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의 경제학 여정(旅程) <22> 정치 민주화, 민간 역할 확대, 그리고 기업윤리​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2년05월28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22년05월27일 10시12분

작성자

  • 김광두
  • 국가미래연구원 원장, 남덕우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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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교수 28명이 “시국 선언문”을 발표했다.

1986년 4월 25일이었다.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한국의 민주화와 대학 자율화를 위한 우리들의 견해”라는 제목이었다.

 

당시 한국 정치는 권위주의 체제였다.

학생들과 진보 진영의 시민들이 꾸준히 정치 민주화 운동을 벌여왔었고 일부 교수들도 동참했다. 이런 흐름 속에 서강대 교수들도 뜻을 모은 것이었다.

 

西江大(서강대)교수 28명 時局(시국)성명서 발표

조선일보 | 1986.04.25 기사(뉴스)


西江大(서강대)교수 28명 時局(시국)성명서 발표

조선일보 | 1986.04.25 기사(뉴스)

서강대학교 교수 28명은 24일 '한국의 민주화와 대학자율화를 위한 우리들의 견해'라는 시국성명서를 발표했다. 교수들은 성명에서 '국민이 국가의 기본법인 헌법을 제정 또는 개정하고 대통령 선출 방법을 논의하는 것은 기본적인 권리'라고 전제하고 '따라서 개헌문제에 대한국민의 자유로운 의사표시를 막아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교수들은 또 대학구내에서의 물리력의 행사와 화학물질의 남용은 대학을 황폐케하고 국력을 낭비한다고 지적하고, '학생들은 어떠한 경우라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민주적 평화적인 방법으로 의견을 제시하라'고 촉구했다.

 서명교수는 다음과 같다. 吉熙星(길희성) 金基鳳(김기봉) 金福雄 金舜基 金勝惠(김복웅 김순기 김승혜) 金榮漢(김영한) 金春鎬(김춘호) 金翰奎 金弘明(김한규 김홍명) 朴廣緖(박광서) 朴文守(박문수) 朴鐘大 吳炳善(박종대 오병선) 李甲允(이갑윤) 李道星(이도성) 李鐘旭 李周棟(이종욱 이주동) 任珍昌(임진창) 張達重(장달중) 趙兢鎬 趙玉羅(조긍호 조옥라) 鄭求珣(정구순) 鄭良謨(정양모) 崔載賢 崔賢茂(최재현 최현무) 洪承基(홍승기) 金廣斗(김광두) 李泰旭(이태욱)

 

이런 뜻에 내가 동참한 것은 권위주의 체제로는 사회적 평화가 이루어지기 어렵고, 경제발전도 지속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권위주의 체제는 기득권을 바탕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국가 구성원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할 수 없다. 기회를 제약 받는 개인들에게 자유와 공정은 뜬구름일 뿐이다.

 

경제의 지속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율과 창의에 바탕을 둔 기업가정신이다. 권위주의 체제는 권력의 자의적(恣意的) 시장 개입을 가능하게 하여 공정한 규칙에 의한 시장경쟁을 훼손한다. 자율과 창의보다는 정경유착(政經癒着)과 부패의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정치 민주화의 열망에 맞춰 정부가 내놓은 경제정책 관련 법 중 하나가 “공업발전법”이었다. 이 법안은 1985년부터 입안되어 1986년 7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이 법은 1973년의 “중화학공업 선언” 이후 입법 시행된 7대 개별 산업육성특별법들을 단일화하여 대체(代替)한 것이었다. 

 

이 법안이 갖는 의미는 정부의 시장 개입 범위를 축소하고 민간의 자율적 의사결정 범위를 확대한 것이었다. 이 법은 민간 전문가들을 주축으로 한 “공업발전심의회”를 주요 의사결정 심의기구로 설정했고, “유망유치산업”과 “불황 산업”에만 정부가 개입하도록 했다.

 

공업발전심의회는 후에 산업발전심의회로 명칭이 바뀌었고, 나는 1998년경부터 3년간 그 위원장을 맡았다.

