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2 : 전조(前趙)의 유요(C)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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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유요의 낙양함락(AD311년 6월)
사마월이 병으로 죽자(AD311년3월19일) 이를 알아차린 석륵은 경무장한 기병을 풀어 동해로 돌아가는 사마월의 영구를 추격했다. 사마월의 10만 대군은 석륵에 패해 거의 멸절되었다. 석륵은 포로로 잡은 서진 조정의 태위 왕연과 사마범 등 모든 신료들을 칼을 더럽힐 수 없다고 하면서 담장에 세워놓은 뒤 담장을 무너뜨려 압살시켰다. 석륵은 영구에 안치된 사마월의 시체를 불태우며 이렇게 말했다.
“ 세상의 난적은 바로 이 사람이다.(亂天下者此人也)
내가 천하를 위하여 보복에 나섰으니(吾爲天下報之)
따라서 이 자의 뼈를 불태움으로써(故焚其骨)
하늘과 땅에 이를 고하는 바이다.(以告天地)“
사마월의 죽음으로 8왕자의 난이 종결되기는 했으나 서진은 허울뿐인 나라에 불과했고 서진 황제 사마치는 다행히 목숨을 건지기는 했으나 떠돌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구희가 수도를 낙양에서 개봉으로 옮기자고 제안했지만 아무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전란과 흉작으로 곡식이 부족해서 수도 낙양에서는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형편이었고 황제가 타는 가마나 호위병조차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다.
전조의 유총은 전군대장군 호연안에게 2만 7천의 군사를 주어 낙양을 점령하도록 했다. 5월 30일 호연안의 군사가 제일 먼저 낙양성에 도달하였으나 다른 원군이 도착하지 않자 낙양성 공략을 미루고 퇴각했다. 이어서 왕미와 유요의 군대가 낙양에 도착하고 나서 이들 삼군이 합하여 낙양성을 함락시켰다. 시안왕 유요는 왕미가 자신보다 먼저 낙양에 입성한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다. 왕미가 유요에게 이렇게 말했다.
“ 이제 낙양이 우리 손에 들어왔습니다.
낙양은 천하의 중심지가 아니겠습니까.
의당 주상께 말씀드려서
수도를 평양(임분)에서 낙양으로 옮기도록 하시지요.“
유요는 왕미의 말을 듣지 않고 낙양 궁성의 진귀한 보물들을 모두 약탈한 뒤 불을 질렀고 그것도 모자라 능묘를 파헤치고 역대 황제의 유골을 훼손시켰다. 이로써 AD265년부터 서진의 수도였던 낙양은 완벽하게 무너졌다. 미처 피난하지 못했던 황제 사마치는 잡혀 유폐되었다. 유요는 그 외 서진의 황족과 대소신료 3만여 명을 몰살시켰다.
왕미는 시안왕 유요를 심하게 욕했다.
“ 저 따위 도각자(흉노족은 대부분 남몽고 도각마을 출신이어서 이들을 비하하는 말)들에게
어디 제왕다운 면모가 있겠는가? “
그리고는 군대를 이끌고 동남쪽으로 물러나 항관(하남성 항성현)에 진을 쳤다. 유요와 왕미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이 틈이 벌어지고 말았다. 석륵은 군사를 끌고 개봉을 장악한 뒤 허창에 주둔했다. 유총은 유폐된 서진 황제 사마치를 특진좌광록대부 및 평아공에 책봉했고 유요는 갇혀있던 죽은 서진 혜제 사마충의 두 번째 부인 양황태후(양헌용)를 부인으로 취했다.(AD311년6월)
<13> 기구한 운명의 황후 양헌용(AD311년)
유요가 첩으로 택한 양헌용은 아마도 5천년 중국 역사상 가장 기구한 운명의 황후 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 네 번이나 황후의 자리에서 쫓겨났다가 복위되기를 반복했고 또 서진과 전조라는 두 황조에서 황후로 책봉된 경력을 지닌 여인이다. 그만큼 미모와 성품에 매력이 있기도 했을 것이다.
양헌용은 지금의 산동성 태안지방 출신이고 아버지는 한미한 중간관리 양현지였다. 그녀의 외할아버지 손기(孫旂)는 사마륜의 오른팔 실세 손수와 막역한 사이였다. 따라서 8왕자 난의 세 번째 주역 사마륜이 집권하자(AD300년) 양헌용은 외할아버지 손기의 영향력으로 황제 사마충의 두 번째 부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AD301년 사마륜이 황제를 유폐시키고 악명 높은 가황후를 처단한 뒤 황제자리에 오르자(역사에서는 그의 황위를 인정하지 않음) 그에 반발하는 사마경과 사마영 등의 연합군이 일어나 사마륜을 타도하여 주살시켜버렸다. 이때 양황후의 외할아버지 손기는 처단되었으나 아버지 양현지는 살아남았다.
