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최협의 박물관 이야기 <30>... 올림피아 고고학유적(Archaeological Site of Olympia)과 <올림피아 고고학박물관>(Archaeological Museum of Olympia)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1년05월16일 09시00분
  • 최종수정 2021년06월24일 11시04분

작성자

  • 최협
  • 전남대학교 연구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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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0세기 건축의 거장 루이스 칸(Louis I. Kahn)은 그리스의 폐허(廢墟)에서 과거에 있었던 것은 항상 존재한다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돌로 지은 건축물이 폐허가 되어 자연 속에 남으면, 이제 유용성에 대한 집착이 사라져 건축이 원래 간직했던 인간의 표현 의지(意志)와 염원(念願)을 방해받지 않고 음미해 볼 수 있기에, (Kahn)은 폐허야말로 건축의 끝이자 종착점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폐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나는 여행처럼 쓸쓸하게 아름다운지 모른다. 2019년 늦가을... 그 같은 폐허를 만나러 그리스로의 시간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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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그리스는 신화비극의 문을 통하여 나의 정신세계로 들어왔다. 2019년 늦가을에, 내가 아이스킬로스(Aischylos)의 비극 아가멤논의 기억과 올림피아 최고의 () 제우스의 이야기를 되살리며 찾아간 곳은 그리스의 서남쪽, 펠로폰네소스반도의 올림피아였다. 올림피아는 그리스신화의 主神(주신)인 제우스를 칭송하는 고대 올림픽이 열리던 장소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알티스’(聖域(성역) 안을 의미하는 일리아 지방의 방언)라 불리는 성역에서 기원전 776년부터 4년마다 치러진 고대 그리스의 경기에는 여러 도시 국가에서 참가한 운동선수들이 실력을 겨뤘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웅변가·시인·음악가들까지 찾아와 제우스를 찬했다고 전해진다.

알티스 성역 안에는 기원전 5세기와 6세기에 제우스와 제우스의 아내 헤라(Hêra)를 위한 화려하고 거대한 신전이 각각 세워졌고, 그 외에도 체육관, 보물창고, 목욕탕 등에 더하여 기원후 157~160년에는 로마 제국의 집정관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가 세운 엑세드라(Exedra, 반원형의 내빈 관람석이나 심판관석) 등에 이르기까지 다한 건축물이 올림피아의 숲이 우거진 계곡에 꾸준히 덧붙여졌다. 따라서 올림피아는 고대 지중해 문명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표적 지역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대체로 기원전 10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를 올림피아의 전성기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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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46년 코린토스 전투에서 로마가 승리함으로써 그리스는 로마의 일부가 되었고 올림피아의 제우스 칭송 문화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천 년 이상 지속한 올림픽 경기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국교로 선포한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재위기 간 AD 347~395)의 이교도 금지령을 계기로 394년 막을 내렸고, 426년 테오도시우스 2(재위기 간 AD 408~450)는 우상숭배금지를 내세워 올림피아 신전들을 파괴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설상가상으로 6세기에 이 지역을 강타한 지진(地震)은 올림피아의 건축물들을 대부분 무너트렸고, 알피오스 ()과 클라디오스 강물의 흐름마저 바뀌어 파괴된 올림피아의 건물이나 시설은 붕괴하여 모래와 흙 속에 매몰되어 잊혔다.

수 세기 동안 방치되었던 올림피아 유적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755년 독일인 학자 빈켈만(John J. Winchelmann :1717 ~ 1786)<고대 그리스 미술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를 근거로 1766년 영국인 찬들러(O. Chandler)가 올림피아 유적지를 시험 발굴하여 제우스 신전의 위치를 파악해냈다. 다만 필요한 자금과 전문가의 확보문제로 본격적인 발굴은 십 년을 더 기다려야 했고, 독일의 고고학연구소가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올림피아 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와 발굴을 시작할 수 있었다. 1875년에 그리스와 독일 정부 사이에 사적인 이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발굴에 관한 의정서가 교환되어 지금까지 독일 정부의 지원으로 독일 고고학연구소가 발굴 조사를 계속하고 있다. 특기할 사항은 발굴을 통해 올림피아 유적에서 출토된 문화재는 그리스 국내에서 보관·연구하기 위해 1888년 발굴유적지 인근에 박물관 건물을 지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올림피아 고고학박물관>의 모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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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피아 유적은 폐허와 잔해만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9년 유네스코는 유적지 자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곳에서 발굴된 주요 유물들은 <올림피아 고고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관리한다. 올림피아 고고학박물관이 자랑하는 주요 전시유물로는 헤라 신전의 폐허에서 출토된 <헤르메스와 어린 디오니소스 조각상>(Hermes and the Infant Dionysus)과 제우스 신전 부근에서 발견된 <니케의 상>(The Nike of Paionios), 그리고 제우스 신전 동쪽과 서쪽 지붕 박공(牔栱, pediment: 경사진 지붕 한 쌍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삼각형의 공간)을 장식하던 42개의 거대한 조각상과 헤라클레스의 12 고난을 묘사한 벽면 조각 장식이 대표적이다.

