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의 경제학 여정 <3> 신촌, 홍릉, 그리고 청진동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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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1월29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2년01월28일 12시26분

작성자

  • 김광두
  • 국가미래연구원 원장, 남덕우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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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고등학교! 
1960년대 당시 서강대의 학습 규칙은 대학 생활이 풍기는 자유분방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정좌석제, 3회 지각하면 1회 결석으로, 3회 무단결석하면 FA(Failure by Absence=F)로 자동 처리. Convocation이라 해서 재학생 전원을 부르는 모임이 있었는데, 이 모임에서 중간고사 성적표를 성적순으로  한 사람씩 호명하여 나눠 주었다.

당시 서강대학교는 경상대학은 물론 인문대, 자연과학대 학생들에게도 모두 경제학 원론을 교양필수 과목으로 듣게 했다. 때문에 시험 기간이 되면 경상대 학생들의 인기가 짱이었다. 특히 콘보케이션에서 성적이 좋은 것으로 밝혀진 소수의 몇 명에게 개인 학습 러브 콜이 쏟아졌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이때 개인 학습 대가로 다방( 요즈음엔 커피숍이나 카페라고 한다) 에 가서 음료를 대접받았다.

당시 신촌 로터리에 있었던 “왕자 다방”이 우리의 아지트였다. 이곳에서는 양파 누나( 얼굴이 양파처럼 둥글둥글해서 우리가 만든 애칭)가 우리들을 반갑게 대해줬다. 돈이 없어 차를 못 마셔도 보리차를 잘 가져다  주고, 음악 리퀘스트도 기꺼이 받아줬다. 이 집은 지금은 없다.

경제과 교수님들은 휴강이라는 단어를 모르시는 듯했다. 강의 시간 정시에 시작하고 종료 벨이 울릴 때까지 열강했다. 거기에 덧붙여 POP QUIZ를 1주일에 1회씩 거르지 않았다. 이건 고등학교 때보다 더 했다.

경제학과의 학풍은 POSITIVE ECONOMICS( 실증경제학)에 바탕을 두었다. 객관적 사실을 중심으로 경제 현상을 분석하는 접근 방법이다. 가치 판단을 앞세워서 바람직한 경제 상태를 추구하는 NORMATIVE ECONOMICS( 규범경제학)에 대비된다.

이런 학교 분위기·학풍과 다른 공기를 마시고 싶다는 욕구가 경제, 경영, 무역학과 클라스 메이트들 사이에 만연했다. 그래서 돌파구를 모색했다.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학생들과 교류하자는 아이디어였다. 당시 서강대 경상대 학생회장과 서울 상대 학생회장이 만나 이런 교류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교수님들도 동의하셨다. 당시 서강대 경상대 학장은 이승윤 교수(전 경제부총리, 재무부 장관, 서강학파 1세대) 이셨고, 서울 상대 학장은 변형윤 교수( 학현학파 창시자)이셨다. 현재도 서강학파와 학현학파는 한국의 양대 경제학파로 불린다.

1967년 가을학기부터 두 대학 간 학술토론회와 체육대회를 갖기로 했다. 봄 학기에는 학술모임을 가을학기에는 체육 모임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서울 상대는 홍릉에 있었다. 양교의 학생들은 신촌과 홍릉을 왕복하며 모임을 했다.

서울 상대 학생들은 자유분방했다. 그게 참 부러웠다. 학교 분위기가 학생들에게 자유로운 대학 생활을 허용하는 것으로 듣고 느꼈다. 그러나 경제 토론에서는 서강대 발표자들의 논리가 더 과학적이었다.

당시 청진동은 막걸리, 빈대떡의 천국이었다. 대학생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이 교류 모임의 인간적 교류와 낭만이 꽃피었다.

당시 체육대회는 축구, 배구, 농구의 세 종목으로 나누어 승패를 겨루었다. 2승을 하면 우승팀이 되었다. 당시 농구는 상대가 배구는 서강대가 주로 이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상대 농구팀에 고교 시절 학교 대표선수였던 학생과 움직임이 빠르고 슛이 정확한 학생, 2명이 있었다. 이들의 기량이 뛰어나서 대적할 수 없었다. 서강대 팀엔 배구선수 출신이 한 사람 있었다. 그 학생의 스파이크( Spike) 를 상대 선수들이 막지 못했다. 축구 경기는 대등한 게임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술 토론이 끝나거나, 운동 시합이 종료되면 뒤풀이가 따랐다. 뒤풀이 장소로 두 대학의 학생들이 함께 우르르 몰려간 곳이 주로 청진동 막걸리 골목이었다. 아무래도 운동 후 마시는 막걸리가 더 맛있었다. 체육대회 우승컵은 막걸리 한 되( 2리터 용량) 크기로 주문 제작했다.

어느 빈대떡 잘하는,“청진옥”이라는 집 2층 전체를 차지하고 우리들은 청춘과 경제를 읊었다. 화제 중에는 연탄값이 왜 오르느냐?, 쌀값이 농민들의 노고에 비해 너무 싸지 않느냐?, 케인즈가 증권투자에 성공한 이유,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영국에서 집필된 이유 등도 있었지만, 여학생 뒷 꽁무니 따라다닌 에피소드 등도 있었다. 취중 대화가 이어지다 보면 서강대와 서울 상대의 두 학생이 서강대의 한 여학생을 동시에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곳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막걸리 잔을 들었다. 하나가 우승컵이었다. 이 컵에 가득 채운 한 되짜리 막걸리는 그 자리에 둘러앉은 모두에게 필수 과목이었다. 그 이후엔 전통적 사기그릇 하얀색 막걸리 잔으로 능력에 따라 마셨다. 

서강대 학생들은 서울 상대 학생들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들의 학습 내용이 “서강고등학교”에 비해서 부실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기회비용(Oportunity Cost)의 한 사례였다. 대화의 과정에서 그들은 상대적으로 NORMATIVE ECONOMICS에 강하고, 서강대 학생들은 POSITIVE ECONOMICS에 더 익숙하다는 인식도 하게 됐다. 아마 1960년대 당시의 두 대학의 교수진 구성의 차이가 학생들에게 이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이 교류 당시 서강대 경상대 학생회장이었던 김종숙은 현재 미국 L.A.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촌놈이었던 나의 서울생활 적응을 도와준 고마운 친구였다. 서울 상대 학생회장은 박진원이었다. 미국에 가서 법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현재 서울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다. 서울 상대 학생회 학술부장은 김중수였다. 그는 한은 총재로 활동했다. 서울 상대 농구선수 중 날쌘돌이는 고성규, 서강대 배구팀의 호프는 배종길이었다. 고성규는 귀향하여 제주도에서 고향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봉사 활동을, 배종길은 고향 마산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김종숙은 LA에 가면, 박진원은 수년 전에, 김중수는 가끔, 고성규는 제주도 세미나 길에, 얼굴을 본다. 배종길은 대학 졸업 후 소식만 듣고 있다. 그 시절 청진동에서 어깨를 비비며 젊음을 나눴던 친구들 그곳에서 다시 만날 수는 없을까? 세월의 흐름이 허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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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가을. 서울상대와 학술·체육 교류를 시작할 당시 필자(가운데)와 함께 한 김종숙 서강대 경상대 학생회장(필자 왼쪽)과 이재선 경제학과 학우(필자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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