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동의 문화시평 <45> 찬란한 전설, 천경자》전을 지켜보며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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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한국을 대표하는 여류화가 천경자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해이다. 그녀의 미술사적 위상을 생각하면 대대적인 회고전과 그녀의 작품세계를 재평가하는 행사가 개최될 만도 한데, 중앙 화단에서는 그녀를 기념하는 전시가 제대로 기획되지 않았다. 그녀가 많은 작품을 기증한 서울시립미술관조차 본격적인 개인전보다는 그녀와 다수의 여류 채색화가들을 포함시킨 소극적인 기획전을 개최했을 뿐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녀의 생일인 지난 11일 고향에서 고흥군 주최로 《찬란한 전설, 천경자》라는 제하의 조촐한 전시가 개막되었다. 고흥군은 2010년 천경자의 미술관을 조성하겠다는 약속으로 그녀의 작품을 기증받았지만, 허술한 작품관리 탓에 2년 후 유족 측이 작품을 회수해 가는 바람에 미술관 건립 약속을 지키지 못한 큰 부담이 있었을 것이다.
이번 전시는 미국에 거주하는 천경자의 둘째 딸 수미타 김(김정희) 교수가 감독을 맡아 준비하였다. 물론 작가인 그녀는 평론가나 전시기획자가 아니기 때문에 전시 준비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있던 처지에다 흩어져 있는 어머니의 작품을 모으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고 준비기간도 짧고 예산도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를 위하는 마음에 정성 들여 작품과 자료를 모았고, 규모는 작지만, 그간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들과 귀중한 유품들을 공개하여 의미 있는 전시를 만들었다. 천경자 화백을 사랑하는 뜻있는 소장자와 소장처에서 작품을 기꺼이 대여해 주었고 천경자를 그리워하는 많은 관람객들이 전시장을 찾고 있다 한다.
고흥의 남포미술관에서도 연계 전시를 준비하였다. 천경자 화백이 개척하고 이끌었던 채색화의 대표 작가들을 초대한 전시이다. 천경자 화백의 선배인 박래현, 제자인 이숙자로부터 서정태, 김선두 그리고 청년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10명의 작가가 참여한 《색채의 향연》 전이 그것이다. 물론 전시를 기념하는 학술행사가 함께 열렸으면 좋았겠지만, 준비기간이 짧아 여의찮았다. 어쨌든 그녀의 고향에서 그녀를 기리는 전시가 열렸다는 것은 그나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고흥군은 이번 전시와 행사를 계기로 천경자의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만들 예정이며, 기념관 주변에 ‘천경자 길’을 조성하겠다는 선양 사업 계획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천경자 화백은 1924년 전남 고흥에서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고, 현재 전남여고인 광주공립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유학했다. 그녀는 유학 중이던 1942년과 43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祖父)>와 외할머니를 그린 <노부(老婦)>가 연이어 입선하면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해방 후에는 전남여고의 미술 교사를 거쳐 1954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의 교수로 부임하여 1974년 사임할 때까지 학생들을 지도했다. 이때 그녀는 동료 교수로 있던 박생광과 함께 학생들에게 채색화를 가르쳤다. 당시 동양화단은 수묵화가 주도하는 상황이었다. 같은 홍익대 교수로 있던 청전 이상범이 누상동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채색화를 하는 그녀와는 거리를 두며 지냈다고 한다.
