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 #20 : 북제 창업자 고환의 업적을 다 까먹은 아들 고담과 손자 고위 <I>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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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서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58> 패역한 아들 고징(AD547)
아버지 고환이 죽고 후경이 반란을 일으킨 상황에서 고징은 본거지 태원을 단소에게 맡기고 수도인 업으로 향했다. 아직 공식적으로는 고환이 죽은 것을 발표하지는 않았으나 진원강 정도만 알고 있었다. 업에 도착하자 동위 주군 원선견은 고징을 위해 잔치를 열었는데 고징이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고환의 사망 소식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아버지가 죽었는데도 술에 취해 춤을 춘 고징을 보고 끝을 제대로 맺지 못할 것을 알았다.
AD547년 5월 동위에서는 대대적인 인사조치를 내렸다. 고적간이 태위가 되고 손등이 태부, 하발인이 태보가 되었다. 가주혼도원은 사공, 고환의 아들이자 고징의 동생 고양은 상서령이 되었다. 고징이 동생 고양에게 업을 맡기고 다시 태원으로 들어간 다음에야 고환의 사망을 공식발표하였다.(AD547년 6월 12일)
<59> 한궤의 후경 포위(AD547)
동위의 한궤가 영천(하남성 장갈)에서 후경을 포위했다. 후경은 동형주, 북형주, 노양 및 장사의 네 성을 쪼개 주면서 서위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서위의 상서좌복야 우근은 동위를 지원하는 것이 섣부르다고 생각하고 움직이지 말자고 했지만 형주자사 왕사정은 오히려 지금과 같은 기회를 살리지 않으면 후회가 막급일 것이라고 하면서 군사 1만을 가지고 노산으로 출병했다. 우문태는 후경에게 대장군 겸 상서령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그리고 태위 이필에게 1만을 덧붙여 영천으로 보냈다. 후경은 양나라가 섭섭해 할 것 같아서 소연에게 사신을 보내 급해서 서위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이지 속으로는 고징이든 우문태든 복속할 마음이 없음을 해명했다. 황제는 후경의 듯을 가상하게 여겼으며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후경을 믿었다. 그리고는 파양왕 원범을 정북대장군으로 하여 한수 이북을 토벌하는 일을 맡겨서 양성(하남성 등주)으로 보냈다.
영천을 포위했던 동위의 한궤는 서위의 이필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군사를 돌려 업으로 돌아갔다. 후경은 서위의 이필과 조귀가 온다고 하자 유인하여 사로잡을 생각이었는데 조귀와 이필이 말려들지 않았다. 조귀 또한 후경을 역으로 유인하여 체포하려고 했지만 이필은 후경을 사로잡은들 하남의 광대한 지역을 관리할 여력이 아직은 없고 오히려 동위만 유리해진다고 판단하여 후경을 사로잡는 계획을 중단시켰다. 양나라의 지원군이 도착하자 이필도 군사를 돌려 돌아갔다.
후경이 땅을 경략한다는 핑계로 서위에게 군사지원을 다시 요청하였다. 대행대 좌승 왕열이 우문태에게 그렇게 친했던 고환을 배반한 후경의 속내는 절대로 믿을 수가 없으니 도와주면 안 된다고 강하게 말했다. 우문태도 그렇게 생각하고 후경을 조정으로 불렀다. 후경이 진정한 속내를 파악하기 위한 조치였다. 들어오면 서위를 반란할 진심이 없는 것이고 들어오지 않으면 그럴 마음이 있다는 증거였다. 우문태와 서위의 여러 장군들은 후경이 속내를 꿰뚫고 있었다. 후경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후경이 우문태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 내가 고징과 더불어 안행(기러기 같이 서로 돕는 일)하기를 부끄럽게 여겼는데
하물며 큰 동생인 너와 어깨를 나란히 같이 하겠는가?”
후경은 서위와의 관계가 깨졌다고 판단하고 양나라와 손을 잡기로 결심했다. 고징은 후경의 어머니와 처자가 다 업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미끼로 다시 동위로 돌아오기를 회유하였다. 후경은 죽이려면 말려도 죽일 것이고 그들이 동위의 손아귀 안에 있지만 자신의 대업성취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우문태는 후경에 내린 태부 대장군 겸상서령 하남대행대 도독하남제군사를 형주(하남성 등주)자사 왕사정에게 내렸는데 왕사정이 받지 않았다. 여러 번 받기를 요청하자 왕사정은 도독하남제군사만 받았다.