올림피아 고고학박물관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제우스 신전 페디먼트(=박공)의 장식조각상들의 크기는 높이가 거의 3m에 달해 신전 자체의 규모가 얼마나 거대했는지를 말해준다. 또한, 그 조각상들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올림픽 기원에 관련된 이야기를 품고 있어 학술적, 예술적 가치에 더해 관람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손색이 없는 귀중한 전시품이다. 그런데 이 조각상들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그리스의 신화를 알아야 한다. 올림피아가 올림픽의 발상지임을 생각하면 올림픽의 시작과 관련 있는 다음의 이야기는 여기서 잠깐 소개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로의 시간여행을 떠나 당시 그리스인들과의 대화를 원하는 방문객이라면 유물보다는 그 유물에 얽힌 스토리텔링을 통해야 당시 그리스인들의 사유를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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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에게 바쳐진 고대 올림픽 경기의 시작은, 전설에 따르면, 올림피아를 관리하는 피사의 왕 오이노마오스(Oinomaos)가 시작한 전차 경주(Chariot Racing)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오이노마오스 왕은 자신이 사위의 손에 죽게 된다는 신탁이 두려워 딸의 결혼을 막기 위해 자신의 딸에게 청혼하는 자는 모두 전차 경기에서 목숨을 걸고 자기를 이겨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다. 왜냐하면, 그가 당시 최고의 전차 경주자였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지원자가 청혼하여 모두 왕에게 경기에 져서 사형을 당했다. 한편 제우스신의 총애를 받던 프리기아의 왕 탄탈로스(Tántalos)의 아들인 펠롭스(Pelops)가 청혼한다. 하지만 전차 경주의 승리에 자신이 없던 펠롭스는 왕의 마부 미르틸로스(Myrtilos)를 사전에 매수하여 왕의 전차 수레바퀴의 청동 못을 밀랍으로 바꿔치기하도록 시켜 전차 경기 중 왕의 전차가 뒤집혀 죽게 만든다. 펠롭스는 속임수를 이용해 공주와 결혼하고, 저주의 신탁대로 오이노마오스 왕은 사위 손에 죽임을 당했다. 올림피아 박물관의 중심 홀에 전시된 제우스 신전 동쪽 페디먼트(pediment:박공)의 조각상들은 바로 이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을 일렬로 세워 놓은 것이다. 인물들의 배열은 가운데 제우스가 서 있고 그의 오른편으로 오이노마오스와 마부 미르틸로스, 그리고 왼편에는 펠롭스와 오이노마우스의 딸 히포다미아(Hippodamia)가 경기에 이용된 전차를 옆에 두고 서 있다. 이는 올림피아 성역의 핵심 신전인 제우스 신전의 정면 페디먼트(pediment)에 이 신화의 줄거리를 부조처럼 새겨 넣은 것임을 말해준다. 신화에 따르면 펠롭스는 자신을 도운 마부 미르틸로스도 배신하여 바다에 던져 죽였다. 펠롭스가 저지른 죄의 대가는 아가멤논 가문에서 벌어지는 친족간의 살인극으로 결국 후손들이 치르게 되는데, 이러한 이야기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3부작 '오레스테이아'(Oresteia)에 잘 묘사되고 있어 이 또한 흥미롭다.

올림피아 고고학박물관은 비교적 작은 규모의 박물관이지만 전시된 유물들이 이곳에 오기까지 고고학자들이 기울인 노력을 생각하면 감사의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는 특별한 곳이다. 학문의 미개척 분야를 묵묵히 걸어 수백 년 동안 역사와 흙더미와 망각의 늪에 묻혀있던 값진 인류문화의 유산을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만들어준 초기의 학자들, 그리고 오랜 시간 발굴 현장에 남아 매우 어려운 퍼즐을 맞추는 작업에 매진해온 고고학자들이 고마운 것이다. 지금 우리가 편안히 접하는 <헤르메스와 어린 디오니소스 조각상>의 경우, 커티우스(Ernst Curtius)가 인솔하는 독일의 발굴팀이 발굴을 시작한 지 2년 뒤인 1877년이 되어서야 헤라 신전이 매몰되어 있던 장소에서 머리와 몸통의 일부 파편을 발견할 수 있었고, 무려 여섯 차례에 걸친 재발굴과 점검과정을 거쳐 오늘날 우리가 전시실에서 만나는 조각상이 모습이 맞추어졌다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조각상의 오른팔 부분은 찾아내지 못했고, 그 외에도 왼쪽 손의 손가락 두 개와 성기 부분, 그리고 어린 디오니소스의 팔과 오른발 끝부분 등은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흙더미와 폐허에서 진행된 발굴의 기술적 어려움과 조각들을 복원하고 짜 맞추는 작업에 쏟아부은 수많은 고고학자의 노고를 생각하며 박물관을 나서는 나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서구의 건축과 예술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고대 그리스 문명의 향기를 폐허의 시간 속에서 다시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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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협은 누구?

서울대학교에서 인류학을 전공하고 미국 켄터키 대학교에서 인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남대학교 인류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한국문화인류학회 회장, 대통령자문 21세기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부시맨과 레비스트로스>, <다민족 국가의 민족문제와 한인사회>(공저), <호남사회의 이해>(편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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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05월16일 09시00분
  • 최종수정 2021년06월24일 11시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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