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을 통한 휴식과 힐링의 시간

Kai Jun의 그림이 있는 단편소설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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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 Jun, 희망의 창NO.1​​, Oil on Canvas, 116.7cm X 72.7cm, 2011년 작

 

 

정진은 진진한 태도로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우리나라가 포지티브 법체계로 발전한 것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나라는 광복이후에 할 일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세계에서 3번째의 극빈국이 경제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죠. 자원도 없고 힘도 없는 나라는 선택지가 별로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정치, 행정에 있어 자율성보다는 국가의 발전방향성에 국민이 맞추는 형국이었습니다. 국가는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철저하게 규정 지었으며 그 방법 안에서 국민들은 성실히 자기 업무에 최선을 다하여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변하여 지금은 이 방법이 적합도가 떨어진 것이 문제입니다.”

정진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시민운동가들이 국회의원의 활동을 통제하면서 규제문제는 더 확대 되었습니다. 저도 규제문제를 확대한 사람으로서 가슴이 아픕니다. 규제국가, 규제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 이유 중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국회의원의 활동이 너무 적극적이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정진의 말에 대부분의 참석자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국회의원이 일을 적극적으로 해서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 도대체 이해가 안 갔다. 숱한 날들을 국회에서 싸움만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언제 무슨 일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했다는 말인지 말이다.

미영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정진에게 질문을 했다.

좀 더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 부탁드립니다. 국회의원이 적극적으로 일을 해서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 뭔가요?”

 

그때 전 국회의원을 지낸 도호진씨가 일어섰다.

저는 국회의원을 한번 한 사람으로서 지금은 국회를 떠났지만 애국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청년들이 모였다는 말을 듣고 작년부터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저의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장내는 다시 진지한 분위기가 흘렀다.

 

도호진 전 국회의원은 용어부터 정리해주었다. 포지티브 제도(Positive System)이것만 해라식의 규제우선 제도이며 네거티브 제도(Negative System)이것만 하지 마라식의 자유우선제도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이것만 해라의 제도이므로 자율성이 떨어지는데 이것만 해라제도가 문제가 된 이유는 규제가 너무 많아서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규제가 현재 13천개를 넘어섰다.

 

규제가 많아진 이유는 크게 3가지이며 첫째는 획일화된 국회의원 평가방법이라고 한다. 국회의원이 재선을 위해 선거에 다시 출마하려면 공천을 받아야하는데 일반적인 평가방법이 계속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국회의원의 업무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본회의 출석률, 상임위 출석률, 대표 발의건수, 가결건수 등등이 적용된다. 이 정량적 평가의 허점이 문제를 키웠다는 것이다. 국민에게 얼마나 필요한 법안이냐를 신중하게 따지는 정성적 평가가 아닌 수치상으로 얼마나 일을 했냐를 따진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임기 중 마지막 해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법안이 발의된다. 그중에서 가결이 쉬운 것이 공업·규격·계량 분야가 대안반영 포함 80%되는데 이런 산업에 관련된 세부 규정들이 많아지면서 현재 산업의 융복합 자율성과 어긋난다는 문제다.

 

