당시 중국 상하이 주재 프랑스 영사였던 샤를 드 몽티니(Charles de Montigny)는 통역관을 대동하고 원정구조대를 이끌고 비금도를 찾았다. 과거 병인양요로 인한 양국의 관계 때문에 선원들이 크게 고초를 겪고 있을 것으로 염려했지만 다행히도 이들은 섬 주민들의 보살핌으로 무사히 지내고 있었다. 몽티니는 조선 정부에 감사를 전하고 송환 전날인 5월 2일 정부를 대표해 나주 목사 겸 남평 현감인 이정현은 이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했고, 이들을 위해 튼튼한 선박을 골라 제공했다(철종 2년 비변사등록). 몽티니 영사와 이정현 목사는 막걸리와 포도주로 서로에 대한 우호의 정을 나누었고, 이정현은 선물로 막걸리를 담은 검은색 옹기주병을 선사했다 한다. 

 

172년이 지난 2023년 주프랑스 대한민국대사관은 5월 2일을 한·불 양국의 우정을 상징하는 날로 정해 처음으로 파리 세브르 국립도자기박물관에서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박물관은 당시 이정현 목사가 몽티니 영사에게 선물했던 옹기주병을 특별 전시했다. 이 전시에는 프랑스 샴페인협회 사무총장, 한국 막걸리 협회 고문, 연구자인 시테대학교 한국학 교수인 피에르 에마누엘 후 교수 등이 참석했다.

 

나주시는 작년 이와 관련한 학술 포럼을 개최하였는데 주한프랑스대사관의 문정관, 피에르 에마누엘 후 교수와 오영교 한불통신 대표 등을 초청했다. 이를 통해 비금도 표류 사건의 역사적 사실을 새롭게 규명하고 이를 토대로 내년 140주년을 맞는 한·불 교류 활성화 방안을 도출할 계획이다. 비금도의 현재 행정구역인 신안군의 경우는 비금도에 기념 공원을 조성하고 폐교 등을 이용한 샴페인 박물관을 조성하며 몽티니 영사의 고향인 툴루즈와 자매결연을 하며 관내에 프랑스 마을을 조성하는 등 적극적인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한다. 

 

지역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역사와 문화들은 중앙에 잘 소개되고 있지 않다가 비금도 사건과 같이 많은 시간이 지난 후 발굴되거나 재해석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비금도에 연루된 한불 외교 비사는 해외연구자에 의해 발굴된 것이지만 향토사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기존의 국가 중심 역사 서술에서는 소외되기 쉬운 지방의 역사를 조명하여 보다 균형 잡힌 역사 서술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중앙 중심의 역사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사회·경제·문화적 흐름을 보완할 수 있으므로 국가 역사 연구의 보완적 역할을 담당하며, 중앙의 기록에서 누락된 서민들의 생활 방식, 전통 행사, 구술 역사 등을 연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지역의 기록이 모이면, 보다 입체적이고 다원적인 역사 서술이 가능해진다. 향토사의 연구는 지역의 역사적 특징과 전통을 기반으로 관광 자원 개발, 문화 산업 육성 등의 정책을 수립할 수 있으며 지역 고유의 유산을 활용한 도시 브랜드 구축 및 경제 활성화에도 이바지할 수 있다.

 

역사는 사료를 근거로 한 해석의 과정이라 할 때, 사료의 발굴과 연구가 가장 중요하며, 때에 따라서는 기록이나 유물과 같이 물질적인 자료는 없지만 구전되어 내려오는 사실들에 대한 기록도 매우 중요하다. 때에 따라서는 가계의 역사나 개인의 일기 등과 같은 작은 자료가 역사의 숨겨진 사실들을 끄집어내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를 기술하고 구축하는데 사료들과 사건들에 대한 정당한 해석은 더욱 중요한 것이다. 사료의 해석은 단순한 과거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연구자의 관점과 시대적 영향을 받는 복합적인 과정이다. 정치적 권력은 종종 역사 해석을 왜곡하려 하지만, 다양한 사료를 비교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태도를 유지할 때 그 오류를 극복할 수 있다. 또한 학문적 자유를 보장하고, 역사 교육을 통해 시민 대중들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역의 다채로운 역사. 문화는 한국문화의 원형을 찾는 광맥이다. 요즘처럼 K컬처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상황에서 향토사학자들로부터 지역의 역사 문화종사자들 그리고 중앙의 연구자들이 개방된 태도로 국제적 맥락의 견고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원활한 소통과 학문적 교류를 통해 원천콘텐츠인 역사 문화 콘텐츠를 세밀하게 발굴하고 다원적으로 개발해 나가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ifsPOST>​ 

3
  • 기사입력 2025년03월17일 21시29분
  • 최종수정 2025년03월18일 16시04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