<60> 개다리 황제라고 놀린 고징(AD547)
동위 황제는 고징에게 사지절, 대승상 도독중외제군사 대행대 발해왕 등 아버지 고환의 직책을 그대로 물려 주었지만 그는 계속 사양했다. 그렇지만 고징은 사실상 동위 최고의 권력자였다. 이 때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동위 황제 원선견은 얼굴과 겉모습이 매우 아름다웠으며 활 쏘는 솜씨나 체력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문학을 좋아하고 태연한 자태가 사람을 매혹하는 힘이 커서 전에 사람들은 효문제 원굉을 많이 닮았다고 칭찬했다. 죽은 고환은 AD535년 원선견을 황제로 세우고 격을 갖추어 각별하게 공경했었는데 고징은 반대로 거만하게 굴면서 황제 원선견을 깔보았다. 한 번은 연회를 하면서 원선견이 이렇게 말했다.
“ 자고로 망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고 했는데
짐이 이런 삶을 살아 어디에 써 먹겠는가”
그러자 고징이 이렇게 내뱉었다.
“ 짐, 짐이라니 무슨 개뼈다귀 같은 짐이냐.”
내시 최계서로 하여금 주먹으로 세 번 황제를 내려치게 하였다. 그 다음날 고징은 최계서를 다시 보내 사과했는데 황제도 그 사과를 받아들이고 최계서에게 비단 100필을 하사했다. 그러나 황제는 울분과 치욕을 참을 수가 없어서 사령운의 시를 읊었다.
“ 韩나라가 망하니 자방이 분을 참지 못하고 일어나
진나라가 황제를 칭하니 노중련이 치욕을 당하였네.
본래 강해로부터 왔으니
충성과 의로움이 군자를 감동하네
(韩亡子房奋,秦帝鲁连耻。本自江海人,忠义动君子)”
사령운(AD385-AD433)은 동진과 유송시대의 유명한 산수(山水)시인이다.
<61> 고징 주살모의(AD547)
동위 황제 원선견이 고징에게 모멸과 수치를 당했다는 것과 황제가 그에 대해 울분을 토한 것을 알게 된 상시 순제라는 사람이 낭중 원근, 장추경, 유사일 및 화산왕 원대기, 회남왕 원선홍, 제북왕 원휘와 더불어 고징을 암살하기로 계획했다. 황제가 순제에게 물었다.
“언제 강연(암살실행)을 열 계획인가?”
황제의 뜻을 확인한 순제는 궁궐 내에 토산을 만든다는 명분으로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나 땅굴이 천추문 밑을 통과할 즈음 문지기 경비병이 땅 밑의 이상한 소리를 듣고 수사한 끝에 고징 암살계획이 발각되었다. 고징은 병사를 이끌고 황궁으로 가서 황제에게 따져 물었다.
“ 폐하께서는 어찌 뒤집어 엎을 생각하십니까?
신의 부자는 사직을 세운 공로가 있는 사람 아닙니까
무슨 죄를 졌단 말입니까.
반드시 주변의 비빈 무리들이 주모한 것일 것입니다.”
고징이 호부인과 이빈을 죽이려고 하자 황제가 정색을 하면 말했다.
“ 신하가 역모를 한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황제가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은 못 들어봤소.
왕이 사직을 뒤엎을 생각이면서 어찌 내게 책임을 지우는 것이오.
또 내가 왕을 죽이면 사직이 안정되는 것이고
못 죽이면 망하는 것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일이오.
나도 슬픔으로 내 한 몸 가누기 힘든데 비빈들이야 어떻겠소.
필시 역모를 꾸민다면 완급은 오로지 왕에게 달려있는 일이오.”
고징이 칼을 내리고 계단 앞에서 울면서 사죄했다. 그리고 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밤이 늦어서야 궁에서 나갔다. 사흘 뒤 황제를 합장당에 가두고 순제 등 주동자를 저자에서 팽하였다.
<62> 고징 암살 주모자 순제
순제는 원래 강동(강소성)에서 살았고 양나라 소연과 매우 친했다. 똑똑하면서 학문이 깊었으며 글을 잘 지었지만 기개가 높아서 항상 남에게 복종하는 것을 싫어했다. 소연이 황제가 되고서 누군가가 순제를 추천했지만 소연은 그 사람의 인품을 이렇게 평가하며 말했다.
“ 그 사람은 재주는 있지만 풍속을 어지럽히고 뒤집기를 좋아해서 쓰기가 어렵다.”
순제는 소연이 불교를 숭상하여 탑을 세우고 절이 사치하는 것을 조장하자 이를 크게 비판했는데 소연이 화를 내고 순제를 죽이려하자 소연의 총신 주이가 알려주어 북쪽 동위로 망명간 사람이다. 고징이 중서감으로 임명되고 순제를 시독으로 차출하여 가까이 두려하자 고환이 죽기 전에 고징에게 말했다.
