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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북베트남 ‘부활절 대공세’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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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11월22일 13시56분

작성자

  • 이상돈
  •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20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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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철수하자 아프가니스탄 군대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우리 언론은 1975년 월남이 패망할 때와 같다고 썼다. 말하자면 당시 아프가니스탄 군대와 월남군은 모두 ‘당나라 군대’였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는 베트남 전쟁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아프간 군대는 당나라 군대가 아니라 실체가 없었던 ‘고스트 군대’(ghost army)였지만 월남군은 막강한 북베트남군과 마주서서 싸웠던 군대였다.   

 

1969년 초 대통령에 취임한 닉슨은 자신의 공약대로 첫 임기 내에 베트남에서 명예롭게 미군을 철수할 계획을 세웠는데, 그것이 ‘Vietnamization'(베트남化) 전략이다. 즉 월남군이 전투를 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도록 하고 미군은 군사고문(advisor)단을 남기고 지상군을 철수시키며 미군은 공중 지원과 군수 지원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1972년 초까지 월남군은 막강한 인력과 장비를 갖춘 군대로 태어나게 됐고 한때 50만에 달했던 베트남 주둔 미군은 7만 명으로 줄었다.  

 

1968년 초 북베트남 군이 대규모 정규군을 투입했던 구정(舊正) 대공세(Tet Offensive)는 베트남의 고도(古都) 후에를 함락하고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을 공격해서 큰 충격을 주었으나 미군은 반격을 가해서 후에를 탈환하고 북베트남 군을 북쪽으로 패퇴시켰다. 이 때 북베트남 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어서 국방장관 지압이 문책을 당했다. 1971년 말부터 북베트남 군의 동향이 심상치 않음을 파악한 미군 정보국은 멜빈 레어드 국방장관에게 북베트남 군의 공세가 임박했음을 보고했으나 레어드 장관은 북베트남 군이 구정 대공세의 여파에서 회복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묵살했다. 사이공의 미군 사령부는 구정이  지나도록 아무 일이 없자 안심을 했고 벙커 대사와 에이브람스 사령관은 부활절을 앞두고 휴가를 떠났다.   

 

하지만 북베트남군은 소련과 중공으로부터 신형 T-54 탱크와 대공포 등 중장비를 비밀리에 보급 받아서 라오스와 캄보디아 국경지대를 거치는 호지민 루트를 통해 병력을 이동시켰다. 1972년 3월 30일, 북베트남 군은 국경지역인 쾅트리에 총공세를 퍼부었다. 신형 탱크 100대를 앞세운 2개 사단의 공세에 이 지역을 지키던 월남군 3사단은 압도되어 버려서 쾅트리 시(市)를 내어주고 후퇴했다. 티우 대통령은 사단장을 교체했으니 이미 상황은 늦어버렸다. 북베트남 군의 공세는 2차 대전에서 보던 대규모 정규전 공세라서 미군 지휘부를 놀라게 했다. 븍베트남 군은 후에 시(市)를 위협했으나 월남군 해병대와 공수부대가 미군의 공습에 힘입어 반격에 나서서 후에를 지켰다. 

 

4월 5일에는 사이공에서 50마일 떨어져 있는 요충지 안록이 북베트남 군의 공격을 받았다. 민간인들이 안록을 탈출하는 등 혼란에 빠졌고 안록은 북베트남 군에 포위되었으나 미군의 공중 지원에 힘입은 월남군 2개 사단은 영웅적인 전투를 벌인 끝에 북베트남 군을 패퇴시켰다. 북베트남 군 탱크는 미군 코브라 헬기와 월남군의 토우 미사일로 박살이 났다. 

 

가장 큰 전투는 북베트남 군 3개 사단과 탱크 수백 대가 동원된 중부 콘툼에서 일어났다. 콘툼을 지키던 월남군 22사단은 지휘관이 전의를 상실하자 와해되기 시작했다. 이 때 이 지역의 미군 고문관이었던 존 폴 밴(John Paul Vann 1924~1972)은 남아 있는 22사단 병력을 23사단장인 리통 바(Ly Tong Bar 1931~2015) 대령이 함께 지휘하도록 하고 두 사람이 전방에서 작전을 지휘했다. 당시 존 폴 밴은 민간인 신분이었다. (존 폴 밴에 대해선  9월 27일자 폐북을 참조. 뉴욕타임스 기자를 지낸 닐 쉬한의 책 의 주인공이다.) 