 

官(관)에서 民主導(민주도)의 政策(정책)기대 工業發展法(공업발전법)(案(안))의 실효성

매일경제 | 1985.09.14 기사(칼럼/논단)


官(관)에서 民主導(민주도)의 政策(정책)기대

工業發展法(공업발전법)(案(안))의 실효성

租減法(조감법)과의 調和(조화)의妙(묘) 긴요


金廣斗(김광두) <西江大(서강대)교수·經博(경박)>

 

자율과 개방이라는 단순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현 경제정책의 큰 흐름 속에서 시장경제의 불완전성을 보완하려는 의지를 담은 공업발전법(案(안))이 상공부에 의해서 준비되었음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이 법안은 크게 보아 3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는 60년대 이후 지속되어온 정부주도의 정책수립을 반성하여 민간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는 점이다. 민간기업·학계·전문가들로 구성될 공업구조심의회의 설치는 기능으로 보아 매우 뜻깊은 일로 본다. 

 

둘째는 합리화 대상 업종을 지정하여 해당 업종의 합리화를 촉진함에 있어서 有望幼稚業種(유망유치업종)과 경쟁력 상실 업종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지금까지 사용되어온 특정전략산업의 개념을 우리 산업구조의 변화와 국제무역환경의 변동에 대응하여 적절히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셋째는 산업활동에 대한 지원방식을 특정업종별 지원에서 기술수준과 생산성의 향상을 위한 자원으로 전환하였다는 점이다. 즉 업종별 지원은 합리화 대상 업종에 국한시킴으로써 극소화하고 기술투자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산업활동의 양적확대보다는 질적高度化(고도화)에 더욱 力點(역점)을 두겠다는 것으로서 우리 산업의 현위치로 보아 매우 바람직한 방향 설정이다. 

 

그러나 동법(안)이 실제적으로 공업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직도 남아있음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첫째 문제는 재무부가 관장하고 있는 조세감면규제법과의 조화를 어떻게 이루느냐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조세감면규제법 47조에 나타나 있는 산업합리화지정대상업종의 기준과 지정절차가 공업발전법(안)5조가 규정하고 있는 합리화 대상 업종의 기준 및 지정절차와 상이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두 법(안) 간의 차이는 산업합리화의 효율적 추진의 시발점이 될 부실기업의 처리문제에서부터 재무부와 상공부 간의 對立(대립)이 나타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재무부가 부실기업의 정리를 주로 겨냥하여 제시한 조감법 개정안의 내용은 상공부의 공업발전법(안)과의 조화를 크게 의식하여 준비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재무부는 자신의 '발등의 불' 격인 금융정상화를 염두에 두고 조감법 개정안을 마련한 듯한 인상을 풍긴다.

 

이러한 재무부의 입장을 고려할 때 재무부 소관인 재정·금융상의 정책수단이 합리화 업종에 대해 공업발전법(안)이 원하는 방향으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인지 매우 의심스럽다.

 

둘째 문제는 공업기술의 향상 노력에 있어서 현재까지 기술진흥확대회의를 주관하여 온 과학기술처와 유기적 협조체제를 어떻게 구축하여 나가느냐 하는 점이다.

 

공업발전법(안)의 12조(공업기반기술연구사업)와 13조(공업기술개발촉진사업)는 공업기술 및 생산성 향상을 추진하기 위한 핵심 조항이다. 그러나 이 2조항이 실효성을 발휘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처와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制限(제한)된 국가자원의 효율적 사용이라는 측면을 고려할 때 기존 과기처 산하 연구기관의 기능과 중복된 기구를 상공부 산하에 신설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정부 조직의 개편에 의한 부처 간 업무의 조정이 없는 한 과기처가 지금까지 고유 업무로 관장하여온 사항을 상공부가 다스릴 수는 더욱 없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우리는 기술혁신의 전과정을 新技術(신기술)의 확보 단계와 사업화의​ 단계로 나눌 수 있으며 이와 같은 단계이론에 바탕을 두고 과기처와 상공부의 分業體制(분업체제)를 설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공업발전법(안)이 現實的(현실적)으로 부딪치는 문제는 두 부처 간의 明確(명확)한 업무분담보다는 기술과 산업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느냐 하는 점이다. 만약에 산업기술을 보는 상공부의 시각이 우선순위의 선정 등의 정책수행에 있어서 과기처의 견해와 일치한다면 두 부처 간의 협조는 자연적으로 이루어질 것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기술과 산업의 연계는 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 

 

두 부처 간의 시각과 견해가 일치하기란 쉽지 않다고 보는 것이 보다 더 현실적인 인식이라면 공업발전법(안)12조와 13조의 실효성도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나타나게 될 전망이다.