“나도 순제를 아끼기 때문에 그를 쓰지 않은 것이다.
그가 궁에 들어오면 실패하여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그래도 고징이 고집하므로 순제를 채용한 것이다. 시중 양준이 순제에게 이렇게 물었다.
“ 쇠약해질 나이가 된 황혼녘에 무슨 고생을 하고자 이런 일을 꾸몄는가?”
순제가 말했다.
“ 아직도 씩씩한 기력이 남아있네.
내 나이가 들어 꺾이고 부러져도
공로와 이름을 세우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왔기 때문에
천자를 돕고자 권신을 주살하고자 한 것이네.”
고징이 살려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순제에게 물었다.
“ 무슨 이유로 역모를 꾸몄는가?”
순제가 이렇게 대답했다.
“ 황제의 조서를 받고 일을 일으킨 것인데 어떻게 역모라고 하시오.”
유사는 순제가 늙었으므로 사슴이 끄는 수레를 태워 동쪽 저자에 가서 그와 함께한 무리를 태워 죽였다. 앞에서는 ‘팽(烹)’이라하였고 여기서는 “태웠다(焚)‘이라고 했는데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확실하지 않다.
<63> 후경의 전투력과 패배(AD547)
이때 후경은 장갈(하남성 허창 북쪽 20KM)에 있었는데 양나라와 손을 잡고 동위의 영토인 서주의 도읍 팽성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양나라에서는 소연명을 팽성으로 보내 후경을 기다리게 했다. 동위 대장군 고징은 공격을 받고 있는 팽성을 지원하기 위해 대도독 고악과 반락을 파견할 생각이었다. 진원강이 모용소종을 시키는 것이 반락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라고 제안하므로 모용소종을 동남도대행으로 고쳐 삼고서 고악과 반락을 같이 따라 보냈다.
후경은 처음에 동위의 한궤가 자신을 토벌하러 온다고 하자 돼지 창자나 먹는 아이라고 비하했었는데 서위의 고악이 온다고 할 때에는 병사는 뛰어나도 지휘관이 평범할 뿐이라고 폄훼했다. 그러나 모용소종을 보냈다는 소식을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했다.
” 누가 선비족 아이(고징)에게 모용소종을 추천하여 오게 가르쳤는가?
고환이 죽지 않은 것 아닌가?“
고징이 정위경 두필에게 다스리는 일의 요체와 경계해야 할 중심을 물었다. 두필의 대답이 이렇다.
” 천하의 가장 큰 일은 상을 내리고 벌을 주는 일입니다.
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 천하를 기쁘게 하며
한 사람에게 내리는 벌로 천하가 두려워합니다.
진실로 두 가지의 일에 실수하지 않으면 저절로 모두 아름답게 됩니다.
(天下大务,莫过赏罚 赏一人使天下之人喜,罚一人使天下之人惧,苟二事不失,自然尽美)“
고징이 그 말을 크게 기뻐했다.
동위 모용소종이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탁타현(팽성 부근)에 도착했다. 양나라의 양간이 소연명에게 기습작전을 제안했지만 소연명은 묵살했다. 모용소종의 군대가 탁타현 성을 맹공했지만 소연명은 술에 취해 잠자고 있었고 양나라 군대는 탁타현을 지원하러 나가지도 않다가 군대를 물려 후퇴하고 말았다. 소연명은 모용소종에게 포로가 되었고 양간은 도망갔다.
후경은 양나라 소연에게 원씨 성을 가진 사람을 후계자로 뽑아서 군사와 함께 북쪽 동위로 보내 고징을 몰아내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되면 동위 사람들도 좋아할 것이고 소연 또한 남북을 통일하는 셈이니 공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소연은 원정이라는 사람을 세워 함양왕으로 삼고 군대를 주는 한편 동위의 주군으로 임명했다.
후경은 모용소종과의 이번 전쟁에서 크게 이겼다. 작전의 핵심은 짧은 칼을 써서 적군 사이를 헤집고 들어간 다음 무릎 아래를 공격하는 전법이었다. 여러 장군이 부상을 당하거나 사로잡혔고 모용소종의 말이 무릎이 잘리는 바람에 모용소종은 낙마해 초성(안휘성 박주)으로 도망갔다. 모용소종이 말했다.
” 내가 여러 전투를 싸워봤지만 후경처럼 이기기 어려운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모용소종의 패배를 꾸짖던 다른 장수 곡률광과 장시현이 나가서 후경과 싸웠지만 역시 패배하고 돌아왔다. 모용소종이 말했다.