사마륜이 사마경 등에게 피살된 뒤(AD301년 5월) 다시 사마경이 사마예에 의해 타도되고(AD302년) 또다시 사마예가 사마영에게 축출(AD304년1월)되는 동안 황제 사마충은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양황후 또한 아무런 권한이나 영광이 없는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다만 실세 사마예는 황실과 조정에 대해 정중한 예우를 했으므로 인심을 잃지는 않았고 황제나 황후도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AD304년 대장군 사마영이 사마예를 축출하고 나서부터 예기는 180° 달라졌다. 새로운 실권자 대사마·승상·도독중외제군사 사마영은 양황후를 폐위(1차폐위)시키고 또 황태자 사마담도 폐위시킴과 동시에 사마옹을 시켜 자신을 황태제로 삼으라고 윽박질렀다. 사마영의 입장에서 보면 양황후는 구세력 중심으로써 적폐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사마영은 과거에는 평판이 좋았으나 정권을 장악하고 나서는 사치하고 오만하며 황실을 업신여김으로써 민심을 크게 잃었다. 당장 전국에 흩어져있는 종실들이 사마영 타도를 외치고 나섰는데 그 중심에 동해왕 사마월이 있었다. 사마월이 같은 뜻을 가진 황족을 규합한다는 소식을 들은 사마영은 곧바로 폐위시킨 양황후를 복위(1차복위)시키고 폐위된 황태자도 복위시켜 민심을 돌리려고 하였다. 사마영에게 대항한 사마월 등의 연합군이 업성을 포위하고 전투를 벌였으나 함락을 시키지 못하고 사마월은 동해로 돌아갔다. 그러자 사마영과 같은 편이던 태재 사마옹이 배반하여 휘하 장방을 보내 낙양을 점령했고 장방은 양황후와 태자 사마담을 다시 폐위(2차폐위)시켜 버렸다.
낙양을 겁탈한 장방은 황제와 대신들을 자신의 근거지인 장안으로 옮겼다. 황제가 장안으로 들어오자 장방의 우두머리이자 서진의 실세인 사마옹은 양황후를 복위시켰다.(AD304년 11월12일:2차복위) 그 다음해 4월 장방은 다시 양황후를 폐위(3차폐위)시켰는데 4개월 만에 다시 폐위시킨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장방은 양황후 폐위에 매우 적극적이었고 사마옹은 그 반대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낙양에 주둔하고 있던 주권은 장안의 실력자 사마옹의 명령을 위조해서 스스로 평서장군이라고 외치며 유폐된 양황후를 복위시키고(4차복위) 군사를 일으켜 사마옹 타도를 시도했다. 그러나 곧바로 낙양현령 하교가 주권을 죽이고 양황후는 다시 폐위되었다(4차폐위). 사마옹은 양황후를 등에 업고 반란하는 움직임이 자주 나타나자 상서 전숙을 보내 양헌용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서진 조정의 충신 유돈이 양헌용을 적극 두둔했다. 그녀는 억울할 뿐이며 그를 죽이면 민심은 더 크게 돌아설 것이어서 난국을 헤쳐 나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였다. 사마옹은 화가 치밀어 올라 유돈마저 죽이라고 지시했다. 유돈은 재빨리 청주(산동성)에 있는 사마월과 사마략에게로 도망가서 숨었다. 덕분에 황후 양헌용은 사마옹이 지배하는 낙양에 있었지만 죽음을 면했다. 사마옹이 그녀를 죽이는 것이 오히려 악수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당시(AD304-AD305) 서진의 전국 정세는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낙양은 허수아비 황제가 갇혀있는 상황에서 실세는 장안의 사마옹이 장악하고 있었고 동쪽 청주지방에는 사마월이 대치하고 있었다. 북쪽으로는 유총과 유요가 웅거하고 있었고 업에는 유연의 세력 하에 있는 석륵 군대가 주둔하여 사실상 전국은 장안의 사마옹, 평양(임분)의 유요 및 청주(산동) 사마월의 세 세력이 전국은 나누고 있는 셈이었다.
내부분열과 선비족 침략으로 장안의 사마옹이 무너지고 등장한 사마월은 곧바로 양황후의 복위를 서둘렀다.(AD306년 8월) 그러나 황제 사마충이 죽고(AD306년 11월) 유요가 낙양을 점령하자(AD311년6월) 유요가 양황후를 첩으로 삼았던 것이다. AD318년 유요가 유찬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자 다음해에 양헌용을 황후로 승격시켰고 그가 나은 아들 유희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유요는 양헌용을 매우 아꼈던 것이 분명하다. 양헌용은 3년 뒤(AD322) 병사하였고 유요와 태자 유희 모두 석륵에 의해 피살(AD329)되면서 전조의 25년 짧은 역사는 막을 내린다.