 

셋째 문제는 工業構造審議會(공업구조심의회)의 효율적 운영에 관한  사항이다.

 

이 심의회는 동법(안)의 民主導的(민주도적) 성격을 나타내는 상징일뿐만 아니라 동법(안)의 시행을 돕는 두뇌집단이다. 따라서 앞의 2문제가 정부차원에서 잘 해결된다고 할지라도 이 심의회의 지혜를 최대로 수렴할 수 있는 운영체제를 마련하지 못할 경우 동법(안)이 추구하는 공업의 합리적 발전은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때문에 정부 당국은 지금까지 구성되어 왔던 수없이 많은 민주도를 구호로 내건 위원회들이 사실상으로는 정부 결정사항의 추인기구에 불과하였다는 경험을 잘 吟味(음미)하면서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이 심의회를 운영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현직 정책당국자들이 상당한 自制力(자제력)을 발휘하지 않는 한 또 다른 허구적 명칭으로써 이 심의회가 이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80년대에 들어와 경제정책의 일관성 결여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이에 덧붙여 정책의 실효성 또한 매우 중요함을 강조하고 싶다. 호랑이처럼 발표된 정책이 시행과정에서 고양이 역할밖에 못한다면 정부정책에 대한 불신을 더욱 깊어질 것이며 어떠한 정부정책도 불신받는 가운데 성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工業發展法(공업발전법)(案(안))의 실효성 제고를 위한 당국의 행정기술 향상을 기대해본다.​

 

3저(3低)의 훈풍!

 

1985년 가을, 훈훈한 바람이 태평양에서 불어왔다. 

미국이 주도한 플라자 합의(1985년 9월 22일)로 일본의 엔화 가치가 폭등하고, 미국의 통화 긴축 완화로 국제금리가 낮아지고 산유국들의 석유 증산으로 국제유가가 하락했다.

 

환율 효과에 의해 우리 수출의 가격 경쟁력이 강화되고, 외채 금리 지급액과 수입 유가 부담이 경감(輕減)되었다. 이로 인해 만성적 경상수지 적자가 1986년에 흑자로 전환되어 1989년까지 지속되었다

 

전두환 정부는 80년대 초의 경기침체를 경제 체질 강화 정책으로 극복하려 했다. 정부는 재정 통화 긴축에 의한 물가안정을 경제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놓았다. 선거에 의해 선출된 정부였다면 선택하기 어려운 비인기정책이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견디면서 경제 체질 강화, 재정 건전성 회복, 기업의 연구개발 투자 증가 등이 진행되었다.

 

태평양을 건너온 3저의 훈풍(薰風)이 고통스러운 재활(再活) 훈련 중인 한국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재활 훈련으로 되찾은 경쟁력으로 한국의 상품들은 훈풍을 타고 태평양을 횡단할 수 있었다.

 

3저 현상으로 경제가 침체기를 벗어나 활황 국면에 진입하면서 정치 민주화와 민간 기업의 자율성이 요구되는 흐름이 더욱 강해졌다. 자율엔 책임이 뒤따른다. 자연스럽게 기업윤리에 대한 재조명(再照明)도 사회적 이슈로 등장했다. 경제성장과 사회통합의 동반(同伴)이 국가경쟁력의 구조적 뿌리임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치 민주화가 경제민주화와 동반하는 것은 자본주의 발전이 성공한 국가들의 역사적 경험이었다. 한국은 60~70년 대의 압축적 고도성장을 바탕으로 “절대적 빈곤”으로부터 탈출했다. 이제는 “노동착취”, “중소기업 죽이기”와 같은 압축성장 과정의 잘못된 관행(慣行)은 사라져야 할 때가 된 것이었다.

 

그동안 정경유착에 의해 재벌이 성장해왔다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윤리경영으로 사회 구성원들과 상생하고 기술 중심의 국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할 경제구조와 시대적 국면에 들어섰다고 나는 판단했다.

