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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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노트

장마철이 되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어릴 적 우리나라의 산은 거의 붉은 황토를 드러낸 모습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이상기후로 인한 극한호우가 아니어도 비만 오면 시뻘건 흙탕물이 쉴 새 없이 산 아래로 넘쳐났었습니다. 장마철이나 태풍이 오면 여지없이 하천은 범람하고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피해가 매년 되풀이되었습니다. 6~70년대까지는 자연의 위력 앞에 맥없이 무너지는 삶을 살아야 했지만 1962년에 사방사업법, 1963국토녹화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제정, 공포됨으로써, 1960년대 이후에는 사방사업이 범국민운동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치산 치수를 이룩한 거경궁리 (居敬窮理)의 결과​

 

 

특히 1973년에는 제1차 치산녹화10개년계획이 수립, 시행되면서 급진적인 변화가 생겨났고 1976년에는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내마을 붉은땅 없애기운동(19761977)’이 전개되면서 전 국토가 푸른 나무의 생명력으로 치산, 치수의 염원을 이뤄내는 전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지금은 산엔 나무가 무성한 숲이 있다는 것을 당연시될 정도로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전국토의 변화를 만들어낸 선배님들의 위대함을 생각하며 만든 작품이 사의사색 w-24입니다. 모티브가 되는 대상은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오도리에 위치한 사방기념공원입니다. 이 곳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공부한 거경궁리 (居敬窮理)의 결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시작은 수해가 끊이지 않는 헐벗은 산을 사방 공사로 안정화 작업을 하자는 것이었는데 막상 시작하고 나니 화강암 부식토 지역이라 나무를 심기도 어렵고 심어놔도 자라지 않으며 장마가 오면 심은 모든 나무가 흘러 내려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런 돌산에 나무를 심어 푸른 숲을 만들었습니다. 5년만에 오도리 바위산 일대는 197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연인원 360만 명이 총면적 4500ha를 녹화하여 전세게에 유래가 없는 사방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룩한 대표적 지역으로 알져진 곳입니다. 2400만 그루의 나무가 조림되었고 산사태나 홍수는 물론 그 어떤 자연 피해도 없도록 조성된 이곳은 인간과 자연이 융복합된 특수지역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산림 녹화사업의 모델이 된 엄청난 결과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문제를 엄숙하게 바라보는 경()의 습관이 있었다고 봅니다.

 

 

 

 

작품 설명

자연과 융복합되어 상생의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낸 사방사업을 모티브로 제작되었다. 전 국토의 대부분이 붉은 땅을 드러냈던 50여년전의 모습에서 전세계인이 부러워하는 원시림과 유사한 자연을 가진 나라로 발전한 대한민국의 발전된 모습을 표현하였다. 위쪽에 자리한 산이 붉은 것은 과거의 황폐한 산을 나타내는 것이고 아래쪽으로 오면서 푸르름이 극에 달하게 구성하였다. 전체적인 시각적 형상은 동양화의 사의적 표현을 하였으며 중간 중간에 현대적 건물을 넣어 첨단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전체적인 구성은 우리의 전통적인 거경궁리의 정신과 현대기술이 융복합되어 하나의 유토피아가 건설되었다는 것을 영일만에서 바라보는 느낌으로 제작하였다.

 

 

전완식 작품. 사의사색 w-24​ / 216x216cm​ / 거울 위에 아크릴페인팅과 혼합재료​ / 2023년

 

 

전편에서 설명한 융복합주의와 사의사색화의 기본 설명은 아래 링크로 대신합니다.

융복합주의(Convergeism) https://url.kr/ke4u1s

사의사색화(寫意思索畵) https://zrr.kr/usAb 


전완식 작품. 사의사색 w-01 / 100 X200cm / 거울 위에 아크릴페인팅과 혼합재료​ / 2022년 

 

융복합주의(Convergeism)는 필자가 오랜 시간 대한민국의 장점을 연구하다가 만들게 된 장르이다. 4차산업시대의 대표적인 시대정신이기도 한 융복합주의는 현시대의 예술이 가야 하는 길이라고 생각되어 창안하게 되었다. 처음 연구를 시작할 무렵에는 인류사에 유례없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고 대한민국의 발전 원인과 동력을 알고 싶어하는 외국인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을 설명할 마땅한 내용이 없음이 동기가 되었다. 이를 위해 한국인의 정신과 한국의 문명사를 연구하다가 한국이 동양정신문화(성리학)의 정수를 가지고 있으며 서양의 문화를 스펀지처럼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를 미술작품화하여 대한민국 성장 과정의 원동력인 융복합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본 시리즈 작품의 전체에 흐르는 표현 방식은 동양화의 정신에 입각한 산수화와 서양의 시각에 입각한 풍경화를 결합하여 새로운 산수화를 창안하였다. 명칭은 사의사색화이며, 이미지들이 융합하여 나타나는 결과는 동양의 사의적 표현과 서양의 사색적 표현을 융복합한 것이다. 표현의 기법과 재료는 서양적인 것으로 하며 표현의 대체적인 시각화 형상은 동양적인 것으로 한다.

 

재료는 거울필름(바탕 재질), 아크릴 물감, 디지털 프린팅을 사용하였다.

 

거울필름은 청동기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금속은 문명을 발달시키는 핵심 재료가 되고 있다. 금속의 물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크롬이며 크롬의 특성이 잘 표현되는 일반적인 물질이 거울이다. 거울 필름을 사용한 것은 문명의 발달을 상징하며 거울이 빛을 반사하는 것처럼 작품은 중간중간 빈 공간으로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문명의 발전이 빛나고 있음을 나타낸다.

 

아크릴 물감은 동양화의 번지기효과를 가장 비슷하게 표현할 수 있는 서양화의 재료이다. 수용성이며 덧칠할 수 있어 동, 서양의 기법을 모두 나타낼 수 있는 재료이다.

 

디지털 프린팅은 작품의 최상층에 위치한 선(토기, 웨이브 선)을 표현하는 재료이다. 수작업으로 완성한 작품 위에 동,서양문명의 융복합을 이루는 상징적 체계를 표현한다.

 


전완식 작품. 사의사색 w-01​(부분)

 

작품 설명 : 프랑스와 정식 외교를 한 것은 137년이지만 민간 외교까지하면 188년이 되었다. 프랑스는 대한민국과 외교관계를 맺어왔던 서유럽의 국가 중 사실상 최초로 한국과 외교 접촉을 하였다. 1835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프랑스인 모방 나 베드로 신부가 처음 조선 땅을 밟은 것을 계기로 이후로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 등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프랑스인 사제들이 잇따라 방한하였다. 그러나 척양정책으로 일관했던 흥선대원군의 군대는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때 프랑스 사제들을 죽였고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면서 마침내 188664일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관계는 좋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 최초 유학자였던 홍종우는 대한제국이 지향해야 할 이상국가 모델을 나폴레옹 3세 시기의 프랑스로 보았다. 대한제국 이후 일제강점기 시절 단절되었던 교류는 1949215일에 대한민국과 정식으로 수교했다. 프랑스와 대한민국은 매우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90년대까지는 프랑스에서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였고 최근에는 우리의 문화가 전파되고 있다. 프랑스는 문화 대국이기 때문에 프랑스를 매개로 한 한류는 유럽 내에 확산을 주도한다. 20181019일에 파리에서는 2만석 규모의 방탄소년단의 공연이 있었는데, 프랑스는 물론 이탈리아와 독일, 포르투갈, 벨기에 등지에서 모인 팬들은 이어지는 노래의 가사 모두를 외워 따라 불렀고 이들 중에는 심지어 실신한 팬들까지 있었다.

 

전완식 작품. 사의사색 w-01​(부분)

좌측 두 개와 우측의 세로로 길게 뻗은 거울은 모뉴멘트적인 문화 교류 발전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전완식 작품. 사의사색 w-01​(부분)

산의 풍경은 동양화의 기법을 최대한 살려서 표현하였는데 이는 동양의 표현기법과 공기원근법의 서양 표현 방식의 조화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본 작품은 이런 한불관계와 최초의 서양 문화 유입이라는 의미를 담아 동서양의 융복합을 표현한 작품이다. 좌우의 산은 동양(대한민국)을 의미하고 중앙의 에펠탑은 프랑스를 의미한다. 좌우 산의 가운데는 대지이며 바다의 형상인데 이 표현을 거칠고 무겁게 표현한 것은 초기 교류가 산고의 고통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완식 작품. 사의사색 w-01​(부분)

색상은 검정색 위에 노랑과 파랑을 여러번 겹쳐 칠한 것은 채도와 명도 대비의 극단을 보여주어 서로 융합하기 어려운 요소가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 결합하는 현상을 표현하였다전체 화면을 뒤덮고 있는 물결은 문화가 서로 연결되고 확산되며 상호작용을 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서양의 투시 및 공기원근법을 화면 전반에 걸쳐 나타내어 현대의 감각적 시각 분석 체계를 유지하였고 묘사를 하는 방법은 동양화의 기법을 살려 융복합 된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지난 스승의 날인 515일 서울 청계광장에서는 국악 관련 저명한 국가무형문화재 예능 보유자, 교육자, 학자, 전문연주가, 학생, 애호가 등 많은 인파가 모인 가운데 특별한 집회가 있었다. 국악교육의 미래를 위한 "전 국악인 문화제"란 주제로 국악교육의 위기를 피력하고 교육의 정상화를 요구했다. 이렇게 국악에 관련된 많은 이들이 거리로 나오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향후 이루어질 국악교육 정책에 대한 이견과 미래 전통문화예술 교육에 관한 소통 때문이었다.

 

 

지난 15일 청계광장 <전 국악인 문화재> 모습

 

현시대 우리 대한민국은 전통문화를 삶의 가치로 삼아 배우고 창작과 융합을 통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등 많은 사업과 정책으로 우리의 생활 수준을 높이고 있다.

 

온라인 콘텐츠로 대한민국 게임 산업을 세계에 알린 기업 넥슨은 지난 511, 12일 이틀간 제1보더리스 공연 : PLAY'이란 주제의 본 공연과 갈라 공연을 개최했다. 과거 넥슨의 비영리 재단은 공모전을 통해 게임과 전통예술의 만남이란 주제로 현대연희 prototype21’ ‘플레이 오케스트라(Play Orchestra)’ ‘보쏘(BOSS5)’ 등 세 팀을 뽑았고 양일간 넥슨의 대표 IP에 씻김굿, 마당놀이, 국악관현악 등 전통예술과 접목한 공연 콘텐츠를 선보이며 우리 문화의 우수성과 한류 게임 문화 콘텐츠 가치를 대내외로 알렸다.

 


넥슨재단 홍보동영상 / 넥슨재단 제공

 

또 다른 기업의 사업을 살펴보자. SK텔리콤은 국립극장과 협력해 메타버스 플랫폼 '이프랜드'에 각종 문화 행사가 가능한 '놀러와 국립극장'를 만들어 전통예술에 기반한 콘텐츠와 함께 디지털화 및 확산, 선도한다는 사업을 추진하였고 지난 429일 개관식을 통해 랜드 오픈식을 성대히 치륐다. 기업의 이러한 혁신적인 시도는 전통예술을 새로운 가치의 세계로 확산시켰고 민족의 정체성과 함께 경제적 창출을 포용한다는 성과를 이뤄냈다.

 


SK텔리콤 홍보사진 / SK텔리콤 제공

 

이러한 전통예술의 가치를 새롭게 융합 창출하고자 하는 민간사업이 있는 반면 국악인들을 거리로 나오게끔 유도한 안타까운 국가 교육정책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올해 말 확정·고시 예정인 <2022 개정 교육과정의 '국악' 전면 배제>라는 문건이다. 지난 421일 전국국악교육자협의회는 가장 먼저 졸속 개정 작업을 즉각 중단하라라는 규탄 성명을 발표했고 한국국악협회 등 130여개 관련 단체가 이어 함께 소신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지난 15일 국악교육 정상화를 위한 대규모 집회로 이어져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교육부가 공개한 문제의 ‘2022 개정 음악과 교육과정 시안을 살펴보면 성취 기준항목에 국악 관련 내용이 하나도 없다. 여기서 '성취 기준'이란 교육 목표를 의미하며 향후 변경되는 학교 수업과 평가, 교과서 편찬의 가이드라인에는 국악이란 단어가 배제되어 있다. 이러한 논란에 교육부는 "서양음악, 국악 등 장르를 구분하기보단 실생활 위주의 교육을 위한 개정 과정에서 국악이란 표현이 빠졌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각 나라에는 특수한 음악 요소와 개념이 내포된 자국의 음악이 존재함인데 그러한 독창성과 별개로 포괄적 수용으로 만들어진 음악교육의 정책은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물이 되어 국악인과 대중들에게 다가왔다. 예견컨데 교육 현장에서 우리 선조의 국악 더늠, 시김새, 간지, 성음 등 전통의 기교를 어떠한 서양음악 방식으로 표현하고 가르칠 것인가? 우리 전통음악의 독창적인 명칭과 표현 방법은 절대적이며 포괄적일 수 없다.

 


러시아 모스크바 차이콥스키음악원 아쟁교육 사진 자료


러시아 모스크바 차이콥스키음악원 단소교육 사진 자료

 

대한민국 미래 원동력인 전통문화는 무한한 잠재력과 창의력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한 사유로 민간기업과 정부는 애정을 갖고 다양한 전통예술 사업과 정책을 통해 특별한 대한민국을 지향하고 있다. 하지만 이토록 서로의 방향성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드러내어 창출하고자 하는 의도와 포용하여 준용하고자 하는 의미는 다르다. 문제의 핵심은 어떻게 수용하고 지혜롭게 끌어내며 담아 가느냐가 관건이다. 전통은 불온한 혁신과 수용 속에 본질을 잃을 수도 있고 섣부른 융합과 무관심 속엔 사라질 수도 있는 정서적 매개체임을 잊지 말자. 그러므로 우리는 깊은 애정과 관심을 두고 올곧은 전승과 교육으로 전통예술을 소중히 지키고 이어가야 하겠으며 새로운 정부는 다양한 국민 여론 수렴과 함께 존중과 배려로 정책을 만들고 수립해야 하겠다.

 

<김용호 / 한국학 박사(Ph.D) 칼럼니스트 소개>

이날치의 손녀 이일주 명창에게 춘향가 사사. 박종선 기악 명인에게 아쟁을 배워 1999년 춘향제 전국국악대전 기악부 최고상인 대상을 수상. 국가무형문화재 제82-4호 남해안별신굿 이수자. 서울시무형문화재 제39호 아쟁산조 이수자.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창작 및 표현활동지원 대상자전통음악부문에 선정. 2010년 독자적인 '아쟁' 주제 논문으로 한국 최초 아쟁전공 박사. 2012년부터 수년간 러시아 모스크바 차이콥스키음악원에서 한국 전통음악 Master Class와 연주회를 주도적으로 개최하여 주러시아 한국대사관과 차이콥스키음악원 간 MOU를 성사. 2016년부터 2019년까지 4년간 체계적인 국악교육과 연주회를 시행. 경북도립국악단 악장, 국립부산국악원 초대 악장, 국립남도국악원 악장, 대구시교육청 대구예술영재교육원 음악감독, 전북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장을 역임했으며 정읍시립국악단 단장, 전주대사습청 운영위원, 전북일보 문화칼럼니스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심의위원,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심사위원, 예술경영지원센터 정부시상지원 현장평가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카레이서이며 F1경기의 긴박감과 속도감을 오랜 시간 동안 표현해 온 이익렬 화가는 강렬한 색채와 탈 경계를 나타내기 위한 수많은 기의(記意)들을 이용하여 이익렬 만의 조형적 언어로 재구성하고 있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감상자 내면의 질주 본능이 자극되는데 이는 화가 자신의 본성을 표출함과 동시에 감상자의 원초적 에너지를 자극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 


이익렬 (좌)Ferrari F1machine 2020 acrylic on canvas 65.1X90.9cm  (우)Team Red 2020 acrylic on canvas 65.1X90.9cm

 

작품속의 표현은 입체감이나 공간감이 매우 사실적인 영역과 하나의 면으로 흡수되어 시 공간이 사라져버린 흔적 같은 공간으로(점이적 연속성) 멀어지게 구성되어있다. 이는 화가가 추구하는 질주 본능의 표현에 매우 적합한 표현으로 보인다. 특히 사실적 영역 표현의 주된 기법은 임파스토(IMPASTO반죽된이란 뜻의 이탈리아 어물감을 두껍게 발라 질감을 거칠게 나타내는 기법​)기법으로 이 기법의 대표화가인 렘브란트나, 고흐의 작품을 연상하게도 한다.


이익렬 ​​()Teamwork Red 2017 acrylic on canvas 90.9X65.1cm(중좌)Lewis Hamlton’s Mclaren machine 2016 acrylic on canvas 162.2X130.3cm

(중우)Team Red 2018 acrylic on canvas 116.8X90.9cm()Team Ducati 2014 acrylic on canvas 53X45.5cm


이익렬 화가가 강한 애착을 가진 주제인 질주는 원초적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초원을 달리는 인간은 생존의 필수조건으로 자연을 극복하고 지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속도는 인간이 신체의 한계를 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출하는 것으로써 동물뿐만이 아니라 자연을 지배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속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탈것을 만들어 시간과 공간을 압축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기계공학과 유체역학, 전자공학의 과학적 방법을 동원하여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해결하려는 의지는 질주 자체에 모든 목적을 두고 있는 F1경기를 만들었고 이 정신의 발전이 우주선을 만들어 지구 밖의 세상에 대한 탐험을 가능하게 했다고 본다. 질주의 본능은 인간의 도전 정신과 그 맥을 함께하는 것이고 미래이자 진보이고 혁신이다. 이익렬 화가는 이런 프론티어 정신의 무장이 필요함을 주지시키기 위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는 오랜 기간 작업하던 F1 경기(FORMULA ONE WORLD CHAMPIONSHIP)에서 도시와 우주선, 우주공간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이런 관심의 변화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변화로 보인다. 이런 관심사의 변화 속에도 진보적 프론티어의 방향성은 변함이 없이 질주 본능과 질주 쾌감을 연출하고 있다.

  

이익렬 ​()Planet develop project 2017 acrylic on canvas 162.2X130.3cm(중좌)Planet develop project 2015 drawing on paper A4

(중우)Planet develop project 2015 drawing on paper A4()MV-22 Osprey 2015 acrylic on canvas 72.7X60.6cm


인간은 누구나 발전된 미래를 희망하고 있다.

그것이 과학적 발전이던 철학적 발전이던 문화적 발전이던 간에 도전과 탐험에 대한 강한의지를 피력할 때 자신과 사회의 발전이 가능하다고 본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정지되고 정체되어있다. 이런 물리적 정체가 정신적 미래지향적 본성까지 정체시킨다면 우리는 바이러스에 굴복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필자가 이익렬화가의 작품을 소개하고자 했던 이유도 이 시대가 간과하거나 미뤄두면 안 되는 것들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의 강한 질주 본능을 통하여 우리는 이 시대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 생각해 볼 때이다. 

 


 이익렬 Elon Musk’s Mars develop project 2020 acrylic on canvas 50X50cm.

 

 

 

 이익렬  LEE IKRYEOL 

 

홍익대학교미술대학 서양화과 졸.


국내외 개인전 22

서울, 뉴욕, 마이애미 1987~2019

아트뉴욕Context,마이애미Scope/Context,런던첼시아트페어,바젤Scope,영국,싱가폴 Affordable, 아트코리아-런던전, 북경 아트차이나, 상하이아트페어, 중산아트페어, 홍콩 아시아컨템포러리 등 해외아트페어 약50회 출품.


청년작가전, 걷는사람들, 전그룹전, 오리진회화협회전,

국내외 단체전 및 그룹전 250.

 

이익렬은 국제적인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화가이며 조경디자이너, 카레이서, 자동차 컬럼니스트로도 활동하며 자신의 영역을 넓히고 있는 중이다.

 

machine64@naver.com

www.facebook.com/machine64

https://blog.naver.com/machine64

 

 

 

전통을 현대적 재료와 기법으로 재해석한다.

‘21세기 정신을 전통의 산수화에 담기프로젝트 NO.1

 

Kai Jun  등용문01  150호M 227.3cm X 145.5cm  Acrylic on Canvas  2020년

 

프로젝트를 왜 시작하였는가?

현대미술은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매우 효과적인 장르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현대미술에 대한 인식은 어려운 것이다.’ 또는 나는 문외한이다.’라는 식으로 기피하려한다. 전시장에서 보이는 감상의 상태도 매우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 깊이 있는 사색의 시간이 적음은 작품을 통해 자신의 관념 변화를 꾀하려는 시도를 안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 사회는 대체적인 나라가 자본주의의 사회 구조 안에서 살고 있다. 자본주의는 근본적인 정의로 볼 때 사유재산을 인정한 상태에서 이윤획득을 위해 상품의 생산과 소비가 이뤄지는 경제체제이다. 따라서 생산과 소비의 원활한 흐름을 만들기 위해서는 공감과 소통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공감과 소통은 남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데 일반적인 생활환경에서는 자기의 경험과 관습적인 사고의 고착화로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는데 거북함이 많다.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는 좋은 장르가 현대미술이다. 자신의 고정관념을 깨트리고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좋은 환경 제공 말이다.

 

미국은 자본주의와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국가이다. 현대미술이 미국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현대미술의 꽃을 피운 작가의 대부분은 미국 출신이거나 미국 거주인들 이다.

 

Kai Jun  등용문12  100호F 162.2cm X 130.3cm  Acrylic on Canvas  2020년

 

현대미술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충격적인 것이다.

