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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대선 주자들, 낙태법 개정에 직면하라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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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7년04월07일 18시16분
  • 최종수정 2017년04월07일 18시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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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큼 앞으로 다가온 장미대선을 맞아 유력 대선후보들은 사회 곳곳에 곪아 있는 문제들을 개선하고자 각종 공약들을 발표하고 있다. 특히나 양성평등과 여성의 권리 보장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거세지는 만큼 그에 부응하기 위해 실효성 있는 관련 정책을 필수적으로 제시하는 분위기이다. 이에 따라 지난 3월, 문재인, 안철수 등의 야당 후보들이 성 평등사회의 건설을 위해 남녀 간 일자리, 임금 차별 철폐, 동수 내각 구성 같은 페미니즘 공약을 발표한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페미니즘 공약과는 별개로, 후보들은 사회의 구조적 병폐에 보호 없이 노출된 일부 여성들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이중적인 행태를 저지르고 있다. 실제로 문 후보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 대통령이라 칭하며 성 평등공약을 발표하는 포럼까지 열었지만, 낙태죄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며 공허한 ‘사회적 합의’만을 강조하였다. 이는 안철수, 홍준표 등의 유력 대선후보에게도 지적되는 문제점이다. 낙태 합법화 이슈는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양육에 대한 복지제도 확충과 결을 같이하므로 핵심적인 여성 문제이다. 따라서 후보들은 언론 플레이를 통한 수박 겉핥기 식의 여성공약으로 표심 모으기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낙태 이슈에 대해 책임 있는 입장의 발표와 정책 제시가 필요하다.

 

현실과 유리된 낙태법

현재 한국의 낙태법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므로 개선되어야 한다. 형법 제 269조에 근거하여 대한민국의 사법체계는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한다. 다만 임신이 강간에 의해 이루어졌거나 산모와 태아의 생명이 위태로운 경우에 한해 합법적인 낙태 수술을 받을 수 있다. 즉, 한국의 현행 낙태법은 나이, 수입, 가족 구성, 직업 등의 사회경제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함으로써 정작 실제로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해 나갈 부모들이 처한 사회적 배경은 고려하지 않는다. 

 

한국여성민우회에서 발간한 낙태 사례집 <당신이 생각하는 낙태는 없다> 에 따르면 낙태 경험 여성들은 ‘낳고 싶었지만 낳을 수 없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낙태를 하게 되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그들에게 불법 낙태는 본인의 의사에 따른 자율적인 선택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 ‘강요된 선택’이었다. 실제로 미국, 일본, 영국, 독일 등의 선진국에서는 임산부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고려하여 아이를 양육하기 어려운 상황이 인정될 경우 합법적인 낙태가 허용된다. 하지만 한국은 낙태의 논의과정에서 사회경제적 요인을 제외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복지 지원 자체가 미비한 상황이다. 미혼모 등에게 임신 1회에 한해 80~120만원 정도의 지원금만 제공할 뿐, 여건이 안 되는 데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은 부모들에게 정부는 현실적인 대책을 마련해 주지 않는다. 사회경제적 이유로는 합법적인 낙태를 할 수 없게 만들어 놓고, 출산 이후의 양육에 대해 제대로 된 재정적 지원 조차 하지 않는 국가 정책은 무책임하다.

 

또한 현행 낙태법은 합법적인 낙태의 조건을 너무 제한적으로 설정하여 위험한 불법 낙태를 조장하고 있지만 정작 낙태 수술의 안전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2010년 보건복지부 조사 결과에 따르면 불법 낙태를 포함한 우리나라의 낙태율은 가임 여성 1천명당 29.8명으로 주요 선진국의 8~16명보다 훨씬 높은 수준인데, 이 중의 95%는 불법 낙태이다. 불법 낙태는 법적으로 허용된 안전한 수술의 과정을 담보하지 않으므로 산모가 수술 이후 부작용으로 고통 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이렇게 불법 낙태가 횡행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낙태 수술의 안전성을 담보하는 세부 규정을 마련해 오지 않았다. 이에 대한 대책 없이 정부는 그저 낙태 금지 조항만을 강조하며 불가피하게 낙태를 해야만 하는 임산부를 위험한 불법 낙태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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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개선의 필요성