두 번째로는 산업이 융복합적으로 이루어지다보니 정부의 주무부서 모호성으로 이중적 기준이나 규제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현재는 각 산업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가 나눠져 있지만 앞으로는 모든 산업에 5G 이동통신,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등등이 결합되어야하는데 자율주행차, 무인점포, 인공지능 의료, 증강현실 패션 등등 현재 산업이 4차산업혁명의 기술과 결합하여 진화된 산업에서는 주무 부서를 구분할 수 없다는 문제이다. 즉 과도기인 현재는 4차산업혁명에 관련된 산업 대부분은 위법한 상태로 노출된다는 것이다. 아니라면 우리나라의 모든 산업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관리해야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국민의 관심분야라고 지적한다. 입법부의 담당자가 국회의원이므로 국회의원을 뽑을 때 진정으로 국민을 위해 일을 할 사람을 뽑아야하는데 국민의 관심이 이념이나 사상이 자신의 관심사와 같은 사람을 뽑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회의원이 하는 일중에서 언론에 주로 비춰지는 내용은 이념이나 사상적 바탕을 둔 사건들이 주로 방송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민의 삶을 좌우하는 것은 경제적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산업을 일으킨 국회의원은 방송에 조명되지 못하고 이념적으로 잘 싸운 국회의원이 부각된다는 것이다. 국회의원이 산업을 일으킬 법안을 잘 만들어야 국민의 삶이 좋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을 평가하고 심판하는 국민이 국회의원의 평가를 잘못한다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도호진 전 국회의원의 발언이 끝나자 장내는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국회의원의 잘잘못을 성토하는 사람, 정부의 무능을 성토하는 사람,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 등 여러 가지의 이야기가 장내를 웅웅거리게 만들었다.

 

장내가 소란스러워지자 의장인 태성이 발언자를 다시 지목했다. 사업가인 최영석 대표가 발언을 했다.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저도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IMF사태 이후에 벤처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사업을 하고 있는데 빚만 엄청나게 많습니다.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강남의 건물을 팔아 10억 정도 마련하여 사업자금으로 활용했습니다. 만약 그 건물을 팔지 않았다면 지금 몇 백억 원은 되었을 겁니다. 사업을 하면 할수록 빚이 많아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사업의 환경이 참 안 좋습니다. 2000년대 이후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규제개혁을 외쳤지만 한 번도 해결된 적은 없습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기대감이 있었고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일을 하면서도 정부에 기대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오늘 알게 되었습니다. 정부에게 바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태 정부 탓만 했습니다. 정부도 중요하지만 우리나라가 바로 서려면 국회의원을 잘 뽑아야하는군요. 저는 기업을 다시 반석위로 올려야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회사의 직원들과 관련 기업들의 직원들에게 오늘 들은 내용을 알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선거에서는 기업과 경제를 살리는 후보를 지지하겠습니다. 그동안 뽑은 국회의원들 생각하니 후회가 많이 됩니다.”

 

최대표의 발언이 끝나자 도호진 전 국회의원이 다시 발언하였다.

최대표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런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비관만 할 것은 아닙니다. 최근 우리 단체 외에도 국회의원의 의정활동 평가를 혁신적으로 만들어 진행하는 청년단체가 있습니다. 그들이 만든 의정혁신 평가 방식은 4차산업혁명시대 경쟁력 강화 등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한 혁신 법안, 국회의원의 대국민 성실도, 국민의 질적인 삶과 밀접한 민생 혁신 법안, 각 분야의 혁신 관련 법안 발의 현황, 국민과 국가를 위해 매우 필요한 법안임에도 제반 여건 미비로 통과되지 못한 폐기 법안, 기타 정량평가, 기타 정성평가 등 7대 부문과 하위 10개 항목, 80개 세부지표를 평가해, 최고평점 국회의원, 창의력우수평점 국회의원, 최우수평점 국회의원 등 국회의원의 의정활동에 대한 평가 순위를 매긴다고 하는데 과거의 의정평가보다 정성적 평가를 하므로 많이 개선되었다고 봅니다. 이런 청년 단체의 움직임은 더욱 활성화 되어야 하며 구체적으로 경제를 혁신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인허가 요건의 구체화 및 명확화, 중복규제의 금지, 국민불편해소적 규제로의 전환, 협력적·자율적 규제방식의 적극 활용, 규제비용의 명확한 반영, 현실적 규제로의 전환, 의원입법의 사전규제영향분석 및 규제일몰제 도입, 규제총량제를 넘어 규제감량제 도입, 청부입법의 원칙적 금지 등을 제안 해야합니다.”

 

도호진 전 국회의원의 발언 이후로 국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국민들이 어떻게 노력해야하는지 국민의 실천사항은 무엇인지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4부 끝-

그들이 만들어 갈 희망의 나라. 다음편도 기대해 주세요.