1863년 에두아르 마네는 풀밭위의 점심이라는 작품을 발표하며 봉건주의적, 관습적 표현에서 탈피하여 모더니즘을 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인상주의, 큐비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등 다양한 이즘들이 나타나며 작가들은 당시의 사회에 필요한 정신적 요소를 작품에 녹여 넣는 실험적 경향을 띠게 된다. 수많은 작가들은 스스로 전위예술가(아방가르드avant garde)를 자처하며 시대정신과 문명의 방향이 어디로 가야하는지 제시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모더니즘에서 나타난 두 가지의 흐름은 조형적 순수 예술사회적 담론으로써의 예술로 정리할 수 있는데 두 흐름 모두 신, , 귀족 등의 봉건적 사고에서 탈피하여 자기 본연의 가치관을 갖게 하려는 목적이다. 그 누구도 누군가에게 귀속 될 수 없고 스스로 완전하며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스스로의 모색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일깨우려는 태도의 산물이다.

19세기까지 사회전반에 깊이 물들어 있는 봉건주의적 사고의 혁명 또는 혁신을 위하여 기존 이념을 개선하기 위한 시도가 매우 많았다. 당시 유럽에서 활동이 많고 잘 알려진 화가들의 대부분은 기존의 사회질서를 개선하기 위하여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이념적 배경을 두고 작품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참여도가 낮은 피카소의 경우도 프랑스 공산당의 당원이었다. 당시 유럽의 대체적인 철학, 문학, 미술, 과학 등등의 창작자들은 이념적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활동의 변화가 세계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승전국인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수많은 창작자들과 자본주의 결합이 사회적 이념이 아닌 개인의 사고에 초점이 맞춰지며 자유로운 사고의 환경이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추상표현주의 잭슨폴록, 팝아트의 앤디워홀, 색면추상의 마크로스코, 미니멀리즘의 프랭크 스텔라 등등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나타난다. 이 작가들의 출현은 감상자 대상이 다수의 대중을 타겟으로 하는 경향을 띤다. 이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한동안 지속되다가 1989-1991년 인터넷 보급, 천안문 사태, 소련붕괴 등의 대규모 사건과 냉전이라는 이슈의 소멸로 인하여 작가들은 더욱 소규모의 개인으로 타겟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 작가는 개인의 가치관과 삶을 지탱하고 있는 기본 요소들을 일깨우기 위한 충격의 마지막 지점까지 밀어붙이는 실험을 단행하게 된다. 이러한 압박적 충격의 시대가 현재의 미술이라고 볼 수 있다.

 

서양미술은 위에서 거론한 방향으로 작가와 대중이 함께 호흡하며 발전하고 흘러왔으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미술은 그렇지 못하다.

서양미술, 동양미술, 한국미술이라는 지역적인 성향을 말하거나 가치의 차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효용성을 말하려한다.

 

현재 우리의 삶은 어디까지가 한국적이고 어디까지가 서양적이라고 규정하기 어렵다. 정신적인 관념은 지극히 한국적인 것이 많이 나타나지만 삶을 지탱하는 경제 활동은 자본주의 체제안에 있으니 미술의 문화적 활용에서도 취사선택이 되어야하는데 현대미술은 어려운 것이라는 편견으로 접근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큰 문제로 보인다.

 

세계적으로 학습 수준이 뛰어난 우리는 왜? 현대미술이 어렵다고 하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높은 아이큐와 학습 상태를 보이고 있는데 웬만한 나라 사람들은 다 즐기는 현대미술을 어렵다고 한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몇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정보의 단절이라고 본다. 봉건주의를 자체적으로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고 이는 왜곡된 정보와 일부 사람을 중심으로한 정보 공유의 비대칭이 이뤄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광복 후 나라는 공산, 민주 양대 진영으로 나누어지고 사상적 자유는 억압되거나 박탈되었다. 당시 유럽에서 발전하고 있는 모더니즘(현대미술)은 사상을 바탕으로 발전하였기에 우리나라에 유입되는 미술의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며 사상의 바탕을 배제한 작품의 표현적 결과물만 알게 되었다. 더불어 6.25 전쟁 후 극빈국이라는 가난한 시절에 당장 배워서 생계를 이어갈 기술을 익히고 배우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에 정보의 차단은 별 문제로 부각되지 않았다.

 

사상적 가치를 판단 할 겨를이 없던 당시에는 부각되지 않던 문제들이 유신체제에서는 사회적으로 이슈화 되었으나 반공법이라는 벽에 막혀 미술의 사회적 기능은 배울 수가 없었다. 


196969일 경향신문 기사

 

당시 초중고 미술교과서에도 현대미술은 탄생배경이나 이념적 내용은 모두 제거되고 대표작가와 표현법을 소개하는 정도로 교육하였다.

이런 왜곡된 교육의 시간이 꾀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는 문제가 있다. 이 정보의 왜곡과 단절은 2000년대 들어오면서 서서히 회복되는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문제는 대중의 전통에 기댄 나름의 해석이다. 우리나라는 한문 문화권으로 시서화(詩書畵)는 동일하다는 관념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래서 양반은 누구나 시서화를 하였고 특히 그림은 자기를 정화하고 단련하는 방법으로 활용하여 그림 속에 의미를 담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독화(讀畫)의 방법인데 그림 속에 스토리를 정해 놓고 그 스토리를 상징하는 사물을 배치하여 그림이 하나의 이야기 책이 되도록 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일로연과(一路連科), 한 걸음에 향시와 전시 두 번의 과거에 연속 등과하다.

 

독화의 역사는 오래되어서 서양미술의 가치와 의미가 전달되지 않은 빈 공간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통적인 해석법으로 그림을 이해하려 애를 썼다.

, 서양화를 감상 할 때 서양화의 본질적 가치를 모르니 동양화의 독화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현재까지도 나타난다.

 

수없이 많은 전시를 하며 감상자에게 무엇을 느꼈냐고 물으면 대체적으로 독화의 기법으로 대답을 한다. 형상이 어떻고, 색상이 어떻고, 배치가 어떻고, 뜻하는 바가 뭐고... , 그림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형상이나 색상이 분명하지 않은 그림은 해석이 안 되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

 

효용성 있는 미술의 감상법은?

서두에 언급하바와 같이 현대미술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렵고 쉬울 수가 없다. 동일한 대중문화인 영화를 보면 사건의 크기에 따라 감동의 충격이 차이가 난다. 종결에서 해피엔딩이던 아니던 간에 사건의 크기와 전개의 기발함이 감상자에게 충격을 주기도하고 아니기도 한다. 현대미술도 똑같은 구조 안에 있다.

영화에서 사건과 주인공 그리고 감상자는 동일시되는 현상이 있다.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전달하려는 주제의식이 감상자의 마음을 바꾸기도 한다.

현대미술은 작가가 감상자의 삶을 근간이 되는 의식을 흔들어 놓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는 질문을 던지는 형식이 많다. 데미안 허스트로 잘 알려진 영국의 YBA그룹의 작가들은 대체적으로 끔찍한 소재를 이용하여 작품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끔찍한 소재로 만들어지고 그려진 작품들이 현대미술 작품가격에서 탑을 경신하는 경우가 많은데 독화의 방식으로 이 현상을 해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대미술의 가치는 내가 가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젖어 든 어떤 관습이나 편견을 깨고 새로운 나로 탈바꿈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의 정신을 혁신하는 기회를 많이 제공한 작가의 작품이 우수한 작품이다. 따라서 작품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에 따라 내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된다. 마치 멜로영화를 보고 과거에 하지 못했던 사랑을 하겠다고 맘먹거나 액션 영화를 보고 힘을 키워야겠다 거나 나쁜 짓을 하지 말자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 현대미술을 보고 삶을 돌아보거나 미래를 상상해보는 계기를 만들면 된다.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고 싶으면 내가 가진 철학적 개념과 작가의 철학을 비교 하며 좀 더 따져보면 충분하다.

 

이런 사고의 전환이 있다면 현대미술을 어려워하는 현상은 사라지고 나를 완성해가는 시간이 될 것이다.

 

전시장에 가서 발가락으로 그려도 이것보다는 잘 그렸겠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좋은 현상이다. 그렇다면 발가락으로 그린 것 같은 그림은 무엇을 나에게 질문하기 위함인지를 따져보고 스스로 자기의 과거를 또는 미래를 생각해보면 된다.

또 전시장에 가서 아주 혐오스러운 소재로 그려지거나 만들어진 작품을 보고 무엇을 나에게 질문하기 위함인지를 따져보고 스스로 자기의 과거를 또는 미래를 생각해보면 된다.

 

작가는 아주 예민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사회현상의 재해석을 통해 이 사회를 살아가는 현명함의 힌트를 많이 받아야한다.

 

‘21세기 정신을 전통의 산수화에 담기프로젝트 NO.1은 왜 하는가?

위에서 거론한 것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우 우수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미술에 있어 매우 위축된 현상을 보인다. 나는 이런 현상이 일단 유감이고 두 번째는 전 세계의 트랜드를 예측하는 힘을 얻는데 중요한 현대미술을 기피한다는 것은 국력이 새 나간다는 것과 동일하다는 견해 때문이다. , 한발 앞선 기업의 탄생이 더뎌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전 세계의 우수 기업들은 혁신을 하기위해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혁신은 사고의 전환에서 나타나는데 고정관념에 얽매여있는 사람이 혁신을 주도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현대미술은 고정관념을 혁파하는 훈련의 최상위 도구라고 본다.

 

나는 이런 신념을 가지고 오랜 기간 작업을 해왔다. 개인적인 성과는 많았지만 본래 가지고 있던 대중에게 혁신의 기회를 주는 큰 효과를 얻지는 못했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수년간 고민을 하다가 나름의 체계를 잡은 것이 단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사고의 혁신 수준을 접근이 용이한 것부터 진행해야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프로젝트 NO.1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화의 해석법에서부터 벗어나는 단계를 느끼게 하기 위함이고 프로젝트 NO.2는 현대미술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기법을 알게 하는 구성으로 되어있다.

 

프로젝트 NO.1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열정을 전통의 산수화를 도구 삼아 표현한 작품들이다. 코로나사태로 처진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좋겠다. 또한 작가의 의도가 자신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 느껴보면 좋겠다.

 

작품은 624일부터 30일까지 안국역에 있는 고도갤러리에서 볼 수 있다. 

 

눈으로 보는 그림, 마음으로 보는 그림

 

 

이군우 / 월. 매화-20-01 / 장지+야광채색 / 2020년 

 

이군우 작가의 작품은 마음에 비추어 보는 그림이라고 말하고 싶다. 화면을 가득 매운 단색의 파랑, 적색, 녹색이 감상자가 경험했던 어떤 기억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진한 단색의 경험 공간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매화 가지와 꽃망울, 달의 조화는 젊은 날 연인과의 만남에서 느꼈던 기쁨으로도 보이고 첫 휴가 나온 이등병이 집 앞에 다다랐을 때 느껴지는 흥분 같기도 하다.

매화 향연이란 작품을 마주하면 버스커 버스커벚꽃 엔딩의 노래가 들리는 것 같다. 좌측 상단에서 우측하단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꽃비 사이로 보름달이 벚꽃 엔딩의 도입부에 그대여 그대여하며 부르는 것처럼 서로의 만남의 설렘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작품 속에는 리듬이 있고 미소를 살짝 머금은 행복의 여린 떨림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자연을 사랑한 사람이라야 느낄 수 있는 특권을 마음껏 표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군우 / 매화 향연 / 화판+야광채색 / 100호 / 2019년 

 

그의 작가노트에서도 보면 자연의 신비, 경의를 느끼고 메마른 나뭇가지에 꽃을 피우는 자연이야 말로 신비, 경의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물들과 내용들을 바탕으로 하여 이끌어 내고자 하는 또 다른 심미의 세계 표현 --- 중략--- 자연은 느린 시간 속에서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해 가지만 인간 세상은 디지털시대에서 커다란 네트워크라는 그물 속에서 우리 모두는 광통신망을 떠다니는 하나의 광소자와 같은 초고속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연의 아름아운 자연미를 놓치고 지나가 버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하는 마음에 자연의 풍경을 그리기도 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어 그의 작품 속에 얼마나 큰 자연의 사랑이 담겨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런 작가의 자연애 덕분에 감상자는 편안하게 자연의 노래를 느끼고 볼 수 있는 것 같다.

 

 

이군우 / 봄바람 / 장지+칠보+야광채색 / 100호 / 2019년 

 

본 칼럼에서 필수적으로 묻는 질문 미술을 통해 얻은 행복이란?”의 답도 그는 자연의 대변인처럼 자연 순리적으로 대답하고 있다. “미술인으로 살고 있고 미술로 나를 표현할 수 있으며 앞으로도 미술로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행복감을 준다.”고 말한다.
 

자연에서 자기를 찾고 자기가 찾은 심미성을 타인에게 봄바람처럼 느끼게 해주는 이군우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이군우 작가 경력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졸업 및 홍익대 대학원 동양화과 박사수료

국내, 외 기획, 초대 개인전 34회 및 초대 기획 단체전 480회 참여

대한민국 창조문화 예술대상 대상” (경기도지사상)

2019년도 앙드레말로 협회 올해의 특별 작가상 수상 (프랑스 말로협회장상)

세계문화 예술교류 대상 대상” (국회문화체육 관광위원장상)

2008 춘추 미술상 수상” (춘추회, 백송화랑) 및 기타 수상 다수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외 22회 심사위원 및 24회 운영위원 역임

홍익대, 고려대, 숙명여대, 전남대, 목원대, 공주대, 강릉원주대, 기타 대 (외래교수 역임)

 

현재 : 춘추회(부회장), 뉴런회, 도원행, 아트 멘토스, 한국응원 프로젝트(홍보이사)

()한국 미술협회, ()부천미술협회 회원, ()한국미술협회 (청년 제1위원장),

K-art M 연구소 (대표), 한국미술응원프로젝트(홍보이사), 갤러리K 제휴작가

콩세유 갤러리 (관장)

 

 

 

 

 

Kai Jun, 희망의 창NO.1​​, Oil on Canvas, 116.7cm X 72.7cm, 2011년 작

 

 

정진은 진진한 태도로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우리나라가 포지티브 법체계로 발전한 것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나라는 광복이후에 할 일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세계에서 3번째의 극빈국이 경제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죠. 자원도 없고 힘도 없는 나라는 선택지가 별로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정치, 행정에 있어 자율성보다는 국가의 발전방향성에 국민이 맞추는 형국이었습니다. 국가는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철저하게 규정 지었으며 그 방법 안에서 국민들은 성실히 자기 업무에 최선을 다하여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변하여 지금은 이 방법이 적합도가 떨어진 것이 문제입니다.”

정진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시민운동가들이 국회의원의 활동을 통제하면서 규제문제는 더 확대 되었습니다. 저도 규제문제를 확대한 사람으로서 가슴이 아픕니다. 규제국가, 규제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 이유 중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국회의원의 활동이 너무 적극적이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정진의 말에 대부분의 참석자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국회의원이 일을 적극적으로 해서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 도대체 이해가 안 갔다. 숱한 날들을 국회에서 싸움만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언제 무슨 일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했다는 말인지 말이다.

미영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정진에게 질문을 했다.

좀 더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 부탁드립니다. 국회의원이 적극적으로 일을 해서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 뭔가요?”

 

그때 전 국회의원을 지낸 도호진씨가 일어섰다.

저는 국회의원을 한번 한 사람으로서 지금은 국회를 떠났지만 애국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청년들이 모였다는 말을 듣고 작년부터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저의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장내는 다시 진지한 분위기가 흘렀다.

 

도호진 전 국회의원은 용어부터 정리해주었다. 포지티브 제도(Positive System)이것만 해라식의 규제우선 제도이며 네거티브 제도(Negative System)이것만 하지 마라식의 자유우선제도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이것만 해라의 제도이므로 자율성이 떨어지는데 이것만 해라제도가 문제가 된 이유는 규제가 너무 많아서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규제가 현재 13천개를 넘어섰다.

 

규제가 많아진 이유는 크게 3가지이며 첫째는 획일화된 국회의원 평가방법이라고 한다. 국회의원이 재선을 위해 선거에 다시 출마하려면 공천을 받아야하는데 일반적인 평가방법이 계속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국회의원의 업무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본회의 출석률, 상임위 출석률, 대표 발의건수, 가결건수 등등이 적용된다. 이 정량적 평가의 허점이 문제를 키웠다는 것이다. 국민에게 얼마나 필요한 법안이냐를 신중하게 따지는 정성적 평가가 아닌 수치상으로 얼마나 일을 했냐를 따진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임기 중 마지막 해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법안이 발의된다. 그중에서 가결이 쉬운 것이 공업·규격·계량 분야가 대안반영 포함 80%되는데 이런 산업에 관련된 세부 규정들이 많아지면서 현재 산업의 융복합 자율성과 어긋난다는 문제다.

 

두 번째로는 산업이 융복합적으로 이루어지다보니 정부의 주무부서 모호성으로 이중적 기준이나 규제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현재는 각 산업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가 나눠져 있지만 앞으로는 모든 산업에 5G 이동통신,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등등이 결합되어야하는데 자율주행차, 무인점포, 인공지능 의료, 증강현실 패션 등등 현재 산업이 4차산업혁명의 기술과 결합하여 진화된 산업에서는 주무 부서를 구분할 수 없다는 문제이다. 즉 과도기인 현재는 4차산업혁명에 관련된 산업 대부분은 위법한 상태로 노출된다는 것이다. 아니라면 우리나라의 모든 산업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관리해야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국민의 관심분야라고 지적한다. 입법부의 담당자가 국회의원이므로 국회의원을 뽑을 때 진정으로 국민을 위해 일을 할 사람을 뽑아야하는데 국민의 관심이 이념이나 사상이 자신의 관심사와 같은 사람을 뽑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회의원이 하는 일중에서 언론에 주로 비춰지는 내용은 이념이나 사상적 바탕을 둔 사건들이 주로 방송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민의 삶을 좌우하는 것은 경제적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산업을 일으킨 국회의원은 방송에 조명되지 못하고 이념적으로 잘 싸운 국회의원이 부각된다는 것이다. 국회의원이 산업을 일으킬 법안을 잘 만들어야 국민의 삶이 좋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을 평가하고 심판하는 국민이 국회의원의 평가를 잘못한다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도호진 전 국회의원의 발언이 끝나자 장내는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국회의원의 잘잘못을 성토하는 사람, 정부의 무능을 성토하는 사람,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 등 여러 가지의 이야기가 장내를 웅웅거리게 만들었다.

 

장내가 소란스러워지자 의장인 태성이 발언자를 다시 지목했다. 사업가인 최영석 대표가 발언을 했다.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저도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IMF사태 이후에 벤처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사업을 하고 있는데 빚만 엄청나게 많습니다.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강남의 건물을 팔아 10억 정도 마련하여 사업자금으로 활용했습니다. 만약 그 건물을 팔지 않았다면 지금 몇 백억 원은 되었을 겁니다. 사업을 하면 할수록 빚이 많아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사업의 환경이 참 안 좋습니다. 2000년대 이후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규제개혁을 외쳤지만 한 번도 해결된 적은 없습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기대감이 있었고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일을 하면서도 정부에 기대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오늘 알게 되었습니다. 정부에게 바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태 정부 탓만 했습니다. 정부도 중요하지만 우리나라가 바로 서려면 국회의원을 잘 뽑아야하는군요. 저는 기업을 다시 반석위로 올려야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회사의 직원들과 관련 기업들의 직원들에게 오늘 들은 내용을 알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선거에서는 기업과 경제를 살리는 후보를 지지하겠습니다. 그동안 뽑은 국회의원들 생각하니 후회가 많이 됩니다.”

 

최대표의 발언이 끝나자 도호진 전 국회의원이 다시 발언하였다.

최대표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런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비관만 할 것은 아닙니다. 최근 우리 단체 외에도 국회의원의 의정활동 평가를 혁신적으로 만들어 진행하는 청년단체가 있습니다. 그들이 만든 의정혁신 평가 방식은 4차산업혁명시대 경쟁력 강화 등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한 혁신 법안, 국회의원의 대국민 성실도, 국민의 질적인 삶과 밀접한 민생 혁신 법안, 각 분야의 혁신 관련 법안 발의 현황, 국민과 국가를 위해 매우 필요한 법안임에도 제반 여건 미비로 통과되지 못한 폐기 법안, 기타 정량평가, 기타 정성평가 등 7대 부문과 하위 10개 항목, 80개 세부지표를 평가해, 최고평점 국회의원, 창의력우수평점 국회의원, 최우수평점 국회의원 등 국회의원의 의정활동에 대한 평가 순위를 매긴다고 하는데 과거의 의정평가보다 정성적 평가를 하므로 많이 개선되었다고 봅니다. 이런 청년 단체의 움직임은 더욱 활성화 되어야 하며 구체적으로 경제를 혁신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인허가 요건의 구체화 및 명확화, 중복규제의 금지, 국민불편해소적 규제로의 전환, 협력적·자율적 규제방식의 적극 활용, 규제비용의 명확한 반영, 현실적 규제로의 전환, 의원입법의 사전규제영향분석 및 규제일몰제 도입, 규제총량제를 넘어 규제감량제 도입, 청부입법의 원칙적 금지 등을 제안 해야합니다.”

 

도호진 전 국회의원의 발언 이후로 국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국민들이 어떻게 노력해야하는지 국민의 실천사항은 무엇인지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4부 끝-

그들이 만들어 갈 희망의 나라. 다음편도 기대해 주세요.