 낙태법으로 억압받는 임산부의 인권을 외면하며 정부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종교 단체가 상투적으로 주장하는 바와 같이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겠다는 고귀한 목적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정부는 임산부를 볼모로 한 낙태법을 통해 출산율을 조절하고자 노력해왔다. 1973년 출산율을 낮추기 위해 박정희 정부는 모자보건법을 제정하는 동시에 형법 제 269조를 개정하여 낙태에 대한 처벌을 폐지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낙태를 장려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2003년 한국의 출산율이 1.19명으로 세계 최하위를 기록하자 정부는 낙태를 강하게 규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명박 정부의 미래기획위원회가 저출산 대책에 ‘낙태방지 분위기 조성’을 포함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작년 말, 보건복지부가 불법 낙태 수술을 하다 적발된 의사의 면허 정지 기간을 12개월로 늘리는 행정처분을 발표했다가 강한 반발에 부딪혀 물러난 것 역시 이러한 정책의 방향에서 나왔다. 출산과 여성의 인권을 다루는 여타 정책과 다르지 않게 낙태법은 여성의 신체를 아이를 낳는 수단으로 규정하고 억압해왔다.

 

가임기 여성을 대하는 정부의 정책 방향은 임산부의 인권을 배제하며 산모를 그저 애 낳는 기계로 취급하더라도 출산율을 높이는 데 한결같이 방점이 찍혀 있었다. 가임기 여성의 수를 지역별로 나눠 지도에 표시했던 ‘대한민국 출산지도’나 지하철의 임산부석에 붙여진 ‘핑크카펫, 내일의 주인공을 위한 자리입니다’ 문구를 보면 저출산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정부의 태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낙태법과 마찬가지로 임산부의 편의를 위한 행정 정책에서조차 여성은 아이를 낳는 객체로 규정된다. 또한 양육에 대한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로 인해 온갖 부담을 끌어 안는 여성에게 오히려 출산율에 대한 과도한 책임이 부여된다.

 

 그러나 저출산을 극복하기 위한 근본적인 방법은 낙태법을 통해 임산부의 인권을 배제하면서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출산 이후 양육의 과정에서 정부가 책임감 있게 실질적인 복지 제도를 확충해주어 그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애를 낳아도 삶의 질과 행복이 저하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합법의 기준이 과도하게 제한적인 낙태법을 통해 출산율이 올라갈 것이라고 믿는 정부의 정책 방향은 근본적으로 틀렸다. 

 

대선 주자들에게 바란다

대선 주자들은 낙태 합법 조건을 완화하여 사회경제적 요소를 고려한 낙태 허용의 필요성을 인정해야 한다. 현행 낙태법의 유지는 낙태 이슈를 출산율과 연결 지어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을 억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여타 페미니즘 공약들의 의미를 퇴색하게 만든다. 낙태법에 대해서는 선택적으로 모호한 입장을 표하면서 페미니즘으로 겉면만 포장한 정책의 발표는 대선을 위한 얄팍한 술책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강한 의심이 든다. 유일하게 낙태 합법화를 주장한 정의당의 심상정 후보는 한 인터뷰에서 낙태죄는 전면 폐지되어야 한다면서 적극적인 공론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심 후보가 말한 대로 전면 폐지와 같은 급진적 변화는 한꺼번에 이루어지기 힘들겠지만, 출산정책의 방향은 낙태 합법 요건을 완화함으로써 임산부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또한 이와 더불어 양육 과정에서의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은 필수이다. 낙태법 개정에 대한 확실한 입장 표명과 이를 개선하기 위한 관련 정책의 발표를 대선주자들에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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