 

 

Kai Jun(전완식)

30여 년간 인물화를 중심으로 회화 작업에 열중하였다. 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둔 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또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의 정신세계를 그림 안에 투영하려 노력하였다. 인물화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다룬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주요 미술경력은 국내외 개인전 27회 단체전 80여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형상 변화 신비510년 만에 재현 -대한민국 7번째 대통령 인물화 작가(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소장 / 문재인, 트럼프 대통령 청와대 소장) -Redwood Media Group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 선정 -미국 행정/정책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 강의 자료로 작품 선정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기획위원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광복70주년 국가 행사 대표작가(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및 서울도서관 전시)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전시행사 대표작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산업대학원 졸업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ICT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 설치미디어아트분과 부위원장, 국가미래연구원 문화예술체육 연구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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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 Jun, 희망의 창NO.3​​, Oil on Canvas, 116.7cm X 72.7cm, 2011년 작

창수가 네거티브 법체계 전환의 의견을 내었고 참석자들은 대체적으로 동의를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나라의 법체계는 포지티브 법체계로 되어있다. 법으로 허락된 것만 할 수 있는 방식이어서 법 환경이 산업보다 선제적인 구성이 되어야하는데 산업의 발달 속도가 더뎠던 과거에는 이 방식이 효과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뤄지고 있는 융복합적인 산업과 4차산업 혁명에 포함되는 산업들은 법이 선제적 환경을 만든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입법에 관련된 사람들은 국가적 대 혼란을 운운하며 반대를 한다.

 

행정학을 전공한 제훈이 반대 의견을 내었다.

대한민국은 이미 70여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이며 기존 법체계로 모든 국민이 익숙해져 있는데 갑자기 법의 기본 개념까지 바뀌는 변화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심각한 경제위기 상황인데 이런 큰 변화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또한 우리가 논의하고 결정한다고 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제훈의 말에 회의장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네거티브 법체계 전환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동의하던 분위기에서 회의장은 순간적으로 무기력해졌다.

이유는 이미 수년 전부터 많은 경제인들이 네거티브 법체계 전환에 대한 의견 개진이 있었고 이에 대하여 규제 샌드박스 등의 개선안을 냈지만 결과적으로 일부의 변화만 있었지 큰 틀은 변함이 없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전반적으로 팽배되어있는 의욕상실의 국가적 분위기였다. 회의장에 나온 사람들조차 의욕이 많이 상실 된 상태였다.

 

술렁이는 회의장 분위기를 의장인 태성이 다시 잡으려 애썼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방금 말씀 주신 내용은 많은 분들이 우려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개선을 위한 깊은 고민이 이 자리에서 일어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해야 합니다.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직 힘은 없지만 지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를 통해 힘을 만들면 됩니다. 지혜를 모아 주십시요!”

태성의 말에 이번에는 미영이 발언을 했다.

 

어려움은 있겠지만 이미 4차산업혁명에서 상당히 밀려있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합시다. 유전공학이나 크리스퍼 기술에서 세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데 생명윤리법으로 사업화 하지 못하는 회사가 한둘이 아니며, 선점한 드론 기술이 각종 규제로 사그라든지 오래되었으며 공유경제는 발도 못 붙이는 상태입니다. 청년실업의 문제도 이와 연관이 있습니다. 대학에서 최첨단의 학문을 연구한 학생들이 취업할 기업이 없습니다. 모두 규제로 인해 연구소의 범위를 넘어가지 못하니 어떻게 취업을 하겠습니까? 중소기업들은 기술을 사업화하지 못하여 결국 해외로 나가고 있습니다. 말기 암 환자와 같은 우리 경제 상황 속에서 못할게 뭐가 있나 싶습니다.”

미영은 강하게 발언을 했다. 미영은 어려서부터 사회 시스템이 국민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강했던 사람이다. 그녀는 로펌에 근무하며 접했던 문제들을 더 열거하였다.