<14> 유총이 여자에 빠짐(AD312)
이즈음 전조 황제 유총은 여색에 빠지게 된다. 당시 유초의 나이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사공 왕육의 딸과 상서 임의의 딸을 궁으로 들여 좌소의와 우소의(각각 1급)로 책봉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중군대장군 왕창, 중서감 범률 및 좌복야 마경의 딸들을 모두 부인(2급)으로 삼고서 우복야 주기의 딸은 귀비(3급)로 들였다. 또 태보 유은의 딸을 들이려고 하자 태제 유예가 같은 성이라는 이유로 말렸다. 유총이 신하들에게 그 문제에 관해 물었더니 모두들 이렇게 말했다.
“ 유은은 유강공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폐하와는 조상이 전혀 다릅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유총이 흡족해 하면서 유은의 두 딸 유영과 유아를 각각 좌우 귀빈으로 하여 소의보다 등급을 더 높게 책정했고 유은의 네 손녀까지 들여서 귀인으로 삼고 그 지위는 귀비 다음에 두도록 하였다. 유총은 여섯 명의 유씨 부인들에 빠져 밖으로 나오는 일이 드물었고 조정의 대소사는 모두 중황문(내시관서)에서 결정되었다. 그 직후에도 유총은 외삼촌 장식의 두 딸장휘광과 장려광을 맞아들여 귀인으로 삼았는데 어머니 장씨가 적극적으로 권유한 때문이었다.
<15> 유총의 난폭함과 왕창의 충간(AD312)
유총은 여색에 빠지면서부터 매우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젊었을 때 그렇게 박학하고 영명하던 그는 지방에서 물고기나 게와 같은 특산공물이 제대로 조달되지 않자 담당책임자인 황족 양릉왕 유터를 참수했고 궁궐 축조가 늦어진다고 책임자 근릉의 목도 날려버렸다.
중군대장군이자 유총의 애첩 왕부인의 아버지인 왕창이 간하며 말렸다.
“ 근래에 폐하께서 하시는 일을 보니
신은 참으로 마음이 무겁고 머리가 아픕니다.
지금 백성들은 서진을 섬길 것인지 우리 조정 전조를 섬길 것인지
마음을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사온데
그토록 잔혹하게 신하들을 죽이시면 민심이 떠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장차 폐하의 허물을 고치시고 행동을 닦으신다면
억조창생에게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유총이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 저 놈의 목을 베어라.”
왕창의 딸이 머리를 조아리고 애달프게 빌자 죽음은 면해주고 감옥에 가두었다. 유총의 생모 장태후도 유총의 형벌이 지나치다고 생각하고 음식을 사흘간이나 끊었고 황태제 유예와 유총의 아들 선우 유찬도 관을 짊어지고 간절하게 탄원(舆榇切谏) 을 했다. 유총이 광분하며 외쳤다.
“ 아니 너희들이 관을 들고 살아있는 사람에게 곡을 하다니
어찌 내가 폭군 걸주보다 더 흉악하단 말이냐!“
조정의 모든 대신들이 나서서 관을 벗고 눈물을 흘리며 황제에게 말했다.
“ 폐하께서 과거 세우신 공과 베푸신 덕은
천하를 덮고도 남음이 있어서
가히 당우(요순)와 비교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에 와서는
소소한 일로 대신의 목을 자르시고
곧은 말을 올리는 충신을 옥에 가두시니
저희들은 이런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걱정하며 잠을 못자고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입니다.“
온 조정이 들고 나서야 유총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 짐이 어제 크게 술이 취해 한 행동이었소.
그것은 정녕 내 본심이 아니었소.
공들이 이렇게 나서지 않았다묜
내가 큰 허물을 보지 못할 뻔 했소.“
모든 사람에게 비단 100필씩 내렸고 명령을 내려 왕창에게 사과하고 풀어주었다.
<16> 유총의 서진 유곤 공략 실패(AD312)
서진이 아직 망하지는 않고 여러 곳에 지지 세력들이 남아있었다. 량주(凉州,지금 감숙성 북서지역))의 장궤, 왕준(유주, 지금의 북경지역) 그리고 병주(지금의 산서성 태원)의 유곤이 대표적인 지방 군벌이었다. 태원의 병주자사 유곤은 탁발의로와 결탁하여 유총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고 유총 또한 유곤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양측의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유총의 아들 유찬이 유곤의 부하 학선과 장교를 격파하자 태원태수 고교 등이 떼를 지어 유총에게 항복했다. 유곤은 동쪽 산산(하북성 정정현)으로 도망갔다. 유주지역을 점령한 유총은 유풍을 병주자사로 임명하고 진양(태원)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상산으로 도망간 유곤은 대공(代公) 탁발의로에게 의탁하고서 진양의 유총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대조차 위태로울 것이라고 토벌을 설득했다. 탁발의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20만 대군을 몰아서 진양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유곤이 앞장섰다. 유총의 총사령관 유요는 탁발의로와 유곤의 군사에게 크게 패배하고 병주자사 유풍은 포로로 잡혔다. 유요도 타던 말이 죽고 도망가던 처지였으나 말단 부하가 말을 양보하는 바람에 겨우 목숨을 건져 돌아올 수 있었다.(AD312년11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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