 

 

Kai Jun(전완식)

30여 년간 인물화를 중심으로 회화 작업에 열중하였다. 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둔 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또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의 정신세계를 그림 안에 투영하려 노력하였다. 인물화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다룬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주요 미술경력은 국내외 개인전 27회 단체전 80여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형상 변화 신비510년 만에 재현 -대한민국 7번째 대통령 인물화 작가(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소장 / 문재인, 트럼프 대통령 청와대 소장) -Redwood Media Group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 선정 -미국 행정/정책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 강의 자료로 작품 선정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기획위원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광복70주년 국가 행사 대표작가(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및 서울도서관 전시)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전시행사 대표작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산업대학원 졸업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ICT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 설치미디어아트분과 부위원장, 국가미래연구원 문화예술체육 연구위원이다. 

 

Kai Jun, 희망의 창NO.3​​, Oil on Canvas, 116.7cm X 72.7cm, 2011년 작

창수가 네거티브 법체계 전환의 의견을 내었고 참석자들은 대체적으로 동의를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나라의 법체계는 포지티브 법체계로 되어있다. 법으로 허락된 것만 할 수 있는 방식이어서 법 환경이 산업보다 선제적인 구성이 되어야하는데 산업의 발달 속도가 더뎠던 과거에는 이 방식이 효과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뤄지고 있는 융복합적인 산업과 4차산업 혁명에 포함되는 산업들은 법이 선제적 환경을 만든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입법에 관련된 사람들은 국가적 대 혼란을 운운하며 반대를 한다.

 

행정학을 전공한 제훈이 반대 의견을 내었다.

대한민국은 이미 70여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이며 기존 법체계로 모든 국민이 익숙해져 있는데 갑자기 법의 기본 개념까지 바뀌는 변화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심각한 경제위기 상황인데 이런 큰 변화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또한 우리가 논의하고 결정한다고 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제훈의 말에 회의장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네거티브 법체계 전환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동의하던 분위기에서 회의장은 순간적으로 무기력해졌다.

이유는 이미 수년 전부터 많은 경제인들이 네거티브 법체계 전환에 대한 의견 개진이 있었고 이에 대하여 규제 샌드박스 등의 개선안을 냈지만 결과적으로 일부의 변화만 있었지 큰 틀은 변함이 없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전반적으로 팽배되어있는 의욕상실의 국가적 분위기였다. 회의장에 나온 사람들조차 의욕이 많이 상실 된 상태였다.

 

술렁이는 회의장 분위기를 의장인 태성이 다시 잡으려 애썼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방금 말씀 주신 내용은 많은 분들이 우려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개선을 위한 깊은 고민이 이 자리에서 일어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해야 합니다.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직 힘은 없지만 지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를 통해 힘을 만들면 됩니다. 지혜를 모아 주십시요!”

태성의 말에 이번에는 미영이 발언을 했다.

 

어려움은 있겠지만 이미 4차산업혁명에서 상당히 밀려있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합시다. 유전공학이나 크리스퍼 기술에서 세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데 생명윤리법으로 사업화 하지 못하는 회사가 한둘이 아니며, 선점한 드론 기술이 각종 규제로 사그라든지 오래되었으며 공유경제는 발도 못 붙이는 상태입니다. 청년실업의 문제도 이와 연관이 있습니다. 대학에서 최첨단의 학문을 연구한 학생들이 취업할 기업이 없습니다. 모두 규제로 인해 연구소의 범위를 넘어가지 못하니 어떻게 취업을 하겠습니까? 중소기업들은 기술을 사업화하지 못하여 결국 해외로 나가고 있습니다. 말기 암 환자와 같은 우리 경제 상황 속에서 못할게 뭐가 있나 싶습니다.”

미영은 강하게 발언을 했다. 미영은 어려서부터 사회 시스템이 국민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강했던 사람이다. 그녀는 로펌에 근무하며 접했던 문제들을 더 열거하였다.

산업의 지형이 변하였습니다. 한 가지만 잘해서 되는 시절은 지나 간지 오래되었으며 융복합이 기본입니다. 또한 누구를 막론하고 사회적 이익을 발생시킬 수 있는 것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플랫폼 시스템으로 변한지 오래되었습니다. 이런 변화가 자연스럽고 편안한 환경인 해외 선진국에 비하여 우리나라는 일일이 허가를 받아야 사업화 할 수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기업지형도에서 허가를 받기위해 몇 개월에서 몇 년을 기다려야하는 우리나라는 뒤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미영은 작심한 듯 성토를 하였다.

 

창수도 다시 발언하기 시작했다.

제가 몇 년간 국회의 입법 현황을 분석해보니 접수된 것이 15대국회 1951, 162507, 175024, 18대 국회 13,913, 19대 국회 17,822, 20대국회 23,048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많은 입법 내용 중에서 공업·규격·계량 분야가 대안반영 포함 80%의 가결률을 보였습니다. 그중에서 20대 국회의 경우 규제 법안 발의 건수는 3773건으로 하루에 3개꼴로 규제 법안이 발의됐고, 이 가운데 1개는 통과되었습니다. 모든 법이 규제를 위한 것은 아니겠지만 규제안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산업은 발목을 잡히는 꼴이 되겠지요. 어찌 15대 국회의 총 입법 발의 건수보다 20대 국회의 규제법안 발의가 2배로 많은지 이해가 안 됩니다.”

 

창수의 발언에 미국에서 기업을 하는 종석이 거들었다.

저도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기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유학을 어려서 갔기에 미국식으로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미국에서 배우고 느낀 것들을 한국에서 펼쳐보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특히 제가 가진 신기술을 한국에서 실현시키기 위해 귀국하여 조그만 기업을 일으켰는데 앞서 말씀하신 분들의 얘기처럼 규제 장벽에 막혀서 3년간 고전하다가 결국 실리콘밸리로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이라도 부모님이 계시는 한국에서 기업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면 돌아오고 싶은 마음입니다.”

 

종석의 말은 현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종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재희도 일어나 얘기하기 시작했다.

저는 어려서 생명공학자로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 수십대일의 경쟁률을 뚫고 대학을 입학하여 성실히 공부했으나 지금은 학원에서 생물과 수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속으로는 대학가면 뭐하나 취직할 곳도 없는데...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한 마음이 강하게 듭니다. 어서 현실적인 국가 운영의 방안이 나오지 않으면 더 심각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회의장 열기는 다시 뜨거워졌다. 다소 흥분한 사람들도 보였고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나이가 조금 많아 보이는 중년의 사나이가 일어나더니 발언하기 시작했다.

저는 상당기간 국회에서 보좌관 일을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법안 발의 건수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와 관련 있는 주요국 중에서 법안 발의 건수는 한국이 23048건으로 가장 많고, 미국 115대 의회는 13556, 영국은 2010~2015년까지 890, 일본 3차 아베내각은 626건입니다. 가결 건수 역시 우리나라가 6527건으로 가장 많고, 미국 443, 일본 250, 영국 182건 순입니다. 이 많은 법은 생활환경에 큰 지장을 줍니다. 법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개인이나 기업가들은 환경이 바뀌는 것과 같습니다. 변경되는 대학 입시법으로 학생들이 혼란을 겪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계시는 모든 분들이 이미 경험을 해보셨을 겁니다. 그런 환경 변화가 기업에게 주어지면 기업은 새로 기업환경을 조성해야하니 어려움이 있겠죠. 선진국일수록 법을 바꿈에 있어 신중하게 법을 다룹니다. 그 신중해야 할 법에 규제까지 더해지니 어려움은 심각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지금까지 발언하신 분들의 얘기 모두 공감하고 있습니다.”

보좌관 출신의 정진이 말을 끝내자 태성이 정진에게 질문을 했다.

정진님께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태성의 질문에 정진은 숨을 고르며 발언하기 시작했다.

 

-3부 끝-

그들이 만들어 갈 희망의 나라. 다음편도 기대해 주세요.

 

 

Kai Jun(전완식)

30여 년간 인물화를 중심으로 회화 작업에 열중하였다. 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둔 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또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의 정신세계를 그림 안에 투영하려 노력하였다. 인물화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다룬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주요 미술경력은 국내외 개인전 27회 단체전 80여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형상 변화 신비510년 만에 재현 -대한민국 7번째 대통령 인물화 작가(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소장 / 문재인, 트럼프 대통령 청와대 소장) -Redwood Media Group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 선정 -미국 행정/정책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 강의 자료로 작품 선정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기획위원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광복70주년 국가 행사 대표작가(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및 서울도서관 전시)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전시행사 대표작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산업대학원 졸업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ICT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 설치미디어아트분과 부위원장, 국가미래연구원 문화예술체육 연구위원이다.

 

 

Kai Jun, 희망의 창NO.9​​, Oil on Canvas, 135cm X 135cm, 2011년 작

창수는 태성이네 포장마차에서 미영이를 소개받는다. 미영이는 태성이네 학교의 법대를 다니는 수재인데 태성과 같이 국가의 미래를 발전시키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만나서 반가워. 태성이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 마초 같은 남자라고 하하하

미영이는 창수에게 인사를 하는데 창수는 왠지 부끄러웠다. 하지만 자신이 남성미가 있다는 뜻으로 생각하고 인사를 받아들였다.

나도 태성이에게 얘기 들었어. 생각이 무척 깊고 현명한 사람이라고. 반가워.”

~.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는데 우선 뭐라도 먹고 얘기하자. 어머니 여기 가락국수 맛있게 세 그릇 주세요.”

태성이 어머니가 말아주는 국수를 먹고 세 사람은 진지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우리 평소에 많이 얘기했듯이 우리가 국가의 미래를 발전시키기 위해 뭘 해야 할지 방향을 잡을 논의를 하자. 각자 하고 싶은 얘기 해봐.”

태성은 본격적으로 논의를 하자고 제안했다.

 

얘기를 하기 전에 내 얘기를 먼저 하는 것이 좋겠어. 나는 너희들처럼 깊이 있게 생각해보지 않았었거든.”

창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창수도 뭔가 사회적 변화를 위해 노력을 하고 싶지만 아직 준비가 안되었다는 것을 솔직하게 얘기하고 싶었다. 그래야 이 두 사람과 호흡을 맞출 수 있다고 느꼈다. 창수는 다시 말을 꺼냈다.

 

나는 태성이 만나기 6개월 전까지는 사실 사회에 불만만 많았지 어떻게 개선해보겠다는 생각은 없었어. 그때 태성이가 지금 있는 어떤 일 때문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지. 내가 어떤 감정과 태도를 보이는 것이 이미 누적된 어떤 다른 문제와 결합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느꼈고, 어릴 때 나는 매우 능동적이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따지고 보니 정 반대의 경우라고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객관적인 입장으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했는데 아직도 잘 안 되는 것을 느껴. 나 하나도 통제가 잘 안되고 판단이 안 서는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불편한 마음이야. 그러나 열정은 있어.”

창수는 처음 보는 미영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조금 자존심이 상했지만 솔직하게 다가가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말했다.

 

창수의 말이 이해되는 부분이 많아. 아마 미영이도 비슷한 경험이 있을 거야. 미영이도 나처럼 이런 고민을 하게 된 동기가 있고 그 이후에 생각하게 되었겠지. 창수하고는 처음이니 미영이가 네 얘기부터 해봐.”

태성은 미영이가 왜 이런 고민을 하게 되었는지를 말하게 하였다.

 

나는 어릴 때 발레리나가 되는 것이 꿈이었어. 우리 집은 이름난 고기집을 하고 있었는데 광우병 사태가 나면서 망했지. 나는 발레를 더 이상 할 수가 없었고 집안 식구들도 예전처럼 생활 할 수가 없었어. 당시에는 어려서 뭐가 문제인지 몰랐고 꿈을 포기하게 된 것에 대한 아쉬움과 불만이 많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우리 집이 망한 것은 단지 수입소고기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로 이렇게 됐다는 것에 분노를 느꼈지.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는 정치인이 되어야겠다. 나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정치인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래서 법대에 가게 된 거야.”

창수는 자기만 황당한 일이 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태성이나 미영이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놀라웠다.

 

미영은 감정을 추스르며 말을 이어갔다.

밤마다 엄마와 아빠가 손님이 없어서 식재료 구입한 것을 팔지 못하고 버리면서 우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그렇게 팔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지자 식당에는 직원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결국 아빠와 엄마만 남아있다가 망했지. 나는 지금도 엄마가 식재료를 버리면서 우는 모습이 눈에 선해.”

미영의 말이 끝나자 태성이가 제안을 했다.

 

우리는 공통점이 있는 사람들이야. 우리 부모님 격은 일들은 있어서는 안 될 일들이었다고 생각해. 그런데 이런 일들이 재발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어. 우리가 사회 생활하다가 또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자식들이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져야해. 그런데 우리는 아직 이런 문제를 해결할 만한 능력도 지혜도 없으니 우선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가 능력을 키울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보자. 의견들 줘봐.”

태성이의 말이 끝나자 미영이는 큰 틀을 먼저 짜야한다고 제안을 했다.

 

큰 틀의 기본 골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국가의 주인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 만큼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이 뽑은 대표자가 국민의 권리와 이익을 위하여 국정을 운영하는 나라이니 스스로가 국민이면서 대표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창수는 미영의 얘기를 듣고 생각이 깊어졌다.

맞아. 내가 예전에는 피해의식만 가지고 있었지... 문제를 해결하려는 주체성이 없었어. 돌아가신 어머니도 피해를 호소하기만 했었지. 적극적인 자세가 중요하구나. 의식의 변화가 있어야한다. 의식의 변화...’

창수는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 의무, 의식의 중요성을 생각하였다.

 

태성이는 능력을 키울 수 있는 방안을 몇 가지 제시했지만 창수는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조금은 어려운 말들이었다. 창수는 태성의 얘기가 끝나자 진지하게 제안을 했다.

태성이 얘기가 좋을 것 같긴 한데... 나는 사실 그런 방안을 실천할 능력이 안 돼. 두 사람은 이미 어른스러운 태도로 생각한지 오래되었겠지만 나는 6개월 전부터였고 그것도 태성이를 만나서 가능해졌지. 아마 내 또래 친구들 대부분은 나와 비슷할 거야. 뭔가 진입단계를 만들어 주면 좋겠어.”

창수의 얘기에 태성과 미영도 동의하였다. 세 사람이 고민하는 문제의 핵심은 더 이상 피해자를 만들지 말자는 것인데 그것은 뛰어난 정치인이 나타나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국가 운영의 수준이 높아져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여러 가지의 의견이 나오다가 온라인카페를 만들어서 글도 올리고 의견도 모으고 동영상도 만들어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의 의식의 수준을 높이는 것부터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창수의 얘기가 큰 도움이 되었어. 나와 미영이는 주도적으로 뭔가를 하겠다는 생각이 강하다보니 참여자의 범위를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 우리뿐만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생각을 해본적은 없었던 것 같아. 각 분야별로 연구하는 소모임을 결성하자. 그리고 그것을 확대한다면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

태성은 창수의 의견이 틀을 잡는데 기여했다고 칭찬 비슷하게 말해주어 창수의 기를 살려주었다.

 

온라인 카페는 그렇게 만들어졌고 경제학과를 다니는 태성은 경제문제를 미영은 법률적인 문제를 창수는 역사적인 사실들을 통해 배울 점을 찾는데 주력하기로 했다. 창수는 수능성적에 맞춰 대학을 정하고 학과를 정하여 본인 재능과 상관없이 역사학과를 다니고 있다. 그런데 태성이를 만나서 역사학과를 다닌 것이 잘 한 일이 되었다. 창수는 학교에서 배운 역사를 이해하는 법을 통해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느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서 카페에 참여자들 중에서 자발적으로 과학, 기술, 교육, 문화, 행정, 의료, 사회 복지, 외교 등등의 각 파트별로 연구 모임 담당자가 구성되었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고 대학도 다양했으며 지역도 제각기였다. 온라인으로 운영하다보니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참여하는 확장성이 있어서 좋았다.

 

몇 년 뒤 온라인 카페가 활성화되었다. 회원수가 10만 명을 넘어가면서 연구의 결과물들도 엄청나게 많아졌다. 온라인 카페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며 좋은 아이디어를 내 놓았다.

그 사이 창수는 역사연구소 연구원이 되었으며 태성은 사업을 하게 되었고 미영은 로스쿨 졸업과 동시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로펌에 다니고 있다. 온라인 카페는 많은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 시키며 확장되다가 회원 수가 줄고 연구물이 안 올라오는 위기가 생겼다.

 

세 사람은 과거와는 확실히 달라진 모습이었지만 나라는 그렇지 않았다. 늘 이념 대립이 생겨서 좌우의 충돌이 많았고 세계 경기의 악화로 국내 경기도 인공호흡을 해야 할 지경에 달하고 있었다. 경제성장률은 2%대를 밑 돌기 시작한지 몇 년 되었고 국민 전반적으로 살림살이가 좋지 않았다.

더 문제가 심각한 것은 성장 동력으로 작용해야하는 중소기업들이 해외법인 설립 후 대거 이주했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문제들로 온라인카페의 회원들도 의욕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유는 연구 결과물들이 반영되지도 않았고 자기 자신도 먹고 사는 문제가 심각해지기 때문에 참여가 쉽지 않았다.

온라인 카페의 각 분야 리더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임을 가졌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두 모인 것은 카페의 운영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전반적인 문제를 논해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탄없는 의견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태성이 의장으로서 회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지만 그 중에서 특별했던 것은 창수의 의견이었다.

창수는 역사를 전공한 사람답게 생각이 깊어졌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터전이 없다는 것이 문제로 보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현재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정조대왕 때입니다. 만약 정조대왕이 의도했던 일들을 모두 마쳤다면 조선말기의 혼란도 없었고 일제 강점기도 없었으며 한국전쟁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평시에는 내려오던 법률과 국정운영 방식을 활용하여 진행하면 되지만 세계적인 변화의 시기에 변화를 못하면 고립되는 것과 같은 현상이 생깁니다. 즉 변화하지 못하면 의도치 않게 쇄국하는 것 이라는 말입니다. 서론이 길었는데 본론으로 말씀드리면 우리나라는 법에 명시된 것만 가능하게 하는 포지티브(positive) 규제가 4차 산업혁명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전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데 우리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어려운 환경이어서 참신하고 역동성 있는 아이디어를 가진 중소기업은 활로를 찾지 못하고 해외로 이주하게 되는 것이죠. 정조대왕도 당시에 그런 세계적 변화를 감지하고 법과 규제를 새롭게 만들어 새로운 세상에 맞는 정치를 하려했는데 아쉽게 꿈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돌아가셨죠. 우리나라의 법체계로는 4차산업혁명을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창수의 의견에 많은 사람들은 동의하였고 네거티브 법체계의 전환을 위한 방안 모색이 우리나라의 미래를 밝게 만든다는 생각으로 회의는 계속 되었다.

 

-2부 끝-

그들이 만들어 갈 희망의 나라. 다음편도 기대해 주세요.

 

 

Kai Jun(전완식)

30여 년간 인물화를 중심으로 회화 작업에 열중하였다. 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둔 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또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의 정신세계를 그림 안에 투영하려 노력하였다. 인물화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다룬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주요 미술경력은 국내외 개인전 27회 단체전 80여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형상 변화 신비510년 만에 재현 -대한민국 7번째 대통령 인물화 작가(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소장 / 문재인, 트럼프 대통령 청와대 소장) -Redwood Media Group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 선정 -미국 행정/정책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 강의 자료로 작품 선정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기획위원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광복70주년 국가 행사 대표작가(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및 서울도서관 전시)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전시행사 대표작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산업대학원 졸업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ICT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 설치미디어아트분과 부위원장, 국가미래연구원 문화예술체육 연구위원이다.

 

Kai Jun, 혹독한 환경에서도 꽃은 핀다​​, Oil on Canvas, 90.9cm X 72.7cm, 2019년 작

 

~! xx야 차 막히는데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저런 xx들 때문에 길이 더 막힌 데니까!”

창수는 군대를 제대하고 고속도로나 자동차 전용 도로의 차가 막히는 구간에서 뻥튀기와 음료수 파는 일을 하는 아버지를 도와주러 길에 서 있다. 지나가는 차들이 뿜어내는 매연도 큰 부담이었지만 가장 힘든 것은 시간에 쫓기는 운전자들이 내뱉는 짜증스러운 욕을 참아내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오늘은 아버지에게 욕하는 어떤 운전자와 싸울 뻔 했었다.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는데 지금 또 비슷한 소리가 들린다. 창수는 모욕감과 불쾌한 기분이 너무도 강했지만 하고 있는 일이 불법이어서 다시 한 번 숨을 몰아쉬며 참아내고 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창수를 바라보던 창수 아버지는 뻥튀기 포대를 주섬주섬 싸더니 창수보고 집에 가자고 한다.

창수부자는 몇 푼 벌이도 못하고 도로를 나와 동네 어귀에 있는 슈퍼마켓의 평상에 앉았다. 둘은 말없이 막걸리를 한 병 가져다가 서로 따라주며 분한 마음을 삭히고 있다.

 

아버지 기운 내세요.”

창수는 자기도 짜증나고 힘들지만 아버지를 위로하려고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창수는 아버지를 위로해야한다는 마음이 컸다.

 

창수 아버지는 운이 없어도 너무나 없는 사람이다. 젊은 시절 휴가로 놀러온 태안의 만리포 해수욕장에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결혼과 함께 직장을 그만두고 창수 어머니가 하던 조그만 횟집을 함께하며 살았다. 둘은 오손도손 잘 살았다. 여름 한철 장사하는 것이라서 넉넉하게 살지는 못했지만 바닷가다보니 창수네 가족은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만드는 삶을 살았다. 어린 창수가 바닷가에서 뛰어 놀고 수영하며 창수네 가족은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는데 창수가 10살 되던 해 12월에 태안기름유출 사고가 났다. 창수네 뿐만이 아니라 만리포 사람들은 생계가 어려워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방제를 위한 봉사를 하고 제거 작업을 했지만 바닷가의 기름 냄새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만리포는 황폐해졌다. 몇 년간 피해보상을 위한 긴 투쟁의 과정에서 창수 어머니는 병이 생겼다. 화병이 심해져 생긴 병과 후각이 예민했던 창수어머니는 계속되는 두통을 호소하였다. 2013년 피해보상으로 받은 돈 조금을 가지고 창수 가족은 어머니 요양 차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점리 공기 좋은 깊은 산속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렇게 새 출발을 하여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데 재작년에 큰 산불이 나서 키우던 염소는 다 도망가거나 죽고 농장은 잿더미가 되었다.

