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의 경제학 여정(旅程) <16> 국제경제연구원(KIEI), 그리고 홍익대 학군단​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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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4월16일 17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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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겠나?”

“네!”

 

1977년 1월 귀국해서 당시 국제경제연구원(Korea International Economic Institute) 정재석 원장(후에 김영삼 정부에서 경제부총리 역임)과 나눈 대화였다. 정재석 원장은 경제기획원 출신의 엘리트 공무원으로 건설부 차관을 지낸 후 이 연구원의 창립 책임을 맡았다.

 

1973년의 오일 쇼크를 극복하기 위해서 정부는 건설업계의 중동 국가들 진출을 적극적으로 독려하고 지원했다. 그런 정책적 노력의 일환으로 1975년(?) 중동지역의 경제를 심층 분석할 중동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 1977년에 이 연구소를 세계 경제 질서와 지역 경제를 함께 분석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국제경제연구원으로 확대 개편했다.

 

나는 이 연구원의 분석 대상이 세계 경제 질서라는 점과 신생 조직이라는 점에 매력을 느껴 지원했다. 다행히 받아들여져 정 원장님과 최종 면접을 했다.

 

창립 초기라 구성원이 아직 단출했다. 첫 출근했던 시점에 연구원의 구성원은 30여 명 정도였다고 기억한다. 김기환 박사( 전 KDI 원장), 조규하(전 전경련 부회장), 이세기(전 국토 통일원 장관), 강철규(전 공정거래위원장), 김태동(전  대통령 경제 수석비서관),고 이계식(전 정부개혁실장) 고 이계익(전 교통부 장관), 이종대( 전 국민일보 사장),등이 재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연구원의 행정 관련 대내외적 업무는 한갑수( 전 농수산부 장관) 씨가 총괄하고 있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세기 전 장관은 대학 시절 KUSA 클럽 활동 시에 유네스코 본부에서 학생들을 지도해 주신 분이었다.

 

정원장은 매우 꼼꼼한 완벽주의자 스타일이었다, 나를 테스트하기 위해 연구원 구성원 전원이 모인 세미나에서 주제 발표를 하라고 했다. 그때 나는 “수출주도형 경제성장 모형 분석”이란 주제로 논문을 준비해서 발표했다.

 

“정재석 원장, 아파트 투기!”

이런 기사가 신문 지상에 크게 보도된 적이 있었다.

 

70년대에는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온 사람들은 희소가치가 있었다. 주요 일간지에서 박사학위 수여 사실을 뉴스로 다루었을 정도였다. 때문에 해외 박사학위 소지자들에게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

 

당시 KDI, KIEI 등은 박사학위 소지하고 귀국하여 연구원에 취업한 사람들에게 아파트와 업무용 자동차를 제공했다. 정재석 원장은 이런 목적으로 현대건설과 협의하여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 7채를 연구원 소유로 매수했다. 당시는 부동산 불경기 국면이라, 아파트가 미분양 상태였고 여러 채를 한꺼번에 매수하기가 쉬웠다. 연구원 소유인지라 소유자 기록 칸에 원장 이름이 명기되었다. 그런데 그 후에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이것이 투기로 보도된 것이었다. 정원장으로선 억울한 일이었다.

 

나도 이 혜택을 받아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에서 살았다. 당시엔 지금 현대백화점이 들어선 자리 주변은 모두 배밭이어서 산책하기 좋았다. 그러나 대중교통망이 미흡해서 불편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훈목( 전 현대건설 회장), 박웅서( 전 삼성 경제연구소 사장), 고 권원기( 전 성대교수), 고 김 정( 전 한화 재팬 대표이사), 고 차동세( 전 KDI 원장), 양수길(전 OECD 대사), 이재웅(성대 명예교수), 이영선( 전 한림대 총장), 이효구(서강대 명예교수) 이명제( 부산대 명예교수), 정의광(부경대 명예교수)박사 등이 참여했다.

 

정재석 원장은 문장의 완결성을 중시했다. 내용이 좋아도 그 표현 방법이 서투르면 읽는 사람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보고서를 써서 제출하면 문장의 허술함(?) 때문에 기압을 받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이런 그의 지적이 결과적으로 나에겐 도움이 되었다.

 

“출국할 수 없습니다.”

“앙? 왜요?”

 

연구원 생활에 익숙하게 적응하면서 재미있게 지내는데, 해외 출장을 다녀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 시기 나는 30세였다. 당시에 그 나이에는 누구든 병무청의 승인을 받아야 출국할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부선망(父先亡) 2대 독자”였고, 이 조건에 해당하는 사람은 병역 면제 대상으로 알고 있었다.

 

“만 30세 되는 해의 연말까지는 병역 의무가 있습니다. 부선망 2대 독자는 방위병으로 입대해야 합니다. 그전에는 출국할 수 없습니다.”

 

1977년 늦가을 나는 수색에 있는 신병 훈련장에서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함께하는 훈련병들은 대체로 19~23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훈련복을 입으면 다 비슷해서, 나는 다시 대학 시절의 젊은 나이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체력적으로 버거운 일부 과정도 있었지만 사격 훈련은 재미도 있었다. 서부 영화에서 죤 웨인은 너무 쉽게 유효 사격을 하던데, 실제 사격을 해보니 그렇지 않았다. 엎드려 조준해서 조심스레 방아쇠를 당겨도 목표물을 빗나갔다.

 

겨울철에 훈련이 끝나고 홍익대 학군단으로 배치 명령을 받았다. 단장은 대령이었다. 나는 행정실에서 잡무를 보았다. 석탄 난로에 불을 지펴서 행정실을 따뜻하게 유지하는 것도 내가 하는 일 중 하나였다. 행정실은 육군 중위와 직업군인 상사(?)가 책임지고 있었다. 동료 방위병 중에 서울대 음대 재학생(성악 전공)이 있었는데, 그로부터 음악에 관한 흥미로운 스토리들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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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홍익대 학군단에서 함께 복무한 동료와 함께.>

 

홍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경제 경영과 교수들이 학군단 사무실로 나를 위문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매우 난처했다. 고참병 하사가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고, 학군단장이 앞으로는 오지 않도록 말해달라고 강하게 했다.

 

1978년 1월에 서강대 박대위 경상대학장님으로부터 한번 보자는 연락이 왔다.

찾아 뵈었더니 서강대 경제학과에 국제경제학 전공 교수가 필요한데 올 수 있겠느냐는 말씀을 주셨다. 나는 6월 이후에 제대 예정이라 현실적으로 가을 학기에는 가능하지만 봄학기에는 어렵다는 말씀을 드렸다. 모교 교수로 봉직하는 것이 나의 희망이었는데 안타까웠다. 교수직은 자리가 비어야 기회가 생기기 때문에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불확실했기 때문이었다.

 

19~20세의 젊은이들이 함께 근무한 동료들의 대부분이었는데, 이들과의 일과 후 어울림은 즐거웠다. 모두 들 미래의 꿈에 부풀어 있었고, 심성이 맑고 선했다. 10년 선배인 노털인 나를 동네 형님처럼 격의 없이 대해줘 고마웠다.

 

복무기간이 끝날 때쯤, 행정실을 담당하던 육군 중위가 행정실 근무 방위병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저녁을 대접했다. 단칸 셋방을 얻어 부부가 살고 있었다. 헤어짐의 아쉬움이 방안에 가득했다.

 

이분들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실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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