 

정치 민주화가 선언되고, 경제민주화 요구의 봇물이 터진 1987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合意(합의)와 奉仕(봉사)' 기업精神(정신) 배양

매일경제 | 1986.10.02. 논단


'合意(합의)와 奉仕(봉사)' 기업精神(정신) 배양

自由(자유)경제와 企業倫理(기업윤리)

社會(사회)·기업의 共同體(공동체)의식 회복시급

政策的(정책적) 지원 통한 發展(발전) 한계점 도달

부동산 買占(매점)행위로 反企業(반기업) 분위기 자초

무분별한 문어발式(식) 領域(영역)확장 경제效率(효율) 저하

'負債(부채) 규모가 공 기업規模(규모)' 歪曲(왜곡)풍토 근절돼야

 

金廣斗(김광두)<西江大(서강대) 經濟學科(경제학과) 교수>

 

自律性(자율성) 크게 저하

 

 18세기 영국의 가장한 문제는 가난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당시 英國(영국)의 인구는 7백만 명 수준이었는데 그중 2백만 명 정도가 極貧者(극빈자)들로서 당시의 사회체제로써는 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길이 막연했다. 이들이야말로 '無産者(무산자)(Proletarians)'였으며 정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기껏 빈민수용소에 이들을 쑤셔넣는 일이었다.

 

 이러한 극한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無産者(무산자)들 몸부림 속에서 근대자본주의의 萌芽(맹아)가 싹텄다.

 

 이 무산자들 가운데 사람들을 집결시켜 무엇인가 만들 수 있는 조그마한 공장을 세우려고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든 사람들의 慾求(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물건들을 생산했다. 이와 같은 大衆(대중)을 위한 상품 생산체제는 곧 大量生産(대량생산)으로 이어지게 됐고, 이것이 곧 近代資本主義(근대자본주의)의 기원이 된 셈이다.

 

 이러한 가난으로부터의 탈출 노력의 결과 영국의 자본주의가 전개된 시기, 즉 1760~1830년 사이에 英國(영국)의 인구는 두 배로 증가했다. 이것은 절대빈곤으로 인하여 그전 같으면 굶주려 죽었을 아이들이 살아남아 성장하여 성인 남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무산자 혁신가들에 의하여 나타난 자본주의라는 제도가 英國(영국)을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으며 현재의 인류가 즐기고 있는 생활의 풍요를 잉태했다.

 

 英國(영국) 사회에서 버림받은 위치에 있던 無産者(무산자)들이 기업가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사람의 욕구, 즉 일반대중이 원하는 바를 충족시켜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도시에서 상류계급의 수요만을 위해 노력했다면 단순한 가공업자에 불과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극빈자들의 고용증대를 통한 절대빈곤의 해결에도 기여하지 못했을 것이다.

 

 즉 자본주의의 기본 생산체제인 大量生産(대량생산)은 일반 소비자들의 욕구를 보다 잘 충족시켜줌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소위 대기업이라는 것은 대중의 소비욕구를 가장 잘 채워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기업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大衆(대중)이란 무엇인가? 이는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의미한다. 생산자 자신도, 노동자도, 정부관리도, 성직자도 모두 대중을 구성한다. 때문에 대중의 욕구를 잘 충족시킨다는 것은 곧 모든 社會構成員(사회구성원)의 충실한 하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기업의 성공적인 성장은 사회에의 적극적인 봉사를 통해 사회구성원의 후원을 얻음으로써 가능했으며, 기업의 이러한 노력은 원가절감·제품혁신 등의 형태로 나타났고, 資本主義(자본주의)의 지속적인 발전은 이와 같은 기업과 사회구성원 간의 共同體的(공동체적) 협조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상품을 통하여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관계에서 이루어졌던 初期資本主義(초기자본주의)에서의 기업과 대중 간의 단순한 관계가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보다 多元化(다원화)되어감에 따라 기업과 사회 간에 마찰의 소지가 많아지게 되었다. 이 부조화는 기업의 적극적 봉사정신에 기초한 대응이 있을 경우 쉽게 풀리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기업과 사회 간의 협조체제가 깨지거나 정부의 對企業規制(대기업규제)가 강화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기업의 자율성을 크게 저하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기 쉬우며, 이는 자본주의의 발달을 크게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韓國(한국)에 있어서 근대적 기업의 태동은 3.1운동 이후 일제의 文化政策(문화정책)으로 민족기업에 대한 제약이 완화된 것을 계기로 하여 이루어지긴 했으나, 近代資本主義型(근대자본주의형) 기업가들이 한국사회에 뚜렷한 모습을 나타낸 시기는 1963년 이후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한국자본주의의 실질적 形成(형성) 시기는 1963년 이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60年代(연대)에 그 모습을 나타낸 기업들의 자본축적이 50년대의 企業外的(기업외적) 활동에 상당한 바탕을 두고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한국자본주의의 형성 기반은 선진자본주의 경제와 다르다. 즉 50년대 우리나라 기업들은 귀속재산불하, 원조물자불하, 특혜금융(外資(외자)따먹기) 등 企業外的(기업외적) 활동을 통해 성장한 경우가 많으며 대중에의 봉사를 통하여 대중의 후원을 얻으면서 성장한 경우는 오히려 드물었다. 이러한 기업들의 과거가 현재 우리사회의 대기업 불신풍조의 기원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취약한 精神(정신) 기반

