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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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5월 뉴욕 맨해튼 <2> 블루칼라 노동자 위세로 72년 대선 공화당 승리, 진보 린지 시장은 몰락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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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11월15일 15시50분
  • 최종수정 2021년11월15일 15시40분

작성자

  • 이상돈
  •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20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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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5월 8일 맨해튼에서 벌어진 반전(反戰) 시위를 제압한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대부분 부근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로, 뉴욕시 건설·토목노조위원회(Building and Construction Trades Council) 소속이었다. 이들은 5월 11, 12, 13, 17일에도 연이어서 시위를 벌이면서 세력을 과시했다. 대학생들과 반전 단체도 이들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으나 노동자들의 위세에 눌려 버렸다. 

 

5월 19일, 건설·토목노조위원장인 피터 브레넌(Peter Brennan  1918~1996)은 노조와 업계 관계자 200명이 참석한 점심 모임에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자신들은 “국가에 대한 사랑과 성조기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함”이라면서 다음날 시위가 맨해튼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시위가 될 것이라고 자랑했다. 그는 “아이들이 성조기를 모욕하고 베트콩 깃발을 올려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5월 20일 정오, 건설·토목 노조는 15만~20만 명을 동원해서 맨해튼에서 시위를 벌였다. 건설·토목 노조원 뿐 아니라 뉴욕 항만 노동자들도 대거 참가했다. 맨해튼 고층빌딩에서 일하는 사무직 노동자들은 창문에서 색종이를 뿌려서 이들에게 지지를 보냈으며, 점심시간에 거리로 나온 사무직 노동자들도 시위에 참여했다. 이들은 “존 린지 퇴진” “붉은 시장 물러가라”라는 피켓과 성조기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존 린지 시장은 시 청사에 포위되어 고립무원 상태가 돼 버렸다. 

 

건설토목과 항만부두 노동자들은 고임금을 받는 블루칼라 인력인데, 이탈리아 그리스 폴란드 등 남부와 동부 유럽 이민 후손이 많았다. 이들은 앵글로 백인과 달리 가톨릭 신자가 많았고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해 왔다. 이들은 또한 2차 대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비중이 많은 집단이었다. 이들 뿐 아니라 이들을 고용한 회사의 경영진과 맨해튼에서 일하는 사무직 노동자들도 이들을 지지하고 나섰으니 반전(反戰)시위와 인종 폭동을 겪어 오던 미국인들은 충격적인 반전(反轉)을 목격한 셈이다.

 

뉴욕시 한복판에서 벌어진 이 모습을 감격하면서 지켜 본 사람이 있었다. 바로 리차드 닉슨 대통령이었다. 닉슨은 자기가 말하는 ‘조용한 다수’(Silent Majority)가 존재하고 있음을 뉴욕 노동자들이 확인시켜 주었다고 생각했다. 5월 26일, 닉슨 대통령은 피터 브레난 등 뉴욕 시위를 이끈 노조 지도자들을 백악관으로 초대해서 환담을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브레난은 'Nixon'이라고 쓰여 진 안전모를 닉슨에게 기증했다. 이 안전모는 남부 캘리포니아 닉슨의 고향에 세워진 닉슨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1972년 대선을 앞두고 피터 브레난은 닉슨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1968년 대선에선 민주당 후보 휴버트 험프리를 지지했던 뉴욕의 강력한 노조가 4년 만에 공화당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1972년 대선에서 닉슨 대통령은 민주당 후보 조지 맥거번(George McGovern 1922~2012) 상원의원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재선에 승리했다. 1972년 대선은 공화당 후보의 역대급 압승이었다.(이에 조금 못 미친 최대의 승리는 1984년 대선에서 레이건 대통령이 민주당의 월터 몬데일(Walter Mondale 1928~2021) 전 부통령을 상대로 압승을 거둔 경우였다.) 이처럼 1972년 선거부터 미국의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공화당을 지지하기 시작했고 그 추세가 2016년 트럼프 당선으로 이어졌다.   

 

재선에 성공한 닉슨 대통령은 피터 브레난을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1975년 3월까지 2년 동안 노동부장관을 지냈다. 한편, 무모한 복지정책과 경찰력을 약화시켜서 뉴욕시를 재정적자와 범죄의 수렁에 빠뜨려서 ‘관리할 수 없는 도시’(The Ungovernable City)로 만든 존 린지(John Lyndsay 1921~2000) 시장은 그야말로 식물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뉴욕시 경찰관은 물론이고 시청 직원 중에도 베트남 전쟁에 본인이 직접 참전했거나 또는 친척이나 친구가 베트남에 참전하고 또 전사한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경찰관이나 시청직원 다수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린지 시장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존 린지 시장은 1971년에 공화당을 탈당하고 민주당으로 당적을 바꾸었다. 이렇게 해서 넬슨 록펠러 지사와 존 린지 시장으로 대표되던 공화당 내의 진보파는 몰락하고 말았다. 1973년 12월 31일, 임기가 끝난 존 린지는 시장실에서 혼자 쓸쓸하게 걸어 나왔다. 한때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됐던 존 린지의 초라한 퇴장이었다. 뉴욕시의 부활은 뉴욕시를 관장하는 연방검사장으로 뉴욕 마피아를 척결해서 명성을 높인 루디 줄리아니(Rudy Guiliani  1944~ )가 1994년에 시장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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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5월 20일 뉴욕 노동자 시위. ‘붉은 시장’(Red Mayor)를 비난하는 피켓이 많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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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5월 26일, 백악관에서 닉슨 대통령을 만나서 'hard hat'을 전달하는 피터 브레난 노조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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