창수아버지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생각으로 실의에 빠졌고 어머니는 결국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창수아버지는 그렇게 운이 없게도 자기의 잘못이 아닌 일들로 인해 인생이 망가졌고 가정도 파괴되었다.

 

창수야. 참 면목이 없구나. 아버지가 못나서 네가 이런 꼴을 당하는구나.”

창수아버지는 아까 운전자가 한 욕을 마치 자기 탓인 양 창수에게 말했다.

아니예요. 아버지. 아버지가 무슨 죄가 있어요. 아버지는 늘 최선을 다하셨죠. 만리포에서도 그랬고 점리에서도 그렇고 아버지는 최선을 다하셨어요.”

창수는 아버지가 최선을 다 한 것을 알고 있다. 그저 운이 없어서, 복이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창수 아버지는 터전을 잃고 떠돌다가 막일이라도 할 생각으로 지금의 은평구 반지하 단칸방에 살고 있는데 여기도 장마때 물이 새서 아주 혼이 났다.

창수는 운이 좋아야하는데 아버지는 참 운 없게 살았다. 가는데 마다 문제가 있어서 인생이 아주 망가졌다. 에이 참~!”

창수 아버지의 한탄하는 한숨소리가 창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창수는 세상이 원망스러웠지만 원망만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말없이 아버지의 잔에 막걸리를 한 잔 더 따라드렸다.

 

아버지는 일찍 잠자리에 드셨고 창수는 동네 어귀의 포장마차로 향했다.

포장마차에서는 아저씨 몇 명이 시국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고 비슷한 또래의 남자도 있었다. 그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조금 후에 보니 포장마차에서 서빙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창수에게 메뉴판을 주며 물었다.

뭘 드릴까요?”

그는 포장마차와 어울리지 않게 차분하고 편안한 외모를 가졌다. 창수는 가락국수와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창수가 국수와 소주를 마시는 동안에도 그는 서빙하며 책 보기를 멈추지 않았다.

창수는 왠지 그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 책보는 것을 좋아하나보네요? 손에서 책을 놓지 않네요?”

창수의 말에 그는 씩 웃을 뿐 별 대꾸를 하지 않다가 김치를 조금 더 꺼내서 창수 앞에 내밀었다. 그러면서 한마디 했다.

좋아서 보는 게 아니고 다음 주가 시험이거든요. 하하하

창수는 그의 말을 들어보니 중간고사 기간쯤 되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군요. 대학생이셨군요. 저도 군대 제대하고 지금은 쉬고 있는데 내년에 복학 합니다.”

둘은 대학생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시작하여 밤새 얘기를 했다. 그는 어머니와 둘이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고 한국대학의 수재였다. 그는 동갑이며 이름은 태성이고 태성이 아버지는 조그만 사업을 했는데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 때 쫄딱 망해서 도피했다고 한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직도 모른다고 했다. 자기와 어머니가 아버지가 남겨 논 빚을 청산하기 위해 지금도 고생 중이라고 했다.

창수와 태성이는 타의에 의해 집안이 몰락한 공통점이 있어서 급속도로 친해지게 되었다.

 

창수는 가끔씩 태성이네 포장마차에 들려서 국수를 먹었다. 아니 국수를 핑계로 태성이와 친해지고 싶었다. 창수는 태성이가 힘든 상황에서도 밝게 생활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고 또 공부도 상당히 잘하는 그가 부러웠다.

 

자신의 모습은 늘 뭔가 불만스러웠고 부정적이어서 군 생활에서도 선임들에게 지적을 많이 받았었다. 창수는 제대 후부터는 자기의 사고방식을 고치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뭐가 잘못되었는지 스스로는 알 수가 없어서 고치려고 해도 고쳐지지가 않았다. 뭔가 불편한 일이 생기면 화부터 먼저 났고 싸우자는 듯한 생각이 들어 상대를 공격하려했었다. 마치 태안의 사태나 점리의 산불이 타인에 의해 저질러 진 것처럼 타인이 자기에게 피해를 줄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있어서인 것 같았다. 그런데 태성이도 비슷할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태성이는 전혀 달랐다. 이런 일도 있었다.

 

~ 아줌마 예쁜데. 여기 술 한 잔만 따라줘~. 아니 그러지 말고 여기 좀 와 보라니까?”

창수가 국수를 먹으러 갔을 때 취객이 태성이 어머니에게 추태를 부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많이 취했으니 집에 들어가시라고 말했더니 그 사람은 추태를 더 부리다가 누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냐며 시비를 걸고 결국 테이블을 엎으며 난동을 부렸다. 태성이는 침착하게 그 상황을 정리하는데 창수는 못 참고 거들다가 오히려 싸움을 키웠다. 결국 경찰이 와서 싸움은 정리되었지만 창수는 도와주려다가 오히려 난장판을 만들게 되어 미안했다. 그런데도 태성이는 창수에게 뭐라고 하지 않고 어머니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

아니야 내가 괜히 흥분해서 더 곤란하게 만들었어. 내가 미안해. 네가 잘 정리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창수는 태성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태성아. 너는 어떻게 그리 침착할 수 있니? 나는 사실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고 짜증이 많이 나서 견딜 수가 없는데. 이렇게 사는 것도 우리 아버지 잘못이 아니라 남들이 그렇게 만든 것인데. 나는 너도 비슷할 것 같은데 너는 전혀 그렇지 않더라. 너의 생각이 어떤지 궁금하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침착해 질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태성이는 의외의 질문에 쉽게 답을 못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말문을 열었다.

나도 화가 많이 났었지. 심지어 아버지가 도망가고 나서 어머니와 둘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할 때 정말 피눈물 났어. 매일 찾아오는 빚쟁이들의 시달림과 모든 집안 살림이 차압당해 길거리로 내동댕이쳐졌을 때 이러다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친척집에도 못 갔어. 친척집에 가면 거기도 따라와서 빚 독촉을 할 것이 뻔 하니... 우리모자는 갈 데가 없어서 제일 싼 여인숙만 전전하다가 어렵게 포장마차를 하게 된 거야. 나는 처음엔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어. 그래서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거는 공부밖에 없었고 학교를 다니지 않았기에 초,,고를 모두 검정고시를 봤어. 대학도 혼자 공부해서 들어왔지.”

창수는 태성이의 말이 놀라웠다. 그의 어른스러운 태도와 말에 감동을 받고 있었다.

그랬구나. 나보다 더 힘들었겠네. 그러면 나보다 더 불만이 많아야 하는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침착하고 안정될 수 있니?”

창수는 태성이에게 이야기를 더 이어 달라고 다시 한 번 물었다.

나는 어머니를 위한다는 마음 하나로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 가르쳐주는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보니 단순한 문제도 혼자 해결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더라. 그렇게 어려운 공부를 하다가 대학에 들어와서 보니 나는 대학 공부가 쉬웠어. 남들은 그때부터 자기 학습을 하는데 나는 이미 스스로 하는 학습만 했었기에 대학 공부가 쉬웠고 늘 1등을 하게 되더라고. 장학금이라는 것을 받으니 정말 기쁘더라. 늘 남에게 피해만 받는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에게 혜택을 주는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니 꿈만 같고 잠이 안 오더라. 그렇게 2학년을 마칠 때 쯤 되니 내가 겪은 아픔이 우리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문제라는 생각이 생겼어. 그렇게 생각이 바뀌니 눈앞에 보이는 일들이 아니라 좀 더 크게 바라볼 수 있게 되더라고. 거시적으로 보는 눈이 생기고 나니 다른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나 말들이 단지 지금 있는 어떤 일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창수는 태성이의 말이 갑자기 가슴속으로 쑥하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 있는 어떤 일 때문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 순간 자기의 모든 행동이 연관되며 떠올랐다.

동네 친구와 싸울 때에도 친구의 실수보다 자기가 사회에 받은 피해의식을 친구에게 결합시켜 그를 더 미워했고 그를 죽일 듯이 팼었다. 사실 그럴게 싸울 일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 생활에서도 자기로 인한 모든 문제가 이미 예전의 사회에서 받은 피해의식이 결합되어 두 배, 세 배 복수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생각이 드니 온몸에 전율이 오면서 부끄럽기도 하고 후회되기도 하며 그동안 자기와 싸운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겨났다.

창수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태성의 얘기를 경청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미 받은 어떤 피해로 인해 이렇게 불안정해졌다는 생각을 하고 나면서 주변을 보니 우리 가족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많더라. 그 사람들이 하는 원한 섞인 것과 같은 부정적인 말들을 들어보면 동질감이 느껴지고 측은한 마음이 들더라고. 그런 생각이 든 이후로 그 사람들이 미워 보이지 않고 불쌍해 보였어. 나는 그 후로 꿈을 바꿨지. 어머니를 호강시키겠다는 마음에서 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는 쪽으로

 

창수는 태성의 얘기를 들으며 큰 감동을 받았다. 이렇게 성숙한 사람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자기도 닮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창수는 태성과의 대화로 자기의 부정적이고 타인에게 불만스러운 태도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게 되었다.

창수는 자기도 사회를 위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창수는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특별한 감정으로 인해 가슴이 뛰고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1부 끝-

그들이 만들어 갈 희망의 나라. 다음편도 기대해 주세요.

 

 

Kai Jun(전완식)

30여 년간 인물화를 중심으로 회화 작업에 열중하였다. 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둔 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또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의 정신세계를 그림 안에 투영하려 노력하였다. 인물화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다룬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주요 미술경력은 국내외 개인전 27회 단체전 80여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형상 변화 신비510년 만에 재현 -대한민국 7번째 대통령 인물화 작가(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소장 / 문재인, 트럼프 대통령 청와대 소장) -Redwood Media Group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 선정 -미국 행정/정책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 강의 자료로 작품 선정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기획위원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광복70주년 국가 행사 대표작가(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및 서울도서관 전시)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전시행사 대표작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산업대학원 졸업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ICT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 설치미디어아트분과 부위원장, 국가미래연구원 문화예술체육 연구위원이다. 


Kai Jun, 다시 태어난다하여도 당신을, Oil on Canvas, 90.9cm X 72.7cm, 2019년 작

 

 

여보, 이번 출장이 몇 년 걸리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생각하지 말고 마음먹은 일 잘하고 오세요. 저는 태교 열심히 하고 있을게요.”

부인은 현관을 나가려는 남편에게 차분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남편은 신던 신발을 더 이상 신을 수가 없었다.

얼음처럼 굳어진 남편은 부인을 향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남편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말한다.

오늘 하러가는 일은 출장이 아니라 잠시 나갔다 오는 거야. 내 잠시 나갔다 들어오리다.”

남편 창수씨는 아내에게 대답을 하고 밖으로 나선다.

창수씨는 슈퍼에 가서 이것저것을 사가지고 돌아오다가 동네 놀이터 벤치에 앉아 멍한 눈으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며 한숨을 짓는다.

창수씨의 발 앞으로 공이 굴러온다. 창수씨는 공을 집어 아이들에게 던져주었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창수씨는 87세의 노인이다. 그의 아내도 83세이다.

창수씨는 집을 나서기 전 아내의 말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창수씨 부인은 치매 초기 증세를 보이고 있다.

 

집에 돌아와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한 아내를 바라본다.

여보 점심 곧 준비되니 마당 화분에 물 좀 주세요.”

창수씨 아내는 조금 전까지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전혀 기억이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니 더 가슴이 아팠다. 창수씨는 화분에 물을 주는데 이파리에 부딪쳐 떨어져 나가는 물방울이 자기의 눈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수씨 또한 자기의 마음을 감추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부인과 마주하며 식사를 했다.

창수씨와 부인은 식사 후에 산책을 하러 나갔다. 꽃을 보고 나무를 보며 아내가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행복해 질 수 있도록 그는 최선을 다 했다.

나무 위를 바쁘게 오가는 귀여운 다람쥐의 모습을 발견하면 아내에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함께 보기를 권했고 어여쁘게 핀 들꽃을 보면 한 움큼 따서 아내에게 내밀 곤 했다. 딴 꽃을 귀 위로 함께 꽂으며 서로의 얼굴을 보며 깔깔 거리기도 했다. 창수씨는 아내를 위해 정성을 쏟았다.

 

산전수전 다 격은 창수씨도 최근 부인에게서 나타나는 증세와 상황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하고 괴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다. 아니 괴롭다는 것 보다는 안타깝고 불쌍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창수씨 내외는 자식이 없다. 젊은 날 한국전쟁에서 힘겹게 살아남고 극빈국의 상태에서 살기위해 닥치는 데로 일을 하며 힘겹게 살던 창수씨는 30살이 넘어 뒤 늦게 중매를 통해 결혼하게 되었다. 둘은 열심히 살아보려고 노력하였으나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해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날들이 많았다. 그러던 중 19653월 월남전에 태권도 교관단을 파병 한다는 소식이 있었다.

창수씨는 파병 나가기에 나이가 많았지만 한국전 당시 백병전에서 살아남으려는 생각으로 태권도를 열심히 연마한 실력이 있었다. 창수씨는 월남전이 삶의 전환점이 되는 기회로 느껴졌고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창수씨는 아이를 가진 아내를 남겨 놓고 월남으로 향했었다. 창수씨가 월남의 후방에서 태권도 교육을 열심히 하고 있을 때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돌아왔을 때 아이는 없었다. 아이가 돌을 넘긴 시점 쯤에 연탄가스중독으로 사망하였다. 창수씨의 아내도 사경을 헤매다가 어렵게 살아남았다.

창수씨의 아내는 그 일 이 있은 이후로 몸과 마음을 다쳐 쇠약해지다가 골반이완 자궁 탈출증으로 자궁까지 적출 수술을 받아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 상태였다.

돈을 벌어왔지만 몹시 망가져 버린 가정을 창수씨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아내는 모든 것이 자기의 실수라는 듯이 창수씨를 바라볼 때 항상 주눅 든 모습을 하였다.

아내의 모습이 안타까워 창수씨는 연애하는 마음으로 살자며 아내를 다독거렸고 그렇게 몇 년은 잘 지냈었다.

 

그런 생활이 지나고 있다가 주변의 지인이나 친구들의 자식들이 자라 학교를 다니고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 창수씨는 헛헛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런 기분이 들 때면 우울한 감정까지 생겨 어찌할 바를 모르는 창수씨는 그저 이 현실을 피하고 싶었다. 불안정한 감정이 생길 때면 자기도 모르게 아내에게 짜증을 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더 창수씨에게 잘해주었고 짜증을 낸 창수씨가 오히려 미안해 질 정도로 아내는 애를 썼다. 그런데 문제는 창수씨가 원하던 가정의 모습이 아님으로 인해 해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창수씨의 이런 불편한 마음이 강해지던 시기에 중동의 건설 붐이 일어났다.

 

창수씨가 월남으로 갈 때에는 완전한 가정을 꿈꾸며 갔지만 이번에는 많이 달랐다. 자기가 꿈꾸던 행복한 가정의 모습과 상당히 거리가 먼 이 현실을 조금이라도 잊고 싶은 마음에 1978년 다시 사우디를 향해 날아갔다.

5년간 근무하고 돌아온 후에도 창수씨는 온통 신경을 일에만 썼다. 아내와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마음도 멀어졌다고 생각했다.

월남전과 사우디 근무 이후로 외국어에 자신이 붙은 창수씨는 그 이후로도 해외를 드나들며 일을 하여 집에는 거의 없었다. 그런 창수씨를 향해 아내는 한 번도 투정부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이 감당해야하는 일로 받아들이고 창수씨 곁을 지켜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수씨는 가정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겉 돌다가 아내를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진 건 불과 몇 년 전이다.

 

바쁘게 일에 몰두할 때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체중이나 몸의 변화가 없었는데 은퇴 후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예전 외국 생활의 식습관을 유지한 탓에 과체중이 되었다. 또 어느 날부터는 몇 시간씩 이어지는 복통과 오한이 와서 검사를 했더니 담석증이 심각하였다. 결국 창수씨는 담낭절제술을 받았다.

 

창수씨 아내는 늘 창수씨에게 최선을 다했지만 수술 전후 간호하는 일과 이후 음식을 만드는 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듯이 최선을 다했다. 건강에 좋은 음식으로 식사를 준비하고 창수씨가 좋아하는 고기를 대신하여 콩으로 만든 콩고기 요리를 배우러 다녔으며 식재료를 살 때에도 지방 함유량을 꼼꼼히 체크하는 성의를 보였다. 아내의 정성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창수씨는 자기가 아프고 나서 알게 되었다.

 

뒤 늦게 아내의 사랑을 깨우친 창수씨는 그동안 무심했던 자기를 반성했다. 한결같이 자기를 사랑해주고 위해주며 평생의 동반자였던 아내를 자기는 마치 남처럼 생각했었다는 것에 대하여 너무나 미안했다. 무엇 때문에 일을 했었나? 왜 살았나?를 생각하게 되었다.

 

창수씨의 생각 변화는 사랑으로 변했고 아내의 모든 일이 아름답게 보였다. 그러던 아내에게 치매가 왔다. 창수씨에게 보내준 아내의 사랑을 다 갚으려면 아직 멀었는데 말이다.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창수씨는 낮에 한 아내의 말을 생각해봤다.

여보, 이번 출장이 몇 년 걸리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생각하지 말고 마음먹은 일 잘하고 오세요. 저는 태교 열심히 하고 있을게요.’

아내는 할머니가 된 지금 아이를 가졌던 그 시절로 돌아가서 다시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모든 아픔을 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간절함이 있는 것 같았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창수씨의 눈에는 진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아직 아내에게 다 하지 못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저 사람이 행복할 수 있게 하려면 난 무엇을 해야 하나? 창수씨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 창수씨는 아내를 데리고 보건소 치매안심센터를 방문하였다. 몇 가지 진단과 상담을 받는 과정에서 창수씨는 아내를 좀 더 전문적으로 간호하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센터에서는 요양보호사 교육원에서 진행하는 교육을 수강하면 전문적인 요양법을 배울 수가 있고 가능하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는 것도 좋다고 말해주었다.

창수씨는 아내에게 뭔가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생각하고 수강 등록하였다. 600페이지가 넘는 기본 교재를 아내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공부하였다. 문제지까지 합하면 10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성의를 다하여 공부해 나갔다.

 

201911

밖에 나갔다 들어 온 창수씨의 손에는 신부 부케가 들려져 있었다.

창수씨는 아내를 소파에 앉히고 나지막이 말을 했다.

사랑하는 여보. 내 오늘 당신에게 고백 할 것이 있소.”

아내는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어리석어서 당신의 한없는 사랑을 느낀 지 얼마 되지 않소. 나는 당신을 더 많이 사랑하고 싶은데 우리가 얼마나 더 살지 모르니 다음 생이 있다면 당신을 사랑하며 당신이 준 사랑을 갚으며 살겠다고 맹세할 참이요. 이 꽃을 받아주면 좋겠소.”

아내는 치매가 진행되어 창수씨의 말을 다 이해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창수씨가 보여주는 말과 행동에서 많은 부분을 느끼는 것 같았다. 잠시 말없이 있던 아내는 창수씨가 내민 꽃다발을 받으며 이렇게 말했다.

고마워요 여보.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 이 꽃은 민수 젖 먹이고 조금 후에 꽃병에 꽂을게요. 꽃이 너무 예쁘다.”

창수씨 아내는 신이 나서 꽃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창수씨는 아까 받은 합격증을 주머니에서 꺼내 다시 보며 눈물로 다짐하였다.

나는 아내보다 하루 더 살겠다고, 그녀를 편히 보내준 후에 가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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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고령화로 치매환자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고령화 시대 환경 변화에 따라 치매 환자들을 적극적으로 간호하려는 배후자나 가족이 늘어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완치가 없는 치매환자를 사랑으로 보살피는 가족들의 마음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요양보호사 자격까지 취득하며 적극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많은 분들을 존경합니다. 이 소식을 소설적 구성으로 만들었습니다.

 

Kai Jun(전완식)

30여 년간 인물화를 중심으로 회화 작업에 열중하였다. 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둔 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또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의 정신세계를 그림 안에 투영하려 노력하였다. 인물화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다룬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주요 미술경력은 국내외 개인전 27회 단체전 80여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형상 변화 신비510년 만에 재현 -대한민국 7번째 대통령 인물화 작가(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소장 / 문재인, 트럼프 대통령 청와대 소장) -Redwood Media Group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 선정 -미국 행정/정책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 강의 자료로 작품 선정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기획위원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광복70주년 국가 행사 대표작가(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및 서울도서관 전시)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전시행사 대표작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산업대학원 졸업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ICT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 설치미디어아트분과 부위원장, 국가미래연구원 문화예술체육 연구위원이다. 

 

Kai Jun, 소나타 음악이 흐르는 시냇가의 판타지, Oil on Canvas, 90.9cm X 72.7cm, 2019년 작

7

나는 까불이였다. 뭐 재미있는 것이 없나?만 생각하고 장난칠 기회만 살피는 까불이였다. 이런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표정은 늘 뭔가 불만스러웠지만 할머니는 나를 무척 좋아해 주었다. 할머니는 나를 할머니 방의 벽 앞에 세워 놓고 노래를 부르게 하며 내가 까부는 모습을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봐 주었다.