 

 60년대에도 대부분의 기업들은 정부주도하에 이루어진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참여함으로써 강력한 정부의 지원을 받았고 70년대에도 정부의 중화학공업정책과 지원 하에서 성장해 왔다.

 

 이 과정에서 기업발전은 정부의 강력한 財政(재정)·金融(금융)의 지원, 정부보증에 의한 外資導入(외자도입), 기타 行政的(행정적)·制度的(제도적) 지원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사회에의 봉사 개념은 기업의 성장에 크게 중요시되지 않았다.

 

 때문에 한국의 자본주의는 先進資本主義經濟(선진자본주의경제)의 基本精神(기본정신) | 기업의 사회에의 봉사를 통한 성장과 자본의 축적 | 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형성·발달하게 되었다. 즉 英(영)·美(미)나 日本(일본)의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기업들이 이룩한 성장의 바탕이 기업의 社會(사회)봉사라는 資本主義(자본주의) 정신과 뛰어난 經營能力(경영능력)의 결합이었다면 한국의 자본주의는 기업들의 정부정책과 經營(경영)능력의 결합을 바탕으로 형성 발달해 온 셈이다.

 

 이러한 성장경험 때문에 한국기업들의 자본주의적 정신 기반은 매우 약하게 됐으며 그 결과 사회의 反企業(반기업) 분위기와 기업인에 대한 不信(불신)풍조를 팽배시키는 여러가지 행위를 自制(자제)하지 못했다. 그 가운데 중요한 행위 몇 가지를 들어보겠다.

 

 첫째는 기업, 특히 巨大企業(거대기업)들의 不動産(부동산) 買占行爲(매점행위)이다. 소위 부실기업이라고 불리는 기업들조차도 非業務用(비업무용) 부동산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눈에 띄고 있으며, 일부 기업들은 산업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不動産(부동산) 買入(매입)에 사용함으로써 경영상의 어려움에 봉착하고서는 정부의 지원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근에 있었던 증권시장의 활황에 일부 기업들이 수출지원자금을 투자자금으로 사용하였다는 소문도 이러한 맥락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商業主義(상업주의)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형성과 발달의 주체가 되는 기업의 경영원리는 産業主義(산업주의)에 있어야 한다. 기업이라는 강한 조직이 상업주의에 집착할 경우 기업과 사회는 대립관계에 서게됨으로써 상호협조체제가 무너지고 이는 자본주의의 건전한 발달을 저해하며, 더 나아가 企業(기업) 스스로의 成長(성장)도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 기업들의 성장이 정부의 강력한 지원에 크게 힘입었다는 점과 그들이 부동산이나 증권의 매입에 사용한 자금이 정책금융의 한부분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사회의 反企業(반기업) 감정을 유발하기에 족하고도 남는다.

 

 둘째는 巨大企業集團(거대기업집단)들의 문어발식 영역확장 행위이다. 굴지의 기업집단이 아이스크림사업에 진출해서 영세업자들을 모두 망하게 한다거나 두부공장을 만들거나 대규모 음식점 또는 빵집을 경영함으로써 사회적 비난을 받았던 경험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기업이나 산업의 경쟁력 강화와는 무관한 사업영역을 부동산 매입식 영토확장의 개념을 가지고 파고드는 경우가 흔히 노출된다.

 

 이러한 문어발式(식) 영토확장은 기업과 경제의 효율성을 저하시킴은 물론 연관되는 다른 사회구성체에 피해를 줌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킨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행위는 경제력집중문제를 초래하여 소득분배에 관한 사회·정치적 대립을 유발한다.