”지금 해보니 어떻던가? 나를 꾸짖을 만하던가?“
후경과 동위군대는 장기 대치전으로 들어갔다.
해가 바뀌어 AD548년 정월이 되었다. 후경의 군대는 보급이 거의 끊기어 영주(장갈)자사 부하 사마세운은 동위에 투항까지 했다. 모용소종은 철기병 5천으로 후겨을 공격했다. 후경은 군대를 분발시키기 위해 군사들에게 가족들을 모두 고징이 죽였다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모용소종은 머리를 풀어헤치면서 그것은 거짓말이며 온 가족이 안녕한 것을 자신이 보장한다고 외쳤다. 여러모로 밀리면서 후경의 부하 장수들 중에 모용소종에게 투항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크게 패한 후경은 급히 남쪽으로 도망갔다.
<64> 동위와 양의 화해(AD548)
후경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남예주의 마두성(안휘성 회원 남부)으로 들어가 웅거했다. 동위 고징은 후경이 차지했던 13개 주를 거의 다 회복하고 나서 양나라와 화해하기를 원했다. 포로로 있는 소연명을 설득하여 양나라에 사람을 보내 자신의 진심을 말하게 하여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소연명은 하후승변을 보내 자신이 어떻게 후대를 받고 있는지, 고징의 사람 됨됨이가 얼마나 좋은지를 말하여 양국의 화해를 추천했다.
그러나 양나라에서는 화해의 진의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후경이 불안하니까 일단 양과 화해 한 다음에 후경을 장악하면 다시 양나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황제의 총신 주이가 화해를 강력하게 주장했으므로 소연은 화해요청을 수락했다. 소연명에게 보내는 친서를 하후승변에게 주어 화해요청에 화답하게 했다.
후경은 마두성에서 다시 옮겨서 수양(안휘성 수현)을 점거하고 있었는데 동위로 올라가는 소연명의 사자 하후승변 일행이 수양을 들르자 이들을 체포한 뒤 소연이 고징에게 보내는 황제의 편지를 빼앗고 대신 가짜 편지를 지어 보냈다. 그리고는 황제 소연에게 표문을 올려서 고징의 잘못을 낱낱이 지적하면서 화해의 부당성을 역설했다. 그리고는 금 300냥과 편지를 주이에게 주었으나 주이는 후경의 계문을 황제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양나라 조정에서는 한 동안 후경의 생사를 몰랐는데 양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 고환의 죽음을 조문하게 하자 후경은 표문을 여러 번 올려 양나라와 전쟁을 벌이기를 주장했지만 소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황제는 더 이상 표문을 올리지 말라고 후경에게 명령까지 했다.
후경은 양나라를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다른 계략을 고안해냈다. 즉, 고징이 소연명을 보내는 대신 후경을 달라는 편지를 거짓으로 써서 소연에게 보낸 것이다. 소연은 그렇게 할 참이었는데 부기가 나서서 반대했다.
” 후경이 궁핍하게 되어서 귀의하지 않았습니까.
그를 버리는 것은 의롭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는 백전을 겪은 사람이니
쉽게 붙잡히려 하겠습니까?“
사거와 주이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 그저 한 마리의 사자와 같을 뿐입니다.”
황제가 편지를 써서 내려 보냈다.
“ 정양후(소연명)가 아침에 도착하면 저녁에 후경을 보내라.”
후경이 좌우에게 말했다.
“ 내가 저 오나라 늙은이가 심장이 얇은 줄 알았지.
주변에서는 안자어도 죽고 서서도 죽을 뿐이니 반란을 일으킴만 못하다고 부추겼다. 마침내 후경은 성안의 모든 주민을 긁어모아 군사를 만들고 반란을 준비했다.
후경은 황제에게 편지를 써서 양나라 최고의 가문인 사씨와 왕씨 여자를 아내로 취하겠다고 요청했으나 황제는 그보다 낮은 주이나 장관의 가문에서 여자를 택하라고 권고했다. 후경은 화를 내면서 왕씨나 사씨(오날 지역의 명문) 딸을 노복에게 줄 것이라고 호통쳤다. 후경은 이외에도 과도한 물자나 병기를 요청하거나 과도한 징세를 하므로써 양나라에 반감을 표시했다. 그리고 평소에 학정으로 백성들의 반감을 샀다가 징계를 받아서 조정과 사이가 멀어진 임하왕 소정덕과 연계작전을 펼쳤다.
예리한 여러 장수들이 후경의 반란기미를 알고 경고했지만 황제의 총신 주이는 후경의 요구를 마치 어린아이가 젖을 달라고 보채는 것 이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양나라에서는 후경에 대해 전혀 방비하지도 않았다.(계속)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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