 

존 폴 밴은 적절한 공중 지원을 받아가면서 포위 공격에 대응했고 특히 북베트남 군을 월남군 기지 부근으로 300미터까지 유인한 후 B-52로 융단폭격을 하도록 해서 북베트남 군 3개 사단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콘툼에서 크게 패배한 북베트남군은 북쪽으로 철수했고 그 후 월남군은 쾅트리를 탈환했다. 콘툼 전투가 북베트남 군의 대공세를 막아낸 계기였다. 특히 콘툼에 대한 B-52 융단폭격은 매우 성공적인 공습으로 평가된다. 월남군은 북베트남 군 시신 1,000구를 발견했고 수천 명이 융단폭격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으로 추측됐다.

 

콘툼 전투는 월남군이 거둔 대단한 승리였는데, 그 일등공신은 존 폴 밴이었다. 그러나 그는 승리의 기쁨을 맛보지 못했다. 사이공 사령부에 작전 결과를 보고하고 콘툼으로 귀환하던 중 악천후로 헬기가 추락해서 그는 사망했다. 존 폴 밴의 오랜 친구이자 콘툼에서 같이 싸운 리통 바 대령은 장성으로 진급을 했다. 그는 1975년 4월, 베트남이 패망할 때 사이공을 지키던 25사단 사단장이었는데,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북베트남 군에 체포됐다. 그는 1985년까지 재교육 캠프에서 온갖 고생을 한 후 석방됐다. 바 장군의 부인은 사이공이 함락될 때 남편이 전사한 줄 알고 자녀들과 함께 사이공을 탈출해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정착했다. 수용소에서 석방된 바 장군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아내와 장성한 자녀들을 만났다. 그는 2015년에 사망했는데, 말년에 베트남은 군대도 사회도 그리고 국가도 부패해서 망해 버렸다는 회한(悔恨)에 찬 기록을 남겼다. 

 

부활절 공세(Easter Offensive)라고 부르는 대규모 공세에 북베트남은 14개 사단 20만 병력과 탱크와 장갑차 300대를 동원했으나 5만 명 이상이 전사했고 5만 명이 부상을 입었고 탱크와 장갑차는 대부분이 파괴되는 등 사실상 궤멸되어 버렸다. 그해 늦여름까지 월남군이 벌인 지상전은 대규모 정규전이었다. 미군은 항공모함 5척을 배치시켜서 공중지원을 했고 닉슨 대통령은 B-52로 하여금 하노이와 하이퐁을 폭격하도록 명령했다. 이 기간 중 미군은 300명이 전사했는데 전투기와 헬기 조종사가 많이 희생됐다. 월남군은 2만 명이 전사했다. 월남군이 북베트남 군을 패퇴시킴에 따라 파리에서 열리는 평화회담에서 미국은 입장이 강화됐고, 그해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 대통령은 자신의 베트남화(化) 전략이 성공했음을 내세워서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파리 평화협정은 1973년 1월 말에 체결됐고 그 후 미군은 완전히 철수했다. 

 

(그러면 1973년 후에는 무슨 일이 생겨서 월남군이 그렇게 무력해 졌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 이유에서였다. 1973년부터 워터게이트 사건이 불거지자 의회의 다수석을 차지한 미국 민주당 의원들은 베트남에 대한 무기 탄약 연료 등 군수물자 지원을 대폭 감소시켜버렸다. 월남군은 연료와 탄약이 부족해서 훈련도 못해서 사기가 땅에 떨어졌고 군에서 이탈자가 늘어났다. 무엇보다 미국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자 싸울 의지를 상실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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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1) 세 개의 화살표가 북베트남 군 공격지점이다. 위에서부터 쾅트리, 콘툼, 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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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2) 군사고문단 일행과 기념촬영을 한 존 폴 밴. 존 폴 밴은 베트남 전쟁 기간 중 매우 독특하고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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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3) 월남군 리통 바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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