산업의 지형이 변하였습니다. 한 가지만 잘해서 되는 시절은 지나 간지 오래되었으며 융복합이 기본입니다. 또한 누구를 막론하고 사회적 이익을 발생시킬 수 있는 것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플랫폼 시스템으로 변한지 오래되었습니다. 이런 변화가 자연스럽고 편안한 환경인 해외 선진국에 비하여 우리나라는 일일이 허가를 받아야 사업화 할 수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기업지형도에서 허가를 받기위해 몇 개월에서 몇 년을 기다려야하는 우리나라는 뒤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미영은 작심한 듯 성토를 하였다.

 

창수도 다시 발언하기 시작했다.

제가 몇 년간 국회의 입법 현황을 분석해보니 접수된 것이 15대국회 1951, 162507, 175024, 18대 국회 13,913, 19대 국회 17,822, 20대국회 23,048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많은 입법 내용 중에서 공업·규격·계량 분야가 대안반영 포함 80%의 가결률을 보였습니다. 그중에서 20대 국회의 경우 규제 법안 발의 건수는 3773건으로 하루에 3개꼴로 규제 법안이 발의됐고, 이 가운데 1개는 통과되었습니다. 모든 법이 규제를 위한 것은 아니겠지만 규제안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산업은 발목을 잡히는 꼴이 되겠지요. 어찌 15대 국회의 총 입법 발의 건수보다 20대 국회의 규제법안 발의가 2배로 많은지 이해가 안 됩니다.”

 

창수의 발언에 미국에서 기업을 하는 종석이 거들었다.

저도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기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유학을 어려서 갔기에 미국식으로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미국에서 배우고 느낀 것들을 한국에서 펼쳐보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특히 제가 가진 신기술을 한국에서 실현시키기 위해 귀국하여 조그만 기업을 일으켰는데 앞서 말씀하신 분들의 얘기처럼 규제 장벽에 막혀서 3년간 고전하다가 결국 실리콘밸리로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이라도 부모님이 계시는 한국에서 기업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면 돌아오고 싶은 마음입니다.”

 

종석의 말은 현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종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재희도 일어나 얘기하기 시작했다.

저는 어려서 생명공학자로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 수십대일의 경쟁률을 뚫고 대학을 입학하여 성실히 공부했으나 지금은 학원에서 생물과 수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속으로는 대학가면 뭐하나 취직할 곳도 없는데...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한 마음이 강하게 듭니다. 어서 현실적인 국가 운영의 방안이 나오지 않으면 더 심각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회의장 열기는 다시 뜨거워졌다. 다소 흥분한 사람들도 보였고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나이가 조금 많아 보이는 중년의 사나이가 일어나더니 발언하기 시작했다.

저는 상당기간 국회에서 보좌관 일을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법안 발의 건수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와 관련 있는 주요국 중에서 법안 발의 건수는 한국이 23048건으로 가장 많고, 미국 115대 의회는 13556, 영국은 2010~2015년까지 890, 일본 3차 아베내각은 626건입니다. 가결 건수 역시 우리나라가 6527건으로 가장 많고, 미국 443, 일본 250, 영국 182건 순입니다. 이 많은 법은 생활환경에 큰 지장을 줍니다. 법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개인이나 기업가들은 환경이 바뀌는 것과 같습니다. 변경되는 대학 입시법으로 학생들이 혼란을 겪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계시는 모든 분들이 이미 경험을 해보셨을 겁니다. 그런 환경 변화가 기업에게 주어지면 기업은 새로 기업환경을 조성해야하니 어려움이 있겠죠. 선진국일수록 법을 바꿈에 있어 신중하게 법을 다룹니다. 그 신중해야 할 법에 규제까지 더해지니 어려움은 심각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지금까지 발언하신 분들의 얘기 모두 공감하고 있습니다.”

보좌관 출신의 정진이 말을 끝내자 태성이 정진에게 질문을 했다.

