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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78> 섬세한 통찰과 치밀한 판단력, 그리고 당당한 보폭-김종철 시인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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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4년09월07일 16시41분
  • 최종수정 2024년08월16일 11시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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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시인은 언제 어디서도 당당했다. 주저하거나 망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처음 만났던 김종철은 태평양화장품 대리점 사장이었고, 해물레스토랑 사장이었고, 중소출판사 사장이었고, 나중에는 우리나라 굴지의 출판사인 문학수첩의 대표였으며, 나중엔 한국시인협회 39대 회장이 되었었다. 

 

그는 자신의 일에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요즘 하는 일이 어떠냐고 말을 건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례 어려운 형편을 털어놓기 일쑤이다. 어떤 경우엔 얼굴까지 찌푸리고 죽을 지경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겸양의 덕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듯도 하다. 그러나 김종철은 늘 당당했고, 자신이 하고있는 일이 아주 잘되고 있음을 말하곤 했었다. 자신감이 넘쳤다. 김종철 시인이 당면한 일들이 늘 순탄하고 만만한 것일 수만은 없었으련만 그는 그랬다.

 

c0bba66c83bf1ca87c1c2580d2a3a9a5_1723776<김종철 시인>


나는 사람 관상에 대해 전혀 식견이 없는 사람이지만 김종철에게서는 어떤 기(氣)같은 게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보통 사람보다는 두어 옥타브쯤 높은 그의 목소리며, 상대와의 대화에서의 확신에 찬 어법이 그를 ‘기’가 아주 센 사람으로 느끼게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그의 육친의 형이며 내 친구이기도 한 김종해 시인과는 대조적이다. 김종해 시인은 탁월한 능력으로 가능한 길을 탐색하고는 안정적인 보폭으로 제 갈 길을 안전하게 찾아가는 사람이다. 아마 사업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두드려보고 점검해 보고 결정하는 스타일이 김종해의 스타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종철에게 출판 판매 신화를 안겨준 ‘해리포터’ 시리즈의 판권이 그의 형 김종해 시인을 스쳐가서 김종철에게 머물게 된 것도 김종철의 과감한 모험과 결단 때문이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바 있었다. (확인을 해본 얘기는 아니지만). 김종해 시인이 일궈낸 문학세계사의 품격과 탄탄한 기반, 김종철 시인이 일궈낸 문학수첩의 비약적 발전-상반되는 길을 가는듯한 형제 시인은 타고난 출판 DNA를 십분 발휘해 각각의 자리에서 일가를 이뤄낸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내가 지금 성공한 사람으로서의 김종철이 그냥 겉으로 드러나보이는 당당한 성품이나 결단력 때문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그의 내면에 내재하고 있는 섬세한 통찰과 치밀한 판단력이 뒷받침이 없었다면, 그는 그냥 큰소리나 치는 허풍장이 생애를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만으로 그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출판이 한국출판사상 최대 판매로 선풍을 일으키고 있을 때, 문학수첩 전담 세무 담당 공무원이 세무업무를 전담하고 있음을 말했다. 그만큼 수익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내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동용 문구용품 하나에 해리포터 로고가 쓰이게 될 때, 얼마나 엄청난 수입이 생기는가를 얘기하기도 했었다. 남들 같으면 세무 업무에 관계되는 사항은 발설하지 않는 것이 상례련만, 김종철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드러내놓고 얘기했고, 말한 대로 실행하며 산 사람이었다. 감추거나 웅숭거리며 산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10몇 년 전, 김종해, 김종철같은 걸출한 시인을 길러낸 그의 어머니를 뵌 적도 있고, 그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들 형제들이 성장한 부산 집엘 가본 적도 있다.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어머니의 고희연이 아니었나 싶다. 명동 한일관에서였을 것이다. 그때 두 시인은 형제 합동시집을 어머님께 헌정함으로써 어머니의 망극한 모정을 기렸었다. 아름다워 보였다. 

 

그들 형제가 자라난 집엘 들른 것은 그 어머니가 별세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였다. 전화연락을 받고, 즉시 차를 몰아 빈소가 마련된 부산의 주소지를 물어물어 찾아갔었다. 부산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산동네 골목 안 조그만 집에서 두 시인을 만났었다. 이 산동네 조그만 집, 가난 속에서였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 성장하면서 한국의 걸출한 형제 시인의 시는 마냥 깊고 넓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천부적인 재질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느꼈었다.

 

김종철 시인의 부음을 전한 언론사의 기사들엔 시인을 “못의 사제”라 쓰고 있었다. 김종철 시인은 ‘못’의 상징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온 시인이다. 시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상징’의 효용- ‘상징’이 관념을 매개하기 위해 쓰이는 것이고, ‘상징’과 상징이 매개하는 내포가 이질적이고 돌발적일 때 상징의 가치가 고양된다는 사실이다. 김종철 시인은 ‘못’의 상징을 통해 현실을 깊이 있게 통찰해 낸 시편들을 썼으며, 때로는 ‘순교’적 희생의 인식을 불러낸 시편들을 보여주기도 했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한국시인협회 회장으로 이루고자 했던 약속들이 그의 돌발적인 별세로 인해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게 된 사실이다. 그는 시인협회 회장 선임 전 병상에 있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기적처럼 병상을 떨치고 일어났으며, 일상으로 복귀해 있는 상태였었다.

 

2014년 2월 10일 한국시인협회 전임 회장들의 모임인 평의원 회의가 열렸었다. 김종철 시인이 건강을 되찾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시협 차기 회장으로 김종철 시인을 추대하기로 뜻을 모았다. 한국시인협회에는 김종철 시인처럼 결단력과 추진력을 겸비한 리더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3월 30일 총회 인준을 받아 39대 회장으로 취임하였으며, 4월 9일에는 한국시협 봄철 답사회를 가졌다. 분단 비극의 상징인 DMZ였었다. 건강을 되찾은 김종철 회장의 의욕이 넘쳐나는 행사였다. 특유의 목소리도 한 옥타브쯤 높아 보였다. 그는 한국시협 발전을 위한 다양한 계획들을 쏟아내었다. 거침이 없었다. 나는 김종철 시인을 차기 회장으로 선출하는데 동의한 평의원의 한 사람으로 잘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었다.

 

2014년 7월 5일 그의 별세 소식은 너무나 급작스러운 것이었다. 시협회장 취임 5개월, 돌발적이었고, 충격적인 타계였다. 그가 한국 시의 발전을 위해 이뤄내고자 했던 여러 가지 과업들이 있었다. 특히, 3. 40대 젊은 시인들을 다수 영입해서 ‘젊은 시인협회’를 이뤄낸 것을 3개월 남짓 재임했던 김종철 회장의 업적이라고 평가한다. 한국시인협회가 펴내기로 했던 월간 시지 <시인불멸>은 웹진의 형태로나마 존속될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협회 발전 기금도 기탁된 것으로 듣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유한한 존재니까. 언젠가는 세상 미련을 털고 이승을 떠나기 마련이지만 김종철 시인의 경우는, 너무 급작스럽고 안타까운 별세였다. 절두산 성지 지하에 유택이 마련되었다 한다. 그가 남기고 간 시편들이 오랜 생명으로 살아 있을 것을 믿는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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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4년09월07일 16시41분
  • 최종수정 2024년08월16일 11시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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