 

 특히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적합한 업종에 진출하여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중소기업을 망하게 하는 행위나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하청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 그 유리한 입장을 이용하여 불공한 거래를 강요하는 행위 등은 대기업의 자본주의정신 부재현상을 잘 나타내주고 있으며 모든 사회구성체의 강한 반발을 사기에 충분하다.

 

 셋째, 거대기업집단일수록 자기자본보다는 타인자본에 의존하는 부채의존형 경영을 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즉 韓國(한국) 30大(대)기업의 자기자본 비율은 17%에 불과하나 韓國(한국)의 제조업 전체 평균은 22%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 있어서 기업의 규모란 負債(부채)의 규모에 의해서 결정되는 셈이다. 때문에 중소기업이 성장하여 대기업이 되고, 대기업이 성장하여 巨大企業(거대기업)이 되는 資本主義體制下(자본주의체제하)의 정상적인 단계가 없이 巨額(거액)의 外資(외자) 또는 은행자금의 借入(차입)기회를 포착한 기업이 곧 재벌기업의 가능성을 갖게 된다는 인식이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자리잡게 되었다. 

 

 더 나아가 이러한 負債依存型(부채의존형) 거대기업들이 不實化(부실화)되었을 경우 사회에 막대한 不實債權(부실채권)의 부담을 안겨주게 되며 실제로 일부 기업의 부실채권의 규모는 수조원의 규모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經濟(경제)정책도 문제

 

 이러한 일부 巨大企業(거대기업)들의 존립樣態(양태)로 인하여 사회구성원들은 기업을 불신하게 되고 기업과 관료의 유착을 통한 特惠(특혜)가 巨大企業(거대기업) 生成(생성)의 常道(상도)인 것처럼 인식되는 風土(풍토)가 조성되었다.

 

 우리 기업들의 성장경험과 存立樣式(존립양식)이 자본주의적 정신기반을 갖출 필요를 못 느끼게 했다면 이는 상당부분 정부의 經濟政策(경제정책)에도 기인한다. 왜냐하면 우리 경제는 지속적으로 정부주도형이엇고, 현재도 그렇기 때문이다. 예컨대 내세워지고 있는 自律化(자율화) 구호와는 달리 기업활동의 핵심요소인 資金調達(자금조달)이 정부의 의사에 따라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음은 다 아는 비밀이다.

 

 근래에 이루어진 租稅減免規制法(조세감면규제법)과 韓國銀行(한국은행)의 對(대)시중은행 特融(특융) 그리고 이에 관련된 부실기업의 내용 非公開(비공개) 등은 사회적 합의가 더욱 중요한 시기에 다시 한번 경제정책의 도덕성 缺如(결여)를 노출하면서 기업들의 資本主義精神(자본주의정신) 不在狀態(부재상태)를 연장시켜준 좋은 예이다.

 

 租減法(조감법)은 그 궁극적 효과가 어떻든 간에 일부 부실화된 기업들의 부동산 투자를 事後的(사후적)으로 합리화시켜 준 조치나 다름없다.

 

 韓銀(한은)의 특융은 금융기관이 어떠한 사유에서든 간에 무분별하게 대출해준 결과 안게된 不實債權(부실채권)을 국민에게 넘겨준거나 다름없는 조치이다. 이러한 조치의 영향을 받고 있는 국민들은 그 배경이 되고 있는 不實企業(부실기업)들에 관하여 당연히 알 권리가 있다. 국민에게 공개됨으로써 대외적인 면에서 어떠한 불이익이 우리 경제에 주어질 수도 있겠지만 자본주의정신을 바탕으로 한 국민적 합의를 위해서 이는 마땅히 공개되어야 하는 것이다.

 

 경제정책 수행상의 이와 같은 도덕결여는 기업들의 경기 원칙(Rule of Game) 부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여 자본주의 발전의 주체로서 기업이 갖추어야 할 정신적 기반을 경시하게 하는 기업풍토를 존속시키며 더 나아가 사회의 反企業(반기업) 분위기가 확대발전되어 정부에 대한 불신까지 만연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기업의 자본주의적 정신기반의 不在(부재)는 어떻든 현재까지는 기업의 발전에 중요한 저해요인으로 고려되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였다. 왜냐하면 국민들은 절대빈곤의 해결에 가장 큰 관심을 가져왔고 정부도 이를 위해서 국내시장 보호 등으로 기업의 시장수요를 확보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기업활동의 경제·사회적 여건은 바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으며 그중 가장 중요한 특성이 경제의 국제화와 양적 자본주의에서 질적 자본주의에로의 이행이다. 