 

9

나는 계속 까불었다.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더 심해졌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여자아이들에게 장난을 치고 수업시간에도 괜히 방귀를 뀌는 소리를 내어 선생님의 비위를 건드렸지만 아이들을 웃기는 데에는 특효였다. 선생님께 혼나면서도 난 뭔가 해낸 것 같은 통쾌함이 있었다.

 

11

늘 까불다 보니 혼나는 날이 많아졌다. 남과 똑같이 잘 한 일에도 나는 낮은 평가를 받고 진짜 잘못을 하면 네가 그러면 그렇지 에이 못난 놈이라는 핀잔과 비난을 받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게 아닌데 왜 이렇게 될까?’를 생각하며 내 생각과 다른 타인들의 반응에 속상해 하는 날이 많아졌다.

 

13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서 어른스러운 행동을 하는 친구들이 생겼지만 나는 아직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를 생각하는 까불이였다. 재작년부터 다니게 되었던 학원의 숫자가 늘어났다는 것을 제외하면 생활이나 생각의 변화는 없었다. 학교에서나 학원에서 난 언제나 장난 칠 기회만 노리는 장난 사냥꾼이었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다. 나는 재미있는데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저 녀석은 좀 문제가 있어.’ 라는 말을 하는 것을 가끔씩 듣게 되었다.

 

14

중학교에 들어갔다. 초등학교와 별 차이가 없는 날들이 지나다가 어느 날부터 여자애들이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예뻐 보이는 여자애는 꿈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장난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이 없던 나는 조금씩 매사에 신중해지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치던 장난을 칠까? 말까?를 고민하면서 쳤다. 버릇을 고치지 못하여 장난치기는 했지만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 나에게는 아주 큰 변화였다. 그리고 예뻐 보이는 여자애들에게도 장난을 쳐서 정말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욕을 먹었다.

 

15

예뻐 보이는 여자애들이 이제 한둘이 아니다. 우리 반 여자애들은 물론이고 대체적인 여자는 다 예뻐 보인다. 심지어 나보다 한두 살 많거나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그런 여자애들에게 환심을 사고 싶었는데 나는 늘 그녀들에게는 함량 미달로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들이 뭘 좋아하는지를 살펴보니 남자 아이돌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열정을 쏟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과 나를 비교하니 나는 먹는 것을 밝혀 뚱뚱했고 옷맵시도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그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른 적이 없었다. 그 생각이 들면서 난 어릴 때 할머니 앞에서 노래하던 나를 기억해 냈다. 난 아주 조금 자신감이 생겼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16

목표가 생기고 나서 여러 가지가 변했다. 먹는 것을 줄여 호리호리한 몸매가 되었고 노래연습을 많이 하여 우리 중학교에서는 제법 노래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 장난을 치는 일도 거의 없다보니 여자친구도 생겼다. 대체적으로 행복한 날들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엄마는 내가 공부는 안하고 딴 짓거리만 한다고 성을 내는 날이 많아졌다.

 

18

얼떨결에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지만 노래하고 춤추는 것 외에 잘하는 것이 없고 대학을 갈지 안 갈지도 미지수였던 나를 여자 친구는 떠났다. 몇 번을 다시 만나달라고 졸랐지만 그녀는 자기 인생과 내 인생은 너무나 다른 방향을 가졌다는 모호한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난 내 인생의 방향이 뭔지 그때부터 생각하게 되었다.

난 삶의 목적이나 방향이 있었나?’

난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왜 살았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원칙이나 방식이 없었다. 늘 재미만을 쫓아왔었기에 현재의 이 순간이 중요했을 뿐 과거나 미래를 깊이 있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학업 성적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학은커녕 내가 할 수 있는 기술직의 전문 영역이 뭐가 있을까를 생각해봐도 도대체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국문과 4학년 졸업반인 큰 누나는 나를 아직도 귀여워 해줬지만 나머지 식구들은 나를 한심한 놈이라는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특히 한 살 차이인 작은 누나는 공부하는데 방해된다고 내가 주변에 얼씬거리는 것조차 싫어했다.

봄과 여름이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초겨울에 작은누나는 당당하게 치대에 수시입학으로 들어갔다. 치대에 입학한 거지 치과 의사도 아닌데도 누나는 이미 자신이 사람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할 거고 방학 중에는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진료 봉사를 할 거라는 식의 얘기를 하며 나와는 격이 다른 사람임을 자주 강조했다.

 

나는 초겨울부터 더 외로워졌다. 삶의 진지함이 없었던 나는 자주 누나들과 비교되는 상황이 많아지면서 더 소외감을 느꼈다. 그럴수록 헤어진 여자 친구가 더 보고 싶어져 가끔은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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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이 되었지만 난 공부에는 도통 진지해 질수가 없었다. 책 펴고 몇 줄 읽다보면 어느새 사람들에게서 소외된 내 모습이 떠올랐다. 코인노래방에 가서 노래하고 춤추다보면 소외감에서 해방되는 느낌을 얻었다. 그런데 1000원에 3곡 밖에 부를 수 없어서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추위를 이기기 위해 꺼져가는 성냥불 앞에서 안타까워했던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난 마지막 성냥이 타 들어가는 것처럼 3곡 모두를 혼신의 힘을 다하여 노래했고 춤췄다.

내 외로움과 소외감 그리고 1000원의 한계성이 더해질수록 노래는 느는 것 같았다.

노래가 늘어서 좋기는 했지만 친구도 대화 상대도 없는 나는 늘 외로웠다. 큰 누나는 취업하여 말단 사원이 되었는데 대학생 때와는 다르게 늦게 오는 날이 많아졌고 작은 누나는 아예 기숙사에 들어가 얼굴 볼 수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부모님과는 얼굴 맞대는 시간이 늘어났지만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잔소리를 듣는 시간이 많아졌다.

 

여름방학이 되고 작은 누나가 집에 돌아왔다. 엄마는 마치 파티를 하는 것처럼 온갖 음식을 차려 작은 누나를 위해줬고 큰 누나도 작은 누나가 있는 동안에는 집에 일찍 들어왔다. 며칠간 작은 누나가 집에 있다가 대학교로 돌아가고 나서 큰 누나가 나를 불렀다. 큰 누나는 작은 누나가 내 걱정을 하며 가족회의 비슷한 거를 제안하여 부모님과 함께 논의를 했는데 지금부터 가수를 시켜보면 어떻겠냐를 제안 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나와 가장 잘 통하는 큰 누나가 차분하게 말해주었다. 딱히 뭘 하고 싶은 것이 없었지만 노래하고 춤추는 것은 좋았기에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대학진학의 부담이 사라져서 좋았다. 그리고 누나들이 내편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도 많이 안정이 되고 힘이 되었다.

매일 노래연습을 하고 인터넷을 뒤져 오디션이 있는 기획사를 찾았다. 몇 개의 공고가 있었지만 기획사가 중소규모여서 가고 싶은 맘이 없었다. 그냥 동네 노래연습실만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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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 한 직후 K-POP Soul이라는 대단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나타났다. 나는 여기에 신청했다. 오디션이 진행되기 전까지 나는 자신이 있었다. 왠지 1등을 하여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화려하게 조명을 받는 내 모습을 상상하였다.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오디션은 하루 앞으로 다가왔고 그동안 수백 번 불러봤던 노래와 안무를 다시 정리했으며 의상과 헤어스타일까지 큰누나의 코치를 받아 멋지게 준비했다. 행사장에는 예상보다 많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와 있었다.

예선은 1소절이나 2소절 정도밖에 부를 기회가 없었다.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대기실 주변에는 자기의 기량을 발휘 못하고 나왔다고 안타까워하며 눈물 짓는 참가자들이 많아졌다.

어제까지의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지 불안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초조한 마음이 들고 있는데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그는 깔끔하긴 했어도 무대 의상과는 전혀 거리가 먼 평상복을 입어서 눈에 띄었다.

오디션 많이 봤어요? 저는 처음인데 참가자들이 예상보다 정말 많네요.”

그도 나처럼 긴장이 되었는지 들고 있는 생수를 연신 들이키고 있었다.

. 정말 많이 왔어요. 저도 처음 참가하는데 긴장되어서 죽겠어요.”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왠지 동질감이 생겼다.

저는 자작곡 준비했는데 끝까지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 예요. 어떤 곡 준비했어요?”

그는 오디션에 자작곡을 가지고 나왔다는 생각해 본적도 없는 말을 했다. 나는 동방신비의 노래와 춤을 준비했다. 그와 나는 대기시간 내내 여러 가지 얘기를 했는데 그는 음악에 대한 소신이 강했고 싱어송라이터협회의 회원이었다. 또한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하여 연세대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이름은 진현이고 우리는 서로를 격려해주며 순번이 비슷하니 발표 보고 같이 가자고 약속하였다.

 

어느덧 우리 차례가 되어 오디션 장에 들어갔다. 나는 노래를 조금 부르다가 춤을 춰보라고 해서 춤도 추었다. 두 가지를 별도로 시켜서 내심 기대했지만 떨어졌다. 진현이도 가지고 온 기타로 전주를 다 했으며 노래도 남들보다는 많이 불렀다고 했는데 떨어졌다. 진현이는 자기에게 실망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나뿐만이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미안했다. 파이팅을 외쳐주던 큰 누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그날 이후 우리는 자주 만났다. 진현이는 음악에 대해 아는 것이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대중가요에 무슨 철학을 그렇게 많이 담고 싶은지 묘한 말을 많이 했다. 진현이는 오디션을 보지 않고 작곡에 전념했고 나는 수없이 많은 오디션을 봤지만 다 떨어졌다. 나는 그해 겨울 아버지의 권유로 군대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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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 있는 동안 음악에 대한 나의 생각도 많이 성숙해졌다. 나는 음악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게 되었으며 내 인생에 절대적인 어떤 사명이 있는 것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군대도 갔다 왔으니 밥벌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라고 얘기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타이르듯이 말씀하시다가 내가 음악에 대한 고집을 부리니 말 안 통하는 답답한 놈이라고 나무라기 시작했다. 군대를 가기 전까지 적극 지원해주던 집안분위기는 이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뭔가를 해서 나의 능력을 입증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일단 가수로 인정을 받아야 했기에 다시 오디션 장을 찾아다녔다. 성과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떨어지는 이유를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이제 아이돌 연습생하기에는 나이도 조금 많은 편이고 잘 생긴 것도 아니고 해서 그런 것 같았다. 노래는 오디션 보러 온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뒤지는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내가 노래를 한 소절 부르다 보면 심사위원들의 숙여졌던 고개가 들리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 괜찮은데...’라는 눈빛을 주곤 했다. 나를 평가하는 눈빛에서 얻은 이런 느낌들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단점을 없애기 위해 감각적인 패션과 몸매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6팩의 복근을 만들고 독특한 헤어스타일과 파격적인 의상을 입고 다시 오디션 장을 찾으니 평가가 조금 달라졌다. 그렇게 몇 번의 오디션을 더 보고나서 중간급 기획사에 연습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연습생이 되면 가수가 되는데 있어 한발 전진 한 것은 분명했지만 언제 데뷔를 한다는 기약은 없었다. 또한 데뷔한다고 해서 가수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연습했다. 회사가 요구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밤낮 가리지 않고 연습에 매진하였다. 춤 실력은 특별하지 않았지만 노래는 동료 연습생들에게 가르쳐줄 정도로 잘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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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에 문제가 있었다. 노래는 잘되었는데 노래를 하면서 춤을 추면 다른 연습생과 안무가 맞질 않았다. 안무를 신경 쓰면 노래가 실력만큼 되질 않았고 노래에 집중하면 안무가 또 틀렸다. 아무리 연습해도 잘 고쳐지지 않아 데뷔하는 팀을 짤 때 계속 떨어졌다. 무한반복의 연습이 계속되었다. 겨울이 될 때쯤 춤의 문제가 어느 정도 개선되었는데 예상치도 못했던 집안에 문제가 생겼다. 춤에 몰두하느라고 집에는 신경을 거의 쓰지 못했다. 아버지가 퇴직을 하고 개인 사업을 시작했는데 완전히 망했다. 큰 누나는 이제 대리고 작은누나는 아직도 치대를 다니고 있어 5식구 중에서 돈 버는 사람은 큰누나 밖에 없게 되었다.

나는 춤과 노래의 완성도가 생긴 시점인데 깊은 고민이 생겼다. 가수의 길을 걸어야하느냐 마느냐의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아버지는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얘기했고 어머니도 마트에 가서 일을 하겠다고 했다. 큰 누나는 결혼 자금 모은 것을 내 놓았고 작은누나는 휴학을 하고 학원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했다. 나는 가수를 그만두고 직장을 얻겠다고 했는데 집안 식구 모두가 말렸다. 이유는 내가 군대를 제대한 후에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고 한다. 특히 누나들이 나의 변화 된 모습을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서 이렇게 무언가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는데 최근 모습은 다른 사람 같다는 말을 해가며 계속 가수의 길을 걸으라고 격려해 주었다.

누나들의 말이 너무나 고마웠지만 아무 능력 없는 나의 모습이 초라했다. 나는 1년만 지켜봐 달라는 부탁의 약속을 했다. 가족회의 후 나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을 며칠 보냈다.

 

회사에 집안 얘기를 하고 데뷔를 빨리 할 수 없겠냐는 말을 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회사에서 계획한 일과 나의 상황은 일치하지 않았으므로 회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나는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하기로 했다. 유튜브 채널을 만들고 일주일에 한 번씩 대학로에 나가서 버스킹하며 나를 알리기로 했다. 유튜브를 만들었는데 구독자가 없었다. 열심히 동영상을 올렸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버스킹은 그래도 반응이 있어 힘을 낼 수가 있었다.

진눈깨비가 오락가락하는 날 마로니에 공원에서 버스킹을 하는데 날씨 탓인지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집에 가야겠다고 짐을 싸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K-POP Soul에 참가했던 현섭이?”

그는 진현이었다. 4년 만에 만나게 되었다. 진현이와 나는 식사를 같이 하며 그동안 있었던 서로의 일들을 얘기했다. 진현이도 요즘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였는데 구독자가 없어서 고민이라고 했다. 그는 예전보다 더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음악성이 무엇인지, 아티스트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등의 얘기를 했다. 우리는 밤이 깊어 가는지 모르게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진현이 작업실에서 잠을 잤다.

 

진현이는 다음날 함께 음악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나는 집안 상황을 얘기하면서 1년 안에 뭔가를 만들지 못하면 안 되는 절박함을 얘기했는데 그는 그럴수록 우리가 함께해야 한다는 말을 강조했다. 이유는 자기가 그동안 만든 음악이 좋은 게 많은데 자기의 목소리로는 소화가 안 되고 퍼포먼스가 좋은 내가 하게 되면 대박이 날것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대답을 하기에는 고민꺼리가 많아서 시간을 달라고 했고 진현이는 자기가 만든 곡을 하나 주며 다음에 만날 때 한번 불러봐 달라고 했다.

진현이의 곡은 사랑노래였는데 부를수록 빠져드는 느낌이 있었다. 뭔가 기대감이 생기는 곡이였다. 며칠 진현이의 곡을 내 노래로 만들기 위한 연습을 하고 우리는 다시 만났다.

 

진현이 함께하자는 제안을 다양한 비전을 제시하며 나에게 말했지만 나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진현과 함께 작업한다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 거대한 조직과 자본을 가진 기획사에서도 대박 가수를 만들기 힘든데 우리처럼 아마추어 둘이서 어떤 결과를 만들 수 있을지 미지수였고 특히 나에게는 1년이라는 시간의 한계가 나를 더욱 압박했기 때문이다.

별로 말없이 진현의 얘기를 듣고 있는데 진현이가 갑자기 비장한 각오를 했는지 마지막으로 자기 얘기를 들어보라고 뭔가 신중한 자세를 취하며 말을 꺼냈다.

나도 너처럼 음악으로 성공하고 싶어. 어쩌면 너보다 더 강하게 원하고 있을 거야. 난 음악을 하길 원했지만 집안의 반대를 뚫기가 어려워서 절충안으로 부모님이 만족 할 만한 대학을 간 다음에 내 음악을 하기로 했지. 밤낮으로 공부해서 대학에 갔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과에 다니고 있어. 그리고 진정 나의 음악을 알리기 위해 돈도 모았어. 학교 다니고 과외나 알바하며 돈을 모아 얼마 전에야 이 작업실도 차리게 된 거야. 이제 모든 것을 걸고 음악을 하고 싶어. 그런데 나는 너처럼 노래나 춤을 잘 출 수가 없다는 한계에 항상 부딪쳤지. 나는 적어도 2-3년간 내가 음악에 몰두할 수 있는 자금을 확보했는데 너와 함께 한다면 1년도 안 되는 시간에 소진 되겠지. 그래도 너와 함께 하고 싶어. 나는 인터넷을 활용한 글로벌 세상에 우리가 함께 한다면 분명 결과가 있다고 생각해.”

진현은 정말 진지했다. 나는 절박함에 당장 무엇이라도 해야하는 성격이었지만 진현이는 자기가 갈 길을 차분하게 준비해왔던 것이다. 나는 진현의 미래에 대한 설계 그리고 준비성과 진지함이 맘에 들었다.

그날 우리는 진지하게 미래를 함께 하기 위한 설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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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사 연습생을 접고 진현이와 음악을 하며 다양한 시도를 했다. 동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리고 팬을 만들기 위해 버스킹과 자원봉사 공연도 많이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우리의 팬은 작년과 비교하여 큰 차이가 없었다.

나는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에 성과가 없는 날들이 지속되면서 짜증이 늘어갔다. 진현이가 하는 말에 괜히 성을 내기도하였다. 그렇게 짜증을 내고나면 재워주고 먹여주고 노래도 주는 진현이에게 뭐 하러 그렇게 했나하는 미안한 마음과 후회가 생겼지만 자제가 안 되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런 시답지도 않은 말다툼이 몇 번 있은 후 진현이는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요즘은 음악작업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하네. 지금 보는 책들은 뭐야?”

나는 책상위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책을 보며 진현에게 물었다.

. 최근에 우리의 음악을 돌아보는 생각을 했어. 우리는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는 가수가 되길 갈망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만 했어. 그리고 그 음악이 이미 시대에 뒤처지는 것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아. 현섭이가 좋아하는 음악도 중학교 때 듣던 음악과 별 차이가 없고 나도 그래. 우리가 듣던 노래가 우리의 감성의 바탕이 되어 버렸으니 우리가 하는 노래는 모두 10년 전 음악이라는 생각이야.”

진현의 얘기는 큰 충격을 주었다. 대중가요를 유행가라고도 부르는데 그 단순한 말의 의미를 깨우치지 못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너 요즘 공부하는 것이 뭐니?”

나는 진현의 얘기가 무척이나 중요한 말 같았다.

. 요즘은 가요나 팝송, 그리고 가수를 분석한 논문도 많아. 나는 석학들이 분석한 엔터테인먼트의 방법론을 보며 우리가 어떻게 가야하는지 길을 찾고 있어.”

진현이는 한권의 책을 내밀었다.

스타 속성이 스타와 팬 커뮤니티 동일시와 팬 자발적 행동에 미치는 영향 방탄소년단을 중심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음악은 자기의 감성, 소위 로 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음악이 관계를 나타낸다는 식의 해석이 충격적이었다. 진현이가 해주는 다른 책들의 주요 내용을 설명 들으니 더욱 충격적이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하다보면 나와 같은 감성을 가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그건 완전한 착각이었다. 진현이는 그동안 공부하며 반성한 내용과 깨우친 내용을 말해주었다. 이후로도 진현이는 그 논문을 교인이 성경 들고 다니는 것처럼 매일 끼고 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논문의 하드커버가 너덜너덜해졌다.

 

우리는 몇날 며칠을 토론했다. 팬이 좋아할 수 있는 그리고 팬이 원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찾아가며 분석했다.

별거 아닌 것 같았는데 팬을 확보하기 위한 그동안의 모색이 순서가 아주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팬이 좋아할만한 일을 해야 비로소 팬이 확보되는데 팬이 되어달라고 외치기만 했으니 답이 없었던 것이다.

 

진현과 나는 우리가 토론한 내용을 적용하기 위한 실천 목록을 만들었다. 진현은 조금은 복잡하고 어려운 철학적 얘기를 했는데 나는 어릴 때 봤던 극진가라데의 창시자 최배달 총재의 어록 실천이 없으면 증명이 없고 증명이 없으면 신용이 없으며 신용이 없으면 존경을 받을 수가 없다.’를 나에게 맞게 수정하여 간직했다.

팬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팬의 만족이 없고 팬의 만족이 없으면 팬덤이 없으며 팬덤이 없다면 인기가수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실천사항들을 하나하나씩 챙겼고 유튜브에서도 댓글과 커뮤니티에서 팬들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진현도 그동안 고집하던 음악 스타일을 팬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많이 수정하였다. 진현의 음악 변신이 용이했던 이유는 자신이 그동안 추구했던 음악이 과거지향적이라는 판단이 들면서였다. 진현의 음악적 변신은 편곡에서 나타났다. 자기의 감성으로 만든 곡을 팬들이 원하는 스타일로 계속 수정하였다. 마치 완성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처럼 엄청나게 신경을 썼다.

나도 팬들의 원하는 노래의 스타일과 춤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했다. 하도 춤을 많이 춰서 진현이 작업실 바닥은 반질반질해졌다.

 

우리는 매일매일 팬들의 미래이며 희망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며 팬의 입장에서 노래를 만들고 부르니 팬들은 놀랍게 늘어났다. 아무리 용을 써도 늘어나지 않던 팬들이 마구 늘어났고 팬클럽이 생기기까지 했다. 팬들이 늘어나니 요구사항도 많았다. 이런 것 찍어 달라. 저런 것 만들어 달라. 각양각색의 요구가 있었는데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최선을 다 했다. 몸은 엄청나게 고됐다. 진현과 나는 한 달에 한두 번씩 몸살이 났다. 하지만 마음은 즐거웠다. 특히 외국 팬들의 요구를 노래와 춤으로 잘 표현해주면 자발적으로 그 지역의 팬덤을 일으켜 주었다.