정진님께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태성의 질문에 정진은 숨을 고르며 발언하기 시작했다.

 

-3부 끝-

그들이 만들어 갈 희망의 나라. 다음편도 기대해 주세요.

 

 

Kai Jun(전완식)

30여 년간 인물화를 중심으로 회화 작업에 열중하였다. 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둔 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또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의 정신세계를 그림 안에 투영하려 노력하였다. 인물화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다룬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주요 미술경력은 국내외 개인전 27회 단체전 80여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형상 변화 신비510년 만에 재현 -대한민국 7번째 대통령 인물화 작가(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소장 / 문재인, 트럼프 대통령 청와대 소장) -Redwood Media Group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 선정 -미국 행정/정책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 강의 자료로 작품 선정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기획위원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광복70주년 국가 행사 대표작가(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및 서울도서관 전시)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전시행사 대표작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산업대학원 졸업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ICT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 설치미디어아트분과 부위원장, 국가미래연구원 문화예술체육 연구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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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소개

 의로운 한국여성을 생각했다. 여러 여성인물 중 과거 진주성 방문에서 느꼈던 논개가 가장 강열하게 떠올랐다. 논개의 심리를 표현하기 위한 다양한 표현을 하던 중에 우리나라의 역사를 되짚어봤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의병의 활동이 매우 많은 의병의 역사이다. 논개가 의로운 여인의 대표격이라면 그와 함께한 사람의 정신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논개를 그리다말고 논개의 남자를 떠올렸다. ‘최경회대단한 업적과 인품을 가진 사람이다. 작품은 최경회 장군의 의병 시절 무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어내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던 상황을 상상하여 그렸다. 관군이 아니기 때문에 사복으로 만든 군복이었을 것으로 생각했고 그의 나이가 60이었지만 평소 활쏘기에서 능하여 선조 앞에서 활쏘기 시합을 할 때 장원을 한 사례와 진법에도 능했던 것을 보면 신체 단련도 상당히 열심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외모를 강인하고 조금은 젊은 느낌으로 제작하였다.

 

1편에서 이순신 장군을 간단하게 설명했는데 이순신 장군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최경회 장군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 못하여 좀 더 자세히 설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경회와 같은 의로운 사람들이 있어 우리가 있다는 고마움을 느낀다. 

 


화가: Kai Jun/ 제목 : 한국인 시리즈 NO.4- 논개의 남자. 최경회/ 유화/ 72.7cm X 60.6cm/ 2017

 

최경회 소개

최경회에 관한 기록은 많이 있으나 논개에 대한 문헌적 기록은 매우 미흡하다. 그 부족한 부분을 해주 최씨 승지공파의 17세손 최경회의 부실(副室)로 기록 된 족보와 최경회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논개의 구전 내용을 결합하여 구성하였다.(논개의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 편에)

 

최경회(崔慶會) : 선우, : 삼계, 별호: 일휴당

1532년 화순 삼천리 태생/1561년 신유 식년시 생원 급제/1561년 신유 식년시 진사 급제/1567년 정묘 식년문과 을과 급제/1574년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 옥구현감(송덕비 건립)/1577년 장수현감(선정비 건립)/1579년 무장현감(송덕비 건립)/1582년영암군수(송덕비 건립)/1584년 호조정랑, 형조정랑, 영해부사(영해고을민이 생사당을 세움)/1587년 사도시정, 담양부사(선정비 건립)/1590년 모친상으로 관직 사직/1592년 임진왜란 전라우의병장/1593년 경상우도병사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

최경회는 문신이며 의병장이다. 그의 생은 백성을 위한 삶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옥구현감 시절부터 고을민들이 자진하여 송덕비와 생사당을 지을 만큼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국난이 나자 나라를 구하기 위한 사명감으로 목숨을 바쳐 싸웠으며 혁혁한 전과를 이룬 대장군이다. 그의 충의에 대한 신념과 실천은 주변인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함께 동참 할 수 있는 큰 믿음을 주었던 훌륭한 리더임이 분명하다.

