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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82> 첫 시집을 내던 무렵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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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4년11월02일 16시30분
  • 최종수정 2024년10월16일 11시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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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첫 시집이 되는 『이건청시집』이 나온 것은 1970년 5월이니까 어느새 50여 년을 훌쩍 넘었다. 이 시집에는 37편의 시와 박목월 선생의 서문이 실려 있고 뒤에 이승훈의 발문이 붙어 있다. 참고로 그때 박목월 선생께서 쓰신 서문을 여기 옮겨본다.

 

“이(李) 군의 작품을 보아온 지가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이 군의 끈기있는 노력과 정진은 그가 얼마나 성실한 문학도임을 충분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는 성숙을 기다리는 한 알의 열매처럼 내일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기대를 가지고, 10년을 여일하게 자기의 세계를 심화 세련․연마해 온 것이다.

진작부터 나는 이 군의 참신한 시풍과 그의 타고난 남다른 시재(詩才)를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보다 알찬 성숙을 기다려, 세상에 그를 소개하는 자랑스러운 시기를 고대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 성숙에의  길고 긴 인내와 자기완성에의 어수선한 과정을 거쳐, 이제 그의 광우리에는 잘 익은 과일로 그득하게 채우게 된 것이다.

그는 내면에 깊이 침잠하여, 현대정신의 위기와 심연을 의식의 심층에서 형상화하고 있었다. 불안과 방황, 좌절과 열등의식의 표상물로서 그의 작품은 오늘을 증언하는 심각한 문제성과 너른 공감권을 간직하고 있다.

비록 이번 시집이 그에게는 처녀시집이요, 그가 시단의 각광을 받게 된 시일은 연천하지만, 10여년 동안의 노력으로 이룩된 결정물이요, 또한 앞날의 대성을 약속해 주는, 출발의 발판이 될 것이다.

그의 꾸준한 정진과 대성을 축원한다.”

                                  1970년 4월      박목월

 

10여 년을 선생 문하에서 시작 수습 끝에 첫 시집을 내는 제자에게 건네는 기대와 격려가 담겨진 글이다. 『이건청 시집』은 95페이지 분량의 시집이다. 발행처가 ‘월간 문학사’로 되어 있는 것은 친구 이문구가 거기 근무하고 있어 양해 하에 그리 된 것일 뿐이다. 어차피 자비출판 시집이었으니 발행처는 어디라도 괜찮았기 때문이다. 실제 제작은 현대시학의 전봉건 선생이 도와주었다.

 시집의 제목을 어떻게 붙일까 많이 고심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나의 첫 시집이 되는 이 책의 제목을 「구시가의 밤」으로 붙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막 등단한 신인으로 '구시가'를 제목으로 내세운다는 게 면구스러울 것도 같고 해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박목월 선생께서 “마, 그리 어려우면 그냥 '이건청 시집'이라면 어떻겠노?” 하셔서 그냥 저자 이름을 내세운 쑥스런 시집 이름이 되어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좀, 새롭고 참신한 시집 이름을 생각해서 붙였었더라면 하고 아쉬운 생각도 없진 않지만 지금 와서 어쩔 수도 없는 일이니 그냥 수긍하고 만족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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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시집 '이건청 시집'의 겉표지>


  시집 겉표지에 들어갈 시집 이름을 박목월 선생께서 싸인펜 글씨로 써 주셨고, 시집의 제작을 맡아 해주신 전봉건 선생께서 세로로 쓴 그 글씨를 내리닫이로 겹쳐 인쇄해 박목월 선생 글씨의 모자이크가 표지 장정이 되어 버렸다. 500부 한정이었는데, 한 150부 쯤 시단에 기증본으로 돌리고 200부쯤은 몇 개 서점에, 그리고, 100부쯤은 그 때 내가 교사로 근무하던 한양중학교 교사와 학생들에게 보내졌던 걸로 기억한다.

 

  6월 며칠쯤인가 ‘호수 그릴’에서 출판기념회가 있었고 아마 그때 사회를 오세영이 한 것으로 기억된다. 오세영의 첫 시집 『반란하는 빛』이 같은 해 9월에 나왔고 역시 같은 장소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렸었다. 그때 사회를 내가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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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 선생의 격려>


  1967년에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또 『현대문학』에 추천도 거치고 하는 과정에서 비슷한 시기에 등단한 몇몇 신인들로부터 연락이 있었고 함께 동인활동을 시작해 보자는 논의도 몇 번씩인가 있었다. 우선 같은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친교를 열고 있었던 오세영과 의기투합하면서 비슷한 시작(詩作) 경향을 지닌 같은 연배의 시인들에게 연락도 하고 직접 만나 의견을 나누곤 했었다. 그때 주로 우리들이 만나던 장소는 시청 건너편 지금의 프라자 호텔 뒤 중국인 거리의 '가화 다방' 이었다.

 

  그러나, 동인 문제는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당히 의견이 다가서다가도 막상 구체적 실천단계에서는 조그만 복병들이 솟아나고 그것들이 결정적 방해가 되곤 했다.