우리는 늘 팬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런 모습이 좋았나 보다. 가족들도 나의 변화에 안정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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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의 팬덤이 상승곡선을 그리며 치솟다가 드디어 유튜브에서 다이아몬드 버튼을 받게 되었다. 구독자가 1000만명을 넘으면 주는 상징적 기념물이다.

우리는 이제 누가 봐도 가수다. 그것도 인기 있는 가수가 되었다. 다이아몬드 버튼을 받은 내용이 신문의 연예기사를 장식했고 우리 노래는 노래방 애창곡이 되었다.

 

지금 나와 진현은 팬들이 원하는 희망이 되기 위해 월드투어를 나가고 있다. 여기는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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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Super M의 빌보드 1위 소식이 있었습니다. 싸이, 방탄소년단의 성공을 이어가는 우리 가수들의 눈부신 활약에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Kai Jun(전완식)

30여 년간 인물화를 중심으로 회화 작업에 열중하였다. 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둔 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또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의 정신세계를 그림 안에 투영하려 노력하였다. 인물화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다룬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주요 미술경력은 국내외 개인전 27회 단체전 80여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형상 변화 신비510년 만에 재현 -대한민국 7번째 대통령 인물화 작가(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소장 / 문재인, 트럼프 대통령 청와대 소장) -Redwood Media Group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 선정 -미국 행정/정책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 강의 자료로 작품 선정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기획위원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광복70주년 국가 행사 대표작가(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및 서울도서관 전시)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전시행사 대표작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산업대학원 졸업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ICT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 설치미디어아트분과 부위원장, 국가미래연구원 문화예술체육 연구위원이다.

 


Kai Jun, 행운의 꿈​​, Oil on Canvas, 90.9cm X 72.7cm, 2019년 작

 

, 민희야 TV 좀 켜봐.” 미영이가 민희에게 다급한 어투로 부탁을 한다.

민희와 미영이는 TV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밤을 새웠다. TV에서는 소멸지구를 부활시키겠다는 공약을 가진 후보들이 대체적으로 당선 유력후보로 나타나고 있다.

 

2024410일 온 국민의 뜨거운 관심 속에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지고 있다.

작년부터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소멸고위험지구를 넘어 소멸지구가 나타났다. 불과 5년 전 228개의 지자체가 이제 210개로 줄었다. 2019년부터 인구 3만명 미만이거나 당 인구 밀도가 40명 미만인 전국 24개 군 단위 지방자치단체가 '특례 군 법제화'를 추진하고 별의별 방법을 동원하였으나 인구가 빠져나가기 시작한 지자체는 걷잡을 수 없이 인구가 줄어들다가 결국 소멸되어 버렸다.

TV에서는 개표방송을 하다가 중간 중간에 2006년 옥스퍼드대학교 데이비드 콜먼 교수가 예언한 것처럼 한국이 저출생으로 사라지는 나라 1의 위기라는 멘트를 앵커는 빠트리지 않고 넣었다. 이 얘기가 나올 때만해도 설마라고 생각했었는데 진짜 소멸되는 지자체가 생기고 지역구 통합, 행정구역 및 행정관리 절차를 다시 재편해야하는 전례 없는 일들이 작년부터 벌어지자 이번 22대 국회의원 선거는 국가적 재난에 해당하는 이 문제에 집중하게 되었다.

 

민희와 미영이는 밤새 TV를 보다가 아침 무렵 잠이 들었다. 뭔가 행운이 가득 들어오는 꿈을 꾸던 미영은 아이의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 잠이 깨었다. 황급히 아이를 살펴보고 기저귀를 갈아준다. 민희도 잠에서 깨었다.

민희와 미영이는 다시 TV를 켜고 당선자들을 찾아본다.

미영아! 너 정말 저 국회의원이 공약으로 내건 스마트 어촌에 가서 살 꺼니?”

민희는 미영에게 걱정된다는 말투로 말을 꺼냈다.

, 난 내 아기만 키울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어서 걱정되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난 엄마니까 할 수 있어.”

미영은 결의에 찬 얼굴을 해가며 대답했다.

 

. 신안군 당선자가 확정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TV에서는 미영이 주목하고 있던 지역구 국회의원이 당선되었다는 개표방송이 나오고 있다.

~! 민희야 당선되었데. 이제 저 국회의원의 공약대로 한다면 나와 우리 아기는 살 수 있어!”

미영은 자기가 당선 된 것 마냥 손뼉을 쳐가며 기뻐했다. 미영은 고사리 같은 아기의 손을 잡고 흔들며 우리 이제 살 수 있다는 말을 연거푸 하며 좋아했다.

난 이제 스마트어촌의 역군이 되겠어. 그리고 우리 아기는 바다의 왕이 될꺼야! 하하하미영은 아기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듯한 동작을 해가며 신나했다.

 

방송에서는 미영이 응원하는 당선자가 당선 소감을 말하고 있다.

어촌과 수산업을 종합적으로 지원하는 새로운 거버넌스가 필요합니다. 기존의 어촌특화지원센터와 귀어귀촌센터를 아우르는 현장 밀착지원 조직이 필요하며 특히 부모와 아이가 동시에 귀어한다면 국가를 살린다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 정착 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미혼모들을 복지적 차원에서 각 지자체가 지원했는데 저희 지역은 스마트 어촌에서 일도 하고 삶의 행복도 얻을 수 있는 정주성 높은 고장으로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당선자의 당선 소감은 미영을 더욱 들뜨게 했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미영은 아기를 바라보며 찬호가 이 모습을, 이런 상황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할까가 떠올랐다.

 

미영과 찬호의 이야기는 작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영은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취업했다. 취업한 업체는 택배배송 업체였고 미영은 여기에서 사무를 보고 있었다. 미영이네 업체는 택배배송 재하청하는 회사라서 거의 대부분의 직원이 계약직이다. 미영이는 연봉은 낮아도 정규직으로 근무한다는 것에 자부심이 있었다. 성실하게 자기 업무를 하고 있었다.

날이 무척 더운 어느 날 선풍기 몇 개에 의지한 채 택배 상자를 이리저리 옮기는 직원들에게 미영은 시원한 물이라도 줘야겠다는 생각에 냉장고의 얼음을 꺼내 열심히 냉커피를 탔다. 여러 개의 종이컵에 나누어 담고 땀 흘리며 일하는 직원들에게 한잔씩 나눠주고 있었다. 아저씨들에게 한잔씩 주고 돌아서려는데 처음 보는 미영이 또래의 찬호가 있었다.

어머, 처음 뵙는 분이네요. 이거 한잔 하세요!”

미영은 찬호에게 종이컵을 건네며 인사를 했다. 찬호는 미영이 주는 커피를 받으며 미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미영은 왠지 쑥스러웠다.

고마워요.” 찬호는 간단한 대답을 하고 다시 상자들을 이리저리 옮겼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

미영은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틀 뒤였다. 찬호가 배송한 물건이 파손되었는데 소비자의 항의 전화로 사무실이 아주 발칵 뒤집혀졌다. 생산업체와 중간의 물류센터에서도 제품의 하자가 없었고 미영이네 회사에 물건이 들어왔을 때에도 문제가 없었다. 결국 찬호가 배송하며 파손 한 것인데 제품이 너무 고가라서 분위기는 살벌했다. 배송을 마치고 찬호가 돌아왔을 때 찬호도 이미 전화로 엄청 야단을 맞은 상태여서 기가 죽어 있었다.

찬호는 이사님과 한참을 얘기한 뒤 뭔가의 서류를 작성하고 사무실에서 나오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미영은 또래 친구처럼 보이는 찬호가 처진 어깨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뒷모습이 애잔하게 보였다. 미영은 찬호에게 뭐라도 위로의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기운 내세요. 다친 데는 없어요?”

미영은 제품이 파손되며 찬호가 다치지 않았나? 걱정되기도 했었다.

. 고마워요. 조금 찢어지기는 했는데 괜찮아요.”

찬호는 정말 고맙다는 표정으로 미영에게 대답했다.

미영은 찬호의 말에 깜짝 놀라 그의 몸을 훑어보니 발목에 핏자국이 있었다.

아니 핏자국이... 많이 다친 것 아니에요? 병원가야 할 것 같은데요.”

미영이 찬호의 다리를 살피며 말하자 찬호는 괜찮다고 말하며 병원 갈 돈도 없고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아니니 걱정 말라고 했다.

 

찬호는 자신의 택배차에 올라 멍하게 앉아있었다. 미영은 사무실 비상 약 상자에 있는 연고와 반창고 등을 챙겨서 찬호에게 건네주었다.

찬호는 자신의 처지가 몹시 괴로웠는데 미영의 친절함에 상당히 큰 위로가 되었다. 찬호는 고맙다는 말을 하며 자신에게 있었던 오늘 일을 얘기해주었다. 찬호가 배달 간 곳은 4층 건물이었는데 상자가 커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4층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커다란 개가 크게 짖으며 다가 왔다고 한다. 목줄이 되어있어 물리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나타난 개에게 놀라 그만 상자를 떨어드렸다고 했다. 찬호의 발목을 부딪치며 굴러간 상자 속에는 유리로 된 제품이 들어있었던 것 같았는데 집 주인이 없었고 개가 하도 짖어서 그냥 물건을 놓고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1시간 정도 지났을 때부터 택배 물건 주인에게서 항의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했다. 제품은 100만원이 넘는 물건이어서 며칠 택배일 한 자기로써는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라 괴롭다고 했다. 찬호는 부모님이 편찮으셔서 자기가 도움이 되려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일만 저질러서 속상하다는 말을 했다. 미영은 찬호가 딱해보였다.

찬호와 미영은 일을 시작한 동기가 같았다.

 

미영의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는데 아버지는 농약 중독으로 몇 년째 누워 지내고 어머니도 남의 과수원에 사과 따는 일하러 갔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친 후 겨우 움직일 정도 밖에 안 되었다.

미영이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일터로 나온 이유도 찬호와 비슷하였다.

미영은 찬호의 얘기를 듣는데 자기 얘기 같아 가슴이 답답하였고 동정심도 생겼다.

그날 이후 미영과 찬호는 서로의 속 얘기를 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미영과 찬호는 서울에 올라와 친구도 아는 사람도 없어서 외롭기도 했고 미영이 성격이 사람 좋아하고 친절하며 정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찬호도 미영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둘은 연애를 시작했고 서로 생활비를 아끼자는 차원에서 자취방을 합쳐 동거를 하게 되었다. 마치 신혼살림을 차린 것 같이 둘은 행복했다. 미영은 조금이라도 돈을 아껴 부모님께 보낼 수 있어서 좋았고 찬호도 매월 회사에 지불해야하는 제품 배상금을 낼 수 있어 좋았다.

그렇게 소박한 행복의 시간이 흐르다가 미영이 이상 증세를 느끼기 시작했다. 생리가 없어지고 감기 같은 증상이 나타나며 피곤하여 회사에서도 일에 집중이 안 되는 날이 며칠 있었다. 이러다 말겠지하며 지내는데 뭔가 느낌이 안 좋았다. 약국에 가서 임신진단 테스트기를 사서 진단해보니 두 줄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업무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미영이 찬호를 살펴가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찬호는 아버지가 되기에는 너무나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생각이 있어서였다. 미영 또한 준비가 안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찬호씨 우리 얘기 좀 해야겠는데... 조금 진지하게 할 얘기가 있어...”

미영은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응 뭔데? 말해봐.”

찬호는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분위기를 잡나 하는 표정으로 미영을 쳐다봤다.

며칠 전에...... 나 감기 기운 있는 것 같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게 아니었고 오늘 임신진단 테스트기로 진단해보니 임신이더라고...”

미영은 말을 하다 말고 주머니에서 진단기를 보여주었다.

찬호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진단기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크게 내 쉬었다. 그리고 뭔가 비장한 각오를 한 듯한 표정으로 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미영아 우린 아기를 가질 형편이 안 돼. 너도 부모님께 생활비 보내야하고 나도 그렇고 나는 내년쯤에 군대도 가야해. 우리가 어떻게 아이를 키우겠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니 병원에 가서 지우자.”

찬호의 단호한 얘기에 미영은 어쩜 저렇게 말을 할까 나에게 위로의 어떤 말도 없이 저렇게 말하나하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실은 미영도 현실적인 찬호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왠지 서러웠다. 미영은 그날 밤 등을 돌리고 잠을 청했다.

 

일로 바쁜 며칠이 지나고 둘은 시간을 만들어 산부인과로 향했다. 가는 동안 찬호는 아기를 지운다는 것을 몇 번 얘기하며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을 했고 미영은 그냥 듣기만 했다. 대답은 안했지만 형편을 생각하면 찬호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다사랑 산부인과라는 간판이 가까이 보이기 시작하며 미영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기가 어떻게 생겼을까? 지금 얼마큼 자랐을까? 아기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알고 있을까? 미영은 머리가 복잡했다.

 

병원 진찰실로 미영은 들어갔고 의사선생님은 기본적인 진료 상담을 마치고 초음파검사를 하였다. 미영은 아직도 머리가 복잡했다. 아기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너무 커서 가만히 누워있기조차 힘들었다. 미영의 배에 초음파를 하기 위한 젤이 발라지고 모니터를 통해 미영의 배속에 자라고 있는 생명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크기로 봐서는 6주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이정도면 심장소리도 들릴 것 같군요. 아기의 소리 한번 들어보세요.”

의사선생님이 아기소리를 들어보라는 말에 미영의 가슴은 뭐라 형용할 수없는 감정들이 벅차게 일어났다.

? 아기 소리요?”

미영이 대답을 하는 사이 아득히 먼 천상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콩딱콩딱콩딱콩딱....’

이소리가 태아의 심장 소리입니다.”

의사선생님이 소리의 정체를 설명해주었는데 미영은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미영은 순간적으로 여러 가지의 생각이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나의 분신, 내 사랑의 결실, 내 모든 것, 나는 이제 엄마다. 나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니고 엄마다!’라는 생각이 지나갔다.

미영은 아기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눈물이 왈칵 흘렀다. 아기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이제 전혀 없다. 진정한 사랑을 얻었다는 진실한 감사의 눈물이었다.

미영은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외쳤다.

선생님 저 아기 낳겠어요. 이 아기는 사랑입니다. 감사합니다. 아기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어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알겠습니다. 남편분과 잘 상의하시길 바랍니다.”

의사 선생님과 얘기를 마치고 미영은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찬호에게 다가갔다.

무거운 얼굴을 한 찬호가 미영을 보며 물었다.

어떻데? 언제 수술할 수 있다고 해? 비용은 얼마나 든데?”

찬호씨 잠깐만. 나 진지하게 할 말 있어.”

미영의 태도에 찬호는 말을 멈추고 미영의 눈만 바라보았다.

난 조금 전에 마음 고쳐먹었어. 난 아기 낳을 거야. 나 그동안 찬호씨 말대로 아기 지울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오늘 그러면 안 된다는 확신이 왔어. 난 어떻게든 아기 낳을 거야. 그리고 아기를 위해 최선을 다 해서 살려고 노력 할 거야.”

미영의 말에 찬호는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화가 났다.

뭐라고 그걸 말이 되는 소리라고 하는 거야! 얼마 전에 다 얘기 했잖아. 왜 그러는데. 우리 형편에 아기를 어떻게 키워. 그리고 그 아기가 행복할 수 있겠어? 무슨 돈으로 키울려고 해!”

찬호는 현실을 생각하지 않는 잘못된 판단이라는 투로 미영을 쏘아붙이고 벌떡 일어났다. 병원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는 찬호를 쳐다보자 찬호는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병원을 나가버렸다. 미영은 찬호의 뒷모습을 보며 왠지 저 모습을 다시 볼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미영과 찬호는 그 날 이후 자주 다투었다. 찬호는 현실적으로 생각해야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미영은 시간이 지날수록 모성애가 깊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둘은 점점 더 간극이 넓어지고 있었다.

 

미영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미영이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찬호는 미영을 나무라지만 미영은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훌륭한 사람이다. 미영은 아무것도 없는 찬호를 사랑했고 자기를 희생해가며 주변 사람들을 챙겨왔다. 찬호는 그런 미영을 생활비를 절약하는 동반자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미영은 아기를 위해 태교도하고 자기의 모든 삶의 가치와 생각을 바꾸고 있는 동안 찬호는 스스로 감당 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른다고 미영을 나무라기만 했다.

 

미영의 배가 눈에 띄게 불러오던 어느 날 찬호는 짧은 편지를 한 장 남기고 떠났다.

내가 책임질 수 없다는 말을 한 것은 진정 그렇게 밖에 안 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 해주길 바래.’ 미영은 찬호가 남긴 편지를 손에 들고 눈물을 훔쳤지만 한편으로는 그래 나 혼자라도 할 수 있어!’ 라고 다짐을 하였다.

 

미영은 찬호를 그렇게 떠나보내고 혼자 아이를 낳고 키울 준비를 하였다. 편찮은 부모님께는 말하는 것부터 부담을 주는 것 같았고 어떻게든 혼자의 힘으로 해결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여기저기 알아보던 미영은 미혼모들을 보호해주는 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입소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같은 처지의 민희도 만나게 되었다.

민희도 미영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둘은 함께 많은 것을 의논하였고 나이에 비해 생각이 깊었다.

 

미영은 아기를 훌륭하게 키울 생각밖에 없었다. 그저 건강하게 자라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이 살만한 환경을 만드는 일에 아기가 큰 몫을 하길 바랐다. 미영은 늘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아기도 나중에 자라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길 또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랬다. 그런 미영의 염원을 이루게 될 스마트 어촌의 비전과 아기와의 관계는 소멸되어가는 우리나라 어촌계의 희망이 될 수도 있다는 꿈을 꾸게 된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고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미영은 아기의 생명도 구했지만 이제 어촌도 구하고 나라도 구한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미영은 아기의 가슴에 귀를 대고 뜨겁게 뛰는 심장소리를 다시 한 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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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 Jun(전완식)

30여 년간 인물화를 중심으로 회화 작업에 열중하였다. 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둔 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또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의 정신세계를 그림 안에 투영하려 노력하였다. 인물화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다룬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주요 미술경력은 국내외 개인전 27회 단체전 80여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형상 변화 신비510년 만에 재현 -대한민국 7번째 대통령 인물화 작가(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소장 / 문재인, 트럼프 대통령 청와대 소장) -Redwood Media Group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 선정 -미국 행정/정책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 강의 자료로 작품 선정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기획위원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광복70주년 국가 행사 대표작가(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및 서울도서관 전시)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전시행사 대표작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산업대학원 졸업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ICT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 설치미디어아트분과 부위원장, 국가미래연구원 문화예술체육 연구위원이다. 

 

Kai Jun, 들꽃처럼 다시 피어난다​​, Oil on Canvas, 90.9cm X 72.7cm, 2019년 작

명동 성당의 종소리.

 

9년 전 철없던 내가 들었던 그 소리가 같은 시각에 울려 퍼지고 있다.

오후 6시에 울리는 만종,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에 울리는 종소리는 경건하게 나의 하루를 돌아보게 한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전화 드렸던 한국동물보호협회 미스 김입니다.”

~! 전화 목소리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미녀네요. 반가워요

명동 성당 바로 앞에 있는 카페에서 미스김과 나는 반갑게 인사를 했다.

이번에 저희 협회에서 대표님의 공로를 인정하여 공로상을 드리려고 하는데 대표님의 봉사에 대한 기사도 나가요. 대표님이 봉사하게 된 계기를 말씀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미스김의 요청에 나는 조금 당황 했다. 나의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고 계기가 좋아 보일수도 없어서였다.

우물쭈물하는 나에게 미스김은 말하기 어려운 뭔가가 있나?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다 이렇게 얘기했다.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그냥 편하게 말씀하시면 제가 걸러서 기사로 내면 되니까요.”

미스김은 사람을 안정시키고 신뢰감을 주는데 재능이 있었다. 그녀는 인터뷰보다 일상적인 얘기를 꺼내며 나를 안심 시켜주었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한 뒤에 나에게 다시 질문을 했다. 나도 마음이 편안해지니 어떤 얘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뭐부터 얘기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두서없이 막 얘기하더라도 미스김이 잘 정리 해주세요.”

나는 괜히 손에 힘이 들어가고 식은땀이 살짝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대표님이 동물보호에 앞장서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미스김은 미소로 나를 계속 안정시켰다. 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녹음기와 메모지를 연신 쳐다보았다.

. . ..”나는 목이 메어오는 것을 참아가며 말을 이어 보려했다.

저는 심각한 우울증이 있어서 한때 자살을 생각했었어요. 자살을 하려고 건물 옥상에 올라갔는데 한걸음 땔 때마다 온몸이 떨리더군요. 난간을 붙잡았는데 다리가 떨려서 발을 난간 위로 올릴 수가 없었어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데 반대편 옥상에서 길고양이 두 마리가 생선 머리 하나를 두고 서로 죽일 듯이 싸우는 것을 보았어요. 날카로운 비명 소리처럼 들리는 고양이의 울음소리와 쉭쉭 소리를 내며 서로 달려드는 격한 모습에서 저는 충격을 받았죠. 저는 갑자기 나는 온 힘을 다해서 살아본 적이 있나? 저 고양이들은 한 끼 식사도 되지 않을 조그만 생선토막 하나에도 목숨을 거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죠.” 나는 말을 이어가기가 힘들었다.

그러셨군요. 힘든 일이 있으셨네요.”

미스김은 자기도 이런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한 당황한 눈빛이었지만 담담한 목소리로 계속 이어가라는 느낌을 줬다.