 

그의 업적과 관련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590년 모친의 상으로 낙향하여 지내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그는 이제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으니 내 몸을 나라에 바쳐도 된다. 부모에게 하던 효도를 나라에 충성으로 바치리라.“하며 형 최경운, 최경장, 아들 최홍기, 조카 최홍재, 최홍우 6명이 힘을 합쳐 화순 삼천리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고 전라우의병이라 칭하였다. 조카 최홍재를 금산의 고경명(高敬命. 문인·의병장) 휘하로 보냈으나 고경명장군이 이미 전사한 후로 그의 휘하였던 남은 병력 800여명을 수습하여 전라우의병에 편입시켰다.

전라우의병은 한양으로 가서 근왕하려하였으나 전라감사 권율으로부터 전라도 방어를 책임져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전라우의병은 장수를 주둔지로 하여 금산, 무주 등지에서 왜군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둔다. 금산전투에서는 짙은 밤안개를 이용하여 볏짚을 병사로 위장하고 적의 화살과 탄환을 소비하게 했다. 어둠이 개이고 날이 밝아올 때 공격하여 크게 승리한다. 그는 탁월한 감각과 현감 시절 고을의 안녕을 위한 노력으로 각 고을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던 경험으로 지리에도 밝았다. 그는 장사진, 어관진, 조운학익진 등의 진법을 지리적인 이점을 활용하여 기습작전 및 매복 작전으로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1592년 왜군이 진주방향으로 진격한다는 첩보를 받고 의병을 매복시켜 공격하며 큰 타격을 입힌다. 이 전투를 무주대첩이라 한다. 이 승리 이후 장수에서 남원으로 주둔지를 옮긴다. 남원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을 때 영남의병장 김면과 경상우도관찰사 김성일이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에 그의 부장들과 고을민들은 적군의 기세가 사방으로 뻗치고 있는데 호남을 버리고 멀리 영남으로 간단 말입니까라는 말을 하였다. 이에 영호남의 마음을 하나로 잇는 위대한 말을 남긴다. “嶺右我國之地 湖南我國之地 영남도 우리 땅이요, 호남도 우리 땅인데 의로써 일어난 사람들이 어찌 영호남을 가리겠는가.' 라며 영남으로 출병하여 159210월 진주성 1차 전투 외곽 지원담당을 맡는다. 왜군 2만 여명을 상대로 진주목사 김시민과 진주성 군사(38백명) 주민(수만명), 정유경(300), 조응도/최강/이달(500), 정기룡(300), 상대승/정언충(200), 최경회/임계영/김준민(2000)의 관군과 주민 의병이 힘을 합쳐 진주성 1차 전투(진주대첩)를 대승리한다.

 

전라우의병은 거창에 주둔하며 영남의병장 김면과 합동 작전으로 개령에서 왜군을 몰아내고 1593115일에 성주성을 탈환한다. 이후 고령의 김면과 김성일이 전염병으로 죽자 조정에서는 421일 조정에서는 최경회를 경상우도병사로 임명한다. 선조실록 371593421일의 기록을 보면 비변사가 말하기를 최경회는 무신이 아니지만 이미 여러 번 전공을 세워 명성이 크게 드러나고 재능도 책임을 감당할 만합니다. 그리고 그가 거느리고 있는 호남의 의병이 이미 그와 친숙해 있으니 사변이 안정될때가지 직을 맡겨도 되겠습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무렵 조선에서는 구원군인 명나라와 1년간 전쟁으로 피폐해진 왜군사이에 화의가 성사된다. 그 결과 왜군은 북부 및 수도권 지역에서 철수, 남해안까지 물러나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과정에서 왜군 전군에 진주성을 공격할 것을 명령한다. 1차 전투에서 참패로 위신이 손상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36월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우키타 히데이에 등에게 복수전을 하도록 특별히 명령을 내렸다. 왜군은 615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18일까지 경상남도 함안, 반성, 의령 일대를 점령하고, 19일에는 37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격한다.

