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續)여의도에는 왜? 정신병원이 없을까 <20> 장기표, 당신은 왜 그렇게 바보처럼 살았습니까 ⑦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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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를 이끄는 지도자와 그 집단에 대해 야박해서 눈물이 날 정도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그들이 힘들어 울어야 국민이 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건… 정책이나 전문가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사회지도층이 국민보다 힘들지 않고 편하게 살기 때문이다.> (졸저 ‘여의도에는 왜? 정신병원이 없을까’ 중) |
2024년 9월 23일 자 중앙일보
<‘영원한 재야’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이 22일 별세했다. 향년 79세.
올해 초만 해도 국회의원 특권 폐지 운동에 앞장서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던 고인을 덮친 것은 말기 담낭암이었다. 장 원장은 두 달 전인 7월 15일 “담낭암이 다른 장기까지 전이돼 치료가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다”며 “당혹스럽긴 하지만 할 만큼 했고, 이룰 만큼 이뤘으니 미련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고 주변에 투병 사실을 담담하게 밝혔다. …후략…>
투병 사실이 알려진 지 두 달여 만에 그가 세상을 떠났다. 생각보다는 너무 빨라서 당혹스러웠는데, 여전히 나는 문병은 고사하고 안부 전화도 걸지 못했기 때문이다. (간간이 나오는 기사에 따르면 병세가 악화해 문병도 아무나 가기는 힘들다고 나오긴 했다.)
세상은 그의 죽음을 의례적으로 대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영원한 재야, 잠들다’, ‘재야 운동 대부, 장기표 별세’, ‘의원 특권 폐지 꿈 못 이루고…’, ‘장기표 별세… 젊어선 독재에 맞서, 나이 들어선 특권에 맞서 싸웠다’ 등등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뉴스가 신문을 가득 채웠지만, 내 눈에는 그날 지면 또는 뉴스를 채울 아이템 하나로 다뤄졌을 뿐 진심으로 애도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대중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은데, 어쩌면 그런 느낌은 내가 너무 오랜 기간 문제점만 파헤치는 기자로서 살다 보니 냉소적인 성격이 돼서 그런 탓도 있을 것이다.
별세 소식과 그가 살아온 인생, 그리고 문상 온 사람들의 면면과 그들이 전하는 고인에 대한 기억 정도가 하루 이틀 나오고는 언론에서 더 이상 그에 관한 기사는 볼 수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잔인한 표현이겠지만, 승객을 내려주고 무심하게 출발하는 버스 같다고 할까. 물론 언론과 세상만 탓하기도 어렵다. 나도 기자지만, 만약 어떤 후배가 장기표 선생이 남긴 뜻을 기획 기사로 쓰고 싶다고 제안하면 받아주기 힘들 것이다. 설사 내가 받아줘도 더 위에서 아마 허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체로 그 정도의 기사 가치가 있는 인물은 아니라고 보니까.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이것이 지금까지 짧은 펜을 길게 늘인 이유다. 일개 기자일 뿐인 내가 그에 대한 글을 쓴다고 세상이 놀랄 것도 아니고, 이 글이 게재되는 곳이 큰 언론사 사이트도 아니지만 그래도 세상 어느 한구석에 남보다는 조금 더 길게 그를 기억하는 사람과 그에 대해 뭔가가 끄적여 있는 곳이 있다면 좀 더 따뜻하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평생을 다른 이들을 위해 살아온 사람에게 이 정도의 예우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뻔한 안부 전화나 죽은 뒤의 형식적인 문상보다 내가 그에게 진심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솔직히 그에 대한 글을 시작했을 때는 그가 이렇게 빨리 세상을 떠날 줄 몰랐다. 적어도 몇 달은 더 살아있을 줄 알았고, 연재가 마무리된 뒤에 그에게 안부를 물으며 연락하고 싶었다. 상투적으로 “쾌차하세요”라고 하는 것보다는 “제가 선생님의 만장(輓章)을 미리 썼습니다”라고 하는 게 훨씬 더 장기표란 사람에게 맞는 대우일 것 같아서다. 적어도 내가 아는 장기표라면 그 말을 듣고 불경스럽게 생각하기보다 “이 형, 고맙소”라고 하며 크게 웃어 줄 것 같았다.
대장부 영가옥쇄 하능와전(大丈夫 寧可玉碎 何能瓦全).
‘장부는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질지언정 하찮은 기와가 돼 목숨을 부지하지 않는다.’
그를 생각하면 이 말이 떠오른다.
영달을 위해서라면, 젊은 시절 세웠던 신념쯤은 길바닥에 팽개치는 사람이 세상에는 넘쳐난다. 복지부 장관 후보자가 돼서야 안 내던 국민연금을 한꺼번에 내고, 비리로 물러났던 교육감이 다시 출마하면서 일말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다. 대통령 부인이 명품백을 받고도 창피한 줄 모르고, 야단은 고사하고 마지못해 영혼 없이 죄송하다고 하는 남편. 국민 세금으로 일본 샴푸를 즐기면서 반일 감정 고조에는 앞장서는 야당 대표. 딸 스펙 높이려고 표창장을 위조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되레 정권에 탄압받았다며 국민을 호도해 국회의원 배지를 단 전직 서울대 교수이자 법무부 장관….
그들에 비하면 대한민국 최고의 집단에서 살 수 있었던 삶 대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살다가 간 그의 삶이 훨씬 아름다운 것 같다. 어떤 이는 병마로 쓰러진 그의 마지막을 안타까워하겠지만, 나는 그것이 더 장기표다운 마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룰 수 없는 꿈 인줄 알면서도, 가야만 하는 길을 걸은 한 남자의 마지막답다고 할까.
최치원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썼더니 황소가 읽다가 놀라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고 한다. 내게 그 정도의 글재주가 있었다면 기와 한 장의 가치도 없는 삶을 사는 그들을 준엄하게 꾸짖고 당신의 삶을 빛나게 그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재주가 없는 나로서는 그와의 인터뷰 마무리에 썼던 글로 그에 대한 평가를 대신하려 한다. 다음은 그의 딸 보원 씨가 2020년 4월 제21대 총선 지원 유세에서 했던 말이다. 팔은 안으로 굽고, 자기 아버지 편들지 않을 자식이 어디 있겠냐마는 적어도 그들 부녀는 허위 스펙으로 대학을 간 게 들통나고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사는 어느 부녀와는 차원이 다른 것 같다.
‘…제 아버지 장기표는 오랜 시간 감옥 도망 고문을 당하고서도 10억 원대의 민주화운동 보상금을 신청조차 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런 보상금은 우리 같은 일반 국민들의 세금을 낭비하고, 민주화운동의 진정성을 해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제 아버지 장기표는 서울대 법대 시절, 남들은 기피하는 병역을 스스로 다 했습니다. 운동권 시절부터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주사파를 질타했습니다. 쉽게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변화의 기미가 안 보이는 정당이라는 이유로 마다했고, 고액 연봉이 보장되는 공공기관 이사장 자리도 고사하셨습니다. 이렇게 무분별하게 만들어지는 공공기관이 꼭 필요할 곳에 쓰여야 할 세금을 축낸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장기표, 당신은 왜 그렇게 바보처럼 살았습니까’ 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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