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의 경제학 여정 <2> 매판자본, 아현동 협곡, 그리고 마포경찰서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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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1월23일 09시00분
  • 최종수정 2022년01월22일 15시31분

작성자

  • 김광두
  • 국가미래연구원 원장, 남덕우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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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285명의 서강대 학생들이 대학 캠퍼스에서 나와 아현동 고개로 진출했다. 뭔가 다른 날이었다. 교문 앞에서 학생 시위를 원천 봉쇄하곤 했던 경찰들이 보이지 않았다.

1967년 봄 어느 날이었다. 당시 다수의 대학생들이 한일회담(韓日會談)에 반대하면서 거리 시위가 이어졌다. 
우리가 분노의 몸짓으로 거리에 나선 것도 대학사회의 그러한 분위기가 격하게 반영된 것이었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는 ‘매판자본론(買辦資本論)’이 널리 회자 되었다. 외국자본이 들어오면 그것은 우리 경제를 수탈해 가는 수단이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은 민족자본론을 내세운 학자들에 의해 제기됐고, 중고교의 교육과정에서 일제 강점기의 아픔을 배우고, 반일 감정을 키워온 60년대의 대학생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논리였다. 특히 나는 광주 학생독립운동의 본산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이 교정에 서 있는 광주 서중·일고에서 6년간 교육을 받았다. 근래 또 하나의 기념탑이 건립되었다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유일한 광주 학생독립운동 기념탑이었다.

 민족자본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일본 자본을 들여오려는 국내 기업인들이 매판자본가들이고, 이런 정책을 추진하는 정치인들이나 관료들은 매국노(賣國奴)라고 주장했다. 친일파에 대한 반감을 가득 안고 중고 시절을 보낸  우리 세대가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당시 서강대의 재학생 수는 400명 수준이었다. 이웃 연세대나 이화여대의 학생 수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다. 시위대는 일단 수가 많아야 위력적이다. 우리는 아현동 고개에서 연대, 이대 학생들과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면 수천 명이 되어 시청 앞까지 진출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아현동 고개에서 우리는 경찰에 의해 저지당했다. 기대했던 이대, 연대 학생들은 아직 오지 못했다. 아마 학교 앞에서 경찰과 대치 중이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당시엔 휴대폰이 없었기 때문에 현장 진행 상황를 파악할 방법이 없었다.

아현동 고개에서 경찰의 벽에 막혀 지형을 살펴보니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좌우로는 언덕이 높아 올라가기 어려웠고, 후면엔 이미 경찰이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경찰 헬기가 요란하게 배회하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막막한 형국이었다.

먼 훗날 살펴보니 당시 한국 경제의 상황이 우리 시위대의 처지와 비슷했다. 1966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30달러 수준이었다. 같은 해, 필리핀의 1인당 소득은 170달러였다. 국민소득을 증대하려면 투자를 해서 국내 고정자본을 형성해야 한다. 그런데 투자를 하려면 저축된 국내 자금이 있어야 한다. 1인당 국민소득이 130달러의 수준에서 높은 수준의 저축이 가능했겠는가?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1962-66년) 중 연평균 국민 저축률은 6.1%였다. 이 자금으로는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규모의 투자를 할 수 없었다. 연간 8% 정도는 경제가 성장해야 후진국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는 평가가 당시 국내외 전문가들의 의견이었다.

8% 성장을 위해서는 총투자율이 16% 수준이어야 했다. 8% 성장에 필요한 규모의 투자를 하기 위해서 외자를 들여오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학 2년생의 지식과 안목으로는 이런 분석을 할 수 없었다. 감성이 풍부한 시절이었다.

1964년 지금의 조선호텔과 롯데호텔(당시 반도 호텔) 사이에 큰 건물이 준공되었다. 13층 건물로 당시에는 국내 최고층이었다. 이 건물의 당시 이름은 “뉴 코리아 호텔”이었다. 현재 퇴계로 회현역 부근에 있는 '뉴코리아 호텔'과는 전혀 무관한 호텔이었다. 이 건물이 일본 자금으로 지어졌다는 풍문이 정설처럼 시중에 유포되고 있었다. 국내 최고층의 건물에 일본 대사관이 들어서고, 그 내부가 일본색으로 꾸며진다는 풍문도 퍼졌다.

우리를 감각적으로 자극한 것은 눈에 보이는 바로 이 건물이었다. 일본 강점 시대의 재현? 안 돼! 우리가 시청 앞으로 집결하기로 한 이유 중 하나였다.

 시간이 흐른 후에 알게 됐지만, 이 건물은 국내 기업인으로서 1950년대에 미군 상대로 건축 청부업을 하여 돈을 모은 경풍산업<당시의 사명(社名)>의 이상순(李尙舜) 사장에 의해 지어졌으며, 그가 주방 기계, 침대, 위생 도구 등을 고급화하기 위해서 외국 제품 수입 자금으로 일본인과 미국인이 합작한 회사인 “마루베니·이다 아메리카”로부터 25만 달러를 도입한 것이 소문의 진원이었다. (동아일보, 1964년 2월 7일 자 기사와 매일경제, 1968년 11월 27일 자 기사 참조) 이 건물은 1977년부터 임대빌딩(뉴코리아빌딩)으로 전환했고, 현재는프레지덴트 호텔 바로 옆에 위치한 JEI 빌딩으로 개명해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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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1월 공사 중인 뉴코리아 호텔<오른쪽>. 왼쪽은 반도호텔(현 롯데호텔)이었다. <사진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거리 시위에 참여한 285명의 서강대 학생들이 아현동 협곡에 완벽히 갇혀 꼼짝달싹 못하는 상황에서 284명이 경찰 버스에 태워졌다. 한 명은 어떻게 됐을까? 그는 동아일보 사진 컨테스트에서 우수상으로 입상한 김수상 씨였다. 평소에 가깝게 지낸 선배였는데 현재는 호주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상의 왼편 가슴 부위에 입상 기념으로 받은 동아일보 뱃지를 달고, 항상 카메라를 매고 다녔다. 동아일보 뱃지에 카메라를 들었으니, 경찰이 그를 동아일보 기자로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판단이었다. 

우리는 버스 안에서 경찰들을 향하여 “당신들은 매판자본의 앞잡이다”고 항의하다 얻어맞기도 했다. 우리가 끌려간 곳은 마포경찰서 유치장이었다. 지하에 있는 유치장으로 가는 길에 주위를 살펴보니 학생들이 던진 돌에 맞아 부상당한 경찰들이 누워있었다. 슬펐다. 우리 젊은이들끼리 왜 이래야 하나!

어떤 경제 사회적 현상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안다는 것이 중요함을 이 경험을 통해 새삼 깨달았다. 편견과 잘못된 정보로 우리는 흥분했다. 그 동기는 순수했다. 애국심과 정의감이 매판자본에 대한 분노로 표출됐다. 그러나 매판자본론의 현실적 타당성과 그 근거로 제시된 사례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살펴볼 능력이 없던 시절이었다. 흥분과 분노가 앞서서 교수님들께 여쭈어보는 여유도 갖지 못했던 피 끓는 청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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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22년01월22일 15시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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