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정원 논란은 출발부터 뻔히 예견된 일이었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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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에서는 증원, 감원을 포함해 인력 구조조정을 시행할 때는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 기업 자원 계획) 시스템으로 업무 분석부터 시작 한다. 인력이 적절히 배치되고 있는지, 과다하거나 부족한 분야는 없는지, 전략적으로 필요한 인력은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를 판단한다.
마찬가지로 의대 정원 증원도 국가 의료 인력이 어디에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 파악하고 합리적인 인력 운용 계획부터 마련했어야 한다. 국가마다 지리적 문화적 환경이 다른데 인구대비 의사수 비율을 다른 나라와 비교해 2000명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은 애초에 논리적 근거가 부족했다. 의사 수를 늘리기 전에 현재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그 해결책이 무엇인지부터 고민했어야 한다. 일반인도 알고 있는 의료계의 해묵은 구조적 문제들을 덮어두고 의대 정원에 매달리고 있는 걸 이해할 수 없다 엉킬대로 엉킨 실타래를 아무데나 마구 잡아당겨 더 엉키게 만드는 꼴이다.
영국은 의료를 국가가 전담하고 있다 보니 의료 재정이 열악한 것은 물론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몇 달씩 기다려야 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더구나 지역 가정의가 병원을 지정해 주기 때문에 환자의 병원 선택권도 없다. 이에 영국정부는 NHS(National Health Service 국민건강서비스)에 모든 기술을 동원해 먼저 효율을 높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의료분야의 디지털 전환을 통해 의료서비스 품질을 높이고 환자의 경험을 개선시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국가의료서비스 체계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높이는 것이다.
의대정원 증원이 개혁의 목표일 수 없다. 궁극적으로 의사가 부족할 수는 있지만 그 이전에 의사들이 힘들고 개인적 리스크가 있고 경제적으로도 제대로 보상 받지 못하는 분야의 진료를 기피하고 있는 현실부터 해결책을 내놔야 한다. 결국 의사수의 부족이 아니라 의료 전달체계의 왜곡이 문제인 것이다. 왜곡된 시스템을 놔두고 의사 수만 늘리면 바이탈 분야의 진료는 개선되지 않고 비교적 손쉽게 돈 벌 수 있는 분야의 의사만 과잉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의료계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덮어놓고 의사군(醫師群)의 평균수입까지 들먹이며 이기심에 가득찬 기득권 집단으로 매도하는 걸 보면 경악하게 된다.
일반인의 관찰로도 우리나라 의료개혁의 출발점은 의사 수가 아니라 의료보험제도의 개선이어야 한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의료보험이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의료 현장을 왜곡시키는 문제가 난마(亂麻)처럼 얽혀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보험이 잘 보장되다 보니 감기 같은 간단한 질병의 진료와 처방이 너무 쉽게 이루어져 ‘의료쇼핑’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이렇게 무상에 가까운 손쉬운 처방으로 버려지는 약은 또 얼마인지 알 수도 없다. 그런가 하면 의료 수가의 수준이 낮아 병원 스스로 수익성이 좋은 비보험진료를 확대하고 있다. 그래야 병원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의료보험으로 처리되지 않는 진료를 민간에서 부담케 하기 위해 개발된 실손보험이 의료현장을 더 왜곡 시키고 있다. 실손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환자에게 의사가 공공연히 진료를 권장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꼭 필요한 분야의 의료 서비스는 부족한데 손쉽게(?) 돈 벌 수 있는 분야는 과잉 진료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응급실 뺑뺑이나 이대목동병원 소아과 사례와 같은 의료 사고에 대하여 현장의 문제점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의사 개인에게 법적 책임을 지우려 하니 젊은 의사들은 개인적 리스크가 있는 난이도가 높은 분야를 기피하고 있다. 응급의학, 심장, 뇌, 산부인과 등 긴박성이 높고 의료사고 위험 또한 높은 분야의 지원자가 점점 줄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정원의 증가와는 무관한 일이다.
의료 현장의 혁신은 단순히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의사들로 하여금 더 중하고 꼭 필요한 분야에서 긍지를 갖고 의료행위를 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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