 

  그때 내 기억에 남는 사람 중의 하나가 김지하였다. 내 기억으로는 조태일이 하던 '시인'이란 잡지에 「땅 끝」인가 하는 시를 발표한 이 시인이 매우 미학적인 시를 쓰는 탐미적인 시인이라는 인상을 받고 있었다. 오세영의 천거로 자리를 같이 한 그는 "누런 말똥 종이에 큼직한 활자로 찍은 동인지를 내자"는 말을 던지듯 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그는 그 이후, 정치 현실에 대한 강한 신념의 시를 썼고 우리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갔지만 지금도 나는 이 시인의 근본이 문예 미학적 토대를 감싸고 있는 것이라 믿는다.

 

  그 때, 또 다른 쪽에서 동인 활동을 권하는 친구도 있었는데 그가 박제천이었다. 박제천은 막 군대 생활을 마치고 주부생활인가하는 잡지에 근무하면서 「한국시」라는 동인지를 내는 한 편 그 동인지의 확대 개편을 꾀하고 있었다. 오세영과 나, 오규원과 박제천 등이 꽤 여러 번 만나 일을 논의하기도 했지만 결국 성사되지 못했었다. 모두가 다 패기만만했고 자신의 판단을 절충을 통해 화해의 수준으로 이끌 만큼 여유를 지니지 못했던 것이 그 이유가 되었었던 것 같다. 결국, 70년 5월인가 6월인가 우리는 하나의 동인지를 간행하는데 합의하였다. 그 멤버가 임보와 김춘석, 조정권과 신대철, 이시영, 그리고 오세영과 나 이렇게 7명이었다. 임보는 오세영의 대학 선배였고, 조정권은 나의 고등학교 후배이면서 오랜 문학적 담론의 상대였다. 신대철은 조선일보 신춘 당선 후 군 장교로 일선 복무 후 제대하면서 습작에 몰두하고 있었다. 신대철은 전봉건 선생의 『현대시학』에선가 만나면서 그의 시에 대한 대단한 열정에 끌려 나와 자주 만나던 사이였다. 그리고, 김춘석은 신대철의 연세대 선배였고 이시영은 아마 조정권이나 신대철의 천거였던 걸로 기억된다.

 

  제일 나이가 많은 임보로부터 조정권 이시영하고 10년 남짓 차이였지만 모두 패기 있고 높은 평가를 한 몸에 받는 소위 70년을 전후한 시기의 기린아들이었다. 「六詩(육시)」라는 이름이 붙은 이 시집은 얄팍한 책이었지만 패기 있는 젊음이 넘쳐났다. 동인지 「육시」는 70년, 71년에 각각 한 권씩 동인지를 냈다. 

 

  71년 가을 쯤, 『현대시』동인 멤버들로부터 입회 교섭이 있었다. 『현대시』 동인의 시적 취향과 나나 오세영의 그것은 누가 봐도 동질성이 강한 것이었다. 소위 '이미지를 통한 내면 추구의 시'는 그때 내가 혼신의 힘으로 찾아가던 같은 길이었다. 지금은 많이 다른 세계에 와 있지만 오세영의 초기 시는 나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나는 심각한 고민에 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시를 따라가자면 마땅히 『현대시』 동인에 합류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육시』 동인에 대한 의리나 우정이 나를 번민에 싸이게 했다. 결국 오세영과 나는 우리가 주도해서 만들었던 그 우정의 자리를 떠나 새로운 방으로 옮겨 앉게 되었다.

 

  지금, 나는 대학에 재직하고 있고 문학론을 강의하는 선생이 되어 있지만, 애초에 나는 그런 문학이론 같은 덴 별 관심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문학 이론 같은 건, 시를 쓰는 시인에게는 불필요한 방해꾼일 수 있다는 일종의 혐오감 같은 것까지 지니고 있었다.

 

  70년 4월인가 전봉건 선생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언제 시간 나면 한 번 놀러 오라는 짧은 사연의 엽서였다. 그때 『현대시학』은 서대문 로타리 서대문 우체국 뒤 좁을 길을 따라 우중충한 목조건물 2층에 있었다. 전봉건 선생은 만나자마자 '이형 『현대시학』의 월평을 3개월만 맡아주시오'하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시학』은 1968년경에 창간된 시전문지로서 그때 그 잡지의 월평이 지니는 권위는 상당했었다. 나 같은 신출내기 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나는 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전봉건 선생은 나의 시 「손금」이나 「구시가의 밤」 등을 얘기하면서 시를 보면 산문을 쓸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그 난을 맡아 소위 월평이라는 평론 형식의 논리적 글을 쓰게 되었고, 그것이 문학 이론 공부의 단초였고 그 이론을 작품 분석과 평가에 적용하는 일의 시작이었다. 그런 쪽의 강의를 전담하면서 서있는 지금의 이 자리는 전봉건 선생의 뒷받침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런 면에서 고마움을 느낀다.

 

  첫 시집을 내고 어느덧 50여 년 세월이 훌쩍 흘렀고 그 동안 나는 13권의 창작시집을 냈다. 그때 지녔던 순정과 시에의 열정이 그립다. 마음을 다잡고 최초의 자리의 긴장을 지켜야 하는 것이라 되뇌이곤 한다. 노년의 일상을 떨쳐내고 첫 시집을 내던 때의 용기와 신념을 지녀야 하는 것이라 다짐해 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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