 

거의 모든 왜군 병력이 진주성 한 곳에 집중 공격을 가했기 때문에, 진주 근처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명군은 진주성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왜군 측에서도 고니시 유키나가가 히데요시의 의지가 확고하여 진주성만은 함락시키지 않을 수 없으니 차라리 자신들이 공격하기 전에 민간인들을 모두 내보내라고 권고할 정도였다. 곽재우, 선거이, 홍계남 등 조선군도 진주성 근교까지 갔다가 절대적인 병력차를 확인하고 진주 구원을 포기했다. 그러나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은 진주는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이기에 진주만 공격하고 돌아간다는 왜군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성을 포기하라는 명군과 왜군의 권고를 거부했다.

 

진주성을 향해 총공세를 전개하려는 왜군에 대항하기 위해 관군으로는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김해부사 이종인, 사천현감 장윤 등이 진주성으로 들어 왔고, 고종후, 강희열, 이계련, 변사정, 민여운 등이 의병들을 거느리고 진주성에 들어왔다.

 

불행한 것은 당시 진주목사 서예원은 원병으로 와있던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다가 급히 전투에 참가하느라 진주성을 지휘할 채비를 갖추지 못하였다. 진주성의 대대적인 공격을 막을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관군 22백여 명, 의병 6백여 명 그리고 주민도 6만여 명이 되었지만 모두 의기로 뭉쳤을 뿐 잘 훈련된 왜군에 대항하기는 처음부터 열세적인 입장에 있었다.

 

621일부터 627일까지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621일 왜군 기마병 2백여 기가 출몰하여 진주성을 살피고 돌아갔다.

622일에는 처음 교전이 일어나 왜군 30여 명을 쏘아 죽이니 퇴각을 하였다가, 초저녁과 2, 3경에 다시 공격을 해왔다가 퇴각을 하였다. 조선군은 남쪽에는 남강이 흐르기 때문에, 침입이 예상되는 서북쪽에 해자를 파고, 물을 흘려 호를 만들었으나, 왜군은 해자에 흙을 메워 길을 만들었다.

623일 낮에 3, 밤에 4회를 공격을 하였다.

624일에는 적의 증원군 1천여 명이 동서로 진을 쳐서 포위하였다.

625일 왜군은 동문 밖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들고, 흙으로 만든 대를 세워 성안으로 사격을 퍼부었다. 이에 충청병사 황진도 성안에 다시 높은 언덕을 쌓아 대처를 하였으며, 낮의 세 차례 공격과 밤의 네 차례 공격을 모두 격퇴하였다.

626일 왜군은 방책을 만들어, 탄환과 화살을 막으면서 화전 공격을 하여 성내의 초옥을 불태우면서,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고 다시 전서를 보내 항복을 독촉한다. 이 날도 밤낮으로 일곱 차례를 싸워 적을 격퇴하였다.

627일 왜군은 동문과 서문 밖에 다섯 군데의 언덕을 축조하고 거기에 공성용 대나무 대를 세워 하향 조준으로 사격을 하여 조선군 300여 명을 죽였고, 철갑을 입고 사륜거라는 장갑차를 끌고 와, 철추로 성문을 뚫으려 했다. 장사였던 김해부사 이종인이 연거푸 적을 베어 물리치고, 조선군은 기름과 횃불을 던져 왜군에 대항하여 격퇴시켰다.

628일 야간 경비가 소홀하여 적이 몰래 와서 성을 뚫으려하는 것을 힘들게 방어를 했으며, 1천여 명의 적이 죽었는데 황진도 적이 쏜 탄환을 맞고 전사를 하였다.