저는 고양이들이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거는 싸움을 보며 나는 온 힘을 다해 살아본 적이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하자 비참했습니다.” 나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이쯤에서 멈추고 싶었다.

미스김은 열심히 받아 적다가 나를 다시 쳐다봤다.

... 대표님 계기는 알았는데 좀 더 사연을 말씀해 주시면 좋겠는데요. 기사라는 것이 어느 정도 스토리가 구성되어야 독자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에... ... 제가 동생이다 생각하시고 지금 성공하신 대표님의 과거를 거울삼아 배울 수 있는 내용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문장 구성이나 정리는 제가 최선을 다해 해볼테니 대표님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편하게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미스김이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말해주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내가 만약 동생이 있었다면 말해주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커피를 한모금 넘기며 나는 진정을 찾아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저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여기 바로 앞에 있는 계성여고를 나왔죠. 종교를 갖지는 않았지만 계성여고를 다니는 동안 천주교의 교리나 우리학교 이사장님인 고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들이 참 좋았습니다. 대학은 한성대학교를 나왔고요. 저는 강북 시내에서 자라며 명동과 대학로가 저의 보편적인 놀이터였죠. 저는 늘 그랬던 것처럼 9년 전 가을 친구와 오랬만에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되었어요. 친구 미영이는 오랜만에 만났기에 보통 여자 친구들의 만남이 그런 것처럼 그동안 있었던 사는 이야기와 아이들 이야기 남편 이야기를 하며 공통점을 확인하고 아직도 우정이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미영이는 가락동시장 청과 경매사에게 시집을 가서 경제적으로는 풍족한데 경매시간이 저녁부터 새벽까지 있어서 낮 밤이 바뀐 삶을 살고 있었지요. 그런데 새벽에 들어오는 남편과 아이 등교 준비로 진짜 낮 밤이 바뀌어 아침 9시나 되어야 잠을 잔다고 하며 푸념 아닌 푸념을 한참 들어주고 내 얘기도 풀어 놨었습니다.”

친한 친구분이셨나 보죠?” 미스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얘기를 흥미있게 듣고 있었다.

. 미영이와는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고 잘 통하는 사이였죠. 지금 생각해보면 철없기는 똑같았는데 그 친구와 저는 남편의 직업이 달랐죠. 저에 전 남편은 의사였습니다.”

미스김은 내가 전 남편이라는 말에 눈을 다시 동그랗게 뜨고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상하게 그 순간부터 말이 잘 나오기 시작했다. 큰 사건 두 가지를 얘기하니 못할 말이 없다는 배짱이 생겼다.

저의 삶은 사실 단순했어요. 남편은 개원의 생활을 하다가 병원을 접고 페이 닥터로 큰 병원에 다니고 있었고 딩크족처럼 어떤 이유로 인해 아이를 미루거나 낳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안 생겨서 없었죠. 생활에 특별할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인지 삶이 매우 무료했습니다. 어제도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것이라는 예상이 되는 삶 말이죠. 미영과 달리 저는 너무 평범하여 재미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미영이는 반응이 달랐어요. 제 손까지 잡아가며 흥분해서 말했었죠.”

미스김에게 말하는 사이 나는 타임머신을 탄 듯이 과거의 그 시간에 돌아가 있었다.

 

어쩜 너와 나는 이렇게 공통점이 많을까? 나도 그래. 낮 밤이 바뀌어 살다보니 만나는 사람도 적어지고 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더라고... 특히 아이 학교 다니고 나서부터는 낮에도 애 챙겨야하니까 잠을 쪼개서 자야해. 그러다보니 하루가 남편 챙기고 애 챙기고 남는 시간 잠자고 나면 끝이야. 어떤 날에는 왜 사나 싶기도 해. 우리 말이야 예전에 폼 좀 났잖아. 길 가다보면 남자들이 연락처 달라고 쫓아다니고 호호호. 한번 사는 세상, 재미있게 살아야하는데 이게 뭔지 모르겠다.”

미영의 말에 나도 괜히 흥분 되었었다. 나는 계성여고 다닐 때 명동을 지나다 보면 길거리 캐스팅 제안을 여러 번 받았었고 미영은 한성대 퀸카였다. 우리는 옛날 생각에 온몸이 후끈했다.

그렇지. 나도 요즘 참 재미없어. 우리 다시 명동 좀 누며 볼까? 하하하, 호호호

나와 미영은 손뼉까지 쳐가며 서로 좋아했다.

 

그때 미영과 나는 어릴 적 버릇을 못 고친 상태였는데 둘이 다시 만나게 되니 과거로 돌아가 버렸다. 우리는 멋 부리길 좋아하고 백화점을 구경 다니길 좋아하며 명품을 누가 더 좋은 것 가지고 있나를 경쟁하고 그랬었다.

미영을 오랜만에 만났을 당시까지는 보통 1년에 한번 만날까 말까 했는데 그 다음 주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었다.

다시 만난 우리는 영화를 봤고 노래방도 갔고 백화점을 여기 저기 돌며 결혼이후에 안 해본 것들을 둘이서 신나게 했었다. 미영이와 나는 왠지 대학생 때의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 같아 신이 났었다. 1주일에 한 번씩 만나게 되었고 그동안 안 가본 곳이, 안 먹어본 것이, 안 해본 것이 이렇게 많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사는 것 같고 활력이 넘쳤고 즐거웠다. 미영이와 신나게 노는 시간이 몇 개월 지났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서로 해보고 싶은 일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만나도 뭐하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또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미영을 다시 만났다.

미영은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이제 신나게 놀았으니 다시 집안일 신경 쓰자. 우리 그만 놀자. 이렇게 너와 몇 달 놀으니 속이 다 시원하다. 역시 격 없는 친구가 최고야. 네가 나와 함께 해주어서 참 좋았다.”

미영은 웃으면서 말했지만 왠지 무거웠다. 그러면서 아이 학교생활 얘기를 했다. 아들이 학교에서 회장이 되었고 자기가 이제 뒷바라지를 열심히 할 생각이라고 했다.

미영의 얘기를 듣는데 나는 우리의 만남을 중지해야하는 특별한 계기가 없었다. 그런데 미영이에게 가끔씩은 만날 수 있지 않냐?는 식의 얘기를 꺼내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마음속으로는 , 누구 만날 사람도 특별히 없고 놀 사람도 없어. 미영아 그러지 말고 우리 가끔 보자.’라는 말이 혓바닥 위에까지 올라와 있었지만 나는 엉뚱한 말을 했다.

그래. 우리가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다 보니까 정말 옛날 생각하며 신나게 잘 놀았다. 나도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볼까 궁리 중이었는데...”

말꼬리를 흘리는 내말을 미영이 잘라가며 말했다.

그렇지! 너도 뭔가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역시 우리는 호흡이 잘 맞아. 뭔데? 어떤 일을 생각하는데?” 미영은 뭐가 그리 궁금한지 재차 물었다.

. 아직 정한 건 없고, 고민 중이야. 나중에 정리되면 얘기 할게나는 진짜 계획된 일이 없었기에 해줄 말도 없어서 그냥 막 둘러댔다.

 

미영과 헤어지고 집으로 오는데 헛헛한 기분이 가슴속에 꽉 찼다. 친구를 잃어버린 기분 같은 묘한 느낌까지 들었다.

 

대학 졸업하고 선배가 소개해준 남편과 6개월 남짓 연애하고 결혼했으니 내 인생은 너무 단순하다는 생각이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여자는 너 위하는 착실한 남자 만나서 사는 것이 최고다.’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서 인지 내 인생의 설계나 재능을 따져 본 적이 없다. 그냥 학교 열심히 다니고 대학은 성적에 맞춰 적당한 곳에 다녔고 남들 한두 번 받는 장학금도 받았다. 그 정도가 인생의 성적표다. 따져보니 내가 원했던 것이 있었나 싶었다. 어려서 나는 과학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던 것이 고등하교 다니면서 대학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재능도 꿈도 아닌 성적에 맞는 인생을 살게 되었다. 쉬운 인생만 쫒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도 부모님이 말하던 조건과 부합되기에 특별한 고민 없이 선택했고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겉으로만 화려한 나를 선택한 것 같았다. 우리는 열애라는 것이 없었다. 결혼하고 수년이 지났지만 가슴 뛰게 보고 싶고 좋고 하는 기분을 가져본 날이 있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 삶의 무미건조함에서 탈출 시켜준 미영이 떠나버린 뒤 나는 평생 생각해보지 않았던 를 생각하게 되었다. ‘는 누구인가? ‘는 어떤 목적으로 살고 있는가?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나는...

 

사춘기에도 가져본 적이 없는 자문자답을 수없이 많이 했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나는 초라해졌고 한심했다.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니 중국식 공갈빵이었다. 텅 비어있는 내면에서 나를 찾으라는 울림이 메아리 쳤다.

 

내가 나를 찾는 시간에 남편을 바라보니 예전에는 평범해 보였던 일상이나 그의 태도가 이젠 달라보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조건으로 그를 보았기에 그가 어떤 일을 하던, 언제 귀가를 하던, 누구를 만나던 나는 아무 상관이 없게 보였다. 그저 정해진 날 생활비주고 가끔 보너스 개념의 어떤 것들이 주어지면 나는 불만이 없었다. 그러던 관점이 나를 찾아가고 자기애가 커지며 그와 나의 관계를 따지게 되었다. 나는 남편을 좋아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았고, 남편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특별히 내가 일찍 오라고 부탁하지 않으면 남편은 집에 일찍 들어오지 않는다. 와서도 나와 대화하거나 뭔가 공통 관심사를 논하기보다는 서재에 들어가서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갖는다. 얼마 전까진 남편이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처럼 나 또한 좋아하는 드라마 방해받지 않고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나를 혼자 있게 하는 그가 야속했다. 그리고 그가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도 궁금했다. 남편이 남긴 흔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켜놓고 끄지 않은 컴퓨터, 그의 카드영수증, 차에 남은 흔적들. 굳이 묻지 않아도 남편은 친구와의 만남이 많았고 취미생활도 다양했으며 나 외에 다른 여자도 만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남편에게 묻고 싶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혹시 내가 생각하는 어떤 것들이 진실이라면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이 더 커서 물을 수가 없었다.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남편에게 더 관심을 갖고 잘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고 즐거워 할 수 있는 일들을 함께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실천했다. 일찍 들어오라고 부탁하고 함께 뭘 하자고 제안하고 그랬다. 그렇게 몇 달간 노력하였다. 초기에는 남편도 성의를 봐서 그렇게 따라줬는데 지금은 식탁위의 차려진 음식을 도로 랩으로 싸서 냉장고에 넣는 날이 더 많아졌다.

몇 달이 지난 후 남편은 예전처럼 친구들과 술자리, 취미생활 등등의 시간을 다시 찾아 갔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러나 내 생활은 여전히 편했다. 엄마가 남편에게 노래를 부른 것처럼 손끝에 물 한방울 묻히지 않고 키웠으니 힘들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을 잘 지켜주고 있었다.

그 무렵부터 엄마의 말들을 고분고분 들었던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한다고 생각했던 어린 나의 사고가 원망스러웠다. 편하게 사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해서, 힘든 일 하는 것이 싫어서 만들어진 나의 삶은 그저 화초 같았다. 이렇게 길들여진 시간이 길어서 인지 나는 남편에게 어떻게 우리의 관계를 개선하자고 제안하기도 따지기도 힘들었다. 점점 무기력해지면서 우울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멍하니 앉아있는 날들도 많았다. 마음속으로는 이런 내가 싫었고 이런 날들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구가 컸지만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더욱 정신적으로 힘든 날들이 많아졌고, 남편의 출근을 챙기는 것도, 퇴근 후에 챙기는 것도 건너뛰는 날들도 많아졌다.

나는 우울했고 남편은 날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내가 힘들어 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고 길어지자 남편은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말로는 새로 연구를 시작했다고 하지만 며칠씩 밤새워 할 만큼 연구를 해야 하는 것은 없었다. 남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무미건조하고 무기력한 시간이 지나자 남편은 이혼하자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이때는 그동안 숨겨온 이야기를 모두 했다. 사귀는 여자도 있고 나와의 삶이 불행하고 그냥 시간만 죽이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는 것도 지겹고... 그는 나를 엄청나게 싫어했다. 미워하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나를 싫어했다.

그의 말을 듣는 동안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남편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부족하고 못난 내가 더 미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남편은 통보하듯이 나에게 이혼하자며 위자료와 내가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 생활여건을 제시하였다.

돌이켜보니 나는 남편에게 잘해준 것이 없어서 따지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냥 고개만 끄덕였고 그렇게 단순하게 나의 편한 인생은 정리되었다.

 

저 대표님. 하시던 말씀 계속 해주시죠. 미영씨를 만나고 어떻게 되셨나요?”

미스김이 멍하니 회상에 잠겨있던 나에게 말을 걸었다.

. 제가 잠시 옛날 생각에... 미영이 만나서 철없이 놀았죠.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문제 될 정도의 이탈이나 방황은 없었어요. 그냥 허세가 많아서... 그러다보니 남편과 안 좋아졌고 또한 철이 없었기에 그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이 없었죠. 그렇게 우울증이 왔었어요.”

나는 미스김에게 단순하게 말을 했다. 그때 미스김이 전화를 받는다고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또 회상에 젖어들었다.

 

남편과 이혼 후 나는 변두리의 작은 원룸으로 이사를 했고 한동안 집안에만 있었다.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고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죽고만 싶었고 괴로운 날들을 보내며 자살을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용기가 없었다. 뭘 할지를 몰라서 그냥 산송장처럼 그러고 있었다.

몇 날 며칠을 나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다 결국 죽을 마음을 정하고 옥상으로 올라갔을 때 길고양이 두 마리가 생선 머리 하나를 두고 서로 죽일 듯이 싸우는 것을 보았다.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거는 두 마리의 고양이를 보며 나는 충격을 받았다. 온힘을 다해 살아본 적도 없는 사람이 죽는다고 누가 애통해 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를 수습하기 위해 또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서도 남에게 도움이 안 되고 죽어서도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왜 이렇게 나약하고 쓸모없는 인간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 보다 못난 나는 그날 잠이 오지 않았다. 온힘을 다해 살아봐야겠다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평생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생각이 들자 실천할 일이 생각났다. 그렇게 하기 싫었던 몸으로 하는 일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생각도 한 적이 없는 낮선 곳에서 육체노동으로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도전하다보면 내 삶의 방향이 잡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기술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니 제주도에 가서 귤 따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TV에서 본적이 있어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못해도 도전해보고 싶었다.

 

미스김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협회에서 다음 행사에 대한 얘기가 있어서... 하시던 얘기 계속 해주시죠.”

나는 정리해서 다시 말을 이었다.

. 그렇게 철없이 무기력하게 우울증을 앓고 있는데 남편은 제가 많이 싫었나봐요. 제가 생각해도 그랬겠다는 생각이 지금은 들어요. 당시에는 몰랐지만 겉멋만 알고 할 줄 아는 것은 없으면서 허세나 부리고 요구하는 것도 많고 하니...그렇게 이혼하고도 우울증으로 고생하다가 아까 말씀드린 고양이의 싸움으로 깨우침이 생겨서 평생 해보지 않았던 육체노동을 하게 되었어요.”

내 말을 미스김은 열심히 메모하고 있었다. 나는 육체노동으로 선택했던 제주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제주에 도착하여 일력사무소를 찾아 귤 따는 일을 찾았다. 제주도에서 재배하는 귤의 종류가 다양하다보니 수확시기가 종자마다 달랐다. 그래서 귤 따는 일은 1년 내내있었다.

 

얼굴이 새까맣게 타고 여리여리하던 몸이 근육으로 변해가면서 마음에도 근육이 붙었다. 우울한 기분도 거의 사라지고 사람들과의 대화도 자연스러워졌으며 하루하루가 소중하게 느껴졌다. 예전에 편한 삶을 살겠다고 고집할 때는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무의미하게 살았다.

제주생활 이후로는 매일 똑같은 일을 해도 하루하루가 다르게 느껴지고 내일 있을 일들에 대한 긴장감과 기대감이 있었다. 그리고 내손으로 돈을 버니 돈에 대한 의미도 달라졌다.

 

제주에서의 1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며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붙었고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런 경험이 있으셨군요. 어려움을 잘 극복하셨네요.”

미스김은 뭔가 계속 신기한 얘기를 한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리엑션을 했다.

. 제주생활에서 목표도 생겼죠. 일차적으로는 내 재능을 살려보는 것이었고 그 다음은 의미있는 삶을 살자는 것이었어요.”

나는 다시 제주 생활 이후의 삶을 얘기했다.

 

결혼 생활 11년 동안 하루도 안 빼고 TV를 시청한 덕에 보편적인 여자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에 매력을 느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제주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돌아와서 남편이 준 위자료와 제주에서 번 돈을 합쳐 집 근처에 멀티숍을 차렸다. 무언가 내 상품을 만들고 싶었지만 지식이 없으니 가진 능력을 활용하는 것으로 일단 방향을 잡았다. 나는 TV를 많이 보며 익힌 감각도 있었지만 명품을 고르는 감각이 좋았다.

 

변두리라서 값비싼 물건을 팔아 서는 곤란했다. 그러나 물건의 수준이 떨어져도 곤란했다. 나는 발품을 팔아 남대문 시장, 동대문 시장 등을 누비며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멋진 물건을 값싸게 사들여 진열했다. 의상, 패션잡화, 침구 등등 여자들의 감성에 부합하는 물건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구해서 진열했다. 처음엔 매상이 거의 없었지만 동네에 소문이 나고 인터넷 매장을 개설하면서 장사는 사업으로 확장되었다. 물론 중간에 사업이 휘청거릴 때도 있었지만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니 이겨낼 수 있었다.

명동에 내 숍을 열고 내 이름으로 된 제품을 팔며 내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당당한 내가 되었다.

 

미스김은 내 얘기를 다 듣더니 질문을 했다.

그럼, 대표님은 지금 목표 중에 어떤 단계이신가요?”

. 저는 지금 일차목표는 이뤘다고 보고 이차목표를 향해서 가는 중이죠. 저의 재능을 발휘해서 이만큼 이뤄냈고 동물보호단체에 기부도하고 있으니 말이죠.”

나는 고양이를 위해 기부하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최근에 하는 일중에서 가장 보람된 일이였다.

그럼 이차 목표. 즉 앞으로의 포부를 말씀해주시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치죠.”

미스김은 이제 정리해도 되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오랜 시간 생각했던 일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의 저를 만들어준 길고양이들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요. 앞으로 남은 인생은 세계적인 고양이 용품과 식품 사업을 일으키는 것으로 목표를 삼았어요. 그리고 수익은 동물 보호하는데 활용할 생각입니다. 목적과 목표가 있으니 뭘 해도 의욕이 넘쳐요. 앞으로는 이 일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할 생각입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철없던 내가, 무기력한 내가 세상에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며 자긍심과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미스김이 메모를 모두 마치더니 한마디를 더 한다.

저 이건 개인적인 부탁인데요. 오늘 인터뷰하며 대표님을 존경하게 되었어요. 제가 동생이다 생각하시고 해줄 수 있는 조언이 있으면 한 말씀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제주에서 깨우친 얘기를 해주었다.

제가 제주에서 육체노동을 하다 보니 삶의 가치나 방법이 모두 변하더군요. 나를 확인하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그때 인생을 살아가는 세 가지를 구분하게 되었어요. ‘, 재능, 책임저는 재능은 있었는데 꿈과 책임이 없었죠. 왜 사는지도 없었고 뭘 책임지는 것도 없었어요. 부모님이 저를 책임졌었고 남편이 책임졌었기에 저는 책임 질 일이 없었죠. 저는 , 재능, 책임하고 싶은 것, 잘 할 수 있는 것, 꼭 해야만 하는 것으로 구분 지을 수 있게 되면서 저를 완성 할 수 있었어요. 참 단순한 명제인데 제주에 가기 전까지 한 번도 생각을 깊이 있게 안했더군요. 그저 어떻게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미스김은 이미 알고 계시고 생각해봤을 것으로 보이는데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얘기는 이것뿐이네요.”

미스김은 내 얘기를 곰곰이 생각하며 듣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저도 하고 싶은 것, 잘 할 수 있는 것, 꼭 해야만 하는 것을 인생에 대입하여 어떻게 살아야지 되는지 생각 많이 하겠습니다. 좋은 말씀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미스김은 갔고 나는 명동 성당을 다시 찾았다. 마음먹은 사명을 다 하기 위한 다짐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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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 Jun(전완식)

30여 년간 인물화를 중심으로 회화 작업에 열중하였다. 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둔 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또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의 정신세계를 그림 안에 투영하려 노력하였다. 인물화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다룬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주요 미술경력은 국내외 개인전 27회 단체전 80여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형상 변화 신비510년 만에 재현 -대한민국 7번째 대통령 인물화 작가(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소장 / 문재인, 트럼프 대통령 청와대 소장) -Redwood Media Group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 선정 -미국 행정/정책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 강의 자료로 작품 선정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기획위원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광복70주년 국가 행사 대표작가(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및 서울도서관 전시)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전시행사 대표작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산업대학원 졸업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ICT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 설치미디어아트분과 부위원장, 국가미래연구원 문화예술체육 연구위원이다.

 

 

Kai Jun, 봄의 환희, Oil on Canvas, 45.5cm X 53cm​, 2019년 작

은혜와 용식

 

은혜와 용식이 다시 만나 것은 며칠 뒤였다.