당시 채색화는 일본풍이라 하여 터부시되었지만, 사실 우리 미술의 전통은 고구려 고분벽화와 통일신라, 고려 불화, 조선시대 민화로 면면히 이어지는 채색화에 있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선비들의 화풍인 수묵이 여전히 우리의 전통으로 당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녀는 채색화를 재해석하며 현대적 여인의 낭만적 정서를 담아내는 작업을 펼쳤다. 종군 화가로, 또 아프리카와 남미를 여행하며 남긴 숱한 작품들은 그녀의 자유로운 정신과 채색화의 국제적 감각을 일깨워 준다. 꽃과 나비, 여인을 소재로 한 그녀의 작품은 화려한 색채의 아름다움 속에 깊은 애수가 담겨 있다. 그림뿐만 아니라 영화와 문학에도 소양이 깊어 많은 수필집과 자서전을 남겼다. 그녀의 작품은 한 번의 이혼과 유부남과의 재혼이라는 순탄치 못한 여인의 삶을 녹여낸 것들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수필집의 제목인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처럼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예술혼을 불태웠다. 그녀의 작품이 가진 독특한 예술성으로 여러 차례의 개인전과 수상, 예술원 회원 자격과 1983년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 서훈의 영예와 명성을 누렸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에 치명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게 된 <미인도>를 둘러싸고 위작 시비가 발생한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그린 그림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유력한 인물이 소유하던 작품으로 의심할 수 없는 진품이란 것이었다. 그녀는 절망했다. 자신이 낳은 자식도 못 알아보는 작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분별력이 성성한 67세의 작가 본인이 작품의 기법이 자신의 것과 현격히 다름을 강변했지만 전문감정가들은 이를 진품으로 감정했다. 그녀의 주장은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분노와 치욕에 그녀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의욕도 한국에 있을 이유도 느끼지 못하고 큰 딸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미국에서의 그녀의 삶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얼마나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을지 추측하고도 남는다.
위작 사건을 생각할 때면, ‘식도에 통증이 온다’라고 했다 한다. 그녀의 죽음 또한 너무도 슬픈 소식으로 전해졌다. 2014년 예술원 측은 소식이 끊긴 그녀의 수당 지급을 중단한다는 발표가 있고 난 뒤 유족들은 예술원 회원을 탈퇴하겠다는 소식을 전했고,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2015년 이미 그녀가 사망했음을 사후에 알게 되었다. 너무도 허망하고 쓸쓸한 부고를 접하게 된 국내 화단의 동료 후배들은 오랫동안 그녀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이후 유족들은 <미인도>의 진품 결정에 국가를 상대로 이의를 제기하는 소송을 벌였고, 오랫동안 공방이 있었다. 국내 전문가들은 물론 해외의 전문감정기관까지 참여해 진위를 가렸다. 프랑스 감정팀이 다중스펙트럼, 초고해상도 단층 촬영 등 첨단 기법으로 조사한 결과 <미인도>가 진품일 확률이 0.0002%라는 결과를 내놓았지만, 재판부는 과학적 감정보다도 국내 미술관 관계자들과 9명의 감정위원의 안목 감정 결과를 받아들였다. 역시 진품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유족들은 아직도 이에 대해 승복하지 못하고 있다. 김 교수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 항소심을 제기했고 지난 6월에는 추가 정보공개 청구 소송도 제기했다. 9명의 감정위원의 명단은 미공개 상태이다. 아직도 <미인도>의 진위감정 문제는 미완의 상태이다.
항소심의 결과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지만, 많은 미술인은 이 문제를 석연치 않아 한다.
미술품 감정의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이번 고흥의 전시를 준비하면서도 김 교수는 작품 수집 과정에서 천경자 화백의 많은 위작을 발견했다 한다. 대가들의 작품은 위작이 많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이중섭이나 박수근, 이우환 화백의 작품의 위작 사건 역시 그러하다. 좀 더 정밀한 감정 시스템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에겐 아직 그 전문성이 부족하다. 최근에는 과학 감정 시스템이 부분적으로 활용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작품을 많이 보고 다룬 경험이 있는 화상이나 미술관 큐레이터들의 경험과 안목에 의존도가 높다. 매우 원시적인 시스템이 주종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외국에선 최근 AI를 이용한 감정 시스템도 개발되어 활용되고 있다. 언제까지 주먹구구식 안목 감정에 의존할 것인가?
천경자 화백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근현대 거장들의 화업들을 생각하며, 그들이 힘들게 구축해논 우리 근현대미술사의 의미를 함께 떠올려 본다. 그들의 발자취와 작품들을 잘 관리하고 기록하고 평가하는 일은 우리의 미술사의 원천을 빛나게 하는 일이다. 잘못된 감정 결과가 미술사를 왜곡할 수 있고, 본의 아니게 국가공권력에 의한 심각한 인권과 예술의 침해가 될 수도 있다. 그녀에게 닥친 불미스러운 <미인도> 위작 사건이 그녀의 위상과 명예를 훼손케 해서는 안 된다. 미완으로 남아있는 작품의 진위 문제를 명명백백하게 재검증하여 망자의 한을 풀고 그녀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내년은 그녀의 10주기이다. 찬란한 전설이 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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