629일 전사한 황진을 대신하여 목사 서예원이 경비대장을 맡았으나, 겁을 먹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자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직을 파하고, 장윤에게 그 직을 맡겼으나 장윤도 탄환에 맞아 죽게 된다. 오후에 비가 내려 동문의 성이 무너지자 일본군은 노도와 같이 밀려왔는데, 활과 화살로 대응을 하지 못하므로 창과 칼로 육박전이 일어나게 되고, 이종인도 왜군의 탄환을 맞고 죽게 된다.

 

성이 함락되자 최경회는 조복 한벌과 무주대첩에서 왜장에게서 빼앗았던 보검과 공민왕의 그림을 조카 최홍우에게 맡기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둘째형 최경장에게 전하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둘째 형님이 내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의병을 일으킬 것인데 이것으로 표지를 삼고 이 옷으로 내가 죽은 후 장례를 치러 달라.”고 말한다.

 

이후 끝까지 저항하던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와 함께 촉석루에 오른다. 최경회는 시 한 수를 읊는다.

 

촉석루 위에 올라 있는 세 장사

한 잔 술에 웃으면서 장강 물을 가리키네.

장강 물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가니

저 물이 마르지 않는 한 우리 넋도 죽지 않으리.

 

마지막으로 최경회는 북쪽을 향해 4배하고 외로운 성이 포위당했는데 밖에서 지원군은 오지 않고 형세도 불리하고 힘도 다했으니 한 번 죽음으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뿐이다.”라고 말하고 인장과 병부를 가슴에 안고 남강에 투신을 한다. 이때 함께 있던 여러 장군도 남강에 투신하여 죽게 된다.

 

이후 159377일 일본군 장수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 장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한다. 논개는 깍지를 끼었을 때 빠지지 않게 열손가락 마디마다 가락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유인해 끌어안아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죽게 된다. (논개에 관한 내용은 다음 편에 좀 더 자세히 다룹니다.)

 

진주성 2차 전투는 조선군이 패한 전투이지만 결코 패전이라 할 수 없다. 왜군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주어 진주성 전투이후 왜군은 이렇다 할 전적 없이 부산으로 후퇴하게 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막부 몰락의 시작을 알리는 전투였다.

이 전투는 지방의 성 하나를 놓고 싸운 전투가 아니라 상당히 많은 가치가 남은 전투였다. 진주성 전투는 조선인이 얼마나 강인하고 충, 의가 있는 사람들인지를 보여준 전투였다. 고립된 성 안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맹하게 싸웠다. 최경회와 의병들은 1년간 노숙을 하며 국가를 위해 헌신했으며 과거부터 있었던 호남과 영남의 간극을 없애는 모범을 보였다.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왜군이 호남이나 한양으로 다시 진군하지 않도록 사수하겠다는 생각은 국가와 백성을 사랑하는 깊고 큰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것을 예측하고도 감행했던 그들은 우리역사에서 소중히 생각해야하는 위인이다.

 

 

참고문헌

선조실록 40, 26(1593710)(1593715)(1593716)

선조실록 42, 26(159396)

김세곤 http://blog.daum.net/segon53/15860230

위키백과 제2차 진주성 전투https://ko.wikipedia.org/wiki/%EC%A0%9C2%EC%B0%A8_%EC%A7%84%EC%A3%BC%EC%84%B1_%EC%A0%84%ED%88%AC

최경회 후손 기록 https://blog.naver.com/yschoimd/20137770329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633741&cid=51942&categoryId=54817

세계일보 기사 http://www.segye.com/newsView/20120807022391

 

제작 방식

방식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치하는 테네브리즘적인 표현으로 제작되었다.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유화물감을 두껍게 칠하여 질감 효과를 내는 임파스토 기법을 주된 방식으로 활용하였다. 조선시대의 초상화 표현 특징인 전신사조(傳神寫照)로 표현하였다.

 

미술 용어의 이해

테네브리즘’, ‘키아로스쿠로’ ‘임파스토1편 이순신장군 설명 참고

전신사조(傳神寫照)’2편 별을 바라보는 염근리 설명 참고 



한국인 시리즈 NO.4- 논개의 남자. 최경회작품의 부분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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