 

 경제의 국제화에 따라 기업들이 享有(향유)해왔던 '보장된 국내시장'은 이제 외국기업의 진입에 의해 위협받게 되었다. 

 

 수요자에의 봉사라는 정신적 기반 위에서 기업활동을 해온 先進資本主義(선진자본주의) 기업과의 경쟁에서 국내기업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와의 협조관계를 정립하여 상호간에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여야한다. 日本(일본)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우리 선배들은 民族資本(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은행이나 공장을 共同體(공동체) 의식으로 바라보았으며그 결과 韓國人(한국인) 공장이나 은행이 그 영세성을 극복하면서 생존·번영할 수 있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현재와 같은 反企業(반기업) 분위기가 해소되지 않을 때 국제화의 거센 파도 앞에서 국내 기업의 경쟁적 도태가 예견된다.

 

 量的資本主義(양적자본주의)에서 質的資本主義(질적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소득수준의 상승에 따라 이루어지는 대세이다. 量的資本主義(양적자본주의)란 절대빈곤으로부터의 탈피와 생활에 필요한 상품의 양적 해결이 중요시되는 초기자본주의적 상황을 의미한다. 

 

質的(질적)자본주의 移行(이행)

 

 이러한 상황에서는 필요한 제품의 量的(양적) 確保(확보)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에 만들기만 하면 팔리는 販賣者市場(판매자시장)(Seller's Market)이 형성되며, 量的(양적)인 의미에서의 절대빈곤의 해결문제 때문에 個體(개체) 또는 特定集團(특정집단)의 利益極大化(이익극대화)의 경향이 사회 전체적으로 흐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量的(양적)인 문제가 경제성장으로 인하여 해결되면서 점차 質的(질적)인 문제에 社會構成員(사회구성원)들의 관심이 모아지게 된다. 質的(질적)문제에의 관심의 내용들로서 需要者(수요자)의 선택이 중요시되는 購買者市場(구매자시장)(Buyer's Market), 貧富(빈부)격차의 완화와 기회의 平等(평등), 쾌적한 주거환경 등 社會的(사회적) 편익의 중시 등을 들 수 있으며, 이에 따라 기업의 社會的(사회적) 책임이 크게 강조되는 추이를 보이게 된다.

 

 이러한 경우 국내기업은 외국기업과의 경쟁에서 생존하기가 매우 어려운 입장에 서게 되고, 나아가 사회적 불안이 조성된다. 상황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면 이는 정치성을 내포하게 되며 이에 따라 정부의 개입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고 결과적으로 기업은 그 自律性(자율성)을 他意(타의)에 의해서 크게 제약 받게 됨으로써 스스로 위축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경제의 국제화와 質的資本主義時代(질적자본주의시대)로의 이행은 기업의 자본주의적 精神基盤(정신기반)을 강요하는 셈이며, 기업이 이러한 대세의 흐름에 역행하려 할 때 기업과 사회는 모두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韓國(한국)경제의 오늘을 있게 한 주역 중의 하나가 기업과 기업인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韓國(한국)기업의 급속한 성장이 자유경쟁시장을 통해서 이루어진 측면보다는 정부의 정책적 지원을 받아 직접·간접적으로 국민과 사회의 부담과 협조하에 이루어진 측면이 더욱 강하기 때문에 그 사회적 책임이 크게 부각되는 것이다.

 

 한편 기업 스스로도 경제의 국제성 증대와 質的資本主義時代(질적자본주의시대)로의 이행이라는 큰 물결의 흐름에 순리대로 대응치 못할 경우 사회로부터 버림받아 그 생존에 위협을 받게 되고, 더 나아가 정부의 강력한 간섭을 불러들이게 되어 자율적 생명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韓國(한국)자본주의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 사회적 합의를 중시하는 기업정신의 배양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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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80년대 당시 다양한 최고경영자 연찬회가 있었다. 제주도에서 열린 어느 하계 모임에서 연대 송 자 교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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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5월28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22년05월27일 10시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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