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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그렇다’의 함정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5년05월10일 19시31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9일 10시25분

작성자

  • 나은영
  • 서강대학교 지식융합미디어학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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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다들 그렇다’의 함정

 

 ‘다들 그렇다’고 생각하면 책임이 가벼워진다고 생각해서일까. 언제부터인지 우리나라에서 유행처럼 사용하는 말 중 하나가 ‘다들 그렇다’는 말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다들 그러한데 왜 나만 갖고 그러느냐’ 하고 항변함으로써 본인이 희생양이 된 듯한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다들 그렇다’라는 말 속에 어떤 오류들이 들어 있는지 생각해 보자.

 

피장파장의 오류

피장파장의 논증 오류는 대인 논증의 하나로, 누군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이를 추궁하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즉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 또는 ‘너희들도 마찬가지 아니냐’ 하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오류를 말한다. 요즘 정치권을 강타하고 있는 ‘성완종 리스트’ 파문의 당사자들이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다.

피장파장의 오류는 정치권 이외의 영역에서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작년 대학입시에서 자녀의 입학사정관제 합격을 위해 교사와 공모하여 수상경력을 조작한 사실이 들통 난 학부모도 ‘왜 나만 갖고 그러느냐. 강남에선 다들 이렇게 한다’고 했다는 내용이 기사화되었다. 근거 없이 ‘풍문으로 들은’ 이야기에 근거하여 ‘다들 그렇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지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이 더 많다고 ‘잘못 지각’하는 일종의 착시 현상이 사람들로 하여금 피장파장의 오류에 쉽게 빠져들게 하는 원인일 수 있다.

 

다른 사람도 도둑질을 한다고 하여 어떤 사람의 도둑질이 무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잘못이 알려졌을 때, 일단 처음에는 ‘절대로 그런 일 없다’는 부정에서 시작하여, 차츰 ‘누구나 다 저지르는 잘못이니 무죄’라는 식의 항변을 하다가, 마침내 본인의 잘못을 시인한 다음에는 또 이렇게 항변한다: ‘죄를 저지른 사람이 많은데 왜 나만 갖고 그러느냐.’ 그러면서 음모론이니 표적 수사니 하는 단골 어휘가 또 등장한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 우리의 모든 시선을 모으고 그들의 행동만을 생각하다 보면,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 전체가 그런 잘못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안 그런 사람도 많다’는 사실에도 균형 있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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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똑같아. 우리는 달라.’

잘못된 행동에 대한 지각의 오류, 즉 착시는 자기가 잘 알고 있는 내집단 구성원들보다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외집단 구성원들에 대해 더 크게 나타날 수 있다. 자기가 속해 있는 내집단 구성원들은 저마다 다양해 보이지만 외집단 구성원들은 하나같이 다 똑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내집단 다양성(ingroup heterogeneity)과 외집단 동질성(outgroup homogeneity)이라 부른다.

 

예를 들어, 교사 집단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교사들 중 촌지를 받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 저마다 올바른 가치관과 열정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사랑을 쏟는 교사들이 많다는 사실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교사 집단 바깥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내부의 사정에 대한 정보가 제한되어 있고, 겉으로 드러난 일부의 정보에만 주의집중을 함으로써 ‘교사들은 촌지를 받는 집단’으로 섣불리 판단해버리기가 쉽다.

 

마찬가지로 공무원이나 정치인들도 그들이 속한 집단 안에는 성실하게 자기 일 잘 하면서 합법적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정이 속속들이 잘 보인다. 그런데 그들과 무관한 외부의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볼 때는 언론에서 터져 나오는 부정적 사건들에만 초점을 두어 판단하기 때문에 ‘저들은 다 똑같아’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와 ‘그들’로 나누어 바라보기 시작하면 ‘우리’의 모든 행동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그들’의 모든 행동은 받아들일 수 없게 여겨진다. 범주를 나누는 기준도 ‘한국과 다른 나라’라는 큰 범주에서부터 ‘정치권 대 비정치권,’ 또는 정치권 내에서 ‘여당과 야당,’ 더 나아가 여당이나 야당 내에서도 ‘○○계파와 □□계파’ 등 다양한 수준에서 나누는 것이 가능하다. 어떤 경우든 일단 ‘우리’와 ‘그들’로 나뉘고 나면 ‘우리’에 대한 판단은 너그러워지고 ‘그들’에 대한 판단은 가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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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그런 사람도 있어요’

이제 우리는 ‘안 그런 사람도 있어요’ 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안 그런 사람이 더 많아요’라는 논리로 발전해야 할 때다. 언제까지 이렇게 ‘다들 마찬가지다’라며 자조적인 탄식의 늪에 빠져 있을 것인가.

실제로 촌지를 주지 않는 학부모도 많다. 촌지를 받지 않는 교사들도 많다.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과 정도(正道)를 걸어가는 사람 중 어느 쪽이 다수일지 제대로 검증해 본다면, 정도를 걸어가는 사람이 다수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하루 뚜벅뚜벅 자기가 가야 할 정당한 길을 가는 사람이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람들의 삶은 특별한 조명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실제보다 더 소수로 보이는 것이다.

정도를 벗어나 좋지 않은 일을 저질렀을 때 비로소 언론의 조명을 받는다. 그래서 이들의 행동이 더 다수로 보인다. 더욱이 음지에서나 이루어질 법한 거래가 겉으로 드러났을 때, 사람들은 ‘우리가 모르는 음지에서 그러한 행동들이 얼마나 많이 이루어지고 있을까.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일 것’이라고 추측하기가 더 쉽다.

 

계속 이렇게 ‘다들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팽배한다면, 실제로 정직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다들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유혹을 받기 쉽다. 사람들은 대세를 따라가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모두가 자동차 정지선을 지키고 있는데 자기 차 하나만 정지선을 벗어나 있는 사진을 볼 때와 많은 사람들이 정지선을 지키지 않는 사진을 볼 때, 두 경우 중 언제 더 정지선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커질까?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잘 지키고 있을 때 커진다. 모두가 어기면 ‘다들 어기는데 왜 나만 지켜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바로 얼마 전, 초등학생이 심폐소생술로 위기에 빠진 성인을 구한 사례가 보도되었다. 아마 많은 한국 사람들이 뿌듯하고 기특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도 있다. 그런 어린이도 있다. 비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군 수뇌부도 있지만, 부하를 구하려 지뢰밭에 뛰어들어 두 다리를 잃은 군 리더도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그런 사람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우리 개개인도 그렇고 언론도 그렇고, 가능하면 우리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며 묵묵히 정도를 걷고 있는 사람들의 올바른 행동에 조명을 비추면 좋겠다. 왜 옳은 행동은 조명을 받지 못할까? 그것은 그처럼 옳은 행동이 정상적인 행동이고 당연히 우리가 가야 할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언론이 그처럼 올바른 행동에 조명을 비추지 못한다면, 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우리들만이라도 언론에 등장한 부정적인 행동들이 우리 한국인의 삶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고 비관할 것이 아니라,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주변의 성실한 사람들에게 우리의 주의를 더 기울이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겠다. 그래야 ‘안 그런 사람이 더 많구나’ 하고 깨달을 기회도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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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5년05월10일 19시31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9일 10시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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