은혜는 몸을 추슬러 패션숍의 가을 디피를 다 끝냈다. 얼마 전 추석 때에도 남들은 고향 간다, 산소에 간다고 하는데 자기는 갈 데가 없었다. 보육원 원장님도 돌아가셔서 안계시고 정말 갈 곳이 없었다. 명절도 그렇고 휴일도 그렇고 따로 할 일이 없는 은혜는 그냥 숍에 나와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오늘은 허망하고 외로운 생각이 나서 그냥 어린이대공원에 갔다. 공원에 가면 엄마의 향기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자기가 살았던 상계동은 88올림픽을 준비하는 정부의 시책으로 모두 재개발하여 살던 곳이라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나마 어린이대공원은 변함없이 은혜의 기억을 간직할 수 있게 그 자리를 지켜주고 있어서 은혜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어린이대공원을 걷다 보니 코스모스가 여기저기 피어있었다. 가녀린 꽃대위에 한 송이 피어나는 코스모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이는 코스모스를 보며 은혜는 자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이 높아지고 맑은 푸른하늘이 참 예뻤다. 하늘을 바라보는데 왠지 모르게 가슴이 시려오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눈물이 고인 눈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보니 그들의 얼굴이 이글어져 보였다. 문득 며칠 전 자기를 구해준 구급대원이 생각났다. 자기를 구해주었는데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그를 당황하게 한 것이 못내 미안했다. 은혜는 어린이대공원 옆에는 엄청나게 큰 소방서가 있다는 생각이 났고 거기에서 근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은혜는 발걸음을 옮기며 어차피 군자역으로 가려면 그쪽으로 가야하니 가는 길에 들려 저번에 자기를 구해줘서 정말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은혜는 어린이대공원 바로 옆에 소방차가 아주 많은 광나루안전체험관으로 갔다. 안전체험관에서 남자의 인상착의를 얘기하니 여기가 아니라 바로 옆의 능동119안전센터로 가보라고 했다. 능동119안전센터에 들어가 그를 찾았다. 그는 출동 나가고 없었다. 함께 자기를 구해줬던 여자 대원만 있었다. “안녕하세요. ... 얼마 전에 대공원 정문에서 기절했었던 사람인데요...” 은혜의 어색한 인사에 여자대원은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머, 그때 그분이시군요. 건강해진 얼굴을 뵈니 참 좋네요. 이리 앉으세요.” 서로 인사하고 자기가 그날 경황이 없어서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못함에 대한 미안함이 있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사실 은혜는 남자대원의 얼굴에 놀라서 말을 못했던 것이다. 여자대원은 그럴 수 있다고 말하며 이렇게 미인이 오셔서 고마움을 전하는데 우리 영웅은 또 누구를 구하러 가셔서...미녀 얼굴도 못보네. 호호호은혜는 생각지도 않은 미인이라는 말에 쑥스러워 다른 말로 얼른 돌리려고 했다. “미녀라뇨... 호호호. 그런데 영웅은 그때 그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은혜의 질문에 여자대원은 용식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아주 따뜻하고 용감한 사람이며 사람, 동물 가리지 않고 구해내는데 이 지역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며 용식을 설명해 주었다. 은혜도 그런 것 같다고 응수해주자 여자 대원은 묻지도 않았는데 용수가 왜 그렇게 화상을 당하게 되었는지도 얘기해 주었다. 은혜는 용식을 보았을 때 외모에서 느껴지는 이질감과 무서움의 생각이 변하고 있었다.

 

은혜는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여자대원이 정말 고마웠다.

자신은 전농동에서 패션숍을 하고 있으니 시간 날 때 들리면 가을 스카프를 선물하겠다고 말하고 일어섰다. 여자대원도 그리 멀지 않으니 한번 들리겠다고 답하였다. 은혜는 마음이 많이 가벼워졌다.

 

문을 열고 나가는데 문 앞에서 제복에 묻은 먼지를 털고 있는 용식과 마주쳤다. 또 몸을 아끼지 않고 어떤 일을 처리하고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은혜가 인사를 하려고하자 여자 대원이 먼저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용식씨 이 여자분 기억나지? 며칠 전 공원 정문 앞에 기절해 있어서 ...” 여자대원은 용식에게 장황하게 설명해 주었다.

용식은 얼굴에 화상이 있어 표정 변화가 잘 나타나지 않지만 은혜는 분명 웃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은혜는 정말 고마웠어요. 그때 제가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지 못해서...” 용식은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찾아와 주신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데 건강한 모습으로 이렇게 뵈니 보람되네요. 감사합니다!” 은혜는 되려 자기가 더 고맙다고 표현하는 용식에게 묘한 감정이 생기며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저 혹시 시간되시면 두분 식사라도 하면 어떨까요? 제가 뭐라도 보답하고 싶은데 오늘 무작정 오다보니...” 은혜는 길 건너에 보이는 패밀리레스토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자대원은 왠지 기분이 들떴다. 여자 친구 없이 늘 혼자 보내는 용식을 찾아온 예쁜 여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좋았다. “그래, 용식씨 이제 교대 시간이니 같이 가서 식사해. 그래야 이 여자 분도 빚진 마음을 없애고. ~여자대원이 부추겼다. 용식은 어색한 듯 가만히 있었고 여자대원은 적극적으로 용식의 팔을 끌었다.

아니... 이래도 되나 모르겠네요. 하여간 감사합니다. 그럼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용식은 멋쩍어 하면서도 싱글벙글하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용식은 안으로 들어갔고 여자대원은 얼마전 추석에도 용식씨는 일만 했어요. 우리들은 직업상 어디를 가기도 어렵고 시간을 정해서 약속잡기도 어려운데 잘 되었어요. 정말 고마워요.”라며 용식과 맛있는 식사하라고 말해주었다. 은혜는 같이 가는 것이 아니냐고 물으니 여자 대원은 저는 아직 근무시간이 남아서 곤란하고요. 용식씨와 함께 하세요. 참 좋은 남자예요.” 라고 하였다.

은혜는 남자와 단둘이 식사한지가 너무 오래되어 어색하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자기가 한 말이니 이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그냥 처음 맘먹은 데로 저 남자에게 고마움의 마음을 식사하며 잘 전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용식은 말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둘은 길을 건너 패밀리레스토랑으로 들어갔고 식사를 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용식은 밝고 맑고 순수한 사람이었다. 은혜는 이렇게 맑은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사람들을 구해주며 얻는 보람에 대한 얘기를 할 때 그의 눈이 천사처럼 맑고 순수하게 빛나는 것을 느꼈다. 용식의 얘기를 듣다보니 그의 얼굴이 어색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하게 자기의 닫힌 마음이 열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믿을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은혜는 이 남자가 궁금해졌다. “용식씨는 쉬는 날에는 무엇을 하세요?” 딱히 물어볼 말도 없었고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몰라서 그냥 나온 말이었다. 아마 무의식중에 이 남자도 자기처럼 휴일날에도 특별히 할 일이 없지 않을까하는 동질감을 느껴서인 것 같았다. “저는 서울에 혼자 살아요. 그리고 제 외모가 이렇다보니 사람들이 잘 다가오지도 않고요. 주로 유기견 보호소에서 자원봉사하며 강아지들과 놀지요.” 은혜는 그러시군요.” 갑자기 이 남자에게 묘한 감정이 생기며 측은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뭔가 길게 얘기를 해주고 싶고 이 남자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자기 외에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본 경험이 부족해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은혜는 용식의 얘기를 듣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자기 마음속에서 하는 어떤 말을 듣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은혜는 저기 코스모스 좋아하세요? 어린이대공원에 코스모스 많이 피어있던데...” 라고 말을 했다. 무언가 남과 공감대를 얻기 위한 이런 말을 하는 스스로가 놀라웠고 할 말이 이것 밖에 없냐는 한심한 자책이 동시에 들었다. 용식은 좋아합니다. 직장 바로 옆이라 자주 가죠. 요즘이 한참입니다.” 용식은 자기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는 이 여자가 참 좋게 느껴졌다. 용식도 물었다. “저 초면에 이런 질문해도 되나 모르겠는데 그날 밤 왜 거기에서 혼자 있다가 기절하신 거예요? 신고 하신분이 얘기했는데 너무 예쁜 분이 혼자 한자리에 꼼짝도 않고 가만히 서있어서 혹시 광고 찍나? 하는 생각으로 쳐다보고 있었답니다. 그렇게 은혜씨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기절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고, 그래서 다가가 흔들어보니 완전히 의식을 잃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은혜는 자기의 아픔을 얘기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 못 했다. 입속에 맴도는 자신의 아픔에 대해 그리고 그 아픔으로 인해 자기가 기절했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낮선 남자에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가만히 용식의 눈만 쳐다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뚝하고 떨어졌다.

 

뭐라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깊은 상처.

눈물이 꽉 찬 눈과 꾹 다물었지만 입안에 가득 고인 말들, 용식은 아무 말도 없는 은혜의 표정에서 수천마디의 이야기를 느꼈다.

용식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고 테이블에 있는 냅킨 한 장을 은혜에게 건네며 자기의 얘기를 했다. “저는 화상으로 인해 사춘기 시절 심각한 우울증이 있었어요. 어디를 가기도 싫었고 사람들을 만나기도 싫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치유에 대한 얘기를 해주셨죠. 아버지 얘기를 들을 때는 그 말뜻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지리산 천왕봉 꼭대기에서 말씀을 해주셨는데 내려오는 내내 생각을 해보니 조금 이해가 가더군요. 상처와 치료에 관한 얘기인데 그 얘기를 들으니 , 내가 그동안 마음의 치료를 전혀 하지 않았구나.’하는 깨우침이 오더군요.” 은혜는 갑자기 자기 얘기를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30여 년 동안 상처를 안고 살았다. 상처가 아물기는 커녕 비슷한 상황을 보거나 느끼기만 해도 아픔으로 잠을 못 이루는 삶을 살고 있다. 은혜는 용식의 눈을 바라보며 뭐라고 하고 싶었는데 조금 전까지 아픔의 기억으로 눈물이 난 상황이라 말을 하면 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은혜의 표정에 용식도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대화는 단절되고 둘은 그냥 식사를 마치고 일어섰다.

용식은 자기가 한 질문으로 어색한 분위기가 만들어 진 것 같아 미안했고 은혜는 용식에게 자기를 구해준 고마움을 표하려 했는데 그렇지 못해 미안했다.

 

은혜가 계산을 마치자 용식은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찾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은혜도 미소로 답했다. 둘은 레스토랑을 나와 헤어지기 전 인사를 다시 하는데 가을바람에 가로수로 있는 벚꽃 나무 이파리 몇 개가 후드득 떨어졌다. 아직 낙엽이 떨어지기에는 이른 시기인데 은혜 앞으로 떨어지는 낙엽은 둘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사인으로 은혜는 느껴졌다. 낙엽을 잠시 보던 은혜는 저기 괜찮으시다면... 가을이 가기 전에 공원에 코스모스 함께 보러 가 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아까 치료에 대한 얘기도 마저 듣고 싶고요.” 은혜는 용기를 내어 말을 했고 용식도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둘은 휴무시간을 맞춰 약속을 잡고 헤어졌다.

 

며칠이 지나고 둘은 어린이대공원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핀 들판을 걷고 있다.

은혜씨는 가을과 코스모스를 좋아하시나보네요? 코스모스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은혜는 모처럼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사람들은 가냘 퍼 보이는 코스모스가 저를 닮았다고 하는데 저는 파란하늘을 향해 무리지어 있는 모습이 좋아요. 코스모스는 항상 무리지어 피더군요. 파란하늘은 부모 같아 보이고 무리지어 있는 모습은 오순도순 살아가는 가족 같고요.” 은혜의 말에 용식은 그렇게 보일수도 있구나 하는 새로운 느낌을 받았다. 미소로 시작된 은혜의 표정이 말을 이을수록 우수에 차 보인다는 생각이 들은 용식은 저 사람이 말하지 않는 어떤 아픔이 삶에 모두 연관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용식은 저토록 예쁜 은혜가 가진 아픔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고 연민의 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저기... 은혜씨가 저번에 치료에 대한 얘기를 해달라고 했었는데 어떤 아픔이 있으신가요? 제가 도움이 되고 싶어서요.” 용식은 조심스럽게 은혜에게 말했다. 은혜도 이번에는 자기 얘기를 해볼 심산으로 나왔기에 대답을 했다. 은혜는 자기가 가진 아픔을 모두 얘기했다. ? 어린이대공원을 가슴속에 담고 있었는지 버려진 아이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말했다. 그리고 그 고통에서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신을 설명했다.

 

입을 여니 이상하게 잘못 먹은 것을 토해서 쓴물이 나올 때까지 토하는 것처럼 어린시절의 아픔을 모두 얘기하게 되었다. 얘기하는 동안 왠지 모르게 이 남자에게는 얘기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남자는 자신이 하지 않아도 될 일 때문에 생긴 평생의 상처를 이렇게 가볍게 털고 있는 것이 부러웠다. 은혜는 자기의 인생을 얘기하면 할수록 닫힌 마음이 열리고 사람을 믿을 수 있는 힘을 얻고 있었다. 말없이 진지하게 들어주던 용식이 이렇게 말했다. “정말 큰 아픔이 있으셨군요. 그래서 그날 그런 일도 있었군요. 은혜씨 아픔이 얼마나 큰 크기인지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요. 아픔은 치료하기 나름입니다. 방치하면 오래 아프거나 더 아플 수도 있고 적극적으로 치료하면 빨리 통증이 사라지게 되죠. 상처의 크기만큼 흉터는 생기겠지만 아프지 않으니 움직일 수 있고 생활할 수 있죠. 산행하다 보면 발바닥에 큰 물집이 잡힐 때가 있죠. 아파서 움직이기 정말 힘듭니다. 그런데 치료돼서 통증이 사라지면 언제 아팠냐는 듯이 또 산에 올라가죠.”

그의 말이 맞았다. 은혜는 어린시절의 아픔을 치료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엄마가 원망스러웠고 세상이 미웠다. 만약 올림픽이 열리지 않았다면, 재개발이 되지 않았다면, 엄마와 내가 다른 동네에 살았다면, 아니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라는 별별 가정을 하며 세상을 원망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을 닫으면 닫았지 치료를 할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은혜는 이 남자가 말하는 아픔의 치료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치료가 되는지 그리고 그게 진짜 가능한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용식은 미소 띤 얼굴로 은혜를 쳐다보다가 은혜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제가 처음 치료를 생각했을 때 무엇을 먼저 생각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불속으로 뛰어든 저의 용기가 잘못되었는지 아니면 불을 낸 영희가 잘못을 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이런 몰골로 계속 사는 것이 잘못 된 것이지, 그 어떤 것도 잘 잘못을 구분할 수가 없더군요

그러다가 제 자신부터 하나하나씩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것이 출발선이더군요. 나는 어떤 사람이고 그것이 이 사회에 쓰임새가 있는 것인가? 그러면 그 쓰임새로 내가 행복할 수 있는가? 라는 식으로 제가 살아야 할 이유를 먼저 찾았어요. 그렇게 판단을 해보니 제가 괜찮은 사람으로 느껴지더군요. 저는 용기 있고 남을 아끼는 마음이 있다는 아버지의 평소 칭찬이 기준이 되었습니다.

 

제가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기고 나니 그 환경에서 행복 할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이 생기더군요. 그러고 나서 제가 아픔으로 가졌던 마음을 하나씩 처리했어요. 남의 시선이 따가웠던 것을 생각해봤어요. 그 시선을 더 이상 아픔으로 느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저를 경계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도 했고요. 그런 과정이 더 이상 아픔으로 다가 오지 않게 하는 치유더군요. 아버지가 치료를 하라고 말씀해주신 덕분에 저는 살면서 겪어야하는 아픔의 상황들을 미리 판단해봤고 그런 상황이 되어도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 봐요.” 

 

은혜는 용식의 말을 듣고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갈피를 잡기는 어려웠다. 그저 저런 생각과 실천을 하는 용식이 부러웠다. “저는 상황이 다르고 어떻게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 모르겠어요. 엄마 생각만 해도 복잡한 감정이 생기고 가슴이 답답하며 눈물이 나와 미칠 지경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용식은 잠시 가만히 은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은혜씨는 아픔으로 인해 자기를 돌아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은혜씨를 잘 모르지만 예의바르고 외모도 너무 예쁘고 또한 패션 감각도 상당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미 이정도만으로도 자신을 사랑 할 수 있는 이유는 너무 많다고 생각돼요. 또한 그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이고요

물론 어린시절 아픔이 큰 것은 당연하지만 지금 나이라면 부모님이 있건 없건 간에 독립할 시간은 지났죠. 이미 은혜씨는 보호받아야 할 시간이 지났다고 봐요. 그러니까 과거의 아픔을 지금까지 가지고 계실 이유 자체가 없다는 것이죠.” 

 

용식은 잠시 말을 멈추어 은혜의 표정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은혜씨가 함께 어린이대공원에 가자는 말을 꺼냈을 때 얼마나 가슴이 뛰고 좋았는지 몰라요. 은혜씨는 그렇게 다른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다시 말하면 은혜씨가 자신을 좀 더 진실하게 바라본다면 모든 것이 정리 될 것 같아요. 은혜씨는 이제 온전한 어른이 되었으니 어린이의 아픈 마음을 버려야 해요. 어른이 된 은혜씨를 스스로 느껴 보세요

그리고 만약 엄마를 찾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할지를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순간에 엄마를 만난다면 엄마를 원망하고 미워 할 건지 아니면 엄마를 용서할 건지. 아마 용서 하게 될 거예요. 그렇다면 엄마를 만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 있는 엄마를 용서하세요.” 용식은 은혜를 위하여 진심을 담아 얘기했다

 

은혜는 살면서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마음이 있다는 생각을 용식의 말 속에서 알게 되었다. 은혜는 용식에게 대꾸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엄마를 만난다면, 지금 엄마를 만난다면...’이라는 가정을 하면서 엄마를 만났을 때 원망하고 자기를 왜 버렸는지를 따지겠다는 생각 외에 더 이상의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느꼈다.

은혜는 자신이 느끼는 아픔은 30여 년간 가시덤불 속에 갇힌 새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엄마가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었다는 것도 생각하게 되었다. 엄마도 오죽하면 그랬겠냐는 생각이 들며 엄마를 이해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엄마를 원망하기 이전에 아빠가 문제의 시작이었음에도 한번 보지 못한 아빠는 원망하지 않았었다. 아니 그런 대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에 대한 트라우마가 없는 것처럼 엄마에 대한 생각도 바꾸기만 한다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때 멀리서 한 가족이 웃으면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평소 이런 상황을 바라볼 때 은혜는 고통스러웠다. 시기심이 생기고 서럽고, 쓸쓸하며, 우울하고, 참담한 생각이 들어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마음의 변화가 생겼다. 바라보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엄마와 아이가 깔깔거리며 장난치는 모습이 평범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심정의 변화를 느끼며 순간 은혜는 소름이 돋았다. 내가 변하고 있구나. “... 용식씨 엄마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고마워요.” 용식은 은혜가 뭔가 변화를 시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좋았다.

어머니를 용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셨으니 이제 은혜씨가 살아야 할 이유와 행복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시면 좋겠어요. 더 이상 우울하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말고 행복한 인생으로 설계하셔야죠. 정말 다행입니다. 아픔의 요인을 버렸으니 치료는 된 거나 마찬가지예요.” 용식은 활짝 웃으며 은혜를 바라보았다.

 

은혜는 동토에 묻혀있는 미이라처럼 자신의 아픈 기억이 32년간 얼어붙어 있었다는 깨달음이 왔다.

얼어붙은 아픈 기억단단하게 만들어진 기억을 이제 이 남자를 통해 녹여 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미소가 따스한 햇살 같고 그의 말이 얼어붙은 개울물을 다시 흐르게 하는 봄비 같았다.

은혜는 멈추었던 정서적 성장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가슴이 떨렸다.

 

그렇게 조금씩 은혜의 방치되었던 상처는 아물어 가고 있었다. 조금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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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저는 소방대원과 구급대원이 펼치는 아름다운 선행이 수없이 많지만 잘 알려지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소방서 소속 구급대원이 사람도 구하고 그 사람의 아픈 마음도 달래주는 이야기를 완성하여 연재하였습니다. 영웅적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을 존경하며 우리나라 소방대원과 구급대원의 희생과 봉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상과 외상 – 은혜

내상과 외상 – 용식

내상과 외상 – 은혜와 용식

 

 

Kai Jun(전완식)

30여 년간 인물화를 중심으로 회화 작업에 열중하였다. 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둔 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또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의 정신세계를 그림 안에 투영하려 노력하였다. 인물화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다룬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주요 미술경력은 국내외 개인전 27회 단체전 80여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형상 변화 신비510년 만에 재현 -대한민국 7번째 대통령 인물화 작가(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소장 / 문재인, 트럼프 대통령 청와대 소장) -Redwood Media Group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 선정 -미국 행정/정책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 강의 자료로 작품 선정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기획위원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광복70주년 국가 행사 대표작가(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및 서울도서관 전시)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전시행사 대표작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산업대학원 졸업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ICT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 설치미디어아트분과 부위원장, 국가미래연구원 문화예술체육 연구위원이다.

 

칼럼리스트 Kai Jun(전완식) 소개

30여 년간 인물화를 중심으로 회화 작업에 열중하였다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둔 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또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의 정신세계를 그림 안에 투영하려 노력하였다인물화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다룬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주요 미술경력은 국내외 개인전 27회 단체전 80여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형상 변화 신비를 510년 만에 재현 -대한민국 7번째 대통령 인물화 작가(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소장 문재인트럼프 대통령 청와대 소장) -Redwood Media Group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 선정 -미국 행정/정책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 강의 자료로 작품 선정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운영위원기획위원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광복70주년 국가 행사 대표작가(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및 서울도서관 전시)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전시행사 대표작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산업대학원 졸업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ICT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설치미디어아트분과 부위원장국가미래연구원 문화예술체육 연구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